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리신비

베이징은 지하에도 만리장성이 있다

영지니 2008. 4. 22. 21:32

땅속까지 파고든 '발칙한' 상상력?

[오마이뉴스 김대오 기자]

 

백성들의 피땀을 쥐어짤 어마어마한 대공사들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전제 군주의 즉흥적인 명령 한 마디로 시작되었다는 것을 빗대어 흔히 하는 우스갯소리로 만리장성은 진시황의 "야! 싸!" 한 마디로, 이화원의 곤명호(昆明湖)는 서태후의 "야! 파!" 한 마디로 시작되었다고 풍자한다. 베이징 지하에 30km에 달하는 지하성(北京地下城)이 있는데 이것도 아마 마오쩌둥(毛澤東)의 한두 마디에서 시작되지 않았을까 싶다. "깊게 파! 안 무너지게!"

 

▲ 베이징기차역 부근의 후통에 자리잡고 있는 베이징지하성의 입구.

 

1969년에 중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마오쩌둥은 "깊게 동굴을 파고 양식을 비축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지하갱도 구축 작업을 시작하게 된 것일까.

대외적으로는 그 해 3월 2일 전바오다오(珍寶島, 다만스키섬)에서 발생한 국경분쟁으로 소련과의 전쟁위기가 고조되었고 국내적으로는 문화대혁명으로 입지가 강화된 마오쩌둥이 홍위병을 앞세워 덩샤오핑(鄧小平), 리우샤오치(劉少奇) 등을 수정주의자로 몰아 숙청하고 다시 최고권좌에 복귀하는 시점이었다. 마오쩌둥은 중소분쟁을 구실 삼아 "전쟁에 대비한 전쟁준비를 강화하라"고 지시하며 대약진운동 이후 흔들렸던 자신의 위상을 다시금 확고히 하고자 했다.

 

 

군사문화시설 완비한 또 하나의 지하도시


 ▲ 베이징지하성 곳곳에 마오쩌둥의 동상과 사진 그리고 문화대혁명 당시의 노동화 등이 걸려 있다.

 

 

베이징지하성(北京地下城)은 1969년에 공사를 시작해 10년만인 1979년에 완공된 이후 1980년부터 외국인들에게만 제한적으로 개방되어 왔기 때문에 택시기사도 정확한 위치를 잘 몰랐다. 베이징역 근처에서 길을 물어 힘겹게 시따머창 후통(胡同) 안에 있는 작은 입구를 찾아냈다.

20위엔(3천원 정도)의 입장료를 내고 안내원을 따라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에서 길을 잃을 것을 우려하여 가이드가 동행하며 설명을 해주는데 한국 관광객들이 많아서인지 한글로 된 안내표지판도 있었다.

8m 깊이의 지하요새로 내려가자 제일 먼저 우리 일행을 반겨주는 것이 '마오쩌둥'이다. 이 지하성의 총설계자격인 그의 초상화가 곳곳에 걸려 있다. 갱도의 폭은 약 2m정도인데 현지가이드의 소개에 따르면 베이징의 도심부인 둥청(東城), 시청(西城), 충원(崇文), 쉬엔우(宣武)구에 거미줄처럼 지하갱도가 연결되어 있으며 총길이가 약 30km에 달한다고 한다. 그리고 베이징역, 고궁, 왕푸징(王府井)은 물론 톈진(天津)까지 갱도가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

 ▲ 지하 8m 깊이에, 폭 2m의 갱도가 사방으로 뻗어 있다.

 

 

실제로 베이징 뿐만 아니라 중국의 주요도시 지하에도 이 같은 지하요새들이 남아 있는데 현대화 과정에서 무너진 것까지 모두 포함한다면 만리장성보다 더 길 것이라고 보고 있다.

 

통로에는 5m마다 안전등이 걸려있고 그 중간에는 당시의 화생방전용 장비들이 걸려 있으며 가스유입을 막기 위해 특수제작 된 방호문도 보였다. 또한 지휘소, 무기고, 식량저장창고, 회의실, 도서관, 간부휴식소, 영화관, 이발소, 화장실은 물론 70여 곳의 지하수와 2300여 곳에 특수제작 된 환풍기가 설치돼 유사시 30만 명이 생활할 수 있도록 치밀하게 설계되어 있었다.



 ▲ 가스유입을 막는 돌로 된 방호문.

 

 

50대 이상 베이징 시민 총동원 "땅을 파시오"

사방으로 가지를 치며 뻗어가는 지하갱도가 미로처럼 펼쳐지는데 원래는 주민구의 입구까지 모두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 비록 많이 붕괴되었지만 지금도 이것을 지하창고로 이용하는 가구도 있다.

