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

음식의 기원과 유래

영지니 2010. 4. 18. 21:00

 

음식의 기원과 유래
우리가 항상 먹는 음식이지만, 어디서 유래가 되었는지는 잘 알 지 못한다. 유래를 알면, 음식문화의 변천사와 특성과,그 음식의 역사도 알 수 있다.사람들이 지역과 시대를 초월해, 지속적으로 강장음식의 유래와 특성의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서 우리 주변에 어떤 음식이 건강에 좋은가를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음식의 발전은 전쟁과 밀접한 관련성이 있는데, 전쟁을 통해서 다양한 음식들이 만들어지고 ,다른 지역으로 전파되기도 하였다. 전쟁 수행 음식과 더불어 각 지역에서 건강과 소망을 비는 음식들이 많이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지역마다 다른 음식들을 읽히면서 ,자연스럽게 각 나라의 문화적 특성의 차이를 이해하는데 도움도 된다. 음식의 기원에 대한 정확한 근거로, [마파두부]는 150년전 청나라 말기 쓰촨성의 청뚜에서 처음으로 선보였고, [동파육]은 항저우의 전통요리로 '소동파'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작명된 메뉴이다.하지만,우리나라의 제례문화를 살펴보면, 이름만 틀리지 같은 음식이 많다는 것도 알 수 있다.우리나라 사람도 우리것에 대해 잘 모르는 생활과도 연관된,몰랐던 음식의 유래를 알아 보자.

 

떡국

명절마다 먹는 음식을 "세시음식"이라고 하는데 떡국도 세시 음식 중의 하나다. 설날 세시음식으로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우리 나라 어느 지역을 가도 빠지지 않는 음식이 바로 떡국이다. 가래떡을 뽑아 납작납작하게 썰어서 육수에 끓인 설날 음식인 떡국은 설날이 천지만물이 새로 시작되는 날인만큼 엄숙하고 청결해야 한다는 뜻으로, 깨끗한 흰떡을 끓여 먹은 데서 유래됐다고 한다.
또 이 날 먹는 떡국은 첨세병(添歲餠)이라 하여 나이를 한 살씩 더 먹는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동전모양을 본뜬 떡국을 길게 뽑은 가래떡으로 만드는 이유는 새해 아침 긴 음식을 먹어 장수하라는 뜻에서다.

 

송편

한가위에 한, 중, 일 3국은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달 모양의 떡을 만들었는데, 이름과 모양이 제각각이다. 우리 나라의 추석에 빚는 송편은 반달모양로,쌀을 가루로 내어, 익반죽을 한다음,깨,콩,밤 등등 그 해의 곡식에 단맛을 첨가해,소를 만들어,반달 모양으로 빚는다.잘 빚어야 터지지도 않고, 색도 곱다.호박,치자,녹차가루로 색을 내기도 하며,솔잎을 깔고, 증기로 찐 다음 ,기름을 발라 완성한 음식이다. 송편을 이쁘게 빚어야 , 이쁜 딸을 낳는다는 말도 있듯이, 모양과 안의 소가 나오지 않게, 곱게 빚어야 사랑 받는 음식이기도 하다.중국에서는 [월병]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에서는 [쓰키미당코]로, 둥근모양으로 보름달을 상징한다.

 

순대

순대는 돼지고기를 이용한, 우리고유의 음식 중 세계 어느곳에 내어놓아도 손색이 없는 먹거리이며, 영양가도 유사한 소세지에 비해 오히려 뛰어난 음식입니다. 더욱이 순대는 지역에 따라 그 만드는 방법과 맛이 서로 달라, 보다 다양하게 맛을 즐길 수 있다.
순대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소나 돼지의 창자속에 여러 재료를 소로 넣어 삶거나 쪄 익힌 음식` 이라고 나와 있다. 동물의 내장을 이용한 음식에서 그 기원을 찾아볼 수 있는데, `제민요술`에는 `양의 피와 양고기등을 다른 재료와 함께 양의 창자에 채워 넣어 삶아 먹는 법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우리나라의 순대는 내장에 속을 넣어 익힌 음식으로, 그 고전적인 형태는 `개를 잡아 깨끗이 씻어 슬쩍 삶아 뼈를 발라 만두속 버무리듯이 해서 후추, 천초, 생강, 참기름, 진간을 한데 섞어서, 질척하게 하여 제창자를 뒤집어 말끔히 빨아 먹으면 맛있다.`라고 기록된 ,연대 음식디미방의 개방을 필두로 하여 [규합총서]나 [중보산림경제]에는 `쇠창자 안팎을 정히 씻어 한자 길이씩 베고, 쇠고기와 꿩, 닭고기를 두드려 온갖 양념과 기름장을 간 맞추어 섞어, 그 창자속에 가득히 넣고 실로 두 끝을 맨 다음, 솥에 먼저 물을 붓고, 대나무를 가로 지르고, 그 위에 얹되 물에 잠기게 말고, 뚜껑을 덮어 뭉근한 불로 고아 꽤 익은 후 ,내어 식거든 말굽 모양으로 저며 초장에 써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외국에 유래를 살펴보면, 몽골의 징기스칸이 대륙 정복시 전투근무 식품으로 전장 기능속도를 유지하기 위해, 돼지의 창자에다 쌀과 야채를 혼합하여 말리거나 냉동시켜, 휴대하여 기동전을 효과적으로 수행하여 세계를 정복하는데 일익을 담당하는데 부터, 유래된 음식이라는 설도 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전통식품인 순대제품은 가축의 혈액을 포함하고 있어 ,소장에서 흡수가 용이한 철분의 훌륭한 공급원으로 빈혈이 우려되는 여성에게 적합한 영양식품이다.
그밖에도 순대는 육류, 곡류, 채소류가 골고루 함유된 식품으로서, 제조 방법에 따라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완전식품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순대에 사용된 재료를 살펴보면, [규합총서]에 `쇠고기와 꿩고기, 닭고기를 두드려서`라고 하였고, [부인필지]에서는 `쇠고기와 생치, 제육을 난도하고`라고 하였으며, [역주방문]에서는 `연한 살코기를 만두속과 같이 잘 다져 놓는다.`고 하여 잘게 다져 사용 되었다.

 


김은 세계에서 우리나라와 일본만 먹는다고 한다.1640년 김양식법 창시자 김여익은 전남 영암출신으로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켰으나, 조정이 항복하자 태인도에 숨어살던 중에 ,소나무와 밤나무 가지를 이용한 김 양식 방법을 창안하여 보급하였다. 이후 광양 김은 왕실에 바치는 특산물로 인기가 높았는데, 하루는 임금이 광양 김을 반찬삼아 수라를 맛있게 드신후 음식의 이름을 물었으나, 아는 사람이 없어 한 신하가 "광양 땅에 사는 김 아무개가 만든 음식입니다."고 아뢰자, 임금이 "그럼 앞으로 이 바다풀을 그 사람의 성을 따서 김으로 부르도록 하여라" 분부하여 김』이라고 했다고 한다. 참고로 일본식 김은 김을 굽지않으며 ,참기름도 사용하지않는 ,그냥 맹탕 김을 먹는다.한국 김보다 맛이 없기 때문에 ,한국 특산품인 돌김이 인기가 많다.200-300년전 경상도 하동 지방의 한 할머니가 섬진강 어구에서 조개를 따고 있던 중, 김이 많이 붙은 나무 토막이 떠내려오는 것을 보고 뜯어 먹어 보니, 맛이 매우 좋아서 그 후 대나무를 물속에 세워서 김을 양식했다고 한다.
또 하나는 어류학자들이 전하는 이야기다. 정문기라는 사람이 전남 완도에서 고기잡이를 하다가 어구에 김이 붙어 나온 것을 보고 그때부터 김을 양식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동국여지승람]에는 400년 전부터 김이 전남 광양군의 토산품이었다고 씌어 있는 것으로 보아, 더 오래 전부터 양식을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우리에게는 아주 오래전 부터 양식을 해왔던 김이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희귀식품으로 알려져 있다.

