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문화유산

남대문

영지니 2010. 4. 12. 17:25

 

[뉴스데스크]

● 박혜진 앵커 : 도심 한가운데 든든히 서있던 남대문의 위용과 무게감이 새삼 크게 느껴집니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남대문을 추억해봅니다.

양효경 기자입니다.




6백년 고도, 서울

그 거리의 중심에는 밤 낮 가릴 것 없이 언제나 남대문이 있었습니다.

날개처럼 길게 뻗은 추녀마루. 견실한 목조 짜임새는 조선의 기품 있는 건축 미학을 일러 주었습니다.

도시의 섬. 모진 역사의 풍파를 견뎌내며 제 자리를 지켜온 남대문.

친숙한 그 모습 곁으로.

이 땅 사람들, 희로애락의 개인사. 흥망성쇠의 나랏일이 구름처럼 흘렀습니다.

남대문은 그 세월만큼이나 장중한 무게로 사람들의 생활 속에 깊이 각인됐습니다.

● 김홍승 : "무너질 때 가슴이 우르르 무너지는 것 같이 가슴이 굉장히 아파요."

무너져 내린 빈자리가 더 커 보입니다.

● 서한알 : "우리 집이 탔으면 좋았을 걸. 이게 우리 보물이 이렇게 타서 안타깝습니다."

사람이 지었으되 인간을 뛰어 넘는 세월 6백년이 흐르고 난 오늘, 첨단과학이 거리를 누비고 하늘을 찌를 듯 기세등등한 2008년 2월 11일. 남대문은 역사 속 추억의 자리로 물러났습니다.

이제 다시는 볼 수 없게 됐습니다.

MBC 뉴스 양효경입니다.

(양효경 기자 snowdrop@imbc.com)

 

숭례문 (조선 건축)  [崇禮門, 남대문]

 

남대문(南大門)이라고도 함.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4가에 위치한 조선 초기 한양의 성문. 숭례문 /서울 숭례문의 전경, 조선 ... 국보 제1호. 1396년(태조 5) 창건되어 1448년(세종 30) 개축했다. 조선왕조가 도읍을 한양으로 정한 뒤, 정궁인 경복궁의 방향에 의해 남문인 숭례문이 정문이 되었다. 풍수지리에 의해 편액도 다른 문들과는 달리 세로로 쓰여졌다. 이는 서울 남쪽에 있는 조산(祖山)인 관악산이 북쪽의 조산인 북한산보다 높고 산의 모양도 불꽃이 일렁이는 듯하여 관악산의 화기를 맞불로서 꺾기 위한 것이며, 오행에서 남쪽을 가리키는 예(禮)를 숭상한다는 의미를 담아 숭례문이라 이름했다. 1934년 일본이 '남대문'으로 문화재 지정을 했으나 1996년에 역사 바로세우기 사업의 하나로 일제가 지정한 문화재에 대한 재평가작업을 하면서 '숭례문'으로 명칭을 환원했다. 앞면 5칸, 옆면 2칸의 2층 건물인 이 문은 화강석의 무지개문을 중앙에 둔 거대한 석축 위에 세워져 있으며, 지붕은 우진각지붕으로 상하층 모두가 겹처마로 되어 있고 사래 끝에 토수(吐首)를 달았다. 추녀마루에는 잡상(雜像)과 용두(龍頭)를 두고, 양성한 용마루에는 취두(鷲頭)를 두었다. 2층인 이 문의 구조는 위층의 4모서리 기둥이 아래층까지 내려와 견고하게 결구되었으며, 위층 중앙에는 4개의 고주를 두었다. 다포계 형식의 공포를 얹은 이 문의 위층은 외삼출목, 아래층은 외이출목으로 구성되어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다포계 목조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조선 초기 건축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잘 보여준다. 또 1962년 해체복원공사 때 발견된 상량문(上樑文)은 당시의 건축생산체계와 장인조직을 밝히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현존하는 성문 중 규모가 가장 크며 조선 초기 다포계 양식을 대표하는 건물이다.

 

 

문화재 
자료제공 : 


 

 

 

 

◎ 남대문
조선시대 서울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으로 원래 이름은 숭례문이며,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대문이라고도 불렀다.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태조 4년(1395)에 짓기 시작하여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 지금 있는 건물은 세종 29년(1447)에 고쳐 지은 것인데 1961∼1963년 해체·수리 때 성종 10년(1479)에도 큰 공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문은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석축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을 두고, 그 위에 앞면 5칸·옆면 2칸 크기로 지은 누각형 2층 건물이다.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 형태를 하고 있는데, 이러한 지붕을 우진각지붕이라 한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부분에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그 형태가 곡이 심하지 않고 짜임도 건실해 조선 전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지봉유설』의 기록에는 ‘숭례문’이라고 쓴 현판을 양녕대군이 썼다고 한다. 지어진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서울 성곽 중에서 제일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다.
 

