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나라가 우리 역사다?
많은 분들은 의아해 할 것입니다. 사실, 그런만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계사 시간에, 동양사 전공할 때 금나라, 청나라가 중국의 역사라고 배워왔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중국 역사를 자세히 들여다봐도 중원을 지배한 민족들 대부분은 한족이 아닌 비한족 계열이 많습니다. 그들이 자랑하는 당(唐)나라 또한 고구려의 속국이었던 선비족의 나라였습니다.
사실 그들이 동북공정이란 카드를 내건것도 자기들이 중원을 지배한 경험이 다른 민족에 비해 적으니까 그런 열등감을 벗어나고자 제시한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는 중국내 소수민족 티베트, 위구르의 독립을 막으려는 사전 조치라 저는 생각합니다.(이덕일 교수는 동북공정이 미국 견제용이라고 합니다.)
금나라가 왜 우리의 역사인지 조목조목 그것을 따지고자 합니다.
금나라를 세운 시조는 함보로 고려인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금사』 <세기>를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금의 시조는 함보이다. 처음에 고려로부터 왔는데 나이가 이미 60여세였다. 시조가 완옌부에 살기 오래였는데 그 부족 사람이 일찍이 다른 부족 사람을 죽였던 바 이로 말미암아 두 부족사이에 싸움이 벌어져 화해할 수 없었다. (이에) 완옌부 사람이 시조에게 말하기를 '만일 완옌부의 사람을 위하여 이 원망을 풀어 두 부족으로 하여금 서로 죽이는 일이 없게 해준다면 완옌부에는 나이 60에 시집을 안간 어진 처녀가 있으니 마땅히 배필을 삼아 완옌부의 ㅏ람이 되게 할것이오'하니 시조는 그것을 허락하고 스스로 (상대부족) 나아가 타이르기를 '한 사람을 죽인 것으로 인해 싸움이 끝나지 않고 다치는 사람이 더욱 많으니 난의 괴수 하나만 베어 죽이는데 그치면 부족 내에서 물건으로 보상할 것이다. 너희들은 싸우지 아니하고 이익을 얻는 것이 좋지 아니하냐? 하니 저편에서 이 말을 따랐다.
(중략)
뒤에 두 아들을 낳으니 맏이 우루요 다음이 워루 였다. 또 주세판이라는 딸도 낳아 드디어 완옌부의 사람이 되었다."
『삼조북맹회편』에는 금의 시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습니다.
"여진의 시조 건푸는 신라로부터 달아 나와 아촉호에 이르렀다. 돌아갈 데가 없어 완옌부에 의자하여 완옌을 성씨로 삼았는데 나이 60여세에 아직 처가 없었다. 그 때에 이들은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능멸하며 제도와 법도가 없었다. 컨푸는 나무를 깎아 약속하는 의미를 새겨 사람들을 가르쳐 빛을 놓아 이자를 생기게 하고 농사를 부지런히 짓게 하였으며 가축을 도둑질 한 자에게는 형벌과 배상의 법을 마련하였다. (중략) 이웃의 추장이 딸이 있었는데 나이 40여에 아직 미혼이었다. 소와 말 예물을 가지고 건푸에게 시집을 갔다. 뒤에 여진의 여러 추장이 동맹을 하고 그를 추대하여 수령을 삼았다.
고려사 세가 예종 10년 정월 초의 기사에는 금의 시조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예전에 우리 평주의 승려 금준이 달아나 여진족의 아지고촌에 들어가 살았는데 그를 금의 조상이라 한다 하고 혹은 말하기를 평주의 승려 김행의 아들 극수가 처음에 여진족의 아지고촌에 들어가 여진 여자에게 장가들어 아들 구얼 태사를 낳고 구얼이 훠러 태사를 낳았다. 훠러는 아들이 많았는데 큰 아들은 해리버요, 막내 아들은 잉거였다. 잉거가 가장 웅걸하여 민심을 얻었더니 잉거가 죽으니 해리버의 장자 우야소가 위를 이었으며 우야소가 죽으니 아우 아골타가 섰다."
금의 태조인 아골타가 고려 예종에 국서를 보냈는데 그 국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형인 대여진금국황제(大女眞金國皇帝)는 아우인 고려국왕에게 글을 부치노라 우리의 조상은 한 조각 땅에 있으며 거란을 대국이라 하고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 하여 공손히 하였다."
