흘러간역사

조선 후기 상업의 발달과 성시(城市)

영지니 2008. 10. 3. 17:23

 

 

조선 후기 상업의 발달과 성시(城市)

 <태평성시도> 일부(18세기 후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덕무의 ‘성시전도시(城市全圖詩)’에는 성시전도의 모습이 문자로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 시에 의하면 '성시전도'는 맨 위에 백악산과 인왕산이 버티고 있고 그 아래 성곽이 둘러쳐져 있다. 그 안에 궁궐을 중심으로 사찰, 가게, 집들이 즐비하여 오고가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성 밖의 정경 또한 표현되었다. 산수로 둘러싸인 이러한 장관은 백악, 인왕산, 북악산, 삼각산들이 펼쳐진 아래 경기감영을 중심으로 서대문 밖의 풍경을 묘사한 <경기감영도>와 상당히 유사하다.


 

서울에서 시장이 밀집되어 있었던 종로거리의 저자 풍속을 주제로 한 1789년(정조 13) “종가호시(鐘街互市 : 종로거리를 그린 그림)”를 시작으로 순조 4년(1804) “열사현기(列肆衒奇 : 줄지어 늘어선 가게의 진기한 물건)”, “종가도(鐘街圖)” 등이 화제로 빈번하게 출제되었다.

 

서울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종로거리는 조선 초기부터 비단, 명주, 종이, 베 등을 파는 여섯 개의 시전(市廛, 육의전)이 있었다. 이 육의전은 으뜸가는 시전이라 하여 큰 상권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정조 15년(1791)에는 사상(私商)들에 의한 난전(亂廛)을 합법적인 상업 활동으로 인정하는 ‘신해통공(辛亥通共)’이 실시되었다. 게다가 이 무렵에는 양반들도 상업에 종사할 정도로 상업이 크게 발달하여 종가의 저잣거리는 더욱 활성화되어 갔다. 정조대를 전후하여 이러한 시장통의 모습이 속화(俗畵)의 화제로 출제된 것은 당시 활성화된 상업 활동의 모습이 반영된 결과이다.

 

일본 유현재(幽玄齋) 소장 <담와평생도(澹窩平生圖)>에서 종로거리를 지나는 영의정 행차장면은 좌판을 벌여놓고 물건을 파는 여인과 물건을 사러 나온 사람들로 붐비는 번화한 종로 저잣거리가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영의정 행차로 인해 가던 길을 멈추고 바라보고 있거나, 물건을 머리에 이고 있는 여인들의 모습이 <경기감영도>의 장면과 비슷하다.

조선시대 도성을 그린 지도는 사대문 안을 중심으로 그린 지도가 대부분이었으나, 18세기 후반 이후 19세기에는 도성 내부와 도성 주변지역을 세분하여 그린 지도들이 편찬되어 서울의 범위와 지리적 인식이 외곽으로 확장됨을 보여준다.

 

이밖에 일반적으로 궁궐과 관청 등 행정적으로 중요한 내용을 표시하던 것과 달리 궁궐 이외에 관청이나 공공건물은 생략하고 일반 민가를 빽빽하게 그려 넣은 지도도 있어서 흥미롭다. (1760년경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동국여지도’ 중에는 도성 안에는 기와집, 도성 밖에는 초가집을 다수 표현한 지도가 있다.)

 

반송방 지역은 일찍부터 거주인구가 많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1789년 파악된 한성부의 호수는 43,920戶이고, 인구는 189,153口였다. 그중 성 밖의 인구가 21,835戶 76,782口이고, 한성부 전체인구의 절반에 이르고 있다.

 

15세기 전반 성중오부(城中五部)의 인구가 17,015口이고 성저십리(城底十里)의 민호가 1,719戶로 성 안에 91%의 인가가 살았던 것에 비해 성 밖의 인구증가가 두드러졌다. 특히 서부는 한성부 전체의 1/3 이상의 인구가 밀집하여 서울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았던 곳이었다

시정 풍속

<경기감영도>에는 궁관(宮館) 풍속 외에 묘사된 관찰사 행렬 주변으로 다양한 시정(市井)풍속이 펼쳐져 있다. 거리에는 구경꾼들이 생업을 중단한 채 경기감영까지 계속 이어진 행렬을 지켜보고 있다. 집안 창문이나 대문 안쪽에서 바깥 풍경을 엿보는 사람, 젖먹이를 업고 나온 여인,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행렬을 구경하는 아이, 물동이를 이고 가는 여인, 종복과 마부를 거느리고 말을 타고 외출하는 양반, 행장을 꾸려 길을 떠나는 나그네, 길가에 앉아 쉬고있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다.  

