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중국어 사전에도 없는 ‘논 답(畓)’자의 정체는?
4개의 순수비 중 하나인 경남의 창녕비. 현재 비석의 탁본은 보호를 위해 엄격히 통제되고 있다. 제작진은 첨단 탁본 기술을 사용, 판독을 시도했는데 그 중에서 주목할 만한 글자를 발견했다. 흔히 논 답으로 읽는 ‘畓’이란 한자. 이는 현재 사용되는 중국어 사전에도 없는 글자다. 그렇다면 이 한자는 진흥왕 시기, 중국과는 별개로 독자적으로 만들어진 것인가? 일제 시대, 소풍 간 학생들이 창녕의 화왕산 골짜기에서 발견한 것을 일본인 교장이 자신이 발견한 것으로 둔갑시켜 오늘에 이르고 있는 창녕비, 비문에 남겨진 의문의 글자는 무엇을 뜻하는가?
2. 100년 동맹을 깨고 백제를 배신한 진흥왕 신라 고구려 밀약설, 순수비에 그 비밀이 있다!!!
진흥왕 당시 신라와 백제는 100여년에 걸친 나제동맹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두 나라가 힘을 합해 당시 동아시아 최강국인 고구려의 남하를 저지해 온 것이다. 551년에는 한강 유역을 나누어 차지하기도 했다. 그런데 2년이 채 지나지 않아 신라는 그 동맹을 깨고 백제의 한강 유역을 차지해 버린다. 뿐만 아니라 진흥왕은 신라의 강역을 고구려 땅까지 넓혔다. 갑작스런 신라의 변화는 무엇에 기인하는가? 학자들은 신라와 고구려의 밀약설을 제기하는데... 황초령 비문과 문헌 기록을 통해 파헤쳐 본다. 백년 나제동맹을 하루아침에 깨어버린 밀약은 무엇이었나?
3. 진흥왕이 ‘가야 괴뢰정권’을 세운 까닭은?
진흥왕 시대에 새워진 또 하나의 비 ‘단양적성비’에는 정복지 유민인 고구려인의 공을 치하하고 포상하는 내용을 주로 담고 있다. 또한 ‘도설지’라는 인물도 등장하는데, 이 이름은 10년 후 세워진 창녕비에도 새겨져 있다. 게다가 도설지의 벼슬은 10년 사이에 두 단계나 높아져 있었다. 도설지는 신라의 대가야 정복, 그 후 대가야의 왕으로 봉해진다. 신라에 의한 대가야지역 - 괴뢰정권의 왕, 도설지는 누구인가? 진흥왕의 정복지 정책이 얼마나 철저히 계획되어 있는가를 도설지의 행적을 추적해 밝혀본다.
4. 귀족관료 39명을 대동한 순수비 건립 행사 정치적 이벤트, 숨겨진 의도는 무엇인가?
창녕비에는 숱한 관료들의 이름이 나온다. 당시 신라 귀족 관료들의 이름만도 무려 39명, 그 중에는 진흥왕 때 국사를 편찬한 거칠부, 김유신 장군의 할아버지인 김무력 등 낯익은 인물도 있다. 이들은 당시 신라를 이끌던 핵심 인물. 진흥왕은 39명의 왕경 귀족들을 창녕까지 데려온 것이다. 진흥왕은 왜 순수비 건립에 이렇게 공을 들였던 것일까? 단순히 영역 표기만을 위한 것인가?
인도의 전설적인 정복왕 아소카와 동일시했던 진흥왕. 순수비를 국토 곳곳에 세운 진짜 이유를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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