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 다듬음
● 고조선 멸망 때의 도읍지
고조선 멸망 당시의 도읍지는 과연 평양이었을가?(여기에서의 고조선이라함은 위만조선 곧 번조선 지역을 말하는 것입니다. - 펀주)
이 문제를 검토하는데 가장 중요한 사료는 조선왕(朝鮮王) 준왕(準王)의 도주로가 기록된 후한서(後漢書) 한(韓)조의 "옛날에 조선왕 준(準)이 위만(衛滿)에게 패하여 자신의 남은 무리 수천명을 거느리고 바다를 경유해[走入海] 마한(馬韓)을 공격해 쳐부수고 스스로 한왕(韓王)이 되었다."라는 부분이다.
이 기록을 참고한 것으로 보이는 '삼국지(三國志)' 한(韓)조도 "(준왕은) 그의 근신(近臣)과 궁인(宮人)들을 거느리고 도망하여 바다를 경유해 한(韓)의 지역에 거주하면서 스스로 한왕이라 칭했다"라고 거의 비슷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 기록은 그간 두가지 고정관념 속에서 읽혀 왔다.
그 하나는 준왕의 망명 전 도읍지가 평양(平壤)이라는 고정관념이고,
다른 하나는 준왕이 도주한 마한(馬韓) 지역이 현재의 충남이나 호남 지역이라는 고정관념이다.
그러나 도주 전 준왕의 거주지가 평양이고 도주한 마한이 충남이나 호남 지역이라면 준왕은 굳이 '바다를 경유해[走入海]' 도주할 필요가 없었다. 간편한 육로를 두고 굳이 많은 준비와 위험이 따르는 해로를 선택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고대 중국인들이 가리키는 '해(海)'는 대개 오늘날의 발해(渤海)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당시 조선과 중국의 국경이 난하를 중심으로 갈라져 있었으니 이 때의 '해(海)'도 역시 발해다.
따라서 준왕(準王)이 '비다를 경유해' 도주했다면 그것은 준왕의 도주 전 도읍지가 육로보다는 해로가 훨씬 유용성을 갖고 있는 지역이어야 한다. 이 경우 바다를 경유해서 도주하는 것이 유용성을 가지려면 최소한 배를 타는 것이 유리한 요동반도 지역이어야 한다. 이런 해석을 뒷받침하는 것이 '삼국유사(三國遺事)' 마한(馬韓)조의 기록이다.
"위지(魏志)에 이르기를 위만(衛滿)이 조선(朝鮮)을 치니 조선왕 준(準)이 궁인(宮人)들과 좌우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越海] 남쪽의 한(韓) 지역에 이르러 개국(開國)하고 이름을 마한이라고 했다."고 했으며 (중략) 최치원(崔致遠)은 말하기를 '마한(馬韓)은 고구려이고 진한(辰韓)은 신라이다.(후략)'라고 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준이 이주한 곳은 단군조선의 삼한 중 마한지역이었던 곳이므로 그곳으로 이주하여 마한을 자칭한것이 아닐까요? 당시에는 이미 단군조선이 분열되고 있던 혼란한 시기이므로 무주공간의 지역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 않을까요?
또한 최치원의 말은 고구려의 출발점인 졸본부여는 당시에는 마한지역이었으므로 마한이 고구려라고 하였다고 생각되며, 신라가 계승한 진한은 단군조선이 망하자 반도로 이주한 주민들이 반도 남부에 세웠던 삼한 중 진한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됨니다. - 펀주)
'마한은 고구려'라는 최치원의 말은 준왕이 도주한 지역이 현재의 평양 지역임을 강하게 시사해 준다. 이는 다시 말해 준왕이 위만에게 내준 조선(번조선 -펀주)의 도읍지가 평양이 아니라 요동 지역에 있었던 것이고, 바로 이 지역이 조선(위만조선 - 펀주) 멸망시의 도읍지인 것이다.
(고)조선의 도읍지가 평남 일대라는 대동강 중심설은 이미 그 논거를 상실했지만 (고)조선 멸망시의 도읍지가 평양이라는 중심지 이동설도 후한서(後漢書)의 기록과 삼국유사에 인용된 최치원의 '마한은 고구려'라는 인식에 의해 설득력을 상실했다. 이는 (고)조선의 도읍지가 이동했을지라도 요동에서 한반도로 이동한 것이 아니라 만주 지역 안에서 서로 이동한 것이 된다.
