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천의 수도국산 박물관...일명 달동네 박물관 모습...)
계단을 올라가서 가까이 보니...
( 인천의 송현동 163번지 소재,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
지금은 정비되어 현대식 아파트 촌이 들어섰고 공원으로 조성된 송현동의 수도국산 정상엔 위 사진에서 보는바와 같이 박물관을 만들어 과거의 생활 모습들을 생생하게 느끼고 체험할 수 있도록 조성되었다.
( 현대식 아파트촌 내의 달동네 박물관...)
'달동네는 높은 산자락에 위치해 달이 잘 보인다는 의미로, 유래는 '달나라 천막촌'에서 비롯되었다. 1950년대 말~1960년대 중반 사이에 도심에서 쫓겨난 판자촌 주민들은 정부가 정한 지역에 임시 천막을 치고 살면서 방에 누우면 밤하늘의 달과 별이 보인다고 해서 생겨났다.
( 당시 선거 후보 포스터...정말 옛날 생각나네... )
'달동네'라는 용어가 널리 쓰인 것은 1980년 TV 일일연속극 [달동네]방영 이후이다. 여려운 처지 속에서 보듬고 살아가는 달동네 사람들의 애환을 그린 이 연속극이 큰 인기를 누리면서 이후 '달동네'는 불량노후주택이 모여 있는 산동네의 대명사가 되었다.
(불량노후주택의 대명사..달동네 판자로 만든 사각굴뚝이 그나마 겨우 새끼줄로 지탱되어 있다...)
인천 송현동, 수도국산(水道局山)의 원래 이름은 만수산(萬壽山) 또는 송림산(松林山)이었다. 산 언덕에 소나무가 많아 붙여진 이름으로 송림동(松林洞)과 송현동(松峴洞)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 당시 전국구 비례대표 후보...중간 좌측에 차지철도 보이는군...이만섭...정말 옛날 사람들...)
인천은 본래 우물이 적을 뿐 아니라 수질 또한 나뻐서 개항이후 증가한 인구와 선박으로 인해 물 확보가 큰 고민이었다.
( 물이 귀했던 시절...밭엔 인분을 주었었지...)
일제 통감부의 강압에 의해 한국정부는 1906년 탁지부에 수도국을 신설해서 공사에 착수하였다. 수도국산(水道局山)이란 명칭은 1909년 인천과 노량진을 잇는 상수도 공사를 벌인뒤 산꼭대기에 수돗물을 담아두는 배수지(配水池)를 설치하면서 부르게 되었다.
( 누구네 집이랄것도 없고 대부분 신문지로 벽지를 대신했고...비키니 옷장...)
달동네 주변에는 시장이 있고, 입구에 구멍가게, 연탄가게, 복덕방, 이발소가 있곤했다.
( 박물관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나타나는 복덕방...지금의 공인중개사 사무실이다...)
(구공탄 가게...어렸을 때 기억은 월동준비하느라 형들이랑 광에 연탄 저장작업을 했었는데..)
( 구멍가게...)
( 이발소 풍경...옛날 라디오도 보이고, 당시에 잘못되어 땜통걸린 애들도 많았었는데...)
이 가게들을 지나면 동네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 길은 뒷동네로 갈수록 가파르고 좁아 손수레 조차 다니기 힘든 정도였다. 동네까지 한 번도 쉬지않고 오르기는 힘들지만 동네에 올라서 굽어보는 주변모습은 이곳만이 지닌 특권이라 할 만하다.
( 달동네 골목 벽마다 붙은 간첩에 관한 포스터...당시엔 왜 그리 간첩얘기가 많았었는지...)
( 달동네 전봇대에 붙은 포스터...지금 보니 인쇄도 내용도 조잡하고...)
달동네 집들은 집이 작은 것은 물론 수도나 변소를 집집마다 둘 형편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공동으로 설치하여 사용했는데, 특히 아침마다 공동변소에 줄을 서서 앞사람을 재촉하던 모습은 흔히 볼 수 있었던 풍경이다.
( 달동네 공동변소...당시엔 빨간 조명등이었지...)
달동네 사람들은 집에서 일터까지의 거리가 멀다 보니 이른 아침 집을 나서서 늦은 밤이 되서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남들보다 유난히 긴 이들의 하루는 부지런함을 키우는 밑바탕이었다.