 

빈대떡

빈대떡은 녹두를 물에 불렸다가 맷돌에 갈아 솥뚜껑에 부친 것으로 황해도에서는 막붙이, 평안도에서는 녹두지짐, 지짐이라고 한다. 여기에 새콤한 김치를 다져서 넣기도 하고, 또 고사리나 도라지를 넣어 쌉살한 맛을 더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러한 빈대떡은 특별한 날이면 풍성함을 더하기 위해서 꼭 하는 음식중의 하나다.그런 빈대떡에 대한 유래는 여러 가지가 있다.
서울 덕수궁 뒤쪽의 동네 이름이 지금은 정동이지만 예전에는 빈대가 많아서 빈대골이라고 했는데, 빈대골에 사는 사람 중에 부침개 장수가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 이름이 빈대떡이 되었다고 합니다.
'명물기략'에서는 중국의 콩가루 떡인 알병의 알자가 빈대를 뜻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말이 와전되어서 빈대떡이 되었다고 한다.
빈대떡하면 가난한 사람들이 먹는 떡으로 오해하기 쉽고,유행가 가사에 나오는 것처럼 돈' 없으면 집에 가서....먹지'란 말로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예전의 빈대떡 쓰임새를 보면 절대로 그렇지 않아요. 서울지방에서는 큰상이나 제상에 전을 고일 때 ,빈대떡이나 밀적을 부쳐서 아래에 고이고, 그 위에 생선전, 간전, 산적을 얹었다. 이렇게 빈대떡은 정성을 다해서 일반적으로 예부터 즐겼던 음식이다.

 

약식

약식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우리나라 신라시대부터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신라 21대 소지왕 때 임금이 소풍을 나가 놀고 있을 때 ,까마귀와 쥐가 근처에서 놀고 있었대요. 그런데 갑자기 쥐가 까마귀를 쫓으려 하자 임금이 신하를 시켜 까마귀의 뒤를 쫓게 해 한참을 쫓다가 그만 놓치고 말았다. 그 근처에서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연못 근처에서 한 늙은이가 나와 편지를 건네주고 사라져 버렸다. 편지의 봉투에는 ‘이 봉투를 열어 보면 두 사람이 죽고 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는다.' 라고 써 있었는데, 무사는 이 편지를 임금에게 전달하게 되었고, 이 글을 읽은 임금은 두 사람보다는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낫다 하여 열지 않게 했다고 한다.
이때 왕실의 예언자가 말하기를 두 사람은 서민을 말하는 것이고 ,한 사람은 임금 자신이라고 얘기를 하자 겁이 난 임금은 즉시 그 편지를 열어 보았다. 그 속에는 '빨리 왕실로 돌아가 거문고 갑을 쏘아라' 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어요. 임금은 즉시 왕실로 돌아와 활로 거문고 갑을 쏘니 그 속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리며, 죽은 두 사람이 나오게 되었다. 이 두 사람은 왕실에서 거문고를 연주하는 궁주와 중이었는데, 서로 간통하여 이 날 밤에 숨어 있다가 임금을 해치려고 했던 거였다.
까마귀의 은혜를 입은 임금은 까마귀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서, 까마귀가 좋아하는 대추로 약식을 만들어 까마귀에게 선물했다. 그 때의 음식이 점점 전해 내려오면서, 밤과 잣, 대추를 넣고 ,까마귀의 털 색깔처럼 검게 물들인 약식을 만들어, 사람들이 먹게 되었다고 한다.

 

쿠키  

한입에 먹을 수 있는 조그맣고 예쁜 과자 쿠키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
쿠키의 어원에 대해서 알아 보자.
쿠키는 네델란드 '쿠오레' 라는 작은 케�이라는 뜻에서 따온 것으로, 이 말이 조금씩 발전되서 나라마다 이름과 유래가 다 달라졌다고 한다.
우리가 흔히 쓰는 쿠키라는 말은 미국식 표기다. 여러 종류의 달콤한 소형 과자를 일컫는데, 주로 반죽해서 잘라내거나, 숟가락으로 떼어내서, 만들어 먹는 것을 일컫는다. 영국에서는 비스킷이라 부른다.
19C초 나폴레옹시대 때 전쟁시 비스케라는 항구에서 정박 중 식량이 떨어지자, 남은 재료를 물에 반죽해서 잘게 떼어, 철판에 구워먹은 것이 시초라고 한다. 그 후 비상식량으로 널리 이용하게 되었고, 영국을 대표하는 과자로 발전했다.
프랑스에서는 사블레라고 부르는데, 샌드 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노르망디 지방에서 처음 만들어 졌고, 바삭한 감촉이 느껴진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중국에서는 당과자라고 불렀는데, 예불을 드릴 때, 과일모양으로 만들어 올리던 과자로부터 시초를 찾아볼 수 있다.
우리나라는 본래 과일을 과자라 표기했는데, 제사용으로 과일이 꼭 필요했을 때, 과일이 없는 계절에는 곡물로서 ,과일 대용품을 만든 것이 과자의 시초다. 중국과 비슷한 과자의 시초를 가지고 있다.

 

크래커

크래커는 폭죽또는 균열이라는 뜻의 의성어로 제품을 먹었을 때, 나는 부서지는 소리가 마치 폭죽을 터트리는 것처럼 크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커피의 기원

<커피>란 말이 어디에서 왔는지는 분명치 않다. 에티오피아의 지명중 하나인 [KAFFA]로 부터 유래됐다는 설과 <힘과 정열>을 뜻하는 희랍어 [KAEWH]에서 유래됐다는 설이 있다. 이처럼 커피의 어원이 분명치 않은 만큼 ,그 전해된 내력도 명확하지 않은데, 전설 중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에티오피아의 양치기 <칼디>가 발견 했다는 것이다.
어느날 양떼가 목장근처의 열매를 먹은 후, 흥분상태가 되어 뛰노는 것을 본 뒤 그것을 수도원 원장에게 물어보았는데, 원장도 이상히 여기고 그 열매를 따서 끓여 먹어 보았더니, 기분이 유쾌하고 머리가 상쾌해졌다. 이후 제자들에게도 마시게 해서 졸지 않고, 기도에 전념할 수 있게 했다고 한다. 이로써 커피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지금은 커피가 현대인의 식사음료와 기호 음료로써 그 영역을 넓여 가고 있지만, 그렇다고 늘 환영 받는 존재는 아니었다.
에티오피아 양치기 소년에 의해 처음 발견되었을 당시만 해도, 커피는 '신이 내린 소중한 약'으로 여겨져 극히 제한된 지역에서 이슬람교 사원이 관리하며, 포교의 수단으로 이용하던 '빨간 열매에 불과 했던 것이, 1554년 콘스탄티노블 (이스탄불의 옛이름)에 커피점이 생겨났고, 그곳은 곧 학생 예술가 ,철학가 ,정치가가 모이는 사교장이 되었다.
그러자 통치자들은 사람들이 커피하우스에 모여서 정치.종교적인 토론을 하는 것을 불안하게 여겼고, 곧 커피금지령이 내려졌다. 심지어 커피가 십자군 병사들에게 의해 유럽대륙으로 퍼져 나간 초기에는, 이슬람 세계에서 전래된 것이라고 해서 이교도의 음료로 배척되기도 했다. 그러한 고통의 시절을 보내던 커피는 르네상스 시대를 맞아 비로소 자유와 예술의 상징으로서 그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영국의 대표적인 빵..스콘

속을 넣지 않고, 가볍게 부풀리도록, 구운 밀가루 빵으로, 영국에서는 티타임 때에 홍차와 먹는 빵이다. 처음에는 딱딱하고 얇았는데, 화학 팽창제인 중탄산나트륨을 사용하고 ,버터와 우유 등을 배합하면서, 지금과 같은 통통하고 ,부푼 모양이 되었다.
스콘의 유래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스콘이란 이름은 스코트랜드의 왕의 대관식에 사용하던, 그들의 성스러운 돌의 이름이다. 후에 잉글랜드가 빼앗아갔는데, 엘리자베스 여왕은 이 돌을 돌려 주었다. 약 700년 후의 일이었으며, 그 당시의 스코틀랜드 국민들은 마치 나라를 되찾은 듯한 느낌이었다 한다. 현재는 에든버러 성에 보관 중이다.
다른 한가지 설은 네덜란드 말로 아름다운 빵이라는 뜻의 스쿤 브롯(schoonbrot)을 인용해서 만들었다는 설이 있다.

