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문화유산

八萬大藏經

영지니 2008. 1. 2. 18:28



 

 

 

 


 

 

世界文化遺産시리즈 (1)

 

海印寺

 

八萬大藏經

 

 

 

창건뒤 여러차례의 큰 화재로 많은 건물들이 불탔으나 지금도 75개의 말사와 16개의 부속암자를 거느리고 있는 해인사 전경,,

 

세계 불교인의 순례지, 해인사

 

해인사는 신라시대의 승려였던 순응과 이정이 802년에 세운 절로서 신라의 화엄십찰 가운데 하나이며, 현재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산에 위치하고 있다. 해인사에 <고려대장경>이 보관되어 있기 때문에, 해인사를 한국의 법보사찰로 부르기도 한다. 또한 해인사는 한국에서 가장 큰 불교종파인 대한 불교 조계종의 12교구 본사로, 조계종에 속한 현대 한국 사찰 중 가정 먼저 총림으로 지정된 절이기도 하고, 한국 최대의 절인 동시에 대표적인 한국의 사찰 양식을 보여 주는 절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절은 한국의 불교도들뿐 아니라, 세계의 불교도들에게도 유명한 순례지가 되고있으며, 1993년의 집계에 의하면 그해에 이 절을 찾은 방문객은 약 200만 명의 학생들을 포함하여 900만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해인사의 중요성은 여러가지 측면에서 살펴볼수 있지만, 해인사를 현재의 해인사가 되게한것은 이곳에 보존되어 있는 <고려대장경>의 존재 때문이다

 

 

 

대장경의 탄생

 

"대장경"은 일정한 규칙에 따라 불교 전적을 모아 편집한 것을 말한다. 대장경의 산스크리트인 트리피타카(tripitaka)는 원래 세 개의 광주리라는 말이었으나, 후에 모든 불교 전적을 의미하는

경, 율, 논의 삼장(三藏)을 가리키게 되었다. 동아시아에서 삼장이란 단어는 6세기 중국의 승우

(僧祐)가 편찬한 <출삼장기집>에서 처음 나타났다. 그러나 10세기 중기 이후 삼장은 동남아시아

의 상좌부 전통의 불교전적을, "대장경"이란 말은 동아시아의 불교 전적을 나타내게 되었다. 따라서 모든 불교전적을 의미하는 대장경이란 단어는 당나라이후에 쓰이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역사상 존재한 한역 대장경은 약 30종에 달하며, 동아시아 최초의 한역 대장경은 971년부터 983년까지 중국 북송에서 주조된 <촉판대장경>이었다. 이 대장경은 그 후 한국의 <고려대장경>, <거란대장경>, <몽골대장경>, <티베트(서장)대장경> 등을 포함하여 동아시다 각국에서 편찬된 여러가지 대장경의 모델이 되었다.

 

한국 대장경의 역사

 

우리나라에서는 역사상 대장경 판각이 두 번, 대장경 목록집 판각이 한 번 이루어졌다. 첫번째 대장경은 11세기에 이루어진 <초조 고려대장경>이고, 두 번째는 13세기에 판각된 <재조 고려대장경>으로 이것이 현존하는 <고려대장경>이다. 그리고 고려의 대각국사 의천이 <속장경>을 편찬했는

이것은 <초조 고려대장경>의 보유판 목록집이다

 

 

 

 

**고려대장경**

 

몽고군이 고려를 침공하자 고려 정부는 <초조 고려대장경>을 바탕으로 제2차 대장경 판각 작업에 착수하게 되었다. 이 판각 작업은 1236년에 시작되어 1251년에 끝나게 된다

고려대장경은 13세기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주목을 받아왔으며, 14세기 후기에도 불교를 믿던, 적지 않은 왕실 식구들뿐 아니라 다른 불교도들에게도 귀중한 유산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또한 친유교 반불교 정책을 표방했던 조선시대에도 대장경은 한국과 일본 사이의 주요한 외교적 쟁점이 되곤 했다. 조선시대 유일한 호불 군주였던 세조는 주요 사찰에 배분할 목적으로 1458년 역사상 가장 많은 50부의 <고려대장경>인쇄를 명하기도 했는데, 그것은 그 후에도 간헐적으로 간행되었다.

