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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698년부터 926년까지 건국과 성쇠

영지니 2010. 4. 15. 09:43
발해(渤海)
698년부터 926년까지 존속했던 왕조 국가. 남쪽의 신라와 함께 남북국 시대를 이루었다.
 
건국과 성쇠
 
[건국]
 
고구려가 멸망한 지 30년 가까이 지난 696년에 요서 지방(遼西地方)에서 거란족 이진충(李盡忠)의 난이 일어났다. 이 난은 발해의 건국에 절호의 기회로 작용했는데, 이는 당제국 내에서 당시 요서의 영주(營州 : 지금의 朝陽)가 지니고 있었던 군사·외교상의 지정학적 가치가 높았던 데 기인한다 하겠다. 요서는 일찍이 중국 전국시대 연(燕)나라 장수 진개(秦開)가 개척한 이후, 동북과 서북에서 남하하는 비한족(非漢族) 세력을 막는 군사적·외교적 요충지였다. 그리고 고구려의 팽창정책에 밀려, 송화강 유역에 거주하던 속말말갈(粟末靺鞨)의 추장 돌지계(突地稽)가 무리를 이끌고 들어와 수에서 당에 이르는 시기 동안 보호를 받았던 곳도 바로 요서군 내의 영주였다.
 
당나라는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그 지배집단을 강제로 분산시켜 세력을 거세하는, 이른바 사민정책(徙民政策)을 강행하였다. 그 과정에서 이 영주에도 고구려 유민의 일부를 강제로 이주시켰다. 이것은 역대 한족 국가에서의 전례나 지리적인 위치로 보아 당연한 일이었다. 이 무렵 투르크(Turk)족의 돌궐(突厥)은 고비(Gobi)사막 남쪽에서 세력을 떨치고 동남으로 세력을 뻗치려 하고 있었다. 한편 거란족은 동쪽의 고구려 세력에 시달리며 시라무렌(Sira muren) 유역을 방황하던 중 고종 이후 영주 부근에서 당나라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거란족 추장 이진충은 당나라로부터 송막도호(松漠都護)로, 손만영(孫萬榮)은 귀성주자사(歸誠州刺史)의 직함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영주도독(營州都督) 조홰(趙窯)의 잔인함과 거란족에 대한 지나친 우월감에 반발해, 696년 5월 그를 죽인 뒤 무리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 해 10월 이진충이 죽자, 손만영은 무리를 이끌고 이듬 해 3월 하북(河北)의 영평(永平) 부근에서 왕효걸(王孝傑)이 지휘하는 당군을 무찔렀다. 그리고 그 기세를 몰아 유주(幽州 : 지금의 北京)까지 공격하였다. 이 반란은 당나라가 돌궐의 힘을 빌려서야 발발 1년 만에 겨우 수습할 수 있었다. 당시 영주 부근에서 당나라의 보호와 감시를 받고 있던 이민족에게 이 난이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 약소 부족의 주체 의식을 깨우쳐 주었던 것이다.
 
고구려 출신인 걸걸중상(乞乞仲象)이 말갈족의 지도자 걸사비우(乞四比羽)와 더불어 무리를 이끌고 당나라에 반기를 들게 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들은 일시적으로 거란족의 반란에 동조까지 하던 세력으로, 영주를 탈출한 뒤 요하(遼河)를 건너 요동 지방에서 세력을 키우기 시작하였다. 반란 초기에 측천무후걸걸중상을 진국공(震國公), 걸사비우를 허국공(許國公)에 봉하고 그 죄를 용서하는 등의 회유책을 썼다. 그러나 회유책이 실패하자, 거란족 출신인 이해고(李楷固)를 당군의 지휘관으로 삼아 그들을 공격하게 하였다.
 
이해고의 당군은 먼저 걸사비우를 참살하였다. 그리고 걸걸중상이 죽자 그 뒤를 이은 대조영(大祚榮)을 공격하였다. 이 때 대조영은 통솔자를 잃은 걸사비우의 말갈병까지도 흡수한 뒤 천문령(天門嶺)을 넘어 피신하였다. 천문령은 휘발하(輝發河)와 혼하(渾河)의 분수령을 이루는 장령자(長嶺子) 부근이었다. 대조영은 이 곳을 넘어 추격해 오는 당나라 군대에 반격을 가해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그리고 지금의 길림성(吉林省) 돈화시(敦化市)에 있는 성산자산성(城山子山城)으로 옮겨와 산성을 쌓았다. 이 곳이 바로 문헌에 나오는 동모산(東牟山)이다.
 
대조영은 여기서 698년 나라를 세워 스스로 진국왕(振國王)을 자처하였다. 마침 거란과 해족(奚族)이 당나라의 요서에까지 진출함으로써 당나라와의 통로가 막힌 것도 건국에 아주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하였다. 당나라는 이를 무력으로 저지할 여유가 없었으므로, 이미 기정사실화된 대조영의 건국을 무턱대고 적대시할 수만은 없었다. 이에 중종(中宗)이 복위한 705년 시어사(侍御史) 장행급(張行肱)을 보내어 화친을 요청하였다.
 
결국 양국간에 화해가 성립되면서 대조영의 둘째 아들 대문예(大門藝)가 당나라의 수도로 들어갔다. 당나라에서는 대조영을 곧 왕으로 책봉하려 하였다. 그러나 마침 거란과 돌궐의 침략이 잦아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713년 예종(睿宗) 때 뒷날 발해의 조공도(朝貢道)가 된 해로를 통해 홍려경(鴻豈卿) 최흔(崔誤)을 보내 대조영을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봉하였다. 이로부터 진국(振國) 대신 발해국이라 국명이 쓰이게 되었다.
 