( 인~천의 성냥~공장~ ... 성냥공장 아가씨~ ... 당시엔 성냥갑 만드는 부업이 이렇게 성행했었다...)
달동네는 비좁은 공간에 여러 가구가 살다보니 자연스레 '함께' 사는 동네가되었다. 우리집 담은 이웃집 담이 되고, 그 담은 다시 모두가 이용하는 골목이 되었다.
( 골목 처마밑마다 붙어 있던 적산전력계와 두꺼비 집...)
( 물이 귀했던 당시 인천에선 돈을 주고 수돗물을 길어가곤 했었다...)
( 당시의 벽에 붙어있던 영화 포스터...)
조금 넓은 공터가 생기면 어김 없이 동네 사람들의 만남의 장소, 아이들의 놀이터, 행상들의 장터가 되었다. 달동네의 집은 늘 열려 있었다. 부잣집 높은 담장 속의 단절된 삶과는 달랐다. 서로 남의 집을 오가며 밥을 먹는 경우가 흔했다.
( 공동변소 스라브 위엔 장독대로 쓰이고... 빨래터도 되고 새끼줄에 꿴 조기도 말라가고...)
수제비를 끓이다 이웃사람이 오면 물 더 붓고 수저 하나 더 놓으면 그만이었다. 작은 것 하나부터 기쁨에 고통까지 함께 나눔으로써 부대끼며 살아가는 곳이 바로 달동네였다.
( 요즘엔 화학섬유소재 이불솜이지만 당시엔 전부 목화솜 이불이었기에 솜틀집이 있었다...)
수도국산 달동네는 현재 대단위 아파트촌으로 변모하여 옛모습을 찾을 수 없다. 그 모습을 온전히 보존하지 못하지만 그 자취나마 간직하는 까닭은 부지런히 일하고 더불어 살아온 달동네 이웃의 미덕이 오늘날 우리가 지키고 추구해야 하는 삶의 가치라고 믿기 때문이다.
( 달동네 박물관 입구 부조상...)
1960년대 초에는 근대화와 경제건설을 국가의 목표로 삼고 경제개발5개년 계획을 추진하였다. 이는 다시 1970년대의 새마을 운동으로 이어졌다. 1970년대는 국가의 기본적인 산업화가 이루어지고 경제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절대적 빈곤으로부터는 벗어날 수 있었다.
( 가난에 찌들었던 부엌 살림살이라곤 고작 이게 다다...)
( 소박한 연탄 아궁이가 있던 부엌...솥단지 옆엔 낮에 빤 운동화가 말라가고...)
기본적인 생계걱정에서 벗어나 이제는 점차 여가를 즐기기도 하였고, TV와 라디오의 확산으로 새로운 문화가 일상을 지배하게 되었다.
( 그나마 스웨터 풀어서 대나무 뜨게질로 만든 바지는 겨울철 뜨시게 잘 입었었는데...)
( 벽에 못박아 옷 걸어놓고 흰천으로 덮은 방...저 앉은뱅이 책상에서 어린시절 졸며 공부했었다...)
1980년대에는 민간 소비부분이 활성화되면서 경제적으로 안정되는 시기이며, 컬러TV 방송시대가 열리면서 대중문화분야가 크게 성장한다. 특히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를 전후로 하여 큰 변화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1987년 6월 민주화항쟁 이후 이전까지 억압적 통제를 받아오던 매체시장이 내국인에게 개방됨에 따라 대중매체가 엄청난 규모로 확산되었다.
( 부엌 딸린 한칸방에서 온식구 모여서 흑백 테레비 보던 집은 그나마 부유했었지...)
1990년대 이후 우리사회의 화두는 '국제화'와 인터넷 발달이 불러온 '정보화'였다. 한국사회는 빠른 속도로 대중소비사회, 개방사회체제로 나아가는데, 이러한 변화를 주도한 것은 TV, 영화, 컴퓨터 등의 멀티미디어의 영상문화를 접하며 감각과 의식을 키워온 신세대이다.
( 추억의 만화가게...)
( 신기루 장수와 구두닦이 통...)
바로 이들 신세대들의 미래가 앞으로 21세기에 써내려갈 새로운 역사가 될 것이다.
출처 : | 올드뮤직의향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