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족상잔(6.25 & 5,18 )

한국 전쟁이 있기 전까지의 우리나라

영지니 2010. 4. 27. 22:22

한국 전쟁이 있기 전까지의 우리나라

대한민국에 대한 소개

 대한민국은 1945년 2차 대전에서의 일본 패망을 계기로 광복을 맞이하고, 1948년 8월 15일 그 성립을 국내외에 선포하고 국제연합의 승인을 받았다. 역사적으로는 고조선을 한민족이 세운 최초의 국가라 여기며, 그 이래 단일민족국가로서 이어져 왔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중세의 고려, 근세의 조선시대를 거쳐 한민족은 주권을 빼앗기고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 일제강점기 36년 동안 한민족은 줄기찬 독립투쟁을 벌였으며, 그러한 노력과 2차대전에서의 일본패망을 계기로 광복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48년 한반도의 남과 북에는 체제와 이념을 달리하는 두 국가가 들어서게 되었으며 북쪽에서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세워졌다. 대한민국의 헌법에 의하면 한반도 전체와 주변 도시가 그 통치권에 해당된다. 광복 이후 서울이 특별시가 되었고, 90년 현재 1특별시, 2직할시, 9개 도가 있다. 문화적으로는 일찍부터 대륙의 영향을 받으며 민족 고유의 문화를 발전시켰고, 예로부터 아름답고 물이 맑아 「삼천리 금수강산」이라 불리워 왔다. 기후는 대륙성과 해양성 기후의 중간형으로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하다.

 

1943. 11 [카이로 회담] - 한국 독립에 대한 국제적 약속과 신탁통치 논의


 
모스크바 삼상회의 연합국은 1943년 11월 카이로 회담에서 적절한 시기에 한국을 독립시킬 것 을 결의하였고,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는 비공식적이나마 신탁통치를 실시 할 것에 동의한 바 있었다. 이에 따라 미국의 번즈, 영국의 베번, 소련의 몰로토프는 1945년 12월 16 일에서 27일까지 모스크바에서 회동하여 8·15 이후 분단된 한국의 독립방안을 비롯한 광범한 전후문제(戰後問題) 를 논의하였다. 3국대표는 미·영·중·소 4개국에 의한 10년 이내의 신탁통치를 제기한 미국의 입장을 수정한 소련의 제의를 대체적으로 받아들여 조선임시정부(朝鮮臨時政府)의 수립과 5개년 이내의 신탁통치(信託統治) 실시를 결의하였다. 수적 우세를 바탕으로 소련의 영향력을차단하려는 미국과 미소협조를 바탕으로 전후문제 처리에서 유리한 입장에 서려는 소련의 타협에 따라 한국의 독 립에 대한 구체적 합의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 결정은 국내 좌우익의 격렬한 대립과 미소 갈등으로 인해 1947년 9월 폐기되었다.

 

1945. 2 [얄타회담] - 신탁통치 논의


 
얄타회담 제2차 세계대전 말기 미·영·소 3대 연합국 수뇌가 종전대책을 논의한 비밀 회담.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 영국의 처 칠 수상, 소련의 스탈린 수상은 1945년 2월 4일부터 11일까지 크림반도의 얄타 에서 회동하여 독일의 전후처리와 소련 의 대일본전(對日本戰) 참전 문제 등을 논의하였다. 연합국은 외몽고의 현상유지, 사할린·천도(千島)열도·여순(旅順)의 소련 환부, 대련(大連)의 자유항 화, 만주철도의 중·소 공동운영, 만주 에 대한 중국의 주권보장 등의 조건하에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결의하였다. 이 회담에서는 한국문제가 공식적으로 제기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루즈벨 트는 미·중·소 3개국에 의한 20년 내지 30년의 신탁통치를 제안하였고, 이에 대하여 스탈린은 신탁통치 실시에 동의하나 기간은 짧을수록 좋으며 외국 군대의 주둔에는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로써 한국에 대한 연합국의 방침은 비공식적이나마 신탁통치의 방향으로 가닥을 잡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1945년 7월26일 [포츠담 선언] - 독립에 대한 국제적 약속