이 때 대조영의 아들 대무예(大武藝)를 계루군왕(桂婁郡王)으로 봉하였다. 뒷날 대문예의 아들 대도리행(大都利行)에게도 계루군왕의 봉호를 이어받게 하였다. 이는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하고 있음을 당나라도 인정하고 있었다는 표시로 보인다. 계루란 말은 고구려 계루부의 명칭에서 유래한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발전]
 
대조영의 치적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그가 진국을 세우자 신라가 제5품 대아찬(大阿餐)의 벼슬을 주었다 한다. 또한 내몽고에서는 당나라의 요서군에까지 세력을 미치고 있던 돌궐의 추장 묵철(默輸)과 서로 통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대조영은 신라 및 돌궐과 가까이하면서 당나라와는 긴장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711년 묵철이 당과 화친을 맺고 그 뒤에 점차 세력이 와해되어 나가자, 당나라와 평화적 관계를 수립하는 방향으로 선회하였다.
 
이 무렵 발해의 영역은 동모산을 중심으로 한 돈화 일대에 불과하였다. 이를 훗날 구국(舊國)이라 불렀다. 719년(개원 7) 대조영(고왕)이 승하하고 맏아들 대무예(大武藝), 즉 무왕(武王)이 즉위하였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인안(仁安)이란 연호를 사용하고 국내외에 독립국가로서의 자세를 분명히 하였다. 또한, 영토를 확장하는 데에도 전력을 기울였다. 그의 시호가 무왕인 것도 생전에 무력정벌에 커다란 업적을 남겼음을 의미한다.
 
신당서≫ 발해전에 따르면, “무예가 즉위해 크게 영토를 개척하자, 동북의 여러 오랑캐가 두려워서 신하로 복속하였다.”고 전한다. 또한 727년에는 처음으로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무왕은 일본에 보내는 국서(國書)에 “욕되게 열국(列國) 사이에 끼여들고 외람되게 여러 번국(藩國)들을 결속시켜,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 부여의 풍속을 계승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이 무렵 발해가 고구려와 부여의 영역을 상당히 회복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한편 발해는 동북쪽의 흑수말갈(黑水靺鞨) 문제를 둘러싸고 당나라와 대립하였다. 이는 발해가 당의 종속국이 아니고 당당한 독립왕국으로서 자리를 굳히고 있음을 보여준다. 문제의 발단은 흑룡강 유역에 있던 흑수말갈이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면서 비롯되었다. 당 현종은 이들 지역을 당나라의 영토로 간주해 흑수주로 삼고 통치관인 장사(長史)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발해에서는 당나라의 이러한 조치가 강국의 감시를 받는 결과를 가져올 것으로 판단하였다.
 
이에 무왕은 726년에 아우 대문예 등을 시켜 흑수주를 무력으로 정벌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볼모로 당나라에 갔다가 개원(開元) 초기에 돌아온 대문예(大門藝)는, 무모한 흑수 토벌이 국세로 보아 자칫하면 자멸을 초래할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하였다. 그러나 무왕이 뜻을 꺾지 않자 대문예는 할 수 없이 흑수부로 진격을 개시하였다. 국경선에 이르러 그는 다시 한 번 토벌의 철회를 간하였다. 이에 노한 무왕은 종형인 대일하(大壹夏)를 보내어 군의 통솔을 대행시키고 대문예를 소환해 살해하려 하였다.
 
이에 대문예는 당나라로 망명해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의 벼슬까지 받았다. 그의 송환교섭을 둘러싸고 당나라와 발해 간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732년 무왕은 장군 장문휴(張文休)에게 산동반도의 등주(登州)를 공격하도록 명하였다. 그 결과 자사(刺史) 위준(韋俊)을 살해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이에 당나라는 대문예를 유주로 보내 군대를 징집해 발해를 치게 하였다. 그런 한편으로 대복원외경(大僕員外卿) 김사란(金思蘭)을 신라로 보내 733년(성덕왕 32)에 발해의 남쪽 국경지대를 공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신라 원병은 큰 추위와 눈을 만나 병사들이 반 이상이나 동사하면서 아무런 소득 없이 군대를 되돌렸다. 그 뒤로도 무왕은 자객을 보내 대문예를 죽이려 하는 등 간접적인 항쟁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사태가 더 확대되지는 않았다. 무왕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인 계루군왕 대흠무(大欽茂), 즉 문왕(文王)이 즉위하였다. 그는 왕이 되자마자 대흥(大興)으로 연호를 바꾸고, 774년에 보력(寶曆)으로 개원하였다. 무왕의 무력에 의존한 것과는 달리 문왕은 내치에 힘을 기울였다.
 
따라서 대외 관계에서는 평화 외교 정책을 취하였다. 그는 당나라에 빈번히 사신을 파견해 화평과 함께 관무역의 이득을 꾀하였다. 이와 함께 동해의 해로를 통해 일본에도 자주 사신을 보냈다. 그리고 신라와도 본격적으로 교류를 하기 시작하였다. 신라와의 상설 교통로인 신라도(新羅道)는 대체로 그의 통치 전반기에 설치되었던 듯하다.
 
특히 문왕대에 특기할 사실은 잦은 천도이다. 대조영 이래로 발해의 수도였던 이른바 ‘구국’에서 현주(縣州)로 천도하였다. 그리고 756년 무렵에는 상경(上京)으로 천도한 뒤 다시 780년대 후반에 동경(東京)으로 천도하였다. ‘구국’에서 처음 천도한 중경(현주)은 두만강 하류로 흘러들어 가는 해란하(海蘭河) 강변에 위치한, 현재의 길림성 화룡현(和龍縣) 서고성(西古城)에 있었다. 발해시대에 이 지역은 ‘위성(位城)의 철(鐵)’, ‘노성(盧城)의 벼〔稻〕’ 등의 산출로 이름난 산업지대였다.
 