고조선(古朝鮮- 고대 사서에는 고조선이라는 단어는 없습니다. 후대에 이성계의 조선과 구별하기 위하여 고조선이라고 한 것이므로 이후에는 모두 조선이라고 칭하겠습니다. - 펀주)을 멸망시키고 설치했다는 한사군(漢四郡)의 유물이 한반도 내에는 전혀 출토되지 않고 만주 지역에서만 출토되는 것이 이를 입증한다. 평양 지역에서 다수 출토되는 중국계 유물들은 한나라가 조선을 멸망시킨 전한(前漢) 때의 유물이 아니라 고구려가 존재했던 후한(後漢) 때의 유물이다. 이 부분은 열국시대의 낙랑국(樂浪國)과 낙랑군(樂浪郡)에 대한 기술에서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만주 일대와 한반도 북부 지역을 아우르던 우리 민족 최초의 고대 국가 조선의 도읍지는 시작은 물론 최후의 도읍지도 만주 지역에 존재했던 것이다.
이런 강역 문제에 대한 북한 학계의 논리 변화는 흥미롭다. 북한 학계는 1960년대 초반에는 평양 지역의 중국계 유적, 유물을 토대로 대동강 중심설을 주장하다가 그 후 조선의 중심지가 요동반도에 있었다는 요동 중심설로 정리했다. 그러나 최근 조선사(朝鮮史) 전체를 평양을 중심으로 기술하려는 주체사관(主體史觀)을 공식화시키면서 다시 대동강 중심설로 선회했는데, 여기에는 최근 발굴했다는 단군릉(檀君陵)이 중요한 근거가 되고 있다.
● 기자조선(箕子朝鮮)의 실체
기자조선도 후대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 인정과 부인이 반복되었다.
문헌 기록상 기자(箕子)를 섬긴 최초의 국가는 고구려다.
'구당서(舊唐書)' 고구려(高句麗)조의 "영성신(靈星神), 일신(日神), 가한신(可汗神), 기자신(箕子神)을 섬긴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고구려는 가한신, 즉 단군과 함께 기자신을 섬긴 것이다.
이후 기자는 우리 역사에서 실존 인물로 받아들여졌다.
신라 후기 당나라에 유학했던 최치원(崔致遠)은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을 인정했으며, 고려 숙종(肅宗) 7년(1102년)에 평양에 기자사당이 세워지고, 명종(明宗) 8년(1178년)에 기자 묘에 유향전(油香田) 50결이 배당된 것은 기자 존승이 국가적 행사가 되었음을 뜻한다.
대몽항쟁(對蒙抗爭) 이후 이승휴(李承休)는 '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 전조선(前朝鮮)의 시조로 단군(檀君)을, 후조선(後朝鮮)의 시조로 기자(箕子)를 노래했다. 그리고 충숙왕(忠肅王) 12년(1325년) 평양에 기자사당이 세워지고, 공민왕(恭愍王) 5년(1356년) 이를 다시 중수했다.
조선은 국호 자체가 기자 존숭을 의미했다. 정도전(鄭道傳)이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에서 기자조선(箕子朝鮮)의 계승자라는 의미에서 국호를 조선으로 정했다고 말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태종(太宗) 3년(1403년)에 편찬된 동국사략(東國史略) 이후
국가에서 편찬한 역사서에는
단군조선(檀君朝鮮),
기자조선(箕子朝鮮),
위만조선(衛滿朝鮮)으로 이어지는 상고사 체계가 확립되었다.
16세기 이후 사림파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기자 존숭은 한층 강화되어 윤두수(尹斗壽)는 기자지(箕子志)를 기술했고, 이율곡(李栗谷)은 기자실기(箕子實記), 한백겸(韓百謙)은 기자유제설(箕子遺制說)을 저술했다.
조선 후기 여진족(女眞族) 왕조인 청(淸)나라가 중원대륙을 지배하면서
중국에서는 중화국(中華國)이 사라진 반면,
조선이 소중화국(小中華國)이 되었다는 사상이 확산되면서 기자조선은 더욱 존숭되었다.
