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그시절

개항장과 삼천리 강산의 경관 - 1

영지니 2010. 4. 13. 15:30
[별책 부록|100년전 한국]

제5부 - 개항장과 삼천리 강산의 경관

산천 의구란 말 옛 시인의 허사로고

 

제5부에는 서울과 평양을 제외한 전국의 고적과 풍경 사진을 모았다. 수원·인천·개성·공주·충주·군산·목포·대구·부산·함흥·회령 등 큰 도시의 풍경을 담고 있으며, 개항장의 경우 관청이나 거류지 등 일본인과 관련된 사진이 많다. 강원도와 황해도 관련 사진은 없고, 전라도 역시 개항장의 사진 몇 장이 전부다.

 

우선 수원 화성을 공들여 찍은 사진이 여럿이다. 장안문·화서문·화홍문·방화수류정·화성장대·용연·동북공신돈이 그것이고, 건릉과 화녕전, 용주사까지 넣으면 사진의 대부분이 정조와 관련된 유적이다. 잘 알려진 대로 화성은 전통적인 축성방법에 근대 서양 건축공법을 원용해 축조한 성이다. 효성이 지극한 정조는 뒤주에 갇혀 죽은 부친 사도세자의 묘를 양주에서 수원 화산으로 옮기며 1794년부터 96년까지 이곳에 대역사를 펼쳤다.

 

인천의 사진은 당시 일본인 거류지와 이사청, 부두의 풍경을 담고 있다. 부산과 원산에 이어 1883년 1월 개항한 인천은 서울과 가까워 외국인의 출입이 잦고 외국상사도 많이 주재했던 곳이다.

 

개성은 고려의 수도였고 조선시대에도 유수관(留守官)이 파견된 지역이다. 선죽교와 두문동비 등 고려의 충절이 서린 명소를 비롯해 태조릉과 관음사 등 고려 유적을 담은 사진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인삼밭 사진도 흥미롭다. 그밖에 경기지역에 속하는 유적으로는 북한산 중흥사의 대웅전, 남한산성의 수어장대, 파주 광탄의 쌍미륵 사진이 있다.

 

충청도에서는 공주와 충주 사진이 몇 장 포함되었다. 공주는 공산성에서 찍은 것이고, 충주는 임경업을 기리는 충렬사와 약사, 육각정 등을 찾을 수 있다. 은진 관촉사 미륵불도 렌즈에 담겼다. 전라도는 군산과 목포의 일본인 거류지와 이사청을 찍은 사진뿐이다.

 

경상지역의 경우, 대구의 사진은 별로 없지만 달성공원에 세운 신사로 보이는 사진이 이채롭다. 부산을 찍은 사진은 모두 일본인과 관련된 것이다. 1876년 개항한 부산은 한국 침략을 도모하는 일본의 전초기지였기 때문이다. 초량을 거류지로 삼은 일제는 그 세력을 확대해나갔고, 1905년 개설되어 시모노세키(下關)와 부산을 오간 관부연락선을 통해 일본 국내와 한국을 연결시켰다. 또한 경부선 철도를 개통해 서울과의 거리를 시간적으로 크게 줄였으며 부산 연안 개펄을 매립해 시가지와 항만을 확장했다. 사진에 보이는 잔교나 매립지, 세관공사 등은 그 과정의 일면을 담은 풍경이다.

 

함경도 지역은 주로 함흥과 회령의 풍경을 담고 있다. 청나라 지역인 간도 두 곳의 시가지와 안둥(지금의 단둥) 부두 사진도 포함되어 있다. 함흥은 함경도의 중심도시로 함흥평야를 비롯해 역사 유적도 적지 않은 곳이다. 두만강가의 국경도시인 회령은 청국과의 무역 및 탄광지로 유명했다. 한국인이 대거 이주한 간도지방의 훈춘 및 옌지의 시가지 풍경이 일본인이 한국을 촬영한 사진집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당시 간도가 한반도 생활공간의 일부였음을 말해준다고 할 것이다.