 

  

  

행렬 양 옆에는 쌀과 잡곡을 파는 가게, 주점, 약국, 짚신을 파는 승혜전(繩鞋廛) 등 의식주와 관련된 상점들이 늘어선 저자거리가 형성되어 있다. 흥정을 벌이는 곡물가게 주인과 손님, 행렬구경에 넋이 나간 주모, 가위장단에 엿을 파는 어린아이, 상점 앞을 서성이는 지게꾼, 땔감을 팔러 나온 촌부, 보부상, 행상과 좌고(坐賈)의 모습, 머리에 짐을 이고 가는 여인 등 활기찬 시장풍경이 묘사되어 있다.

 

<경기감영도>에 보이는 시정의 다양한 모습은 인구 증가, 상품화폐경제의 발전, 도성외부공간의 확대 등 다양한 변화를 겪고 있었던 조선후기 서울의 모습을 그대로 반양하고 있다. 이러한 상업도시로의 변화상을 <경기감영도>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① 미전(米廛)

<경기감영도>에서 돈의문을 나오자마자 있는 기와집은 대로변에 접한 행랑채에서 잡곡이나 쌀을 파는 미전(米廛)이다. 짚으로 지붕을 덮었으며, 차양을 달아 도로 쪽으로 좀 더 넓은 면적을 확보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ㄷ자형 배치로 뒷쪽에 생활공간을, 앞쪽에 점포를 두어 주거와 상업을 겸하고 있다. 점포의 좌우 측벽은 화방벽으로 되어 있고, 앞쪽 4칸 중 오른쪽에서 두 번째 칸이 대문이다. 점포에서 팔고 있는 물품이 비교적 넓은 공간이 필요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내부 마당까지 점포가 개방되어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제3폭 아래 감영을 향해 가는 길의 오른쪽에도 쌀과 고추를 파는 상점이 있다. 짚으로 지붕을 덮었으나 위와 마찬가지로 차양을 달았다. 점포의 오른쪽 벽은 다른 집의 벽에 연접해 있고, 왼쪽과 정면은 판벽과 판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점포의 뒷면에 주택 내부와 통하는 문이 있고, 왼쪽에 별도의 대문이 설치되어 있다. 점포와 생활공간이 분리되어 있는 형태이다.

 

 

<경기감영도>에서 미전(米廛)이 2군데나 묘사된 것은 18세기 초부터 미전이 늘어났던 사실과 관련해 생각할 수 있다. 1660년대를 전후하여 마포 미전, 서강 미전, 서대문 밖 문외미전(門外米廛), 외어물전(外魚物廛) 등이 새로 창설되었는데, 이와 같이 대중들이 일용소비품인 미곡과 어물을 판매하는 시전의 증가는 소비 인구의 증가 외에 다른 원인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17세기 후반 이후 대동법 실시와 금속화폐의 전국적 유통은 노동력의 상품화를 촉진시킴으로써 농촌에서 유리된 농민들이 도시에 정착할 수 있는 제반 여건을 마련하였다. 당시 통계에 의하면 서울의 인구는 급증하였으며, 이러한 인구의 급증구조와 주민 구성, 도시문화, 이념적 지향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분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이는 조선이 중세적 질서에서 근대적 사회단계로 이행하고 있음을 예비하는 징후로 이해되고 있다.>

 

② 약국(藥局)

<경기감영도>에는 감영 앞 네거리에 위치한 약국 2곳이 확인된다. 간판 대신 흰 벽에 ‘新設藥局’ ‘萬病回春’이라 써넣은 것이 확인된다.

 

제6폭 감영 앞 대로 남쪽 기와집에 ‘만병회춘(萬病回春)’이라는 상호가 흰 벽에 쓰여 있다. ‘만병회춘’은 명대 중국의서(醫書)의 이름을 딴 것이다. ㅁ자에 차양 구조를 하고, 약방을 겸하고 있는 주택이다. 약방 오른쪽 주요 도로변으로 짚으로 지붕을 덮은 가가(假家)를 형성해 놓은 것으로 보아 상업활동으로 인해 부를 축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감영 서쪽에 있는 주택은 ‘신설약국(新設藥局)’이라고 표기되어 있어 대로 대각선에 위치한 ‘만병회춘’보다는 늦게 생긴 약방임을 알 수 있다. 차양을 설치한 팔작지붕에 오른쪽 길쪽에 초가로 된 가가(假家)를 두고 있다.   

 

<경기감영도>에 표현된 약방들의 모습은 조선후기 상업경제와 의약학의 발달을 그대로 보여준다. 18세기 서울에는 시전(市廛)이나 사상(私商)들의 난전(亂廛) 상인 외에도 점포상도 발다하고 있었다.