 

 

브라우니 케잌

아몬드나 땅콩이 들어 있고 ,초콜릿이 들어 있어, 약간 검은빛의 고급 케잌인 브라우니는, 맛과 영양, 그리고 특유의 질감을 골고루 갖춘 케�이라,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브라우니는 원래 영국 과자였는데, 미국에 전해지면서, 영국 보다는 미국에서 더 많은 인기를 끌게 되었다. 브라우니 이름은 브라우니를 만들었을 때, 갈색이 난다고 해서 붙여졌다.
또 다른 이름의 유래로는 스코틀랜드 전설에 요정의 이름을 빌렸다는 설도 있다. 브라우니 요정은 가족이 잠든 사이에 부엌을 정돈하거나, 접시를 닦아 놓는, 아주 깨끗하고, 인간에게 호의적인 요정이라고 하는데, 주로 부엌에서 케익을 만들어서 그런지, 착하고 귀여운 부엌 요정의 이름을 붙이게 되었나 보다.

 

스낵

스낵의 어원은 (snap: 잽싸게 물다)인데 중세 네델란드인 snacken (깨물다)에서 유래되었다. 스낵의 개념은 광범위하게는 부담없이 즐기면서,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식품을 말하며, 또 다른 의미로는 간단한 식사를 가리키기도 한다.

 

베이글

담백한 맛이 일품인 베이글은, 미국의 아침 식사로 즐겨먹는 빵이다. 도넛과 모양이 닮고, 노릇한 황금색의 표면과 속,그리고 씹을수록 깊은 맛이 특징이다. 그런데 베이글의 유래는 미국이 아니라 한다.
베이글은 2천년 전부터 전해져 온 유대인의 전통 빵으로, 맛과 실용성을 따지는 검소한 민족의 특성이 그대로 담긴 빵이다.
그런 베이글이 어떻게 미국에 들어왔는지는 2가지의 분석이 있다. 한가지는 베이글이 저지방이고, 탄수화물이라는 점인데,비만에 시달리는 미국인들에게, 아주 고마운 빵으로 인기를 얻은 셈이다. 또 하나의 원인은 유대인들의 세력이 미국에 점차 확대됨에 따라 수요가 증가하게 된 것이다.
또 하나는, 처음 베이글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1683년에 폴란드 시골의 빵 기술자가 황제 쟝 소블레스키를 칭송하여 구운데서, 유래 한다고 한다. 쟝 황제는 승마의 달인이었는데, 빵 기술자가 말 등자 모양을 닮은 빵을 만들게 된 것이다.

 

티라미수

진한 커피 맛과 크림 치즈 맛이 잘 어우러진, 티라미수는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있을까?
먼저 티라미수란 말, "끌어올리다"란 뜻의 티라레(tirare)와 '나를'의 뜻인 미(mi)와 '위로'라는 뜻인 수(su)가 복합돤 이태리 어인데, 종합적인 뜻은 '기분이 좋아진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 이름이 붙여진 이유는 18세기에,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부족한 영양분을 보충 시킬 수 있는, 디저트라는 이유도 있고 ,커피가 들어있어, 흥분 작용을 하기 때문에, 기분이 좋아지는 디저트라는 이유가 있다.
1980년대에 갑자기 미국과 다른 유럽에 유행을 했다고 한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세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디저트용 케�이다.

 

와플

요즘 거리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와플은 참 슬픈 유래를 가지고 있다.
처음의 와플은 약 2000년 전부터 중국에서 만들어졌다는, 역사 학자들이 말하고 있는데, 재료가 밀가루와 버터가 아닌 쌀이나 콩 등으로 만든 팬케�에 가까운 형이었다고 한다.
그런 와플에 큰 변화가 있었는데, 그 때가 바로 1734년이다. 영국에 조그만 식당에서 요리사가 스테이크와 와플을 그릴에서 굽고 있던 중에, 고기를 연하게 하려고 막대기로 고기를 두드리고 있었다.
그런데 부인이 말을 시키는 바람에 딴 곳을 보고, 계속 막대기로 두드리다 보니, 두드린 것은 고기가 아닌 와플이었다. 모양이 울퉁불퉁한 와플이 되었는데 ,요리사가 힌트를 얻어 와플에 홈이 패였으므로, 각종 시럽이 흐르지 않을 거라 생각을 한 것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요리사는 이 소식을 부인에게 전하자 마자 넘어져서 세상을 떠났다 한다.. 부인은 이 아이디어를 제임스라는 사람에게 팔았고 ,제임스는 이것으로 큰 돈을 벌었지만, 다른 수백개의 식당에서 더 싼 가격으로 팔기 시작을 해서 ,제임스는 곧 망하게 되었다. 결국 제임스는 무일푼으로 거리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

 

오믈렛

옛날 스페인 왕이 수행원을 데리고 시골길을 산책을 했는데, 산책을 하던중 배가 고파서 식사준비를 시켰다. 수행원은 근처 누추한 집에 가서 왕의 식사로 아무거라도 좋으니, 빨리 만들라고 독촉했는데, 누추한 집의 주인인 남자는 재료가 마땅치 않아 보이는, 계란을 풀어 팬에 넣고 익힌 후, 접시에 담아 왕에게 바쳤다.
왕은 그 남자의 동작을 보고"Quel homme lest ! (정말 재빠른 남자)라고 감탄을 했는데 그 후 Hommelest(오믈레스트)가 그 후 Omelest(오믈렛)으로 변화했다 한다.


 

샌드위치

sandwich는 빵 사이에 야채나 고기 따위를 끼워 넣은 음식을 말한다. hamburger와 hot dog(긴 빵을 반으로 쪼개서 그 사이에 소시지와 야채 등을 넣어 만든 것)도 sandwich의 일종이다. 'sandwich'라는 이름을 가진 백작이 만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는 잘못된 상식이다. 영국에 샌드위치 라는 항구 도시에 존 몬테규(John Montagu) 귀족 일가가 살고 있었다. 몬터규 귀족은 샌드위치라는 작위를 가지고 있었다. 영국 초대 해군 제독을 지냈던, 제 4대 샌드위치 백작은 카드놀이를 너무나 좋아 했었는데, 점심 시간까지 아까울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백작님은 식당에서 호밀 빵에 야채와 베이컨을 넣고 먹었는데 ,이런 모습을 본 다른 사람들이 신기해서 따라 먹던 것이, 점차적으로 퍼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런 형태는 이미 로마인들이 2000년 전에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달걀을 넣은 샌드위치는 미국에서 서부 개척 시대에 냉장고가 없어, 상한 음식에서 나는 냄새를 감추기 위해 빵 사이에 달걀을 으깨서 먹은 것이 시초라고 한다.