"인민전쟁"이라는 구호가 적힌 민병지휘소 근처의 벽화에는 땅을 파고 흙을 운반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모습이 담겨져 있다. 최고 18m 깊이에 달하는 힘든 공정을 별다른 장비도 없이 온 몸으로 감당해야 했던 이들의 고통이 떠오른다.

 ▲ 문화대혁명 당시 공사가 진행되는 현장의 모습이 벽화로 그려져 있다.

 

 

베이징지하성에서 안내원으로 일하는 왕(王)아저씨는 1969년 당시 중학교 1학년이었는데 토요일, 일요일 수업이 없는 날이면 공사장에 나와서 일을 해야 했다고 전했다. 그는 50대 이상의 베이징시민은 거의 땅굴파기 공사에 동원되었다고 말했다.

베이징지하성 근처의 골목에서 만난 리(李) 할아버지는 기술공으로 지하갱도의 주축기둥 축조를 담당했었다고 했다. 당시 작업을 주도한 것은 "디푸반화이(地富反壞, 지주, 부농, 반혁명, 우익)"로 불리는 반동분자들이었는데 이들에게는 "노동개조(勞動改造)"라는 명분으로 암반지역이나 하천을 가로지르는 등의 위험하고 힘든 과업이 주어졌다고 한다. 리 할아버지는 당시 건설업체의 국유기업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일주일에 하루나 이틀씩 땅굴파기 공사에 동원되어 하루 종일 일을 했으며 다른 사업 단위들도 대체로 비슷한 비율로 분담하여 교대로 일했다고 소개했다.

 ▲ 민병지휘소에 있는 베이징지하성의 약도.

 

 

일을 하면서 혹시 불평과 원망은 없었느냐고 묻자 전쟁위기의 급박한 상황과 지식인들도 샤팡(下放, 농촌이나 노동현장에 가서 노동을 체험하는 것)되던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를 소개하면서 "노동은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런 생각을 할 정신적인 겨를조차 없었다"고 말하며 담배를 피워 물었다.

왜 중국인들에게는 개방하지 않나

지난 4월 7일, <징화시바오(京華時報)>와 <런민왕(人民網)>이 베이징지하성에 대해 소개하면서 외국인만 관람이 가능하고 중국인은 입장이 통제된다는 보도를 내보낸 이후 중국의 인터넷에는 베이징지하성의 중국인 개방을 둘러싼 열띤 토론이 진행되었다. 25년 전에 완공된 베이징지하성이 이제서야 중국민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이유는 그간 이와 관련된 보도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포털 사이트 Sohu가 마련한 "베이징지하성은 중국인에게도 개방되어야 한다?" 토론방에는 네티즌들의 다양한 찬반 의견이 올라와 있다.

 ▲ 베이징지하성에 대한 중국인 개방을 둘러싼 찬반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중국의 포탈사이트 Sohu.

 

 

개방을 주장하는 네티즌들은 "외국에서는 '중국인과 개는 입장 사절'이라는 수모를 당하고 또 중국어로는 '참관사절', 영어로는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적힌 홍콩의 한 고급백화점을 60세의 한 중국 노부인이 들어가려다가 종업원에게 구타를 당하는 현실인데 이제는 역사적 유적지마저도 중국인을 무시한다"며 "당장 개방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 다른 네티즌은 "베이징지하성은 문화대혁명이라는 아픈 역사의 기념물이지만 이미 모든 중국인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 그것을 무슨 비밀처럼 감추고자 하는 것은 자승자박의 우를 범하는 것과 같다"고 주장했다.

한편 개방을 반대하는 네티즌들은 "안전상의 문제로 어차피 많은 인원이 한꺼번에 들어갈 수 없는 상황에서 외국인들에게 개방하여 경제적인 실리를 챙기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공사에 참여했다는 한 할아버지에게 한번 참관하고 싶은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내가 팠던 곳에 내가 가는데 돈을 내라고 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며 "함께 일하던 사람 중에 죽거나 다친 사람도 많았다, 그 가슴 아픈 기억이 묻혀있는 곳에 가고 싶지 않고, 개방에 대해서도 반대한다"고 대답했다.

지하베이징 중국인 개방 논란을 주제로 Sohu가 800여명을 대상으로 벌인 인터넷 여론조사에서는 '중국인에게 개방하는 것에 찬성한다'는 의견이 76.7%, 반대가 19.9%로 나타났다.

 

가스 제독이 가능하도록 특수제작되었다는 환풍기, 지상의 빛이 작고도 멀다.

 

 

출처 : 이선생의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