문왕이 중경에서 다시 천도해 온 상경은 목단강(牡丹江) 유역에 자리잡은, 지금의 흑룡강성 영안현 동경성 발해진(寧安縣東京城渤海鎭)이다. 이것은 국력신장 결과 흑수말갈의 위압에 대해 자신을 가지고 실시한 북방 천도라 보아도 무방할 듯싶다. 한편, 그 다음에 천도한 동경은 두만강 연안에 있는 길림성 훈춘시 팔련성(琿春市八連城)인 것이 판명되었다. 이 곳은 발해 사신이 일본으로 가는 출발지이기도 하였다. 이처럼 잦은 천도를 통해 문왕이 대내외적인 국가통치에 내실을 기하고자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문왕은 내부적으로 문치(文治)를 시행해 당나라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유학과 불교를 진작시켰다. 그리고 국력의 신장과 왕권강화에 힘을 기울였다. 이를 바탕으로 고려국(高麗國)을 표방하였다. 그리고 유신(維新)을 단행하는 한편, 불교의 전륜성왕(轉輪聖王) 이념을 채택하였다. 또한, 일본에 대해서도 스스로 천손(天孫)임을 표방하였다. 그래서 내부적으로 황상(皇上)이나 조(詔)와 같이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용어들을 쓰기도 하였다. 당나라가 762년 문왕을 발해군왕(渤海郡王)에서 발해국왕(渤海國王)으로 올려 책봉한 것은 비록 형식적인 것이나 발해의 충실한 국력신장을 반영한 것이다.
 
[내분]
 
독립 국가로서의 기틀을 완전히 굳힌 문왕이 승하하자, 왕위는 친척인 대원의(大元義)에게 이어졌다. 문왕의 장남 대굉림(大宏臨)이 아버지보다 먼저 죽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원의는 성격이 포악해 귀족들에게 시해되었다. 그 뒤 제5대 왕위를 계승한 것은 대굉림의 아들 대화여(大華璵), 즉 성왕(成王)이다. 성왕은 수도를 동경에서 상경으로 옮긴 뒤 곧 승하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793년에서 794년에 걸쳐 1년 간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성왕의 뒤를 계승해 제6대 왕으로 대흠무(大欽茂)의 어린 아들 대숭린(大嵩璘), 즉 강왕(康王)이 즉위하였다. 그는 정력(正曆)으로 건원하였다. 당에서는 795년 2월 대숭린을 발해군왕으로 낮추어 책봉하더니 다시 3년 뒤에 발해국왕으로 높여 책봉하였다. 이는 문왕 대흠무가 죽은 뒤 발해의 국세가 약해진 것을 당나라에서 감지한 결과로 보인다. 재위는 809년까지 15년 간이었다. 강왕의 뒤를 이어 왕위를 이어받은 것은 그의 아들 정왕(定王) 대원유(大元瑜)였다. 그는 영덕(永德)이란 연호를 사용하였다.
 
812년에는 다시 그의 아우 대언의(大言義)가 제8대 왕 희왕(僖王)이 되었다. 그는 817년 무렵까지 재위하였다. 제9대 왕으로 즉위한 희왕의 아우 대명충(大明忠), 즉 간왕(簡王)은 태시(太始)로 개원하였다. 그러나 즉위 직후인 818년에 승하하였다. 제10대 왕을 계승한 것이 대인수(大仁秀), 즉 선왕(宣王)이다. 이상과 같이 문왕이 사망한 뒤로부터 선왕이 즉위하기 전까지 25년 간 6명의 왕이 즉위했던 사실은 이 때가 내분이 잦았던 시기임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특히, 강왕이 즉위한 뒤에 스스로 “구차히 연명하다가 왕위에 오르니 신하들이 의로움에 감복해 뜻을 바꾸고 감정을 억제하였다.”고 한 것은 이러한 사정을 잘 보여 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융성]
 
818년 선왕이 즉위하자 내분이 진정되면서 발해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 들었다. 연호를 건흥(建興)으로 고쳤으며, 침체기를 벗어나 중흥을 이룩하였다. 선왕은 고왕 대조영의 아우인 대야발(大野勃)의 4세손으로, 이로부터 왕의 계보가 바뀌었다. ≪신당서≫ 발해전에는 선왕의 치적에 관해 “인수는 자못 해북(海北)의 여러 부족을 토벌해 크게 영토를 개척하였다.”고 찬양하였다. 이 때 발해는 흑룡강(黑龍江) 유역까지 경략한 것으로 보인다.
 
흑수말갈이 당나라 목종(穆宗) 이후 당에 대한 조공을 끊은 것은 선왕의 영토개척에 따라 그 통로가 끊겼거나, 아니면 발해국의 국력에 크게 위협받은 결과로 보인다. 또한 발해는 요동 지방과 신라 방면으로도 정복활동을 벌여 영토를 확장하였다. 그리고 ‘5경 15부(府) 62주(州)’의 지방 행정제도도 선왕대에 비로소 완비되었다. 처음에 ‘사방 2천리’였다는 영토가 이 무렵에 ‘사방 5천리’라고 한 것은 바로 선왕이 영토를 크게 개척한 전성기의 상황을 이르는 말이다.
 
830년 선왕이 승하하자, 아들 대신덕(大新德)이 일찍 죽은 탓에 손자 대이진(大彛震)이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그는 연호를 함화(咸和)로 바꾸었다. 그는 857년에 승하했으나 시호는 알 수 없다. 대이진을 이어 제12대왕으로는 그의 아우 대건황(大虔晃)이, 그리고 제13대왕으로는 대건황의 손자 대현석(大玄錫)이 즉위하였다. 선왕에서 비롯해 이 무렵에 이르는 시기가 발해의 최대 전성기였다.
이 때 당나라로부터 해동성국(海東盛國)이란 명예로운 칭호를 얻었다. 그러나 이 시기는 중국이 혼란기에 속해 있던 때라, 안타깝게도 발해의 융성했던 모습을 보여 주는 사료가 그 쪽에서도 제대로 전해지지 않는 현실이다.
 
심지어, 제11대 왕부터 마지막 왕까지의 시호도 전혀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리고 제13대 왕과 제14대 왕의 사망 연도조차 알 수 없다. 다만 897년 당나라 조정에서 신라와 쟁장사건(爭長事件)이 일어났을 때에, 국력의 우위를 들어 발해 사신이 신라보다 윗자리에 앉기를 요구했던 일이 있었다. 이것으로 미루어보아, 발해의 국력이 절정기에 달했음을 알 수 있다.
 
대현석왕에 이어 제14대 왕으로 그의 아들 대위해(大瑋易)가 즉위하였다. 이 왕의 재위사실은 김육불(金毓慮)이 ≪당회요 唐會要≫에서 찾아내 비로소 밝혀졌다. 대위해에 이어 마지막 왕인 대인선(大孚侖)에게 왕위가 이어졌다.
 