 

개항장 이외의 지역은 대체로 고적과 풍경을 담고 있다. 한가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을 담은 소중한 사진들이다. 이제는 사라져 볼 수 없는 고적이 적지 않고, 변해버린 풍광까지 감안하면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는 이미지들이 대부분이다. 언뜻 보기에는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듯한 100년 전 고적의 모습에서 우리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걸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가두어 가꾸지 않고 사람들과 함께 숨쉬던 고적의 풍경이 더 정겨워 보인다.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당장이라도 삼천리 강산 곳곳에 오늘날까지 남아 숨쉬는 고적을 찾아 둘러보고 싶은 마음이 절로 일어날 듯 하다.

 

 

 

 

 

 

수원 장안문(長安門)

수원 화성(華城)의 북문으로 정조 때 건축되었다. 서울의 남대문과 비슷한 형태지만 규모가 더 크고 바깥에 옹성을 갖추었다. 무지개문 위에 2층 누각을 올리고 양쪽 계단으로 오르게 했다.

 

 

남한산성 수어장대(守禦將臺)

경기도 광주 남한산성 안에 있는 조선 후기의 2층 건물. 인조 때 남한산성을 축조하면서 지은 4개의 장대 중 유일하게 남았다. 아래가 넓은 데 비해 2층은 좁은 형태이다. 정면에 ‘수어장대’라고 쓰인 현판이 걸려 있다.

 

 

수원 화서문(華西門)

수원 화성의 서문으로 보물 제403호. 단층 누각에 옹성을 쌓았다. 멀리 장안문이 보인다. 화성은 남문인 팔달문과 북문인 장안문이 통행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화서문은 비교적 한적한 편이었다.

 

 

 

 

수원 화홍문(華虹門)

수원 화성의 북쪽 수문으로 북수문(北水門)이라고도 불렀다. 7개의 석조 무지개로 수문을 만들고 수문 돌다리 위에 다시 처마 곡선이 유연한 문을 만들었다. 왼편 뒤쪽으로 장안문이 보인다. 주변의 자연풍광이 아름답다.

 

 

 

수원 전경

멀리 화성이 보이는 수원의 모습. 동생을 업은 아이 앞으로 물이 마른 내와 다리가 보인다. 기와집과 초가집이 뒤섞여 있다.

 

 

수원 화홍문과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

왼쪽이 화홍문이고 오른쪽 바위 위에 세워진 정자가 방화수류정이다. 이 정자에 오르면 주변을 두루 살피고 경치를 즐길 수 있었다. 소를 매어두고 한가롭게 쉬는 농부와 주변 경관이 썩 잘 어울린다.

 

 

 

 

건릉(健陵)

경기도 화성군 안녕리에 있는 정조와 효의왕후 김씨(孝懿王后 金氏)의 합장릉. 홍살문 뒤에 제례를 치르는 정자각(丁字閣)이 있다. 정조가 승하한 직후에는 부친 사도세자(思悼世子) 묘인 현륭원(顯隆園 ; 현재의 융릉) 동쪽에 능을 만들었지만 훗날 왕후와 합장하며 서쪽으로 옮겨 건릉이 되었다.

 

 

 

화성장대(華城將臺)

성벽 정상에 있어 안팎을 두루 살피며 군사를 지휘하던 2층 문루다. 정조가 쓴 ‘화성장대’ 현판이 걸려 있었다. 화성의 서쪽에 자리하고 있어 서장대(西將臺)라고도 불렀다.

 

 

화녕전(華寧殿)

정조의 어진(御眞)을 보관하는 전각. 부왕 정조가 부친 사도세자를 지극한 효성으로 받든 것을 본받고 기리기 위해 순조가 세웠다.

 

 

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

화성의 동문인 창룡문(蒼龍門) 옆에 있는 돈대(墩臺)다. 공심돈이란 속이 빈 돈대라는 뜻. 내부는 3층으로 되어 있는데 둥근 벽을 따라 계단이 놓여 있어 소라각이라고도 부른다. 화성에는 모두 세 곳에 공심돈이 설치되어 있었다.

 

 

 

 

수원의 서호(西湖)

화성의 서쪽에는 농업용 관개시설로 만든 인공호수 축만제(祝萬堤)가 있다. 서호라고도 하며 정조 때 축조됐다. 항미정(杭尾亭)이라는 정자가 이곳의 경관과 풍치를 돋보이게 했는데, 사진은 항미정에서 바라본 서호 풍경이다.

 

 

 

권업모범장(勸業模範場)

1906년 일제 통감부가 일본 농법의 한국 이식을 목적으로 수원에 세운 기관이 권업모범장이다. 한국 농업의 시험·조사보다는 일본 농법의 지도·권장에 치중했다.