[사설] 4800만 국민 지켜보는 가운데 불타 무너진 숭례문

 

대한민국 수도 한복판, 국보 1호 숭례문(남대문)이 하룻밤 새 잿더미가 됐다. 임란(壬亂)과 호란(胡亂)을 거쳐 6·25까지 갖은 전란(戰亂)도 견뎌내며 600년 세월을 견뎌온 서울의 큰 대문이 숯덩이로 무너지는 모습을 국민은 속절없이 지켜봐야 했다. 민족의 얼이 담긴 나라의 상징이 소방관 330명, 소방차량 95대가 동원되고도 속수무책으로 불타버린 5시간 사이 세계 10대 경제대국을 뽐내던 대한민국이 어떤 나라인지가 여지없이 발가벗겨졌다. 양녕대군이 썼다는 '숭례문(崇禮門)' 현판이 매트리스도 받치지 않은 맨바닥으로 떨어져 나뒹구는 모습은 우리 모두가 추락하는 모습 그 자체였다.

숭례문에 불이 났다는 신고가 서울 중부소방서에 들어온 것이 10일 밤 8시50분, 소방관들이 처음 출동해 불을 끄기 시작한 것은 3분 뒤인 8시53분이었다. 발화 시점이 밤 8시48분쯤으로 추정되고 있으니 불이 난 지 불과 5분 만에 불 끄기가 시작된 셈이다. 그러고도 결국 숭례문을 몽땅 태워먹고 마는 거짓말 같은 사태가 벌어졌다. 접근이 어려운 것도 아니고 소방인력이 부족한 것도 아닌 수도 한복판, 만인이 보는 앞에서 일어난 일이다.

소방당국은 밤 9시30분쯤 불길이 잦아들고 연기만 나자 다 꺼진 것으로 생각했지만 남은 불길이 건물 안쪽에 숨어 있는 것을 몰랐다. 소방관들은 옛 목조건물의 복잡한 내부 구조에 익숙하지 않았고, 지붕에 방수 장치가 돼 있어 밖에서 퍼붓는 물이 안으로 배어들지 않는다는 사실도 몰랐다. 10시40분 불길이 다시 치솟은 다음에야 기와지붕을 뜯고 물을 퍼부어 불을 끄려 했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4800만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작은 불'을 '큰 불'로 키워 대한민국 국보 1호를 불태워 버린 것이다.

소방당국은 2005년과 2006년 양양 낙산사와 수원 화성 서장대가 각기 산불과 방화로 타버린 뒤로 문화재 소방에 대한 걱정과 근심이 흘러 넘쳤는데도 겉핥기 대책과 남의 눈을 의식한 형식적 훈련으로 그쳐왔다. 서울 중부소방서는 숭례문 내부 도면(圖面)조차 갖고 있지 않았다. 매년 되풀이한 가상훈련도 건물을 둘러보고 소화전(消火栓)이나 점검하는 형식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숭례문 방화 설비는 수동식 소화기 8대와 상수도 소화전이 전부였다. 화재에 특히 약한 목조건축물인데도 요즘 웬만한 건물이면 다 갖고 있는 화재 경보기나 스프링클러도 없었다.

일본은 매년 1월 26일을 '문화재 방화(防火)의 날'로 정해 지방자치단체들이 소방훈련과 문화재 긴급피난, 소방장비 점검 등을 한다. 이 날은 1949년 1월 26일 나라(奈良) 호류지(法隆寺)에 있는 국보 벽화가 화재로 크게 손상되고, 이어 교토 긴카구지(金閣寺)까지 방화로 소실된 뒤 제정됐다. "문화재를 화마(火魔)에서 지키자"는 구호를 내건 훈련에는 각 지역마다 소방대원과 주민, 사찰 승려 등 수백 명이 참가한다.

국보 1호 관리를 위임 받은 서울시는 2005년 "숭례문을 시민에게 돌려준다"며 주변에 광장을 만들고, 2006년 중앙통로까지 일반에 개방했다. 숭례문은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곳이 됐지만 중구청 직원이 평일 3명, 휴일 1명씩 오전 10시부터 오후 8시까지 근무한다. 이들이 퇴근한 밤 시간엔 무인경비업체의 CCTV와 적외선 감지기에만 감시를 맡겨놓았다. 개방한 만큼 더 엄격한 보호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상식도 없었다는 이야기다.