[멸망]
 
10세기 전반 중국과 한반도가 혼란에 빠지면서 이를 틈타 성장을 거듭하고 있었던 것은 열하(熱河) 북쪽의 거란족이었다. 발해는 건국 초기부터 거란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발해가 건국된 것도 이진충의 난이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난이 평정되고 난 뒤에도 거란의 향배에 따라 관계가 수시로 바뀌었다. 거란은 당나라와 돌궐의 대결 틈바구니에서 그때그때 입장을 달리하였다.
 
720년 9월 당나라가 장월(張越)을 파견해 공동으로 해족과 거란을 치자고 제의한 바 있다. 그런 한편 732년에는 반대로 거란 가돌간(可突干)과 공모해 당나라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3년쯤 뒤에는 돌궐이 사신을 보내와 해족과 거란을 치자고 했지만, 오히려 돌궐 사신을 억류하고 이 사실을 당나라에 알렸다. 이후 거란과의 교섭 내용은 구체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신당서≫ 발해전에는 서쪽으로 거란과 접했고, 부여부(扶餘府)는 거란으로 가는 길목이면서 거란을 막기 위해 군대를 주둔시켜 두던 곳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이로 보아서 거란은 발해의 교섭대상국이면서도 대결관계에 있었다.
 
그러다가 10세기 초에 이르러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거란족의 숙원이었던 부족의 통합을 이루었다. 그리고 중국 본토 진출에 앞서 먼저 발해 경략에 나섰다. 925년 12월 야율아보기가 이끄는 거란군이 발해를 공격하였다. 이듬 해 정월에는 거란 방비의 최전선에 있던 부여성(扶餘城 : 현재의 農安)을 뚫고 수도인 상경용천부를 포위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정월 14일 대인선의 항복을 받아내었다. 이로써 고왕 대조영으로부터 15대 230년 간 이어져 오던 발해가 하루아침에 망국의 쓰라림을 겪게 되었다.
 
[유민 활동]
 
거란은 발해를 멸망시키고 그 자리에 ‘동쪽 거란국’이란 의미의 동단국(東丹國)을 세웠다. 그리고 거란 태조의 맏아들에게 통치를 맡겼다. 928년 동단국을 동평(東平 : 현재의 遼陽)으로 옮기면서 발해 유민들도 요동 지방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발해가 멸망한 후 발해 유민들은 각지에서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주요한 것으로 멸망 직후 서경압록부(西京鴨濫府)에서 일어난 대씨(大氏)의 후발해국(後渤海國, 926∼?)과 뒤를 이어 등장한 열씨(烈氏)와 오씨(烏氏)의 정안국(定安國, ?∼980년대?)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부여부(扶餘府)와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에서 일어난 오사국(烏舍國), 거란의 동경도(東京道)에서 일어난 대연림(大延琳)의 흥료국(興遼國, 1029∼1030)과 고영창(高永昌)의 대발해국(大渤海國, 1116), 거란 상경(上京) 부근에서 활약한 고욕(古欲)의 저항(1115) 등이 있다. 이렇게 유민의 저항은 멸망 후 200여 년이 지난 뒤에까지 지속되었다. 유민 중에는 이처럼 항거한 부류뿐 아니라 지배계층에 참여한 부류도 있었다. 그리고 거란과는 반독립적인 세력을 유지하면서 점차 여진족(女眞族)으로 변화해 간 부류가 있었다.
 
그런가 하면 고려로 망명했던 부류들도 있었다. 특히, 멸망 전후부터 시작해 1117년에 이르기까지 30여 차례에 걸쳐 수만 명의 사람들이 고려로 망명해 옴으로써, 한국사의 흐름에 동참하게 되었다. 지금의 태(太)씨들은 바로 이 때 망명해 온 발해 왕실인 대씨(大)씨의 후예들이다.
발해의 성립과 발전
발해의 성립과 정치·사회
 
고구려 유민의 항쟁으로 당은 신성(新城)까지 후퇴해 있었으나 신라의 영토확장은 대체적으로 평양 이남에 국한되어 있었다. 따라서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에 웅혼하고 있던 고구려의 옛 땅은 고구려 유민이 주축이 된 발해에 의해서 계승되었다.
 
고구려의 멸망과 함께 당에 의해 영주 지방으로 강제 이주되었던 고구려 유민은 송막도호(松漠都護) 이진충의 반란을(696) 틈타, 대조영(大祚榮)의 군사적 지휘하에 뭉쳐 고구려의 피지배유민이었던 말갈인을 규합하여 동주의 기회를 포착할 수 있었다. 이 때 고구려 구장(舊將) 출신인 대조영은 당의 측천무후(則天武后)가 보낸 이해고의 추격을 뿌리치고 천문령을 넘어 건국의 지리적 조건이 완비된 [계루고지(桂婁故地)]인 동모산(東牟山) 서고성자 부근을 거점으로 진국(震國)을 건설하였다(698). 물론 당이 이를 인정할 리는 만무하였다.
 
그러함에도 발해는 스스로 군이 아닌 국이라 자처했고, 독자적 연호도 쓰고 있었는가 하면 돌궐과 신라 등에 사신을 파견하여 적극적인 외교활동도 폈다. 이에 당은 705년 그들의 시어사(侍御史) 장행급을 발해에 파견하여 관계 개선을 도모하는 태도를 보였고, 발해는 고왕(高王, 대조영) 천통16년(731)에는 국호를 진(震)에서 발해로 고치었고, 대조영과 그의 아들 대흠무는 당왕조로부터 각각 발해군왕·계루군왕(桂婁郡王)의 칭호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군왕호칭은 중국중심의 역사관에서 생각할 수 있는 당왕실의 일방적인 것이었고 발해왕실의 태도는 처음부터 국왕을 고수하는 것이었다.
 