이처럼 조선 후기까지 기자조선의 실체를 부정하는 의견은 없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 학계에서는 기자조선의 실재를 부정하는 '기자 부정론(箕子不定論)'이 통설을 이루고 있다. 이는 기자조선에 대한 엄밀한 학문적 연구 성과의 결과라기보다는 이민족인 중국인이 기자조선을 건국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감정적 차원에서였다.
또한 기자조선(箕子朝鮮)을 부정하는 것이 중화 사대주의(中華事大主義), 친일 식민사관(親日植民史觀)의 잔재를 청산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 때문인데 역사가 실재가 아닌 후대의 감정에 의해 부정된다는 것은 문제의 소지를 안고 있다.
기자조선(箕子朝鮮)을 부정할 경우, 기자(箕子)라는 은나라 사람이 조선을 통치했다는 이민족 지배의 논리도 부정되지만 단군조선(檀君朝鮮)도 부정될 위험성을 지니게 된다는 점 때문에 더욱 그렇다.
국내 학계는 청동기시대에 국가가 태동했다고 설명하면서 한반도 청동기문화의 시작을 현재 기원전 10세기경으로 보고 있다. 그것도 그간에는 기원전 8세기로 한정하다가 최근에 올린 연대다. 앞서 기원전 8세기에 최초의 국가가 창립되었다고 산정하다 보니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이 서로 부딪치게 되었다.
즉, 기자조선의 성립 시기를 기원전 12세기경으로 보기 때문에 기자조선을 인정하게 되면 단군조선이 허구가 되는 모순된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발해연안의 초기 청동기문화는 기원전 2000년경 이상까지 올라가며 이 또한 앞으로의 발굴 성과에 따라 더 올라갈 수 있다. 따라서 현재까지의 발굴 성과와 위서나 삼국유사의 기록 등 문헌자료로도 단군조선의 건국연대는 BCE 2333년과 거의 일치한다 - 펀주)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을 식민사관의 잔재로 비판하면서 부정하다 보니 이는 자연히 단군조선의 부인으로 이어졌다. 기자조선을 역사적 실재로 인정하지 않는 연장선상에서 단군조선도 자연스레 부정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기자조선은 막연한 허구로 치부하기에는 관련 문헌은 물론 고고학 유물들도 상당하다는 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기자동래설은 전한(前漢) 때에 편찬된 상서대전(尙書大全)에 처음 나타난다. 기자동래설이 선진시대(先秦時代) 문헌에는 보이지 않다가 한대(漢代)에 와서야 보이는 것을 부정의 근거로 삼기도 하지만, 어쨌든 상서대전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은(殷) 주왕(紂王)의 비정을 간하다가 옥에 갇힌 기자(箕子)는 은나라를 멸망시킨 주(周) 무왕(武王)에 의해 해방된다. 기자는 비록 주왕에게 간쟁하다가 투옥되었지만 은나라를 멸망시킨 주나라의 무왕을 섬길 수 없다는 생각에서 '조선(朝鮮)'으로 망명한다. 무왕은 그 소식을 듣고 기자를 조선의 제후(帝侯)로 잭봉(지나인들은 이런식의 기록을 많이 남김, 춘추필법 - 펀주)했다. 주나라의 책봉을 받은 기자는 신하의 예를 행하지 않을 수 없어서 무왕(武王) 8년에 주 왕실에 조근(朝覲)가서 무왕에게 홍범(洪範)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이다.
여기에서 가장 주목되는 점은 기자가 '조선'으로 망명했다는 기록이다. 이는 조선이라는 나라가 기자의 망명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조선'은 당연히 단군조선이다. 상서대전의 내용은 기자가 동쪽으로 망명했다는 사실보다 그 동쪽에 이미 '조선'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주목할 만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오히려 기자조선(箕子朝鮮)은 단군조선(檀君朝鮮)의 실재를 입증하는 물증일 수도 있다. 상서대전(尙書大全) 외에 사기(史記)도 기자조선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데, 상서대전이 기자가 나중에 봉함을 받았다고 기술한 반면, 사기는 그가 봉함을 받은 뒤 나라를 열었다고 적어(더 악랄한 춘추필법 - 펀주)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중국 요녕성과 산동성에서 기자 관련 유물이 출토되고 있는 점도 기자를 무작정 부정할 수 없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다. 1973년 중국 요녕성(遼寧省) 객좌현(喀左縣)에서 '기후(箕候)'와 '고죽(孤竹)'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방정(方鼎) 등 청동 예기(禮器) 6점이 출토되었다.