 
1945년 7월16일 미국의 원자폭탄 실험이 성공함에 미.영.중의 연합국 정상들은 매우 고무되어 있었지만 일본상륙작전때 미국병사 약 1백만명을 희생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10일 후, 독일 베를린 교외의 포츠담에서 발표한 연합국 미국의 트루만대통령, 영국의 처칠수상, 중국의 장개석(蔣介石)총통 3인의 선언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선언」을 최후 통첩 성격으로 발표했다. 이 선언의 제13항을 보면 『우리들은 일본국 정부가 즉시 전 일본국 군대의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고 또 그와 같은 행동을 성의를 가지고 충분히 보장할 것을 일본 정부에 요구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일본국은 신속하고도 완전히 궤멸할 것이다』라고 되어있다. 또 제8항에는 『카이로선언의 제 조항을 이행해야 하며 일본의 주권은 혼슈,홋카이도,큐슈,시코쿠와 우리들이 결정하는 제소도(諸小島)에 국한할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그러니까「한국의 광복」은 이 제8항에 의해서 합의된 것이다. 이 조항을 언급한 카이로선언(43.12.1)에도『3대 동맹국은 한국 국민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자주독립케 할 것을 결정했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다시 말하면 43년 12월1일의 카이로선언과 45년 7월26일의 포츠담선언에 따라 한국의 독립은 이제 국제적인 약속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때까지 일본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하고 있던 소련도 포츠담회담에 옵서버 자격으로 참석하여 대일전(對日戰)에 참가하기로 연합국 정상들에게 약속했다. 소련의 대일(對日) 참전은 독일전선에 투입한 병력을 극동방면으로 이동하는데 걸리는 시간을 고려하여 8월 상순으로 결정했다. 그러나 일본의 스즈끼(鈴木)내각은 포츠담선언에 대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서 약 10일을 보냈다. 일본 내각은 막후접촉을 통해 소련이 평화협상을 중재해 줄 것을 기대했으나 거부당했다.

 

1945년 8월 6일 일본 - 히로시마 원폭투하

 미국은 더 기다릴 수가 없었다. 8월6일 새벽 1시45분 「에노라 게이」라고 이름 붙인 B29폭격기 한대가 태평양상의 미국 테니만기지에서 조용히 발진했다. 8월 6일 일본인들의 눈에는 하늘을 높은 고도로 날아가던 B-29 폭격기에서 떨어지고 있는 조그만 낙하산의 모습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이 세상에서 보게 된 마지막 풍경이 되고 말았다. 정확히 1945년 8월 6일 아침 9시 15분, 조그만 낙하산에 매달려 떨어진 원자폭탄은 섭씨 수백만 도의 열을 발산. 십만분의 1초라는 극히 짧은 순간에 무려 섭씨 300.000도에 이르게 된 불기둥은 1초 후에는 그 반경이 무려 250m로 부풀었다. TNT 500t에 상당하는 화력을 가진 이 원자폭탄 폭발로 히로시마 주민 7만8천1백50명이 순식간에 몰사했다. 다음날(8월7일) 스즈끼수상은 국왕(昭和)에게 이 소식을 전하고 포츠담선언을 수락할 것을 종용했다.

 


 원자폭탄의 첫 희생자가 된 히로시마는 뼈대만 앙상히 남은 몇 개의 건물을 제외하곤 완전한 페허의 공터로 변하고 말았으며 300,000명의 시민들 중 1/3이 생명을 잃고 말았다. 많은 사람들은 직접적인 폭발의 충격으로 사망했고 폭발 직후 전도시를 휘덮은 열폭풍은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 치명적인 방사선에 화상을 입은 사람들도 매일 수없이 죽어갔다.