고왕의 뒤를 이은 무왕(武王)은 통치체제를 정비하고 등주(登州)를 공략하는(732) 등 영토확장에 주력하였다. 이에 대동강 이북으로의 진출이 좌절된 신라는 장성을 쌓아(721) 발해의 남하에 대비하는 한편 당과 연합하여 발해를 공격하다 실패하였다(733). 이를 기반으로 문왕(文王)은 소고구려국을 병합하여 요동까지 진출하고 흑수말갈(黑水靺鞨) 등 외세의 위압에 대한 자신감과 높아진 국제적 지위를 바탕으로 국도를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로 천도했다(785).
 
그 후 성왕원년(成王元年, 794)에 상경으로 환도한 발해는 선왕대(宣王代)에 전국을 5경·15부·62주로 정비하면서 국세를 크게 떨쳐 해동성국(海東盛國)의 칭호를 듣게까지 되었다. 그러나 발해는 그들 자신이 남긴 기록이 없고 {삼국사기}의 서술대상에서도 제외됨으로 인해, 중국과 대등하게 독자적으로 연호를 사용하며 왕위의 장자상속제(부왕제, 副王制)가 확립되어 있었다는 정도 이외에는 왕권의 자세한 실상 파악이 곤란하다.
 
한편 중앙 정치 기구를 살펴보면, 발해는 당제의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고구려의 전통을 계승하며 자신의 필요성에 따라 독자적 정치제도를 운영했음을 알 수 있다. 주요 관부인 3성(省)은 국가의 정령(政令)을 입안·심의하는 기능을 맡은 선조성(宣詔省)과 중대성(中臺省) 및 그 상위에서 정령을 집행하는 정당성(政堂省)으로 이루어져 각각 좌상(左相)·우상(右相)·대내상(大內相)이 관장하였다. 이 정당성 예하에 실무를 분장(分掌)하는 충(忠)·인(仁)·의(義)·지(智)·예(禮)·신(信)부가 있어 각기 당의 이(吏)·호(戶)·예(禮)·병(兵)·형(刑)·공(工)부에 해당되는 업무를 담당했다. 이처럼 유교의 덕목을 나타내는 어휘를 사용한 6부의 이름이나, 부왕제(副王制), 3성 중 정당성의 우위 등에서 왕권 전제성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이 외에 중앙의 주요 관부로는 관리의 비위를 감찰하는 중정대(中正臺), 왕실의 복어(服御)를 담당하는 전중시(殿中寺), 왕친의 적(籍)을 관장했을 종속시(宗屬寺) 등이 있어 3성(省)·6부(府)·1대(臺)·7시(寺)·1원(院)·1감(監)·1국(局)으로 편제되어 있었으며 색복에 따른 9품계가 설정되어 있었다.
 
지방의 경우는 사방 5천리에 이르는 강역을 잘 정비된 교통망을 바탕으로 5경·15부·62주와 300여 군 현으로 편제하였다. 부여의 4출도(出道)나 고구려의 5부 또는 신라의 5경을 연상케 하는 발해의 5경(상경·중경 동경·남경·서경)은 15부와 함께 지방행정에 있어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는 곳이었다. 일정 단위의 종족이 거주하던 고지(故地)를 단위로 하여 설정된 15부는 행정계통의 중추로서, 그 중 중요한 곳이 5京으로 되며 외국과의 주요 교통로인 5도(道)(日本·新羅·朝貢·營州·契丹道)를 포함하고 있었다. 부의 장관인 도독은 주의 장관인 자사(刺史)를 직접 관장하며 중앙정부의 명을 받들었다. 물론 중앙에 직속된 독주주(獨奏州)도 있었으나, 기본적으로 도독은 지방행정의 중추로서 주·군·현의 상급 지휘계통으로 존재했던 것이다. 또 가장 말단의 행정단위이며 수령에 의해 통치되는 촌락도 부(府) 예하의 명령계통에 속해 있었다.
 
발해의 군사 조직에 대해서는 10위 또는 8위로 생각되는 중앙군과, 수령을 지휘관으로 하는 촌락단위의 지방군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측되나 그 자세한 실상은 밝혀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수난받는 발해사
 
발해사가 우리 역사 속에 떳떳하게 자리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는 아직도 논의의 대상거리이다. 왜냐하면 발해사의 한국사적 정통성에 대한 회의적 견해들이 국내외 사학계에 상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러한 점을 고려해서 발해사 연구의 과거와 현재를 더듬어 보고, 발해사가 우리 역사 속에서 차지해야 할 현주소를 재점검해 보고자 한다.
 
발해사가 우리 역사 속에 크게 부각되었던 시기는 조선후기부터라 할 수 있다. 유득공(1749∼?)은 그의 {발해고(渤海考)}(1784) 서문(序文)에서 신라와 발해를 [남북국(南北國)]이라 서술함으로써 [삼국시대]에 이어 [남북국시대]를 우리 역사상에 설정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는 신라가 발해를 [북국]이라 하였던 데에서 유래한 것으로 근거있는 주장이었다. 발해에 관한 기록은 고려시대에도 {삼국유사}나 {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 찾아 볼 수 있으나, 전자는 중국의 {통전(通典)}을 옮겨 놓은 것이고 후자는 매우 소략했다. 그러나 조선시대 도가류의 {규원사화(揆園史話)}는 발해유민이 고려에서 썼다는 {진성유기(震城遺記)}와 같은 발해에 관한 전문 역사서도 있었던 것으로 전하고 있으나 현존하지 않고 있다. 다만 {규원사화}의 내용중에 그 부분이 인용되어 발해사의 한국사적 요소들을 확인할 수 있다.
 
정사류의 사서들이 발해를 무시하여 왔던 것은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조선후기 주체적 역사의식이 높았던 실학자들은 이를 놓치지 않고 우리 역사 속에 발해를 적극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유득공에 이어 한치윤·한진서가 이를 적극적으로 다루었는가 하면, 정약용도 그의 {아방강역고(我邦疆城考)}에 [발해고(渤海考)]와 [발해속고(渤海續考)]를 서술했다.
 