 

핫도그

hot dog는 1900년경 New York에서 처음 소개된 전형적인 미국 음식이다. 두가지의 유래설이 있다.
첫번째 유래설은 독일 음식에서 찾을 수 있는데, 독일 음식 중에 빵에 소시지를 끼워 먹는 frankfurter 라는 요리가 있었다고 한다.독일 산 개인 dachshund(닥스훈트)가 ,독일제 소시지인 Frankfurter와 비슷하게 생겨서, 이 소시지로 만든 음식에 hot dog라는 이름을 붙여 부르게 되었다. 소시지에 옥수수가루를 묻혀 튀긴, 우리가 먹는 것과 같은 핫도그는 corn dog라 한다. 이 요리가 1860년 미국에 전파되게 되었고, 미국인들은 이 음식을 타크스 훈트(몸통이 길고 다리 짧은 개) 소시지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 음식은 특히 야구 경기장에서 유행 했는데, 1906년 신문 만화가가 신문에 삽입할 때 ,핫도그라고 표기를 해서 이름이 정해졌다고 한다.
두 번째 유래설은 좀 충격적인데, 유럽 중심인 스위스의 동부 지역에서 개고기 소시지를 먹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적이 있었다. 물론 핫도그의 재료가 개고기 였다는 것은 아니다.
1893년 시카고 박람회때 ,등장한 간이 음식으로 프랑크푸르트 소시지를 빵 틈에 끼워먹는 일종의 샌드위치였는데, 그것을 먹던 한 손님이 뜨거운 개고기 소시지를 먹는 것 같다고 말을 한 것을 주인이 듣고 ,힌트를 얻어 이름을 핫도그라고 지었다고 한다.

 

햄버거

햄버거 하면 미국이 생각 나거나 독일 hamburg 도시가 떠오른다. 독일에서 유래되어 미국으로 넘어가서 먹게 되었다던 햄버거..
하지만 더 유력한 유래가 있는데, 중세에 아시아 초원 지대에 살고 있던 타타르 족이라는 유목 민족이 있었는데, 날 고기를 얇게 잘라 양파,후추 등의 양념을 해서 말 안장에 넣고 먹기 시작 했다.
아시아에서 장사를 하던 독일 함부르크 상인들이 이 비법을 전수해 갔는데 날로 먹기는 좀 역겨워 익혀 먹었다.
이 양념한 고기는 우리나라의 육회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그 후 1904년 미국의 박람회에서 첫 선을 보인 것을 계기로, 많은 사람들이 먹기 시작 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육회와 유래가 같다는 사실이 좀 놀랍지 않은가..?

 

케잌

생일뿐만 아니라 축하할 때나 약혼,결혼 등등 너무도 많이 먹는 케�은 언제부터 먹게 되었을까?
처음 케�의 형태를 갖춘 나라는 이집트다. 그러나 그땐 얼음으로 만든 샤베트 였다. 그 후 8-9C 그리스에서는 이미 달걀,유지를 넣어 만든 케�의 종류가 100 여종이나 되었다고 한다. 빵과 케� 명칭이 명확하게 분류된 것은 로마 제국 시대 때 였다고 한다.
11-13C는 십자군 원정으로 동양에서 설탕과 각종 향신료가 유입되어, 케�의 질과 맛을 높였다. 산업혁명을 통해 대중화가 되었으며, 20C에 들어서 다양화 되면서, 국제화가 되었다.
그리고 생일날 케�에 촛불을 켜고, 축가를 부르며, 소원을 빌고,또 촛불을 한번에 불어 모두 끄는 등등.. 거의 의무처럼 되어버린 절차다.. 중세 독일 농민 사이에서 '킨테 퍼스테'라고 하는 어린이 생일날에 처음으로 축하 행사를 했다는 인류학자들의 주장이 있다. 그땐 촛불 하나를 더 붙였는데, 그 하나의 촛불의 의미는 생명의 등불이었다고 한다.
또 하나의 절차인 생일날 주인공 얼굴에 케� 크림 씌우기는, 서양인의 오랜 관습 중 하나이다.
한 사람의 파티에서 행했던 일이, 지금은 전 세계에서 거의 모든 사람이 하고 있다니 좀 놀랍다. 우리나라는 떡을 해서 그날을 기념했다.

 

아이스크림

아이스크림 역사를 보면, 구약시절 아브라함과 이삭이 먹었다는 기록이 있고, 좀 더 구체적으로는 고대 중국인이 BC3000경부터 ,눈이나 얼음에 꿀과 과일 즙을 혼합해서 먹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현재의 아이스크림은 1851년 미국에서 유래 되었다. 우리나라는 1971년에 자동화가 되어 많은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살도 찌고 영양가도 별로 없다는, 엄청난 오해를 갖고 사는, 아이스크림의 영양은 양질의 단백질과, 지용성 비타민이 함유되어 있어 뇌나 신경의 역할을 돕고 있다. 또한 칼슘이 풍부하여 뼈를 만드는 것 외에, 심장이나 근육의 수축을 도와 혈액응고에도 많은 도움을 준다. 그리고 과일이나 너트류를 첨가해서, 우유에 부족한 비타민 C나 철분을 보충할 수 있으므로, 아이들 간식으로도 좋은 식품이라고 할 수 있다.
영양 보충뿐만 아니라 ,소화액 분비를 촉진 시키며 ,또 액상이라 이에 잘 붙지 않아 충치의 원인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어른들에게는 골절 예방에도 도움을 준다. 멸치나 채소보다 맛이 좋고 먹기 쉽기 때문에, 칼슘섭취에 더 효율적이라 할 수 있다.

 

도넛의 구멍

혹시 도넛을 먹으면서 대체 누가 구멍을 뚫었기에 한입의 양이 줄었을까 생각한 적은 없는지..?
도넛에 구멍을 뚫게 된 유래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먼저 네델란드에 머문 영국의 청교도들이 미국에 가서 전했다는 설이 있다. 네델란드 주부들이 밀가루 반죽 가운데에 호도를 올린 다음, 튀김과자를 만들어 먹는 것을 본 청교도인들이, 미국에 가서 링도넛을 만들어 먹었다는 이야기다.
또 한가지는 도넛이 화살을 맞아서 구멍이 생겼다는 이야기이다. 19세기 무렵 인디언 마을에 정착해 살고 있던 순례자의 부인이 빵을 만들던 중 인디언이 쏜 화살이 빵에 맞자 그 모양 그대로 구워내, 가운데에 구멍이 난 도넛이 생겨났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 다른 곳을 살펴 보면, 만들어진 빵의 가운데 부분이 익지 않아서, 그 부분을 파내고 먹다보니 동그란 구멍이 났다는 얘기도 있다..