 7km 상공까지 버섯 구름을 솟구치게 한 이 거대한 원자탄 폭발을 상공에서 내려다보던 미 해군 티베트 대위는 폭발의 충격이 16km가 넘는 지역의 상공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보고했다.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 - 원폭의 위력 - 일본의 무조건 항복


 
8월8일 오후 6시(모스크바 시간) 몰로토프 소련외상은 사토(佐藤) 주소련 일본대사에게 『소련 정부는 내일(8월9일) 일본과 전쟁상태에 돌입함을 선언한다』고 통보했다. 그리고 9일 새벽 소련공군과 육군은 만주와 북한으로 일제히 진격했는데 일본군은 전투도 제대로 해보지 못한채 붕괴했다. 다급한 일본 내각은 9일 아침 일찍부터 「최고전쟁 지도자회의」를 소집, 포츠담선언 수락 여부를 놓고 격론을 벌이고 있었는데, 오전 10시30분에 나가사키 (長崎)에 제2원자폭탄이 떨어졌다. TNT 140t급인 이 폭탄으로 주민 2만3천7백53명이 순식간에 목숨을 잃었다. 250,000인구가 살고 있던 조선(造船-배를 제작함) 산업 도시 나가사키는 67%의 도시가 재로 변했던 히로시마의 경우와  맞먹는 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산된다.

나가사키로부터 400km 떨어진 곳에서 원자탄이 폭발하는 광경을 지켜보던 미 공군 관계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주황색 불기둥이 2.5km 상공으로 치솟더니 곧 16km 반경을 뒤덮는 시커먼 버섯구름으로 변했다고 전하고 있다.

두개의 핵폭탄으로 수없는 인명과 재산의 손실을 입은 일본의 도쿄 방송은 미군의 잔혹한 행위를 비난하면서 평화 협상을 요구하였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일본 내각은 최종 결정을 금방 내리지 못하고 이날 오후 2시반부터 7시간동안 회의를 계속하다가 밤 11시55분에 국왕이 참석하는 어전회의로 이어졌다 여기서도 갑론을박을 계속하자 결국 국왕이 포츠담선언 수락을 결정했다. 이때가 10일 새벽 2시30분이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천황(天皇)의 국가통치대권을 인정한다는 양해하에 일본 정부는 포츠담선언을 수락한다』는 것이었다. 이 조건부 항복문은 즉각 연합국측에 통보됐다. 이에 대해 연합국측은 12일 0시40분 샌프란시스코방송을 통하여『천황과 일본 정부의 국가통치권한은 항복조항 실시를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조치를 취할 연합군 최고사령관의 제한하에 둔다』고 통고했다. 이것은 10일자(日字) 일본의 조건부 항복을 명백히 거부한 것이다. 일본 정부는 12,13,14 사흘동안「최고전쟁 지도자회의」「각의」「황족회의」「어전회의」를 거쳐 14일 정오 그것도 국왕의 최종 결심으로「무조건 항복」을 결정했다. 국왕의「무조건 항복」은 14일 밤 11시50분에 녹음돼 다음날인 8월15일 정오에 라디오로 방송했다.

 

1945년 8월 9일 일본에 대한 소련의 선전포고 그리고..8월 26일 평양입성

 

연해주지역을 출발한 소련 극동군 제1방면군의 한 부대가 소만국경을 넘어 동만주지역으로 진격하고 있다.

 

동만주 목단강 유역에 진출한 소련 포병부대. 포병부대는 보병사단들이 진격해 들어가기 전 일본군 요새 진지에 대한 포격을 담당했다.

 

소련군의 집중 포격으로 초토화된 일본군의 작전지휘소 모습.

 

소련군과의 전투에서 숨져 버려진 일본 관동군 병사 시체들.

 

목단강을 건너고 있는 소련군 군용트럭.

 

4월 하순께 일본군 책임상(성명 미상)로부터 일본군의 배치상황과 무장해제에 대해 듣고 있는 소련25군 사령관 차스챠코프 장군.
사진은 소련 25군 민정사령부 정치부장 이그나치예프 대령이 소장하고 있던 것을 전현수씨 (러시아 동방학 연구소 연구원)가 입수해 통일문화연구소에 제공한 것이다.