그러나 일제의 한국강점기에 이르러서 발해사는 수난을 받기 시작했다. 발해사가 왜곡된 만선사관(滿鮮史觀) 하에서 취급되어 만주사의 일부로 간주되었고, 심지어 고구려사도 만주사의 영역에서 다루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하였다. 이러한 시각에서 발해사는 [통일신라]의 단일정통이론에 가리어 우리 역사에서는 끼지도 못하였다. 그러했음에도 일제관학자들과는 달리 한국고대사의 정통 계승을 신라와 발해의 남북국으로 보고 발해사의 서술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있었음을 기억한다. 신채호의 {독사신론(讀史新論)}(1908)이 그러했고 장도빈의 {국사(國史)}(1916), 권덕규의 {조선유기(朝鮮留記)"(1924)가 그러했다. 특히 장도빈과 권덕규는 신라와 발해를 각각 [남북국]과 [남북조]로 시대를 구분하여 유득공의 뜻을 따랐다.
 
이후 한국사학에서의 발해사는 해방직후까지도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했다. 오직 만선사관(滿鮮史觀) 하에서 이루어진 연구 성과만이 눈에 띨 정도였다. 그러다가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남·북한 사학계를 중심으로 발해사에 대한 인식이 다시 새롭게 부각되었으며, 기존의 시각에 대한 반성도 나타났고 1970년대에는 본격적 연구가 시작되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는 신라사나 다른 연구분야에 비해 초보적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발해사의 연구 동향을 살필 때 중국과 소련의 그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국이 발해를 당 문화의 연장선상에서 보려는 시각으로 일관하고 있는데 비해, 소련은 발해를 중국과 별개의 독립국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렇다고 소련이 우리와 같이 발해를 고구려의 계승국으로 보고 있지도 않다. 발해는 당이나 고구려의 연장이 아닌 토착적 독자성을 지닌 독립국이었다고 하여 발해사가 중국사나 한국사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음을 강조한다.
 
중·소의 이러한 주장들은 현대사의 이해관계에서 설명할 수 있으나 한국사의 주인공인 우리들로서는 이 점을 깊이 반성할 필요가 있다. 왜 발해가 우리 역사에서 이렇게 수난을 받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 이유의 첫째는, 발해인이나 그 유민들에 의해 쓰여진 기록이 어떠한 것도 전해오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있다고 해야 중국의 {구당서(舊唐書)}나 {신당서(新唐書)}의 한모퉁이 기록이 발해의 정사로 인용될 뿐이어서 그 실상을 파악하는 데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둘째는, 한국사학사의 입장에서 볼 때 한국사의 전개가 주로 신라중심적이었다는 것이다. 고려의 {삼국사기}에 발해의 기록이 빠진 것을 필두로 그 이후의 정사들이 모두 발해를 무시해 왔던 사실은 잘 알려진 바다. 물론 이렇게 된 원인은 신라와 발해가 200여 년 간에 걸쳐 대결하는 가운데 대립 현상의 고착이 이루어졌고, 발해가 이민족인 거란에 망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들은 결국 일제 관학자들이 만선사관하에서 발해사를 취급하게 만든 허점이 되었고, 중국과 소련 역시 그들의 입장에서 발해사를 서술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특히 하야시의 {조선통사(朝鮮通史)}(1912)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는 신라의 [삼국통일]이라는 용어는 우리 역사 속에서 발해사의 정통성을 크게 손상시키기도 하였다. 고구려·백제를 '통일'한 신라가 있는데 어찌 다시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가 같은 시기에 병존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라는 논리이다.
 
그러면 발해가 한국사의 일부라고 주장하는 근거들은 무엇인가? 이 점 역시 다시 한번 확인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우선 발해의 영역이 고구려의 그것을 대부분 계승하였고, 그 주민들 역시 고구려의 후손들이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비록 왕실의 역사는 단절되었다 할지라도, 주민의 역사는 살아있었다는 것이다. 왕실에 있어서도, 고구려왕실 붕괴(668)후 30년만에 세워진 발해왕실이었지만 그들 스스로는 고구려 계승국임을 자처하고 있었다. 이 사실은 788년 발해의 문왕이 일본에 보낸 외교문서에 [고(구)려국왕대흥무언(高(句)麗國王大欽茂言)]이라고 하였다든지, 성씨가 밝혀진 32명의 일본파견 사신들 중에서 26명이나 고구려의 고씨였다는 점에서 확인되었다. 따라서 우리 역사에서 발해가 신라와 같은 위치에서 언급될 수 있음은 당연하다.
 
그런데 발해사를 언급함에 있어 자주 논란이 되는 것은 말갈의 문제이다. 이는 발해의 주민구성을 [지배계층은 고구려유민이고 피지배계층은 말갈]이었다고 하는 데에서 나온 것이다. 이 해석만으로서는 발해가 말갈의 역사이지 고구려유민의 역사라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역사의 주인공이란 다수의 피지배계층이 중심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말갈을 고구려 유민으로 보지 않는다면, 분명 발해는 말갈사 내지 만주사의 입장에서 취급될 일이다. 지금껏 발해사에 대한 오해가 여기서부터 출발하였지 않았는가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말갈이란 호칭 속엔 중국중심적 역사관과 왕조중심적 역사관이 함께 뒤섞여 오늘날 이의 실상파악을 흐리게 하고 있는 것 같다. 즉 중국사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던 말갈이란 어느 특정의 종족적 명칭으로 쓰였다기보다는 중국중심적으로 동북아시아의 이민족을 부르는 일반적 범칭이었다고 판단된다. 특히 이는 이민족에 대한 비칭으로 쓰여졌는데 발해를 {구당서}가 [발해말갈(渤海靺鞨)]로 적고 있는가 하면, 신라 역시 이를 따라 {삼국사기}에서 [말갈발해]라고만 하였지 [발해]라고는 부르지 않았다.
 