<고려대장경>은 오늘날에 와서도 당시 문화공보부의 후원아래 1963년부터 1968년 사이에 12부가 인쇄되었다. 이 가운데 4부는 일본에, 1부는 미국의 캘리포니아 대학교에, 1부는 오스트리아에, 2부는 영국에 보냈으며, 나머지 4부는 국내에 보관되어 있다. 그리고 1976년에는 동국대학교 출판부에서 48권으로 된 축쇄 영인본으로 출간하여 독자들이 편리하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영인본 <고려대장경>은 2000년 12월에 CD-ROM으로 제작되었으며, 2001년 5월에는 그 기능을 더욱 향상시킨 <트리피타카 코리아나 2001>이 나왔다. 그리고 <고려대장경> 한문 영인본의 한글 번역본으로서 318권으로 구성된 <한글 대장경>도 2001년에 완간되었는데 이를 위해 1965년부터 2001년까지 37년에 걸쳐 진행되었다.

 

 

** 섬세함

 

1. 판각 배경

 

<고려대장경>의 판각배경은 부처의 힘을 빌어 몽고의 침략을 물리치려고 했다는 것이 통설이며,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 이규보의 <대장경판각군신기고문>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 글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달단(몽고)의 침략으로 불상과 불서, 부인사에 소장되어 있던 대장경판본도 다 없어져 버렸다. 그래서 대장경을 다시 만들기 위해 현종때 처음 만든 대장경 주조의 동기를 살펴보니 거란의 침략을 막기위해서였다. 그 결과 거란군은 물러갔으니, 불타버린 대장경을 다시 만들면 달단 군사도 물러가지 않겠는가?"

그러나 대장경 판각은 그 당시 집권자 최이의 주도아래 착수, 진행되었다는 점, 이규보가 급제 후 최충헌에 의해 발탁되고 그 후에도 최씨 무신정권 아래 관직생활을 한 점, 대장경이 판각된 후에는 최씨 일가의 원당이었던 선원사에 경판이 보관된 점, 강화도 천도 자체도 최씨 일가의 정권유지 차원에서 이루어졌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이 대장경 판각의 배경을 "호국"이란 차원에서 해석하는 것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

 

2. 주조 과정

 

경판 제작은 대규모 사업이었기 때문에 강화도에 대장도감을 설치하고, 진주지방의 남해연안에도 분사 대장도감을 설치하여 판각을 나누어 진행했다. 경판 제조에 사용된 나무는 거제도, 완도, 제주도등지에서 자생하는 자작나무로, 백화목 혹은 거제목이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이 나무들은 경판이 되기전 기후에 따른 변형을 방지하고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상당기간 까다로운 절차를 거쳤다.

먼저 경판 제조를 위해 벤 나무들을 바닷물에서 꺼내어 일정한 크기로 자른후에 다시 소금물이 담긴 통에 넣어 끓였다. 그 다음에는 이 나무판들을 바람이 잘 통하는 그늘에서 3년 동안 말렸으며,

말린 후에는 표면을 매끄럽게 하는 공정을 거쳤다. 이렇게 하여 준비된 경판에 판각수들이 대장경을 새기기 시작했다. 대장경의 내용을 다 새긴 경판에는 충해를 방지하기 위해 옻칠을 했으며, 경판의 네 모서리에는 쇠판을 붙여 경판이 뒤틀리지않게 하였다. 따라서 대장경은 철저한 주조과

정을 거쳐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 고려대장경의 구조와 내용

 

1.구조

 

13세기와 14세기에 각각 판각된 정판과 보판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대장목록>에 실려있는 8만여개의 장경목판과 보유장경판으로 불리는 15종의 경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들 모두를 고려 대장경판으로 보고있다. 여기에는 1,511종 6,805권의 불전이 81,258장의 판목에 새겨져 있다.