 

마들렌 과자

7월 22일은 '성녀 마들렌의 날'로, 작은 조개모양의 단과자인 귀여운 마들렌을 만들어 ,수확의 기쁨을 축하하고, 성녀 마들렌에게 감사하는 서양의 명절이다. 그래서 명과 마들렌은 이날에서부터 유래했다고 전해지지만, 사실은 이름에 얽힌 유래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첫번째, 유래는 마들렌을 처음 만든 부인의 이름을 따서 만들었다는 설이다. 마들렌의 이름은 1700년대 중반에 마들렌을 만든 페로탄 드 발몬 부인의 여요리사 마들렌 포르미에의 이름을 붙인 것이 정설로 알려져 왔다.
또 다른 유래로는, 왕실과 관련된 설로 ,마리 레크친스키는 프랑스왕 루이 15세의 왕비였는데, 남편 루이 15세는 정부인 폼파드르부인에게 빠져 있었고, 폼파드르부인의 입김이 정치에까지 미치고 있었기 때문에, 왕비의 영향력은 아주 보잘 것 없었다. 이를 보다 못한 아버지 폴란드의 왕 레크친스키는 ,여러 가지 맛있는 파이요리와 케이크를 딸에게 보내, 남편 루이 15세에게 먹이게 했는데, 달콤한 과자로 왕의 마음을 딸에게 돌리게 하려는, 아버지의 마음에서 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중 마들렌은 그러한 레크친스키왕이 추천한 명과 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카스텔라

달걀의 흰자를 저어 거품을 내어 만드는 과자 카스텔라는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과자 중 하나로, 프랑스어권에서는 비스퀴, 영어권에서는 스폰지로 불려진다.
카스텔라가 처음 등장한 때는, 15∼16세기로 지리상의 발견이 한창이던 절대주의 시대였다. 스폰지의 발생지는 에스파냐의 카스티야 지방으로 이곳의 비스코초가 스폰지, 즉 비스퀴인 카스텔라의 원형이 되는 것이다. 유럽의 문화, 문명의 중심지였던 에스파냐는 식문화 역시도 가장 번창했던 곳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에스파냐에서는 달걀과 음식물의 혼합기술과 부풀리기가 발달해 스폰지의 원형인 비스코초(Bizcocho)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정열의 나라 에스파냐인들은, 닭고기와 달걀을 유난히 좋아하고, 또 정력증진에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설탕, 달걀, 밀가루로 만든 비스코초 역시 그러한 음식 중 하나로서, 그들에게 사랑을 받았었다. 에스파냐와 더불어 명성을 날렸던 포르투갈은, 에스파냐의 비스코초 발상지명을 따서 '가토 디 카스티유(카스티야의 과자)'라 불렀으며, 이것이 일본 나가사키 항구로 흘러 들어와 카스텔라라는 이름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카스텔라도 바로 일본을 거쳐 올라온 과자다.

 

 

슈 크림

동그란 반죽에 크림을 더해 입에 넣으면 사르르 녹는 슈크림.
슈란 프랑스어로 '양배추'라는 의미로, 슈크림의 모양이 작고, 동글동글하며, 표면에 결이 있는 것이 꼭 양배추 같다는 뜻에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원래는 슈라는 것이 원래의 이름이지만, 우리나라를 비롯한 일본, 대만 등지에서 주로 슈크림이라고 부르고, 미국에서는 퍼프크림(Puff cream)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 슈에 들어가는 크림은, 주로 커스터드 크림을 사용하는데, 요새는 보통 설탕을 첨가한 생크림을 많이 넣기도 한다.
슈는 18세기경 어느 기술자가 처음 발견하게 되었다, 커다란 파이반죽을 굽다가 겉은 잘 구워졌으나, 속 반죽은 덜 구워진 것을 보고 아까운 마음에 계란을 혼합하여, 다시 오븐에 굽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슈반죽이었다고 합니다

 

무스

보통 제과점에 가보면 ,<~무스>라는 이름의 케� 등을 본적이 있을 것이다. 무스란 간단히 말하자면 거품상태의 가벼운 과자를 말하는데, 무스(Mousse)라는 이름도 원래 거품이라는 뜻의 프랑스어라고 한다.
달콤한 과일을 갈아서 만든, 부드러운 퓨레 등의 재료에, 설탕이나 이탈리안 시럽 등을 넣어 거품을 낸 ,생크림과 흰자를 더해 가볍게 부풀린 것으로, 바바루아와 만드는 법과 재료가 비슷하지만 무스는 공기가 더 많이 들어간 훨씬 가벼운 느낌의 과자다. 따라서, 무스에 사용되는 과일은 오렌지, 딸기같이 신선하고 ,상큼한 맛과 향기를 가진 것들이 좋다.
바바루아는 예전부터 서양에서 무스와 젤리, 블랑망제 등과 함께 인기있는 디저트 중에 하나다. 바바루아 역시 무스와 비슷하게 과일 퓌레와 크림에 젤라틴과 생크림을 섞어 식힌 과자로, 무스보다는 조금 무겁고, 밀도가 큰 제품으로, 무스와 젤리의 중간 정도로 보면 된다. 무스와 마찬가지로 과일이 주재료로 많이 사용되고 ,그 밖에도 초콜릿, 커피등을 사용해서 만들기도 한다.

 

크레이프

크레이프는 다리올이라는, 파이의 한 종류로 크로와상과 함께 16세기경부터 만들기 시작했다. 유럽에서 2월 성촉제 때 성당에서 구워 먹었던 음식인데, 17세기가 되어서야 일반가정에 크레이프라는 음식이 알려졌다.
실크 같다는 뜻의 크레이프는, 가늘게 잔주름이 가도록, 얇게 팬에 구워내는 것이 특징이다. 크레이프는 구워서 가볍게 그냥 먹기도 하지만, 마멀레이드, 잼, 초콜릿, 크림 등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넣어 말아서 먹기도 한다. 또 요즘은 크레이프를 크림과 층층이 올려, 아주 정성이 많이 들어가는, 크레이프 케�이 등장하기도 했다.
크레이프라는 어원은, 중세 영국의 크리스프(crisp)가 와전된 것으로 프랑스에서는 파누케(pannequet)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크레프와 ,비슷한 것으로 미국의 팬케이크(pancake), 이탈리아의 브리테나(brittella), 독일의 프판쿠헨(pfannkuchen), 프랑스의 가레트(galette) 등이 있다.

 

마카롱

유럽의 대부분의 제과점에서, 마카롱은 흔하게 볼 수 있는 제품이다. 아몬드, 설탕, 달걀 흰자를 기본재료로 한 마카롱은 매우 단순한 모양의 과자이지만, 오븐온도 등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제대로 된 제품을 만들 수 없는 까다로운 제품이다.
원래 마카롱의 발상지는 이탈리아지만 ,이탈리아의 카트린 공주와 프랑스의 앙리2세가 결혼하면서, 그녀가 데려간 요리사에 의해 보급되어, 프랑스 곳곳에 퍼져 나가게 되었다. 마카롱은 프랑스 남부의 브르따뉴 지방에 있던 ,어느 수녀원에서 수녀들에 의해 더욱 활발하게 만들어졌는데 ,당시 수녀들에 의해 만들어진 마카롱은, 오늘날과 같이 샌드한 형태가 아닌, 원형의 것으로 마카롱 쇠르라 불려졌다고 한다.
그 당시 수도자들을 위해서만 만들어지던, 마카롱쇠르가 수녀원의 높은 담을 넘어 세상에 선보인 계기는 유럽 전쟁 때 였다. 전쟁 중 수녀들은 낭시 지방의 어느 귀족의 보호를 받으며, 낭시성에 숨어있었고, 전쟁 중에 수녀들이 만든 마카롱쇠르가 ,이후 프랑스 전역으로 보급되어, 프랑스인의 구미에 맞는 마카롱으로서 인기를 끌게 되었다.
이후 샌드한 형태의 마카롱이 만들어지고, '마카롱 파리장'으로 불리면서 ,유럽의 대표적인 과자로 자리잡게 되었다.

 

밀크쉐이크

밀크 쉐이크의 사전적 의미는 우유를 주재료로 하여, 아이스크림을 섞은 소프트 드링크 음료다. 다량의 유지방이 들어 있어 누구나 좋아하는 음료이기도 하다. 처음엔 달걀과 우유를 넣어 만들었다.
옛날 북유럽에서 유래가 되었는데, 음료 보다는 감기 예방 차인 계란 술로 출발을 했다. 과거에는 럼을 넣기도 했다는데, 지금은 부드러운 맛을 위해 넣지 않고 ,발전을 한 것이 지금의 맛있는 밀크쉐이크가 된 것이다.