또한 고구려인이나 발해인이라 호칭될 때는 주로 지배층을 지칭하는 것이고, 피지배계층에 대해서는 주로 말갈이란 명칭을 사용하였던 것 같다. 고구려시대 말갈은 백산말갈(白山靺鞨)·속말말갈(粟末靺鞨)·흑수말갈(黑水靺鞨) 등 7말갈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 오는데, 국민적 차원에서 보자면 이들은 모두 고구려의 백성이었다. 단지 고구려의 집권력이 어느 정도까지 미쳤는가 하는 것이 이들의 성격파악에 문제가 되는 정도일 것이다. 이러한 생각하에서 백산은 백두산(白頭山)·장백산(長白山)지역이며 속말은 송화강(松花江)이요 흑수는 흑룡강(黑龍江)을 의미하므로, [백산말갈]이란 [백두산지역주민]이란 뜻으로 풀어 생각할 수 있다. 아무튼 백산인이나 속말인들을 부여계나 예맥계로 보려는 시각이 있다든지, 정약용 이래 여러 사람들이 한국사속에 포함시켜야 할 [위말갈(僞靺鞨 ; 거짓말갈)]이 있음을 지적했다고 하는 사실은 발해의 피지배층이었다고 하는 '말갈'을 고구려유민이요 발해백성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 길을 이미 열어 놓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발해인들은 "풍속이 고구려 및 거란과 같고, 문자 및 典籍[書記]도 상당히 있다({구당서})"고 전하고, "그 나라 사람들은 왕을 일컬어 '가독부(可毒夫)', 또는 '성왕(聖王)', 또는 '기하(基下)'라 하고, 명(命)은 '교(敎)'라 하며, 왕의 아버지는 '노왕(老王)', 어머니는 '태비(太妃)', 아내는 '귀비(貴妃)', 장자(長子)는 '부왕(副王)', 다른 아들들은 '왕자(王子)'라 한다({신당서})"라고 하여 그들만의 독특한 언어가 있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아울러, 지금까지 400여개의 '문자기와'가 발견되었는데, 그 중에서 150여개의 문자와 부호가 발견된 것으로 조사·보고되고 있는데, 이것들 중에는 한자와 다른 '발해문자'도 상당수 발견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발해가 고구려적 전통의 풍습과 언어를 그대로 계승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문화적 측면에서 보더라도 발해인들이 고구려인이었다는 사실은 입증이 가능하다. 문화적 보수성이 강한 무덤과 주거양식에서 발해인들은 고구려인들의 것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었다. 고구려인들이 사용하던 석실분 및 석곽·석관묘를 발해인들도 사용하고 있었는가 하면, 고구려인들이 사용하던 온돌을 발해인들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한국사에서 신라와 발해를 남북국시대로 상정하고 발해사를 언급하는 것은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있다. 현대적 의미에서 보더라도 평안도와 함경도 및 강원도의 일부가 옛 발해영역이었고, 한국인으로 살고있는 태씨(太氏)들이 대조영의 후손을 자처하고 있는가 하면, 세계에서는 유일하게 아파트에까지 고구려와 발해인들이 사용하던 온돌을 사용하고 있는 것 등은 모두 발해의 한국사적 의미를 입증해 주고 있다. 그러나, 이민족에 의한 멸망은 만주 지역의 한국사적 의미를 상실하게 하였다.
 
남북국의 대립과 교섭
 
발해사를 생각함에 있어 신라와 발해가 과연 어떠한 관계에 있었는가 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에 대한 탐구는 한국사 속에 남북국사를 보다 확고하게 할 수 있는 계기가 될 뿐만 아니라, 남북분단시대의 역사적 과제를 보다 명확하게 제시해 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신라와 발해는 230여 년간 교섭보다 대결의 시기가 더 길었다. 끝내 두 나라는 대결을 해소하지 못했으며, 발해가 이민족의 침략에 의해 붕괴되자 발해유민의 상당수는 거란의 협조자가 되어 거란군으로 고려와의 전쟁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남북국의 대립에 관한 기사는 주로 신라와 당의 기록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나, 이 기록을 통해 발해의 대결의식도 대게 짐작할 수 있으리라 본다.
 
호칭면에서, 신라는 발해를 '흉이(凶夷)'·'말갈발해'등으로 불렀고 [발해]라는 공식 국호는 사용하지 않았으며, 잘 불러야 [북국]정도였다. 무력적 대결은 더욱 확실했다. 신라가 개성(開城)을 쌓고(713) 북경(北境)에 장성(長城)을 쌓았다든지(721), 패강진(浿江鎭)에 민호를 옮겼던(782) 사건들은 모두 발해를 의식한 군사행동이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또한 발해가 당의 등주를 공격했던 사건(732)으로 인해 신라와 당이 밀착되게 되었다든지, 일본의 신라공격계획(759∼764)에 발해가 끼여들어 신라를 협공하려고 했던 사건들 역시 그러했다. 한편 일본의 승려 에닌(圓仁)의 기행문인『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의하면, 신라인들이 8월15일(음)을 기해 3일동안 주야로 가무행사를 폈는데(839), 그 이유인 즉 신라가 발해와의 싸움에서 이긴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하니, 두 나라간의 충돌이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고 하겠다.
 
외교적인 측면과 두 나라 지식인들의 태도에서도 서로 치열했던 대결상은 입증이 된다. 최치원이 당 소종(昭宗, 888∼904)에게 보냈던 [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 발해가 신라보다 위에 거하기를 요구했으나 당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음을 감사하는 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내용인 즉 897년 발해 왕자 대봉예가 글을 올려 발해의 국세가 신라보다 강성함을 들어 국명의 서열에 있어 [신라·발해]가 아닌 [발해·신라]가 되어야 한다고 요구했으나, 당이 이를 거절하고 옛 관습대로 하였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최치원이 감사의 글을 당 소종에게 쓰면서 발해를 맹렬히 비난했던 것이다. 당의 외국인들을 위해 설치된 빈공과(賓貢科)에서도 신라와 발해는 서로 좋은 성적을 얻기 위해 경쟁했다. 875년 발해의 오소도가 신라의 이동을 제치고 수석합격하자 최치원은 [일국의 수치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라고 하였는가 하면, 906년에는 반대로 신라의 최언휘(신지)가 오소도의 아들인 오광찬보다 상위에 합격하자 당에 있던 오소도가 심하게 항의를 하였던 사건이 있었다는 것은, 모두가 신라와 발해의 대결상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하겠다.
 