총 글자수는 52,382,960자인데, 이는 한국이 가진 세계기록유산 중의 하나인 <조선왕조실록>의 총 글자수와 비슷하다. 보통 <대장목록>에 수록되어 있는 장경목판은 정장이라고도 하는데, 정장의 구성은 총 1.497종 6,588권으로, 여기에 포함된 불교 전적들은 10권 단위로 분류되어 있고, 이 불전들이 담겨있는 각 함에는 <천자문>의 한자들을 순서대로 1번(천[天],K1)에서 639번(동[洞], K1498)까지 붙였다. 이 불전들은 목판의 양쪽에 새겨져 보관되어 있는데, 이 목판의 총 면수는 162,516면이다. 각 면에는 세로로 한 줄당 14자씩 모두 23줄의 한자로 판각되어 있으며, 한 면의 글자수는 322자이다. 각 경판의 크기는 가로 70센티미터, 세로 24센티미터, 두께 2,8센티미터이며, 각 목판의 무게는 283그램에서 340그램 정도이다. 목판의 필체와 새김글도 아주 아름다우며, 글자형태도 일정하다. 보판(K1499-K1514)은 보유장경판이라고도 불리며, 1392년에 완성된 것이다. 1915년에

<고려대장경> 제작에 사용된 목판을 검사했을 때, 몇 개의 목판이 결여된 것으로 나타나 보충시켰으나, 이 보충판목을 제외한 원래의 81,258개의 목판은 13세기에 판각된 것이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

 

2. 내용

 

정판은 <대반야바라밀다경>을 비롯해서 중국의 당나라와 송나라에서 번역된 불전, 송나라의 태종이 지은 시와 계송, <고려국신조대장교정별록>, <대장목록>, 불교 백과사전격인 <법원주림>, <일체경음의>를 비롯한 불경에 나오는 용어들의 음과 뜻을 밝힌 책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정판에는 선종 서적과 한국 명승들의 저작은 포함되지 않았다. <고려대장경>의 보유판을 구성하는 불전들은 판각 날짜가 알려지지 않은 목판이며, 여기에는 극히 일부 선적만 남아있어 동아시아에서 이룩된 선종 전적이 수록된 정도를 충실하게 파악할 수는 없지만 이 중 10종류의 불전들은 7세기부터 13세기까지 쓰여진 한국 승려들의 작품이다.

 

 

 

 

 *경판의 양쪽 끝의 마구리부분이 글자를 새긴곳보다 두툼하여서 경판 두장을 포개었을 때도, 딱 달라붙지않고 공간이 생기므로 경판사이의 통풍이 원활하게 이루어진다.

 

 

 

 

 

 

 

&& 한 자 새길때마다 절 한 번을 하다

 

고려대장경은 동아시아에서 이루어진 한역 대장경 가운데, 내용의 포괄성, 정확성, 서체와 판각 형태의 아름다움, 역사적 중요성으로 보았을 때 가장 뛰어난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송나라의 초기 대장경 및 그것을 이어받은 중국이나 일본의 대장경들과 비교했을 때, 고려대장경만이 갖고 있는 높은 완성도는 오늘날에도 대장경 역사상 가장 완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 포괄성

 

<고려대장경>을 편찬할 때 여러나라에서 조성된 여러가지 대장경들을 참고했기 때문에 그 내용은 매우 풍부하다. 또한 현재 거의 남아있지 않은 송나라<촉판대장경>의 내용도 <고려대장경>을 통해 알수있다. <고려대장경>은 중국의 대장경을 모본으로 했지만, <고려대장경>에만 수록되어있는 불교 전적들이 있다는 점은 <고려대장경>의 큰 특징중의 하나이다. 즉 <법원주림>이나 <일체경음의>처럼

<고려대장경>이 아니었으면 알려지지 못했을 불전들도 포함되어 있는데, 이들은 <고려대장경>보다 훨씬 늦게 간행된 남송의 <사계대장경>이나 원나라의 <원판대장경>보다 훨씬 늦게 간행된 남송의
<사계대장경>이나 원나라의 <원판대장경>에도 나오지 않은 것들이다.