 

크레페 수제트

크레이프는 다리올이라는 파이의 한 종류로, 크로와상과 함께 16세기에 만들기 시작했고, 유럽에서는 2월 성축제때 성당에서 구워 먹었는데, 17세기가 되어서야 일반가정에서 일반화 되었다.
실크와 같이 라는 뜻의 크레프는, 가늘게 잔주름이 가도록 구워내는 것이 특징이며, 중세 영국의 크리스프, 크레스프가 와전된 것으로, 프랑스에서는 파누게라고도 불렀다.
크레이프와 비슷한 것으로, 빵케이크, 브리테나, 프란쿠헨, 가레트 등이 있으며 ,가레트는 밀가루, 우유, 꿀로 만든 전병으로, 고대 이집트왕의 고분에 조각된 그림에서 볼 수 있다. 현대의 비슷한 비슷한 종류로 와플이나 블리니등이 있다.
이 같은 크레페는 간식이 아닌 식사개념이고, 음료도 우리식 사이다인 시드르( cidre)역시 같은 지방에서 나오는 음료로서 크레페와 어울린다.
크레페는, 햄 치즈등 다양하게 넣어서, 식사대용으로 프랑스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정식식사 코스중 하나의 수프인 콘소메에 비해 훨씬 대중적인 요리다. 전문점도 많이있어, 크레이프를 굽는 맛있는 냄새를 파리시내의 골목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다.. 브르타뉴 서쪽지방의 크레이프는 메밀가루, 황밀로 만들며 설탕 혹은 소금을 치고 속에는 초콜릿 등을 넣어서 굽기도 한다.
거리에서 쉽게 먹을 수 있는 ,이러한 크레이프 외에 호텔에서 맛볼 수 있는, 고급 크레이프 수제트 요리도 있다. 수제트란 말은 ,옛날 영국의 황태자 에드워드가 크레이프 수제트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헨리 카펜터는 황태자 에드워드의 요리장이 ,어느 날 황태자의 식사를 준비하던 중, 크레이프(=pan cake)의 소스를 만들 때, 실수로 인하여 liqueur(과일로 만든 단술)를 엎질렀는데 ,소스에 불이 붙음과 동시에 음식을 버리게 되었다.
헨리는 시간도 없고 하여, 그냥 그 소스에 크레이프를 집어넣어, 황태자에게 제공 하였더니, 너무 맛이 진기한지라 에드워드 황태자는 그날의 파티에 동석한 수제트 부인의 마음을 사려고, 그 부인의 이름을 따서 크레이프 수제트라는 디저트를 명명 하였다 한다.
또 다른 말은 파리의 코메디 프랑세즈에서 ,크레이프를 먹는 단역을 열연하고 있던, 수제트 양을 위하여 팬의 한 사람이었던 조리사가 특제 크레이프를 만들어, 매일 무대에다가 제공했다고 한다. 나중에 유명한 역을 맡게 된 수제트는 그 조리사의 답례로 자기 이름을 붙여 크레이프 수제트라고 했다.

 

파스타

파스타의 기원은, 면의 발상지인 중국에서 비롯된 것으로 전해진다. 중국에서는 타리아테레와 같이 폭이 조금 넓은 면과 ,스파게티 비슷한 것을 먹었다. 그것을 동방견문록으로 잘 알려진, 마르코 폴로가 모국으로 전파하여 ,본격적으로 이태리식 파스타가 유행하게 된 것이다.
원래 파스타의 주류가 된 것은 생파스타였지만, 건조 파스타가 출현하면서 장기간 보존할 수 있게 되어, 더욱 폭넓게 보급이 확산되었다.
건조 파스타의 경우, 아라비아 상인들이 사막을 횡단하는, 긴 여정에서 상하기 쉬운 밀가루 대신 물로 반죽한, 밀가루를 건조시켜 가지고 다녔던 것이, 그 시작으로 이 건조 파스타가 유럽 각지로 퍼져나갔다.그 때까지는 일반 가정에서 때마다 생파스타를 만들어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으나 건조 파스타의 출현으로 먹고 싶을 때, 바로 조리할 수 있고 보존할 수 있기 때문에 빠르게 보급되었다.
이와 함께 이태리에서는 신맛이 나는 토마토와 신선한 해산물, 허브, 버섯 등이 풍부해 다양한 파스타 요리가 나오게 되었다..

 

칵테일의 어원

유래는 정확하지 않지만,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칵테일을 직역하면 "수탉꼬리"가 된다.
옛날에 멕시코 유카탄 반도 어느 항구에 영국배가 입항하였다. 상륙한 선원들이 어느 술집에 들어갔는데 카운터 안에서 소년이 껍질을 벗긴 예쁜 나무 가지로 드락스(Drace)라고 하는 원주민의 혼합음료를 만들고 있었는데, 당시 영국 사람들은 스트레이트로만 마셨기 때문에 이 광경이 신기하게 보였다. 한 선원이 "그게 뭐지?" 라고 물었다. 선원은 술을 물었는데 소년은 예쁜 나뭇가지를 물어보는 줄 알고, 나무 가지가 닭 꼬리처럼 생겼으므로 "꼴라 데 갈료(Cola de gallo)"라고 대답했다. 이 말은 스페인어로 수탉꼬리를 의미한다. 이것을 영어로 바꿔서 칵테일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옛날 스페인군이 뉴 멕시코 지방을 정복 했을 때, 그 지방에는 아스텍구족이 살고 있었으며, 칵테일이란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하나였다고 한다. 아스텍구족 이전에 7-11세기 전 그 지방에는 돌텍크족이 지배하고 있었으며 ,그 귀족의 하나가 진귀한 혼합주를 만들어 어여쁜 자기의 딸 "콕돌"과 함께 바치자 왕은 크게 기뻐하며, 즉시 그 혼합주를 그 귀족의 딸 이름을 붙여 "콕돌" 이라 이름하여, 그 후부터는 그러한 혼합주의 이름이 아스텍구족의 언어의 하나로 전해졌다고 한다.
미국의 독립전쟁 당시 버지니아 기병대의 "패트릭 후라나간" 이라는 한 아일랜드인이 기병대에 입대하였다. 그 사람은 입대한지 얼마되지 않아 뜻밖의 전사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신혼의 "베티" 라는 여인은 남편을 잊지 못하고 ,곧 망부대에 종군할 것을 희망, 1779년 동부대가 뉴욕근교에 이동했을 때 주보를 담당하였. 그 여인은 "Bracer"라고 하는 혼합주를 만들게 되고, 그것을 대원들에게 마시게 했는데, 군인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어느날, 그녀는 반미 영국인 지주의 닭을 훔쳐와서 장교들을 위로하였는데, 장교들은 닭의 꼬리로 장식된 Bracer를 밤새 마시며, 춤을 추고 즐겼다고 한다. 그런데 만취되어 있던 어느 한 장교가 닭의 꼬리로 장식된 그 Bracer를 보고 '야 그 콕스 테일 멋지다!!' 라고 말하자 역시 술에 취한 다른 장교가 '응 정말 멋있는 술이야~!' 라고 해서 그 후부터 혼합된 Bracer를 칵테일이라고 했던 것이 다른 혼합주도 칵테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미국의 유명한 술의 고장 '켄터키'에서는 투계가 유행 되었을 때, 돈을 걸고 싸움을 시키던 한 사람이 돈을 잃게 되자, 화가 난 끝에 마시던 여러 종류의 술을 섞어 마시며 그 싸움에 진 닭의 꼬리를 빼어 술잔에 넣었다. 그 때 옆에 있던 사람들이 "콕 스테일" 하며 크게 웃었고 ,그것을 보았던 주위 사람들이 모든 술을 섞은 다음 닭의 꼬리를 장식하고, 투계의 싸움을 희비로 나누었다 한다.