 

19세기 초에 작성된 『동국여지비고』에는 시전과 다른 점포상을 특별히 ‘사(肆, 방자할 사)’로 독립시켜 서술시켜기술하고 있는데 현방(懸房), 약국(藥局), 서화사(書畵肆), 책사(冊肆), 금교세가(金橋貰家)가 그에 해당한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 조선 전기 서울에 거주하는 양반들도 약재의 구입과 구득이 어려워 관청에서 안면을 통해 약간씩 얻는 정도였던 것에서, 조선 후기에 이르면 심지어는 약물을 과용하거나 남용하는 폐단이 지적될 만큼 약물과 처방전의 구득이 쉬워지고, 약재시장과 의료 환경이 변화되었다.

 

『한경지략』이나 유득공의 『경도잡지(京都雜誌)』 등에서 당시의 시장들의 성행과 연관하여 약방들은 모두 갈대로 발을 만들어 문 앞에 늘어뜨리고 ‘신농유업(神農遺業)’ ‘만병회춘(萬病回春)’ 등의 상호를 내걸고 장사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들 약국은 현재 을지로입구인 구리개(銅峴) 근처에 집중적으로 분포하였지만, 『한경지략』에 의하면 ‘서울 여기저기에 산재해 있었다’고 전한다.

 

조선후기 의약학의 발달로 1613(광해군 5) 간행된 『동의보감(東醫寶鑑)』은 17, 18세기에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급기야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사설(私設) 약국과 의원들 그리고 일반 양반들 모두에게 『동의보감』을 기본으로 이루어졌다. 이와함께 민간의료가 확산되면서 서울에는 수많은 의원과 사설약국이 들어서게 되었다.

 

18세기 후반 서울에 거주하던 양반 유만주(1755-1788)의 일기 『흠영(欽英)』은 이러한 서울의 약국과 의원들의 활동모습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조선 후기에는 의원이 환자에게 처방전을 내리면 그 처방전으로 환자가 약국에서 약을 지어다 먹는 방식이었다. 약국은 약재를 공급할 뿐 아니라 환제나 탕제를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여 약재 가격과 별도의 공임을 받았던 듯하다. 따라서 약국은 약재의 유통과 제약의 제조비 수익으로 경제적 지위가 상승한다.

 

또한 약국은 병자에게 약을 지어주는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시정인들의 약속장소, 만남의 장소로 이용되어

약국이 시정의 소문들이 발생하는 근원지이면서, 그러한 소문이 빠르게 확산되는 공간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경기감영도>는 조선 후기 상업경제와 의약업 발달 면모를 그림 속 약국의 존재를 통해 반증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③ 기타 난전(亂廛)

주택에 붙어있는 상점과 별도로 놓여져 있는 가게 두 곳중 돈의문 근처 미전(米廛) 옆에는 신을 파는 가게가 있는데 초가집의 주택에 차양 구조를 하고 있다.

 

<경기감영도> 제4폭 아래쪽의 감영을 향해 가는 길 오른쪽에 위치한 주택에 붙어있는 점포는 세 칸으로 되어 있다.

신발가게처럼 세 칸 중 가운데 칸은 주택 내부로 출입하는 대문이다. 대문 오른쪽은 붓과 종이, 왼쪽은 먹거리를 파는 곳인 듯하다. 두 품목 모두 기둥과 기둥 사이에 판을 대고 그 위에 물건을 진열하고 있다.

 

붓을 파는 곳은 기둥 사이에 줄을 걸고 그곳에 붓을 매달아 진열하고 있다. 양쪽 점포의 뒷면은 흙벽으로 되어 있고, 가운데 칸은 주택 내부로 들어갈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다. 대문 그리고 벽과 벽 사이 개방된 공간은 이중문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구조에 대해 주택에 붙어있는 점포에 별도의 사람이 임대하여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지적도 있다. 초가집, 점포 부분에만 차양이 설치되었다.

 

제5폭 아래의 간이건물은 먹거리를 팔고, 한쪽 구석에서는 땔감을 파는 곳인 듯하다. 작은 규모이지만 차양이 달려있는 지붕과 한쪽은 판벽을 설치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주변은 대로를 따라 많은 가옥에 차양과 가가(假家)가 설치되어 있어서 <경기감영도>에 표현된 영역 중 비교적 상업적 활동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곳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 수공업 중 종이나 그릇 등 넓은 작업공간이 필요한 분야는 도성 밖에서 제조하였는데, 이 수공업자들 역시 시장에 물건을 판매하기 위한 것이었다.