다소 건방진 국서이지만, 국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금 태조 아골타는 자신의 가문의 기원이 고려에 있음을 인정한 셈입니다.
또한 금나라가 거란이 세운 요나라를 공격할 때 많은 발해 유민들이 거란과 함께 금에 맞서자 아골타는 발해 유민을 회유하기도 했습니다. 발해 유민들을 회유할 때 아골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진과 발해는 본래 한 집안이다. 女眞 渤海 同本一家"
송나라 역사책인 『송막기문』에는 "여진 추장은 신라인으로 성은 완옌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금 태조가 자신들의 국명을 금이라 정한 이유를 『만주원류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전해오는 역사책에 의하면, 신라왕은 성이 김씨로 수십 세를 이었다. 금의 선조가 신라에서 온 것은 의심할 바 못되며 건국할 때 나라 이름은 여기에서 취한 것이다."
같은 책(만주원류고)에는 금나라 시조의 출자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금의 시조 합부(哈富)는 처음 고려국엣 완안부로 거주하닌 마친내 완안부 사람이 되었다. 안출호(安出虎)에 거주했으니 금을 안출호라고 한다."
『박은식 전서』 「몽배금태조전(夢拜金太祖傳)」을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몽배금태조란 꿈에 금나라 태조를 보고 절했다는 뜻입니다.)
"무릇 대금국(大金國) 태조 황제는 우리 평주인(平州人) 김준(金俊)씨의 9세손이요, 그 발상지는 지금 함경북도 회령군이요, 그 민족의 역사를 말하면 여진족은 발해족의 변칭자(變稱者:고쳐서 달리 부르는 것)요, 발해족은 마한족의 이주자가 많은지라. 금국 역사로 말하면 두만강변 일개 소부락으로 굴기하여 일거에 요(거란이 세운 국가)나라를 멸하고 재거(再擧)에 북송을 취하여 지나(支那:중국) 천지에 주권을 장악했노니 같은 땅에서 나온 우리 민족의 사람으로 특별히 천제(天帝)의 사랑하는 아들이 되어 무등(無等)한 복록(福祿)을 받고 무상(無上)한 광영(光榮)을 발표함은 실로 단군 대황조(大皇祖)의 음덕과 백두산의 영우(靈佑)로 인함이라"
위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여진 즉 금(金)의 시조는 고려인(또는 신라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금의 건국 과정에서 많은 발해인이 활약했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장호, 대호,고표, 곽약사 등으로 이들 발해 유민은 금의 건국 과정의 일등공신이었고, 금이 내치를 다스리는데 큰 힘을 발휘했다고 합니다.
놀라운 것은 여진 정권 그러니까 금의 황제는 발해계였다고 합니다.
믿어지십니까? 안 믿기겠지만 이것은 사실입니다.
금의 3대 황제인 희종이 폭정으로 전횡하자, 해릉왕이 희종을 살해하고 금의 4대 황제로 등극하였습니다. 해릉왕은 금 태조의 서장자(庶長子)였던 요왕 종간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대씨 성을 가진 발해 여인이라고 합니다. 희종을 죽이고, 황제위에 오른 해릉왕은 발해 출신을 대대적으로 기용하여, 자신의 황권을 강화했습니다. 그는 천하를 통일하고자 무리한 원정을 감행하였고, 결국 이것이 화근이 되어 결국 태조 아골타의 아들인 예종과 이씨성을 가진 발해 여인과의 사이에서 난 세종에 의해 시해당합니다.
세종 또한 자신의 외가가 발해계라 해릉왕과 마찬가지로 많은 발해 사람을 기용합니다. 이들 발해인들은 금 황제의 보호 아래, 조정에 두각을 나타냈고, 금이 멸망할 때 까지 금 조정에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그리고 세종 이후 금나라 황제는 세종의 핏줄을 이었습니다. 즉 금나라 황제의 피에는 발해인들의 피가 있었던 것이지요
이와 같이 금나라 역사를 살펴보면 그 역사가 중국 한족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금나라 역사는 우리민족 방계의 역사입니다. 일찍이 손진태 선생은 금사를 우리 역사로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출처 : | 이선생의 블로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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