 

만주지역에서 무질서하게 퇴각하고 있는 일본 관동군 병사들. 관동군은 탱크부대를 앞세운 소련군의 공격에 힘없이 무너졌다.

 

하얼빈에 도착한 소련 극동군의 지휘간부들이 도열해 있는 장병들의 인사를 받고 있다.
맨 앞줄 중앙이 소 극동군 최고사령관 바실리예프스키 원수고, 셋째 줄 중앙에 보이는 사람(↓)이 후에 북한주재 초대대사를 지낸 스티코프 상장이다.

 

45년 8월21일 소련의 주력부대가 북만주 하얼빈시에 입성하고 있는 장면. 소련군을 환영나온 거리의 주민들이 태극기를 들고 나온 것이 이채롭다. 이들은 대부분 일제의 탄압을 피해 북만주로 이주한 조선인으로 보인다.

 

8월24일 제25군 사령관 치스챠코프 장군을 태운 비행기가 함흥에 도착하자 주변에 모여 있던 한국 주민들이 몰려가고 있다.

 

8월26일 평양 근교 활주로에 착륙한 제25군 사령관 치스챠코프 장군을 환영하는 사람들. 이날 치스챠코프는 환영인파를 모아 놓고 『친애하는 동지들! 볼셰비키당과 소련정부가 일본 침략자들로부터 조선을 해방시키라고 우리를 이곳에 보냈습니다. 지금 당신들 인민은 이 나라의 주인입니다. 당신들의 손에 권력을 장악하십시오. 우리는 당분간 당신들을 보호할 것이며 당신들의 새 생활의 건설을 도울 것입니다』란 요지의 연설을 했다.

 

「소련군 환영, 大소련 만세」 등의 글귀가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평양시내에 들어온 소련군 선발대를 환영하는 평양시민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소련군은 북한지역의 공산화를 급속히 추진하여 결국 남북분단의 비극을 잉태하게 된다.


 

 

 

소련군 한반도 진주 일지

45년 8월9일
소련, 일본에 선전포고. 소련 극동군 제1방면군 제25군 훈춘(琿春)을 지나 함북 경흥에 진입. 소련 태평양함대, 함북 웅기와 나진에 집중 폭격.

8월11일
소련 해군보병여단 웅기에 상륙작전 감행. ■ 8월12일
소 25군 소속 393보병사단 웅기 도착.
8월13일
소 25군 소속 393사단 나진 점령.
8월16일
소 25군 청진 점령.
8월19일
소련 극동군 제1방면군 제5군 만주 지린(吉林) 점령.
8월21일
태평양함대 소속 제13해병여단원산에 상륙.
소 제1적기군 만주 하얼빈(哈爾濱) 도착.
8월21일
소 제25군 선발대 함흥에 진주
8월24일
소25군 사령관 치스챠코프 장군 비행기로 함흥에 도착.
소 25군 소속 공수부대 평양에 도착
8월26일
8월 말
소 25군 북한 전역에 진주 완료.

 

 

 

 

 

1945년 8월9일 소련이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한 후 8월26일 평양(平壤)에 입성하기까지 소련군의 행로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진.

    1945년 8월 15일 한국 -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한국!

    1945년 8월 15일 오전. 한국의 수도인 서울 곳곳에는 "오늘 정오에 중대한 방송이 있으니, 국민들은 반드시 들어라!"는 벽보가 나붙었다. 곧 이어 라디오에서 일본 천황이 항복 문서를 읽어 내려갔고 , 서울 시민들은 흰 옷을 입고 거리로 물밀듯이 쏟아져 나왔다. 드디어 해방의 날이 왔다고 온 나라에서 열광과 환호 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골 구석 깊숙히 처박혀 있던 풍물패가 나와 밤이면 밤마다 마을들을 휘젓고 다녔고 온 국민은 흥분으로 휩싸였다.