그리고 고려가 1064년에 거란으로부터 받은 <거란대장경>은 <고려대장경>을 조성하는 데 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것은 당시 동아시아에서 조성된 대장경중에 가장 훌륭한 것으로, 여기에 포함되어 있던 많은 불전들이 <고려대장경>에 입장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란대장경>이 현재 남아있지 않아서 그 내용도 현재 <고려대장경>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2. 정확성

 

고려대장경의 가장 큰 장점중의 하나는 그 내용이 정확하다는 것이다. 중국 최고의 대장경이라고 일컫는 만력판을 비롯한 모든 한역 대장경들 중 그 내용이 가장 정확하며, 이러한 우수성은 세계 불교학자들에게 이미 인정받은 바 있다. 고종 때 화엄 학승으로 명망이 높았던 개태사의 승통 수기가 당시 존재하던 <촉판대장경>, <거란대장경>, <초조고려대장경>을 비교 대조하여 틀린 글자를 바로잡고 빠진 글자를 보충했다. 수기가 교감한 내용은 30권, 약 19만자로 구성된 <교정별록>으로 1250년에 편찬됐다. 이 <교정별록>에서는 문헌학적. 어원학적 기초위에서 <고려대장경>의 불전 중 70함, 66종의 동아시아 불교와 상좌부 불교의 경. 율. 논을 검토한 79건의 교감자료가 수록되어 있다.

 

3. 예술적 완성도

 

<고려대장경> 경판의 경문은 약 30명의 판각수들이 중국 송나라의 대명필가였던 구양순의 필체로 새겼는데, 각판에 새긴 글자들은 예술적 미를 갖추고 있으며, 여러명이 판각했는데도 마치 한 사람이 새긴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이것은 판각수들이 한 글자를 새길때마다 절을 하고 새길정도로 정성을 다했기 때문일것이다. 따라서 <고려대장경>은 판각 기술면에서도 17~18세기 일본과 중국의 대장경 판본보다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왼쪽 건물이 수다라전, 오른쪽 건물이 법보전이며 정면에 보이는 작은 건물이 서사간고, 반대편에 동사간고가 있다. 오른쪽 법보전의 앞벽 창문이 윗쪽과 아랫쪽이 크기다 르며 그 반대편 수다라전의 뒷벽 창문도 윗쪽과 아랫쪽이 크기가 다르다. 오른쪽 법보전의 뒷벽은 가야산의 숲에 면해있고, 이 신선한 공기는 법보전의 뒷벽 창문을 통해서 건물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해인사의 초입 일주문에서부터 중간의 대적광전을 경유 이 장경각전까지(가장높은곳)의 계단의 수를 합하면 108개가 된다.

      

 

 

 

** 대장경을 보관하는 아름다운 목조건축

 

 

장경각은 수다라장, 법보전, 동사간고, 서사간고의 네 건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안에는 고려대장경판 81,258매 및 국보 제206호인 고려각판 2,275매가 보존되어 있다.

이 건물들은 조선 초기 목조건축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 주는것으로, 배치, 크기, 균형과 리듬에서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조선 초기에 수리한 대로 현재까지 보존되어 있다. 중국과 일본에도 17~18세기에 판각된 대장경판을 보관하기 위해 지은 건물들이 있다. 그러나 이 건물들은 시멘트와 같은 재료로 지었기 때문에 그 질이 한국의 장경각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떨어진다. 수다라장과 법보전에는 <고려대장경>이 보관되어 있는데, 해인사에서 새긴 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동사간고와 서사간고보다 크기도 더 크다. 이 건물들은 절의 중심 건물인 대적광전보다도 한층 더 높게 지어, 해인사의 건물들중 가장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데, 이는 불(부처), 법(부처의 가르침), 승(승단)의 삼보 중 해인사가 가장 중요시한 것이 부처의 가르침임을 상징하는 것이다.

 

 

** 현대 과학으로도 따라하기 힘든 자연친화적 건축물

 

 

장경각은 기둥이 108개인데, 이는 108번뇌를 상징함과 동시에, 번뇌의 집 속에 진리인 부처님의 말씀을 넣어둠으로써 번뇌속에 깨달음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장경각의 가장 뛰어난 특징은 그것이 과학적 설계에 따라 지어졌다는 사실이다. 즉 통풍은 최대한 잘 되게 하고, 습도는 적게

온도는 적당하게 유지해서 <고려대장경>이 잘 보존되도록 설계된 것이다. 화강암 초석위에 지은 장경각은 유체역학에 기초하여 설계되었지만, 수직 창살로 만든 나무창문 외에는 별다른 장치가 없다

그러나 <고려대장경>을 잘 보존할 수 있게 한 비밀은 바로 이 나무 창문에 있다.