 

사바사바

사바(鯖)는 일본어로 고등어를 가리키는 말이다.. 고등어는 9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가 제철로, 가을의 고등어는 온몸에 기름이 올라있어 조리만 잘하면, 다른 생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구수한 맛이 일품이다.
단 고등어의 단백질 중에는 히스티딘이란 성분이 들어있어 알레르기를 일으킬 수도 있으므로 알레르기성 체질인 사람은 가능하면, 삼가는 것이 안전하다.
고등어 요리를 일본에서는 시메사바라고 부른다. 생선이름이 사바로 정해진데는 몇 가지 설이있는데, 사바의 사(小)는 작다라고 하는 의미의 사로서 ,바는 이빨을 촉음화한 것으로서 결국 사바로 불리워졌다는 설이 있다.
이 고등어를 가리키는 이름, 사바가 국내에선 약간 의미가 바뀌어, 누구에게 무슨 일을 부탁할 때 잘보이려고 하는 의미로 쓰이고 있는데, 그 말이 생긴 연유도 흥미롭다.
옛날 일본은 지리적인 위치로 먹을 것이 귀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 당시 왜구는 굶주림에 우리를 침범했고 조선시대에 그 왜구들이 많이 있는 대마도에서 직접 먹을 것을 주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렇게 먹을 것이 귀했던 시절에 고등어는 귀한 생선이었다. 그 당시 일본은 지금같이 냉장고가 없었던 때였다. 어느 한 일본인이 나무통에 고등어 두 마리를 담아서 관청에 일을 부탁하면서 선물로 가지고 가는 도중에 누가 그게 뭐냐고 물어서 그냥 사바가지고 관청에 간다고 이야기했는데, 거기에서 고등어 사바로 무슨 부탁을 바란다는 사바사바한다는 우리식 의미로 전해지고 있다..

 

라면의 탄생

라면이란 면을 증숙시킨후 기름에 튀긴 유탕면과 기름에 튀기지 않은 건면에 분말 스프를 합친 것을 일반적으로 라면이라고 합니다. 라면의 발상지는 일본이며 ,중국의 튀겨낸 면에서 힌트를 얻어 1958년 가을 일청식품에서 생산되면서부터 대중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1959년 봄.. 에스코트라는 회사가 본격 생산을 시작했으며 1960년 겨울부터는 명성식품이 치킨라면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때 생산되던 라면은 [조미면]으로서 면에 양념 국물을 가미한 것이었다. 1961년에 이르러서야 명성식품에 의해 현재와 같은 양식의 라면이 생산되었고, 일본에서의 라면의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우리나라에 라면이 들어온 것은 1963년 9월부터였고, 1983년 이전까지 삼양과 농심의 양사체제로 라면시장이 형성되었다.
그 후 빙그레등 신규업체가 늘어나면서 농심, 삼양, 야쿠르트, 오뚜기, 빙그레등 많은 업체가 라면시장에 뛰어들게 되었다.

 

프티 푸르 이야기

프티 푸르는 프랑스어로 '약한 불'이라는 뜻이다. 프티 푸르의 기원은 옛날 마을 전체에서 같이 빵을 구워 먹던 시절로 올라가게 된다.
집집마다 빵을 굽는 가마를 갖추지 못하던 시절 프랑스인들은 마을 공동의 큰 가마를 두고 마을 사람들의 식량을 함께 해결했는데 이때 가마의 크기는 짐작대로 굉장히 컸었다. 이렇게 해서 빵을 굽고 난 뒤 불을 꺼도 가마에 남은 열기는 오랫동안 지속되어서 이 여열을 이용해서 만들기 시작한 것이 ,바로 프티 푸르들이다. 말 그대로 불이 꺼진 빵 가마의 약한 불을 이용하는 것이므로 '발효 반죽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며 굽는 시간도 그리 길지 않다.
처음에는 프티 푸르라고 하면 단순한 과자 종류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았지만 지금의 프랑스에서는 프티 푸르의 정의는 아주 광범위하다. 한입에 쏙 들어가는 크기로 자른 작은 케이크나 달지 않은 애피타이저 혹은 아이스크림 후식까지 모두 프티 푸르의 범위에 포함되는데, 이러한 음식들은 주로 리셉션이나 뷔페, 칵테일 파티 혹은 집에서 열리는 작은 파티의 애피타이저나 후식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특히 뷔페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파티에선 그 진가를 더욱 발휘할 수 있는데, 칼이나 숟가락, 포크 없이 손으로 집어서 먹을 수 있고 접시에 들고 돌아다니면서 먹을 수 있기 때문에, 프티 푸르의 화려하고도 앙증맞은 모습이 손님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다.

 

파운드 케�

부드럽고 촉촉하여 누구나 좋아하는 고급 케익인 파운드 케익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지 알아 보자.
기본이 되는 배합은 소맥분, 달걀, 설탕, 버터가 같은 양으로 만들어진 케�이다.
처음 파운드 케이크를 만든 나라는 영국으로 중량은 1파운드(453.6g)이라 하여 이름도 파운드 케이크이라 부르게 되었으나, 이 케이크의 이름은 세계적으로 통일이 되어 있지 않다고 한다. 프랑스에서는 파운드 케익을 도입했을 때, 파운드란 이름을 제외한 케�이라고 부르며, 불어 발음인 <까끄>라고 부른다. 그리고 독일에서는 발상지의 지명을 따서 영국 풍 과자라는 뜻인 <잉글리셔 쿠헨>이라고 부른다.
파운드 케�에는 가운데에 터져 있는 것이 더욱 먹음직스럽게 보여지는데, 일부러 터뜨리는 이유는, 파운드 케�이 터뜨려 주지 않고 구우면 불 규칙하게 터진다. 이왕이면 모양도 예쁘게 하는 것이 좋으므로 굽는 중간에 터뜨려주면 먹음직스러운 케�이 된다.

 

포테토 칩

포테토칩은 1835년 미국의 인디언 요리사인 조지 그람이라는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 졌다.
상류 계급이 모이는 뉴욕의 Saratoga springs에 있는 호텔 레스토랑에서 있었던 일이다. 어느날 이 지역의 유지 중 한 사람이 기름에 튀긴 감자가 너무 두껍다고 불평을 했답니다. 조지 그람이라는 요리사는 자신의 요리 실력에 자신감이 있었던 차에 이런 말을 듣고 오기가 생겨서, 연구를 하던 중 종이처럼 얇게 썰어서 튀기게 되었다. 물론 인기가 있었으며 점점 인기가 확산이 되서 전 미국 지역에 퍼지게 되었다. 이러한 포테토칩이 우리에게는 2차 세계 대전 때 일본에 유래가 되면서 먹게 되었다.