     

    1945. 9. 2 [38선(線) 획정(劃定)] - 허리 잘린 한반도, 분단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미국이 45년 8월6일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을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하자, 일본의 멸망은 시간문제가 되었고 미(美)·영(英)·중(中)·소(蘇) 등 연합국은 전후처리 문제를 급속도로 협의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미·소의 한반도 분할점령 합의다. 미·소 양군은 포츠담회담(45.7.26)의 밀약과 미국의 제의에 따라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설정, 한반도를 남북으로 분할점령함으로써,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군정(軍政)을 실시하기로 합의했다. 이것이 결과적으로 민족분단 비극의 계기가 됐다. 미국무성 기록에 따르면 일본이 8월10일 연합국측에 항복의사를 통보해 옴에 따라 미국무성 육해군합동조정위원회(SWNCC)는 8월13일 38도선 분할점령안을 마련해서 트루만대통령에게 건의했으며 트루만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여 그날로 소련에 통보했고 소련도 그날로 수용하겠다고 회보했다. 이같은 미·소간의 한반도 분할점령선 합의는 18일전인 7월26일 포츠담 연합국 수뇌회담과 외상회담에서 미·소간에 서로 밀약한 한반도 분할점령계획에 따른 것이다. 그리고 공식적으로는 맥아더 미극동사령부가 9월2일 38도선 분할점령을 발표했다.

     

    1945. 9. 7 [남한 미군정(美軍政)선포]


     맥아더사령부는 9월7일 도쿄에서 발표한 9월9일자 포고문 1호를 통해 남한의 모든 통치권을 미군정하에 두는 군정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그에 앞서 9월8일 미육군 제24군단(군단장 하지중장)이 인천에 상륙, 다음날 재한(在韓) 일본군(日本軍) 대표와 조선총독에게서 항복문서를 받고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했다. 전문과 6개조로 된 포고문 1호에 따르면 △북위 38도선 이남의 조선 영토와 조선 인민에 대한 통치권은 미국 태평양 방면 육군사령부(맥아더사령부)가 행사한다 △점령군에 대한 반항 행위나 공공 안녕을 교란하는 행위는 엄벌에 처한다 △공용어는 영어로 한다 △모든 공공업무와 기록, 재산은 현행대로 유지한다고 되어있다. 또 같은 날자로 발표한 포고문 2호는 한국인 범죄는 미군정청 법정에서 재판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며 역시 같은 날자의 포고문 3호는 통화는 종전대로 「원(圓)」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어 9월11일 하지중장은 남한 군정 시정방침을 발표하고 아놀드소장을 미군정장관에 임명했다. 그리고 9월18일에는 남한내각 정당 대표자들에게 건국제언 (建國提言)을 요청했으며 같은 날 집회, 시위에 대해서 허가제를 실시한다고 밝혔다. 이같은 남한에 대한 미군정은 48년 8월15일 대한민국정부가 정식 발족할 때까지 3년간 계속됐다. 한편 8월20일 원산에 상륙한 소련 25군(軍)도 24일 평양에 진주, 군사령부를 설치하고 군정을 실시했다.

     