 

옛 건물의 독창성은 창문의 설계를 통해 살펴볼 수 있는데, 장경각의 특징도 같은 맥락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수다라장과 법보전에는 앞 뒤벽 아랫부분과 윗부분에 나무창살이 달린 창문이 있고, 앞 창문과 뒷창문의 크기가 다른데, 바로 이 점 때문에 통풍과 공기의 순환을 극대화할 수 있는 것이다. 수다라장이라 불리는 앞 건물의 경우, 앞 벽 아랫부분의 창문은 위에 있는 창문의 약4배가 되고, 뒷벽 윗부분의 창문은 아랫부분의 창문보다 액1,5배 크다. 그리고 법보전이라는 뒷건물의 경우, 앞벽 아랫부분의 창문이 윗부분보다 약4,6배 크며, 뒷벽 윗 창문은 아래 창문보다 약 1,5배 크다.

 

이러한 창문 설계는 유체역학과 공기 흐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장경각을 지었다는 것을 증명해주며, 이러한 창문 설계때문에 자연 통풍의 극대화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즉 신선한 공기는 크기가 더 큰 위쪽 창문을 통해 들어오게 되고, 건물 안으로 들어온 많은 양의 신선한 공기는 반대쪽 창문으로 빠져나가기 전에 건물안에서 충분히 순환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아래 창문은 더 작게 만들어 건물 뒤쪽 땅에서 스며드는 습기를 최대한 막게 했다.

 

수다라장과 법보전은 1873년에 지은 정문을 제외하고는 흙벽으로 둘어싸여 있는데, 이는 무더운 여름에는 온도를 낮게 유지하고 습도를 자연적으로 조절해 주는 역할을 한다. 이 건물들은 바닥도 진흙으로 되어있는데, 이 점도 온도와 습기를 조절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계산된 장경각의 또 다른 특징이다. 장경각 바닥에는 구멍이 많이 뚫린 숯과 소금과 석회가 몇 층으로 깔려있는데, 이것은 무더운 여름 장마철에는 과도한 습기를 흡수하게 하고, 건조한 겨울에는 적정 수준의 습기를 유지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노출되어있는 나무 서까래와, 단순한 형태의 받침대위에 진흙과 기와로 뾰족하면서도 둥글게 지은 지붕도, 직사광선에 의한 온도변화를 방지하고 공기의 자유로운 순환을 가능케 한 장치이다.

 

경판을 두는 선반은 굵은 나무로 만들었는데, 이 선반에 두 단씩 경판을 놓을 수 있도록 단을 두어 공기 유통도 잘 되게 하였다. 경판도 손잡이 역할을 하는 마구리부분은 두꺼운 반면 글씨를 새간 부분은 얇게 되어있어 경판을 진열했을 때도 공기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될 수 있도록 만들었다.

 

 

** 세계인의 문화유산, 장경각

 

 

해인사의 장경각은 이제 세계인의 문화유산이 되었다. 문화적 면에서 이들 유산의 가치는 세계적인 인쇄 문화의 보물창고로서 이미 증명된것이지만, 이들 유산에 대한 우리들의 더 나은 이해를 필요로 한다. 고려대장경 주조는 고려가 당시 최고의 인쇄술을 자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해주고,

장경각의 가장 큰 특징은 그것이 지닌 과학성에 있었다. 최고의 인쇄술을 보유한 고려였지만, 당시의 인쇄술은 정부 문서를 효과적으로 보존하는데 주로 이용되었을뿐, 책의 대량보급을 통한 교육에

힘쓰지 않았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발명이 지난 천년 동안 인류역사에서 최대의 업적으로 인정받게 된 이유가 지식의 보편화에 있었던 것과는 상반되는 것이다

전산화 된 고려대장경의 기능향상도 필요하겠지만, 아직까지 별로 연구되지 않은 분야인 <고려대장경>의 내용과 특징에 대한 연구도 더욱 절실하게 요구된다

출처 : 낙송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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