 

피자

피자의 유래는 크게 그리스에서 유래됐다는 이야기와 “a point”라는 단어에서 유래됐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피자가 그리스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은 납작하게 눌려진 또는, 동그랗고 납작한 빵을 의미하는 '삐따(Pitta)'에 어원을 두고 있다. 실제로 이탈리아의 남부 도시들이 희랍인에 의해 건설됐고, 나폴리도 새로운 도시를 뜻하는 '네아폴리스'라는 그리스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것을 봐서 피자는 그리스에서 유래됐었다는 말이 설득력이 있다.
그 다음 a point설은 "pizza"가 고대 이탈리아어의 "a point"라는 단어에서 유래되었다. 그 후 "pizziare", 즉 "끼워서 조이다, 집어 으깨다"라는 의미의 말로 진화되었다고 해요. 이 단어가 처음 나타난 것은 BC 1000년에 나폴리의 지방 사투리에서 였다. 오늘날 피자의 탄생이 이탈리아인들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지만, 피자와 비슷한 원리인 파이는 실제로 에트루리아인 (이탈리아 중서부의 고대국가)과 그리스 문화에서부터 유래되었다.
소수의 아시아인으로부터 에트루리아인들은 빵을 구워냈는데, 구워낸 빵 표면에 여러 가지를 올린 후 장식을 해서 접시에 담아 냈다고 해요. 그 후, 그리스인들이 남부 이탈리아를 식민지화했을 때, 그들은 에트루리아인들이 하는 것을 보고 빵 위에 여러 가지 토핑을 올려서 굽기 시작했다. 이러한 형태가 피자를 만드는 주된 과정이 되었는데 실제로 피자를 알려지게 한 것은 대제국을 건설했던 로마인들이었다고 한다. 그들이 이탈리아는 물론 그들의 지배하에 있던 모든 지역에 이러한 피자를 널리 퍼뜨렸다.
그 후 세월이 흘러 20세기 이탈리아에서 미국으로 이주해온 사람들,이 빵 가게들이 불황을 겪는 동안 오븐을 빌려서 토핑된 빵을 팔기 시작했고, 팔고 남은 빵들은 배고픈 아이들에게 토마토와 함께 주었다.
결과적으로 이탈리아에서 이민 온 사람들이 밀가루 반죽에 토마토 퓨레, 오레가노(향신료), 갈아놓은 치즈가루를 토핑한 빵인 피자의 직접적인 상품화를 시킨 장본인들이다. 우리가 지금 먹는 피자 형태의 첫 시작은 1905년 롬베르디에 의해 뉴욕에서 첫 피자집을 오픈 하게 되면서라고 한다. 그런 피자는 각 나라의 음식과 조화를 이뤄가며 동서양으로 널리 고르게 분포되면서 발전하게 되었다. 다양한 피자로 유명한 일본에서는 피자를 오징어, 띄운 땅콩, 죽순, 생강, 딸기 등으로 장식해서 먹는 걸로 유명하다. 포루투갈은 새의 간을 재료로 한 “사냥꾼 피자”, 닭고기, 모차렐라 치즈, 바나나를 쓴 밤비노 피자 등을 만들어 냈다.우리나라에는 우리의 전통 음식인 불고기를 이용한 불고기 피자가 있다. 처음 우리나라에 피자가 들어온 것은 1985년 부터다.

 

스파게티

11세기가 지나면서 니폴리에서는 눌린 빵(모레툼;moretum)형태가 좀더 다양해지기 시작했다. 이 기간에 나폴리에서는 빵을 눌러 불에 구운 후에 길게 자른 ”라가노(ragano)” 라고 하는 파스타가 등장하게 되는데(이를 오늘날에는 “스파게티”라고 한다.) 이 명칭은 라틴어의 라가눔, 그리스어의 라가논에서 유래되었다. 프라이팬에 라가노와 콩과 식물 다른 종류의 재료를 함께 넣어 요리했는데, 이것이 탈리아텔레의 기원이 되었다. 과거의 시실리 왕국의 영토였던 지역들에서는, 오늘날에도 탈리아텔레를 지칭하는 말로서 라가넬라 또는 라가나투로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이탈리아에 파스타가 소개된 시기는 대략 11세기로 추측되지만, 역사 연구를 통해 밝혀진 보다 중요한 사실은 일단 소개된 이후 베네치아, 피렌체, 제노바의 무역 활동에서 중요한 상품으로 거래 되었으며 점차 포로로 잡힌 몽골계 또는 타타르족의 하인들을 통해서 이탈리아의 여러 가문의 식탁에 자주 등장했다는 것이다.
중세 말에 이탈리아에서 파스타를 가칭하는 명칭 가운데 가장 보편적인 것은 마카로니로서, 오늘날의 길이가 짧고 둥글며 구멍이 뚫린 원통모양의 마카로니와는 차이가 있다. 이 당시의 마카로니는 어느 정도의 편견이 없지는 않았다. 어쨌든 ‘밀가루와 치즈 와 버터로 만든 투박하고 세련되지 못한 음식’이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스타의 음식문화적인 개념 정의와 소비의 사회적 주체는 아직까지 분명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15세기 까지도 물에 익힌 파스타, 기름에 튀긴 파스타, 소금에 절인 파스타, 단맛의 파스타, 단순하거나 여러 가지 음식 재료 (밀가루에 섞거나 기름에 튀긴 고기와 채소)클 첨가하여 요리한 파스타를 아무런 구분 없이 모두 ’파스타’ 라는 이름으로 불러졌으나, 현대적 의미의 진정한 ‘붉은 파스타 혁명’은 대략 1830년경에 미국 대륙으로부터 토마토가 수입되면서 시작되었다. 이때 이후로 오늘날까지 이탈리아에서는 토마토 소스의 유무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구별되는데 ,버터나 치즈 같은 백색의 재료로만 양념하는 후자의 파스타를 비안코 라고 한다.

 

와인

포도의 이름이 처음 문헌에 등장한 것은 기원전 2100년 고대 바빌로니아의 하무라비 왕이 만든 법전에 보면 포도주의 업(業)에 관한 규정이 적혀있다. 또 나일강 근처에 있는 고대 이집트의 수도 테베에서 발굴(1922년)된 이집트 왕의 분묘 벽화에 포도의 재배, 발효, 지하저장의 모양을 볼 수 있다.
구약성서의 창세기에 보면 “포도주는 포도나무를 심었던 노아의 하사품이기 때문에 고대 이집트의 주신인 오시리스에 의해 얻었다”라고 가리키고 있으며 또한 포도주는 “인간의 마음을 즐겁게 하여주는 반면 인간의 도덕을 속이는 것”이라고 기재되어 있고 그리스도가 포도주를 “젊은 피”라고 이야기한 성서(故事)로부터 그리스도교의 확산에 따라 교회 근처에 포도밭이 생겨나서 양질의 포도주를 만들게 되었다.
그리고“그리스 최고의 포도주는 에게해에 있는 키오스섬에서 생산되는 제품이다”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키오스섬에서 3세기 경부터 포도주를 만들 때 10년에서 15년 정도의 오랜 시간동안 저장 숙성시키는 포도주 제조 방법을 터득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10세기 전후 부터 수도승의 세력이 점점 커짐에 따라 포도밭의 수가 점점 늘어나게 되었는데 그 당시 독일에 포도가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1106년에 베네딕트파의 수도사가 Johanesberg에 포도밭을 만든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1131년에는 Rhein 지역의 Eperbach의 수도사가 Steinferg에 대단위 포도원을 만들었으며, 프랑스에서는 1152년 Bordeaux 지방의 공주인 Eleanore가 Henry 2세와 결혼했을 때, 프랑스 서쪽의 포도산지 중 1/2가량이 영국왕실의 소유가 되고 나서부터, 영국이 프랑스 와인의 최대 시장이 되었다고 한다.
13세기에는 영국인들이 보르도(Bordeaux)의 레드와인(Vin Rouge)을 “크라렛”이라고 부르며 즐겨 마셨다. 그러나 영불전쟁이 영국의 패배로 끝난 이후에는 영국은 프랑스가 아닌 스페인에서 수입하게끔 되었으나 그 후 스페인의 왕가 또한 프랑스의 Bourbon 왕가와 결연을 맺게 되어 공동으로 영국에 대항했다. 이로 인해 영국은 포르투갈과 “메수엔조약(Methuen-Treaty)"을 맺어 포트(Port)와인을 본격적으로 수입하였으나, 와인의 질이 프랑스산에 비해 떨어져 인기를 얻지 못했다.
이후 영국의 식민지인 남아프리카와 호주에 대량의 포도나무를 심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현재 약 50여개 국에서 생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