    1945년 12월 16일 -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의 회오리


    -북한의 신탁통치 찬성 성명(1946.1.2)
    1945년 12월 16일 소련의 모스크바에 미국-영국-소련의 외상들이 모였다. 이른바 모스크바 3상회의가 열린 것이다. 주요 결정건은 한반도 신탁통치였다. 신탁통치 문제는 해방 당시의 들뜬 분위기와 함께 전국을 회오리 속으로 몰아넣었다. 신탁통치란 일제의 지배와 같다는 논리로 받아들인 국민들은 좌우,노소 할 것 없이 신탁통치 반대를 외쳤다. 그러나 북한은 신탁통치 찬성이라는 성명을 발표. 민족간의 갈등은 앞으로 기나긴, 그리고 험난한 역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1946. 3. - 미소 공동위원회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46.3.20) 모스크바삼상회의(三相會議)의 한국 신탁통치결의에 따라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3월20일부터 서울 덕수궁에서 열렸다. 미국측 수석대표는 아놀드소장, 소련측은 슈티코프 중장. 제1차 미소공위는 개막 벽두부터 조선임시정부 수립을 논의하기 위한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초청문제를 놓고 팽팽하게 대립했다. 소련측은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의에 따라 미소공위가 열린만큼 삼상회의 결의(신탁통치 등)를 지지하는 정당 사회단체 대표만 초청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미국측은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정당 사회단체 대표도 민주주의 정신에 따라 초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문제가 쉽게 해결되지 못하자 미국측은 5월6일 임시정부수립 문제는 뒤로 돌리고 우선 38선철폐 문제를 토의하자고 제안했으나 소련측의 거부로 결렬, 5월8일부터 무기휴회로 들어갔다.

     

    1946. 6. 14 [좌우합작(左右合作)운동] - 통일조국 건설을 위한 노력은 점차


     신탁통치와 통일 임시정부 수립 등에 대한 대립으로 제1차 미소공위(美蘇共委)가 결렬되자 미군정청 주도 아래 좌우합작운동이 시작되었다. 46년 6월14일 김규식(金奎植) 원세훈(元世勳) 여운형(呂運亨) 허헌(許憲) 등 좌우온건파 대표들이 좌우합작회담을 개시했으며 6월30일 미군정청장 하지중장의 지지성명도 나왔다. 좌우합작회담은 각 파벌의 협박과 반대 등 숱한 진통에도 46년 10월7일 「좌우합작위원회 구성 7개원칙」을 합의 발표했다. 내용은 △좌우합작으로 민주통일임시정부수립 △미소공위속개 촉구 △토지개혁과 주요산업 국유화 합의 △친일파 처리원칙 합의 △정치범 석방과 테러중지 △좌우합작위원회의 입법기구 완전통제 △언론 집회 등 기본권 절대보장 등이다. 그리고 이 좌우합작위원들은 미군정 과도입법의원의 관선의원으로도 참가키로 했다. 그러나 좌우 극단파들의 대립 격화, 이승만(李承晩)측의 단정(單政)추진, 미소냉전의 심화와 제2차 미소공위의 결렬 등으로 좌우합작은 끝내 힘을 잃고 말았다.

     

    1948년 4월 19일 평양 - 남북연석회의 개최
    "이대로 가면 분단되고 피를 흘리게 될 것이다."

     "독립운동으로 살아온 내 나이 이제 칠십이 넘었다. 더 살면 얼마나 더 살겠느냐. 여러분들은 나에게 마지막 독립운동을 허락해달라. 이대로 가면 한국은 분단될 것이고 서로 피를 흘리게 될 것이다. 나는 이 길이 마지막 될지 어떻게 될지 몰라도 이북의 우리 동포들을 뜨겁게 만나봐야 한다."
     1948년 4월19일 김구의 평양행의 반대하여 운집한 청중들에게 김구가 절절하게 호소한 연설의 일부분이다. 그리고도 막아서는 군중들의 눈을 피해 북행을 결행한다. 비서와 아들을 대동한 단촐한 나들이었다. 연석회에서 논의된 주의제는 소련군과 미국의 철수, 그리고 철수 이후의 내전불가 , 민주주의 통일임시정부 수립 후 중앙정부 수립, 단독정부수립 반대였다.