 

 

방화수류정과 용연(龍淵)

방화수류정은 용두암(龍頭岩) 위에 세워졌으며 아래에 있는 연못은 용연이라 불렀다. 용연 주위에는 버드나무를 심어 수원 성곽 주변에서 가장 경관이 좋았다. 못가에는 돌로 만든 용두가 자리잡고 있었다.

 

 

용주사(龍珠寺)

경기도 화성군 화산(花山)에 있는 절. 정조가 부친 사도세자의 묘인 현륭원을 관리하기 위해 세운 능사(陵寺)다. 정조가 김홍도(金弘道)에게 그리게 해 목판으로 만든 ‘불설부모은중경판(佛說父母恩重經板)’이 보관되어 있다.

 

 

 

 

수원 남제(南堤)의 버드나무길

남제는 수원 남쪽에 있는 저수지로 순조대에 축조되었다. 이 곳의 긴 버드나무길은 남제장류(南堤長柳)라 하여 수원8경 가운데 하나였다. 소에 물건을 싣고 지나던 장정이 사진에 담겼다. 우산을 든 모습이 인상적이다.

 

 

 

인천항과 시가

인천은 1883년 1월 개항했다. 서울의 관문인 만큼 일찍부터 도시가 발전하여 시가를 형성했다. 사진은 만국공원(萬國公園)에서 내려다본 인천항.

 

 

 

인천 일본인 거리

인천의 중심가. 일본식 4층 건물이 들어서 있고 오른쪽에는 서양식 3층 건물도 보인다. 한복을 입은 한국인이 일본인 거리를 지나가고 있다. 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인천의 일본인 거주지

1883년 개항 이후 인천에는 일본인이 모여 사는 조계(租界)가 만들어졌다. 지금의 자유공원 남쪽이다. 사진은 일본인 거류자가 급증하면서 형성된 주택가. 곳곳에 전신주가 서있다.

 

 

 

 

인천 부두

배에 실을 물건과 부린 물건이 즐비하게 쌓여있다.

 

 

 

인천 일본영사관

인천이 개항되자마자 일본은 서양식 2층 목조건물의 영사관을 준공했다. 1906년 통감부가 설치된 후에는 영사관을 이사청으로 개편해 청사로 사용했다. 1910년 이후에는 인천부 청사로 사용되었는데, 오늘날 인천 중구청 자리이다.

 

 

북한산 중흥사(重興寺) 대웅전

중흥사는 숙종대에 북한산성이 축성된 뒤 산성을 지키는 승군(僧軍)을 관장하며 큰 사찰이 되었으나, 1915년 홍수로 무너진 뒤 중건되지 못했다. 지금은 주춧돌과 축대만이 남아 있다.

 

 

파주 용미리 쌍미륵

경기도 파주 광탄면 용미리 용암사에 있는 마애입상. 보물 제93호. 고려 초기 석불로 알려져 왔으나 근래 들어 조선 세조 11년(1465)에 제작된 것으로 밝혀졌다. 세조와 정희왕후의 모습을 미륵불로 조각한 것이다.

 

 

 

개성 관아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은 조선시대에 개성부가 되어 유수(留守)가 파견되었다. 1906년 개성군으로 격하되었다가 1930년 다시 개성부로 환원되었다. 문루는 이층으로 위층엔 마루를, 아래층엔 4각으로 다듬은 돌기둥을 놓았다.

 

 

 

개성 서대문

원 사진첩에는 이 사진에 ‘개성 서대문’이라는 간단한 설명만이 붙어 있다. 오른쪽 큰 나무 아래 있는 정자는 길 가던 이들이 잠시 쉬어가는 자리였을 것이다.

 

 

개성 인삼밭

개성은 인삼재배의 중심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산삼이 수요에 비해 크게 모자라자 인삼재배가 시작됐는데, 조선 후기부터 개성이 대표적인 재배지로 떠올랐다. 이 때문에 개성상인은 인삼교역으로 유명했다.

 

 

개성 관음사 대웅전

개성 천마산 기슭에 있는 관음사의 대웅전. 고려 초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진 관음사는 주변 경치가 빼어나 ‘개성금강’이라고도 불렸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건물이고, 앞에 높이 4.5m의 7층석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