남북국은 이렇듯 대결만을 하였던 것은 아니다. 몇 번의 교섭기록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발해는 건국기인 700년경과 멸망기인 924년경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협조를 구했던 적이 있었는데, 초기에는 신라가 대조영에게 제5품 대아찬의 벼슬을 주는 형식으로 발해건국을 인정했는가 하면, 멸망기에는 발해의 구원요청을 응낙하기는 하였으나 결국 돕지 못하고 발해멸망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한편 신라가 사신을 파견하였던 시기는 원성왕(元聖王) 4년(812)이었다. 이들 두 왕은 모두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왕들로서 국내외의 위기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발해와의 교섭을 시도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헌덕왕11년(819), 당에서 일어났던 고구려계의 이사도반란 토벌에 당의 요청으로 신라군사 3만이 지원된 사건직후부터는, 신·당의 밀착과 함께 남북국은 무력적 대결을 각오하는 방향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732년 발해의 등주공격사건에서도 그랬듯이, 신·당의 밀착이 곧 남북국의 대결심화라는 측면으로 나타났던 사실들은 한국사 속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하겠다.
 
역사 발전적 측면에서 남북교섭의 한계를 지적하면, 신라는 그들의 특정 정치집단의 이해관계 하에 발해와의 교섭을 시도하였고, 발해는 고구려 멸망에 대한 신라와의 대립감정으로 인해 안정이 아닌 위기 하에서만 신라와의 교섭을 시도했었다. 또한 두 나라는 각기 당과 일본과의 관계를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납북교섭은 그들의 필요에 의한 차선책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이러한 한계성은 결국 신라와 발해가 문화적 이질성의 심화라는 결과를 낳아, 대결의 현상 고착이라는 반역사적·반민족적 역사전개의 원인을 유발시키고 말았다.
 
후삼국과 발해 유민의 부흥 운동
 
신라사를 보다 엄격히 구분하자면, 소신라, 통일신라(668∼698), 대신라로 생각할 수 있다. 아울러, 우리는 '후삼국'을 남북국시대의 연장선에서 보는 것도 익숙하지 못하다. 한국사에서 '통일신라와 발해'라는 시각에 익숙한 탓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후삼국이 고구려·백제·신라라는 삼국 시대의 후삼국이 아닌 (통일)신라의 후삼국일 뿐만 아니라, 신라의 지방 세력이었던 견훤이 등장하는 892년부터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는 936년까지의 시기에 북방에서는 엄연히 발해가 존재하고 있었다.
 
또한 발해는 대씨 왕실의 단절에도 불구하고, 일부 유민들에 의해 '후발해(後渤海)'라든가 '정안국(定安國)'으로 일정 기간 지속되었고, 또 다른 유민들에 의해서는 거란이나 여진으로 그 모습을 달리하여 발해 문화를 잇고 있었다. 고려와 거란의 3차 전쟁에서 발해유민들이 거란군으로 활약하였던 사실이 이러한 점을 입증하고 있다.
 
남방의 후삼국과 북방의 발해는 남북국의 연장선에 있었고, 때문에 발해의 멸망은 발해만의 문제가 되지 않았고, 후삼국의 대내외관계가 변화하는 등 후삼국과 발해의 역사는 서로 유기적인 관계에 있었다. 발해 멸망 후 후삼국은 대외 관계에서 큰 변화를 일으키어, 고려의 필요에 의해 우호적인 관계에 있었던 거란과의 관계가 적대화되면서, 후백제-거란, 후고려-후당의 친선관계가 대립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발해는 신라가 후삼국의 분열기에 들어 있었던 926년에 침략자 거란에게 멸망하였다. 이민족에게 나라를 빼앗기면서 발해사의 대부분이 거란과 여진에 의해 계승되었던 사실은 고려에 의한 신라계승 의미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신라의 붕괴와 고려의 후삼국 통일은 "(김씨)신라"에서 "(왕씨)고려"로의 역사 발전 과정이었다. 그러나 북국이 그 왕조의 역사를 "대씨발해"에서 이민족의 "야율씨 거란(요)"으로 그 모습을 바꾼 것은 이민족에 의한 왕조의 단절이자, 민족사의 단절이었다. 따라서 발해 멸망은 곧 한민족의 활동 공간이었던 만주를 민족사에서 멀어지게 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발해 멸망 후에도 그 유민들은 오랫동안 왕실을 부흥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런데, 부흥운동 과정에서 발해유민들은 고려에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발해 멸망 후에도, 그 유민들과 고려, 즉 신라와 발해 후손들의 관계가 지속되었음을 의미한다.
 
1029년 이른바 대연림(大延琳)의 난으로 언급되는 발해 부흥운동이 고려와 거란이 세 차례의 치열한 전쟁을 마치고 고려가 거란의 연호를 쓰고 있던 시기에 일어났다. 대연림은 발해의 왕손이면서 거란에서 동경요양부의 대장군으로 활약하던, 친거란파의 발해유민이었다. 그러던 그가 그 지방 호부사 한소훈(韓紹勳) 등의 실정으로 인해 야기된 민심 동요를 틈타 나라 이름을 '흥요국(興遼國)'이라 하고 연호를 '천경(天慶)'이라 하였다.
 
그런데, 대연림의 발해국 부흥운동에서 생각할 수 있는 점은 흥요국과 고려와의 관계이다. 대연림이 끈질기게 고려에 도움을 요청했을 때가 그러했고, 이 사건에서 활약하던 다수의 사람들이 고려에 투화해 왔던 때가 그러했다. 따라서 이 사건은 발해와 고려로부터 나아가 발해와 신라의 관계까지를 생각케 하는 것이었다.
 
대연림이 무려 5차례나 고려에 사신을 파견하여 도움을 요청하였다는 점이다. 그러나, 고려 왕실은 곽원(郭元) 등의 돕자는 의견을 무시하고 지원 불가쪽으로 결정하게 되었다. 대연림이 고려에 도움을 요청하였던 사실과 운동이 실패한 후 그 유민들이 고려에 대거 투화해 왔던 점은 단순히, 인접 왕조였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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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출처 : [기타] http://yeojunet.com/tour/ujek/006/02/01.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