     

    1948. 4. 27 [남북협상(南北協商) 실패] - 통일조국 건설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

     유엔의 남북한총선 결의에 따라 유엔 한국위원단이 한국에 도착했으나(48.1.7) 소련이 입북을 거부하는 바람에(48.1.23) 유엔소총회는 2월26일 남한에서만이라도 선거를 실시하도록 다시 결의했다. 사태가 남한단독정부 수립과 남북분단으로 치닫자 김구(金九)·김규식(金奎植)은 유엔한국위원회에 남북협상을 제안하는(48.2.6) 한편 북쪽의 김일성(金日成)과 김두봉(金枓奉)에게 남북요인회담을 제안했다.(48.3.8) 이에 대하여 북한측은 남한 단독선거를 반대하는 남북한의 모든 사회단체 대표들이 평양에서 연석회의와 요인회담을 하자고 수정 제의하였다.(48.3.25) 김구와 김규식은 북한의 제의를 받아들여 4월19일 북행(北行)을 감행했다. 이렇게해서 4월19일부터 26일까지는 남북 제정당·사회단체대표자 연석회의를 개최했고, 27일부터 30일까지 「남북요인 15인회담」과 「4김(金)회담」등을 계속했다. 이들 일련의 회담을 통해 남북정치지도자들은 외국군대 즉시철수, 전조선정치회의(全朝鮮政治會議) 소집, 남한 단독선거 반대,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 등의 4개항을 결의했다. 그러나 남과 북이 각각 단독정부를 수립함으로써 남북협상의 현실적 의미는 퇴색해 버렸고, 회담은 결과적으로 북한정권의 정통성 선전에 이용당하고 말았다.

     

    1948년 8월 15일 서울 - 대한 민국 정부 수립


     일본으로부터 35년간의 통치를 받고 이어서 미군정으로 3년 즉 38년간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아야 했던 한민족이 드디어 그들의 자신의 나라를 건국했다. 성대한 식이 열렸고 온 국민이 축복하였다. 마치 광복절과 같은 분위기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기뻐했다.

    한편,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승만은, 강력한 반공정책을 주장하였다. 즉, '북진 통일'이라는 구호를 내세우며 공산주의자들을 타도할 것을 약속했다. 즉, 분단된 조국을 통일하겠다는 의지를 강력하게 보인 것이다.

     

    1948년 9월 9일 해주 -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수립


     
    남한에서 유엔한국임시위원단 감시 아래 5·10총선을 실시하고 8월15일 대한민국정부 수립을 선포하자 북한에서도 8월 25일 「최고인민회의대의원선거」를 실시(대의원 2백21명 선출), 9월1일 제1차 최고인민회의를 소집하여, 의장에 허헌(許憲), 상임위원장에 김두봉(金枓奉)을 선출했다. 그리고 9월9일에 수상을 김일성(金日成)으로 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했다. 이에 앞서 북한에서는 45년 10월10-13일 북조선 서북5도 공산주의 대표자와 열성자 대회에서「`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수립되었고, 다음 해인 46년 2월9일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위원장 김일성)를 구성했다. 그리고 「토지개혁 법령」(46.3.5),「중요산업 국유화 법령」(46.6.24) 등의 사회주의 정책을 시행했다. 이어 48년 2월8일 「인민군」을 창설하고 4월2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을 확정했다. 유엔총회, 대한민국정부 승인(48.12.12) 5·10총선 직후인 48년 5월13일 `유엔한국위원단`10026` 임시의장(시리아 대표)은 성명을 통해 『선거 당시 일부지역에서 유권자가 불참했고 「향보단」이라는 단체가 선거감시를 이유로 자유분위기를 파괴했기때문에 선거효과 발표를 보류한다』고 밝혀 국내외적으로 그 귀추가 주목됐다. 그러나 그후 유엔한국위원단은 『이번 선거에는 위원단이 접근할 수 있었고 전체 한국민의 3분의 2가 거주하는 지역에서 유권자가 자유의사를 표현했다』고 총회에 보고했다. 그리고 유엔총회는 12월 12일 소련의 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정부를 48대 6으로 승인하고 유엔한국위원단의 기능도 1년 더 연장하기로 결의했다. 유엔총회의 한국승인에 앞서 한국정부 장면(張勉) 특사는 12월6일 유엔정치위원회의 초청을 받아(북한특사 초청은 부결됨)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유엔이 소련의 반대로 대한민국을 승인하지 못한다면 유엔은 권선징악을 하는 권능을 상실할 것이다. 소련이 북한에 따로 정부를 수립한 것은 부당하다. ……나는 38선이북과 이남의 모든 외국군이 철수할 것을 요청하는 바이다. ……미국은 38선의 철폐를 시도했으나 헛수고에 그쳤다』

     

    1950년 6월 - 북한 각 사단의 전투 전개

    동부지역

     

    제5사단

    6월 22일 기차편으로 나남을 출발, 원산을 거쳐 양양으로 이동하여 38선 우단인 동해안 일대에 배치.