문화재청은 불이 난 지 두 시간이 지나서야 대전 문화재청에 있는 숭례문 도면을 갖고 왔다. 지난해 5월 발간한 '화재 위기대응 현장조치 매뉴얼'에는 문화재에 불이 났을 때 어떻게 불을 꺼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 내용은 하나도 없다. 2006년에야 124개 중요 목조문화재에 방재시스템 구축을 시작했지만 해인사 등 4곳에만 설치공사를 했을 뿐 우선순위 48위인 숭례문 차례는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래 놓고는 11일 아침 일찍 흉물이 돼버린 숭례문에 가림막을 세워 국민의 눈으로부터 감추는 공사부터 서둘렀다.

소방당국은 "화재 초기 문화재청이 '문화재가 손실되지 않게 신중하게 불을 꺼 달라'고 해 적극적으로 진화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밤 9시35분쯤에야 문화재청으로부터 "진화가 우선이니 숭례문 일부를 부숴도 좋다"는 통보를 받았지만 이미 불길을 잡기엔 늦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문화재청은 "진화는 현장의 진화책임자가 상황을 판단, 결정하는 것"이라고 소방당국 쪽으로 책임을 미뤘다.

문화재청은 "200억원을 들여 2~3년이면 숭례문을 원형대로 복원할 수 있다"고 큰소리를 치고 있다. 문화와 문화재의 의미 자체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이제 조선 태조 7년(1398년) 세우고, 세종 29년(1447년) 고쳐지어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견뎌내고, 6·25전쟁의 민족비극을 지켜봐 왔던 우리 역사의 증인인 숭례문은 영원히 사라졌다. 새로 세워지는 숭례문은 원래 것과 모양만 비슷한 21세기 건축물일 뿐이다.

국민이 입은 마음의 상처 역시 쉽게 복구되지 않을 것이다. 국민은 나라의 얼굴이 어이없게 타 사라지는 현장을 목격하면서 경제대국이라고 거들먹거렸던 이 나라가 사실은 모래 위에 세워진 허상(虛像)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뼈에 저미듯이 절절이 느꼈다. 서울 사는 외국인들이 이 모습을 보면서 대한민국을 뭐라 부르며 어떻게 이 나라를 믿을 수 있겠는가.

 
 

[조용헌 살롱] 대문(大門)

조용헌 goat1356@hanmail.net

 

▲ 조용헌

국보 1호인 남대문(南大門)이 화재가 나서 전소되었다. 대문(大門)이란 무엇인가? 밖으로 나가는 출구(出口)이자, 동시에 안으로 들어오는 입구(入口)가 대문이다. 대문은 동양문화에서 안과 밖, 음과 양, 그리고 성(聖)과 속(俗)을 모두 포함하면서 동시에 이 두 차원을 구분해 주는 장치이다. 특히 성과 속의 구분에서 이 대문의 역할이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천장이 낮은 실내에 들어가면 답답한 느낌이 들지만, 천장이 높은 공간에 들어서면 왠지 성스러운 느낌이 든다.


서양은 실내 천장의 높이를 올림으로써 성스러움을 표현하였다면, 동양은 그 높이 대신에 대문을 통해서 성스러움을 표현하였다. 한국의 불교사찰에 가 보면 대문이 여러 개이다. 처음에는 대체로 일주문(一柱門)을 통과한다. 사찰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하동 쌍계사(雙溪寺)를 예로 들면 일주문 다음에는 또 다른 문인 금강문(金剛門)이 있다. 금강문을 통과하면 다시 또 하나 문이 나온다. 바로 천왕문(天王門)이다. 쌍계사의 대문 배치를 보면 문을 하나씩 통과할 때마다 '속세의 때'를 벗는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문을 통과할 때마다 일종의 정화의식(淨化儀式)을 거치는 셈이다. 문을 통과할 때마다 점점 더 성스러운 공간으로 진입한다는 의미가 숨어 있다. 속(俗)에서 성(聖)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대문을 통과해야 한다. 대문이 바뀔 때마다 차원이 바뀌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공간은 대문을 여러 개 열고 들어가도록 장치를 하였다. 유교에서는 대문의 배치가 불교와는 약간 다르다.


유교에서는 어느 방위(方位)에다가 대문을 내야 하는가를 중시하였다. 이는 주역(周易)과 음양오행(陰陽五行) 사상의 영향이다. 동대문을 위시하여 동서남북에 있는 4개의 대문은 주역에 나오는 '진태리감(震兌離坎)'의 방위와 일치한다. 4개의 대문 사이에 있었던 4개의 소문(小門), 즉 혜화문(惠化門), 소덕문(昭德門), 광희문(光熙門), 창의문(彰義門)은 주역의 간(艮), 곤(坤), 손(巽), 건(乾)방에 해당한다. 그 8개 문의 중심 지점에 토(土)의 신(信)을 상징하는 보신각(普信閣)이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서울은 주역 팔괘(八卦)의 중심에 있다는 의미를 지닌다. 남대문 화재는 어떤 의미인가?

 

출처 : 올드뮤직의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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