 

짚신이나 종이, 붓 등을 취급하는 가게들과 소나 말, 지게 등을 이용한 하역운반업 등도 새로운 직업군으로 등장하였던 사실을 <경기감영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서울 인구구성을 보면 17세기 중반 이전에는 서울 인구의 대부분은 국가나 왕실 사무에 종사하는 사람들, 관료나 중인층과 상인층이었다. 그러나 19세기 초반 자료에 의하면 직임자(職任者), 서리(胥吏), 공인(貢人), 시전상인, 군병, 영세소상인, 수공업자, ‘한잡지류(閑雜之類)’로 서울주민을 구분하고 있으며, 이들 중에 농사를 짓지 않고, 길쌈(織布)하지 않아도 먹고사는 ‘한잡지류’들이 수십만 명에 달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들 한잡지류들은 대부분 좌판 행상하여 생계를 유지했던 사람들이었다.

 

조선 후기 문장가인 남공철(南公轍, 1760-1840)에 따르면 “서울은 돈으로 생업을 삼으며, 팔도는 곡식으로 생업을 삼는다. (竊嘗論之 生民之業 京師以錢 八路以穀)”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정조 5년(1781) 장령(掌令) 구수온(具修溫)은 “도하민(都下民) 중에서 각사리예(各司吏隸)를 제외하면, 장사로 살아가는 자가 10중 8,9”라고 말하였다. 여기서 보듯 18세기 서울 인구의 대부분은 상업 인구였던 셈이다. 그러므로 당시 사람들은 시전상인과 공인(貢人)을 ‘도민의 근본(道民之根本)’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회의 변화상은 문학과 회화들에 자연스레 반영되었다. 이와 같이 생업이 다양해지면서 서울에는 종전에 볼 수 없었던 인간 군상들이 출현하고 있었다. 조선 후기 풍속화와 마찬가지로 18세기 중엽의 한문 단편소설이나 한시(漢詩)에는 개장수, 닭장수, 말장수, 거간(居間), 염색업자, 야장(冶匠 : 대장장이), 갖바치, 약국쟁이, 연희패, 서리, 도둑, 포교, 경강상인이나 도고상인, 도시의 수공업자 그리고 경강 일대에서 미곡, 시탄(柴炭 : 숯), 잡화를 하역, 운반하는 도시의 노동자 등을 주인공으로 그리고 있다.그동안 문학작품에는 대부분 산수와 자연을 소재로 삼아왔는데, 18세기 이후에는 도시발달에 따라 여러 종류의 인간 군상들을 형상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표암 강세황의 손자 강이천(姜?天, 1769-1801)은 도시 시정을 무대로 하여 온갖 인간군상들이 등장하는 18세기 서울의 풍속과 생활양상을 묘사한 『한경사(漢京詞)』에서 그러한 사례들을 구체적으로 전해준다.

 

 

4) 상업적 농업

<경기감영도>에는 돈의문 밖 대로(大路) 남쪽으로 밭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아마도 미나리밭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17세기 후반 이후 급속히 상업도시로 성장함에 따라 서울에서는 사업적 농업 또한 크게 성행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이 채소, 과수농업과 약초 재배업이었다. 특히 서대문 밖에는 미나리밭, 영은문 주변에는 무와 채소, 석교에는 가지, 오이, 수박 등이 유명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채소농업은 미곡 농사보다 훨씬 많은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이었다. 19세기 초 우하영(禹夏永, 1741-1812)에 의하면 “미나리 2마지기를 심으면 벼 10마지기를 심어서 얻는 이익을 올릴 수 있고, 채소 2마지기를 심으면 보리 10마지기를 심어 수확하는 것과 같은 이익을 올릴 수 있다.”고 하였다. 또한 정약용 역시 “서울 안팎의 파밭, 마늘밭, 배추밭, 오이밭에서는 상지상답(上之上畓)의 벼농사에 비해 10배 이상의 이익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경기감영도>에 나타난 밭 역시 상업적 농업의 성행을 방증해준다. 실제로 18세기 이후에는 도성 내의 채소밭이 크게 증가하고 규모가 확대되었다.

 

영조 1년(1725) 살곶이벌에 있던 사복시(司僕寺) 둔전도 채소밭으로 변했고, 어영청 관할의 동대문 밖 채소밭도 생겨났다. 또한 도성 안의 용흥구궁(龍興舊宮) 자리가 채소밭으로 바뀌었는데, 이 밭의 주인들이 양반이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관청 외에 일반사대부들도 상업적 농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홍화나 자초 같은 약초 또한 상업적으로 재배되었는데 영은문 주변에 홍화가 재배되어 이 일대를 홍화동으로 불렀다고 한다.

 

이상의 시정 풍경에서 살펴보았듯이 돈의문 밖은 도성을 벗어나 지방에서 한양으로 들어오는 길목으로 상권이 확대되었던 곳이었다.

 

<경기감영도>는 도성과 주변 근교를 잇는 하나의 유통권으로서, 당시 난전(亂廛)을 중심으로 새로이 형성된 상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채소밭의 존재는 조선 후기 서울의 도시화 경향에 따른 농업 성격의 변화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