    제7사단

    6월 18일 원산에서 동부 산악 지대인 양구로 이동.

    제2사단

    6월 10일 함흥을 출발하여 12일 원산을 경유, 철원, 금화를 커쳐 13일 화천으로 이동.

    제766부대

    6월초에 원산을 경유, 동해안 속초로 이동. 그 후속 부대는 6월12일 회령을 출발

    제549군 부대

    속초에서 대기

     * 동부지역에는 38경비대 제 1여단,육전대,1개 유격부대등 도합 3개 사단이 증강배치

     

     

     

    중부지역

    제3사단

    6월 23일 평강을 출발하여 운천리로 이동.

     

    제4사단

    6월 22일 전남포를 출발, 남천을 거쳐 연천으로 이동.

    제105전차 여단

    이미 제 109전차 연대가 평양에서 남천으로, 제203전차 연대가 철원으로 이동하여 6월22일에는 38선 깊숙이 진출

     * 이로써 중심 지역과 의정부 전면을 주공 방향으로 계획한 인문군은 전투 훈련과 자이가 충분한 제 3,4사단과 제105여간 내에서 최강 부대인 제203전차 연대를 이 방면에 배치 완료 하였다.

     

    서부지역

    제1사단

    6월 23일 남천에서 고랑포 남방의 구화리로 이동.

     

    제6사단

    6월 23일 사리원에서 개성 전면 계정 방면으로 이동.

     

     

    후방지역

     제 10,13,15사단 : 3개 38경비 여단은 개전 즉시 제 7사단의 일부를 흡수하여 제 8사단으로 편성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 냉전이 낳은 비극


     비가내리던 날.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은 선전 포고도 없이 공격을 시작 하였으며, 공격 개시 암호명은 "폭풍" 이었다.
     
     -1949년말 김일성은 모스크바로 와서 남침 계획을 설명하고 스탈린의 동의를 얻고자 했다. 김일성은 "남조선을 총검으로 찌르기만 하면 남조선에서의 폭발을 촉진시켜 인민의 권력, 다시 말하면 북조선에서 통치하고 있는 권력이 승리할"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스탈린은 "잘 생각해야 하고 신중한 계획을 세워야 하며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 다시 오라"고 김일성을 설득했다. 심일성은 귀국해서 새 계획을 세워 다시 모스크바로 왔다. 김일성은 "승리를 절대적으로 확신하다"고 스탈린에게 말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미국인들이 뛰어들지 않을까?" 걱정하였다. 이런 걱정에 대해 김일성은, "우리들은 만일 전쟁이 신속히 끝났다면....신속히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스탈린은 김일성의 제안에 대한 모택동의 의견을 물어 보고자 하였다. 모택동의 답은 긍정적이었다. 그는 김일성의 제안에 동의하고 또 이 전쟁은 조선 인민 스스로가 결정해야 할 국내 문제이기 때문에 미국은 간섭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한국 전쟁이 확정되었다.


     김일성은 남한이 북침했다는 주장을 라디오 연설을 통해 주장하면서 반격에 나섰다고 위장했다. 한편,서울 KBS방송국은 주민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저녁 9시경 국군이 북한을 공격하고 있다고 전했다. 주민들은 크게 동요하지 않고 "또 38선에서 전투가 일어졌구나"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북한군은 계속해서 밀려 내려오고 있었다. 

     

    출처: http://한국전쟁.net

     

     

     

     

     

    출처 : 慶州崔氏 司成公派 綠楊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