이들 유물의 제작 시기는 은나라 말기이므로 기자(箕子)의 생존 시기와 일치한다. 기자가 자신의 족속들을 데리고 피신했다고 알려진 지역은 난하(爛河)와 대릉하(大陵河) 사이의 고죽국(孤竹國)인데 객좌현은 하북성(河北省) 노룡현(盧龍縣)에서 멀지 않은 지역이다.
그런데 이런 유물들이 무덤이 아니라 지하의 임시 유물저장소인 교장갱(喬藏坑)에서 발굴되었다는 점에서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이는 기자족속이 이 지역에 오래 거주하지 않고 곧 다른 곳으로 이주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출토 유물로 볼 때 기자족(箕子族)이 오래 거주한 지역은 산동성(山東省)으로 보인다. 1951년 산동성 황현(黃縣) 남부촌(南埠村)에서 8점의 기기(箕器)가 출토되었고, 1969년에는 산동성 연대시(烟臺市) 남쪽 교외에서 기후정(箕候鼎)이 출토되었다. 그런데 이들 청동 예기는 교장갱이 아닌 무덤에서 출토되었다. 이 유물들은 서주(西周) 후기부터 춘추시대에 걸쳐 제작된 것으로서 이 시기에 기자족속이 이 지역에 거주했음을 말해준다.
요녕성과 산동성 출토 유물들의 제작 시기로 보면 요녕성 지역에 갔던 기자족속이 산동 지역으로 재차 이동했다고 볼 수 있다. 아니면 요녕성 지역에서 한 갈래는 산동 지역으로 이동하고 한 갈래는 동쪽으로 이동을 계속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 경우 동쪽으로 계속 이동한 세력이 기자조선의 실체일 가능성이 있게 되지만 이를 입증할 유물은 아직 촐토되지 않고 있다.
'위략(魏略)'에 기원전 4세기 말~ 기원전 3세기 초에 왕(王)을 칭했던 조선(번조선 - 펀주)의 최고 지배자가 '기자의 후손 조선후(朝鮮候)'라는 기록이 나오는 점이나 삼국지(三國志)에서 위만(衛滿)에 의해 축출된 준왕(準王)을 '기자의 4-여세손'이라고 한 기록들은 단군조선과 기자조선, 위만조선의 상관관계를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기자조선은 비교적 풍부한 문헌상의 기록에도 불구하고 그 실재를 의심하는 견해가 과거부터 있어 왔다. 이규경(李圭景; 1788~?)은 중국에만 기자 묘가 세 군데나 존재한다며 평양 기자 묘의 실재를 의심했다. 그는 '오주연문장전산고(五州衍文長箋散稿)' 에서 치밀한 고증을 통해 기자조선은 새로운 지배세력으로 등장한 한씨조선(韓氏朝鮮)을 뜻한다며 기자조선의 성격을 조선 내부의 왕실 교체라고 규정짓기도 했다.
천관우(千寬宇)는 기자족속을 동이족(東夷族) 안에 있었던 하나의 씨족 단위로 파악했다. 글나 중국 산서상 태곡현(太谷縣) 일대를 시발점으로 이동을 시작해 난하 유역에 일시 정착했다가 요서와 요동을 거쳐 평양 지역에 정착한 것이라며 기자동래설 자체는 긍정했다.
윤내현(尹乃鉉)은 기자국(箕子國)은 중국 변방에 있었던 소국(小國)이었는데, 그 말기에 조선의 변경에 위치하게 되었지만 조선 사회의 주도적인 세력은 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즉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은 인정했지만 기자조선이 단군조선의 주류적 위치를 차지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기자조선은 단군조선의 주도적인 세력이 아니라 단군조선의 삼조선(삼한) 중에서도 번조선(번한)의 속국이었던 것이다. - 펀주}
그의 주장은 기자조선의 서쪽 경계인 패수(浿水)는 난하이고 조선의 중심지는 요하 일대임이 전제된 것으로서, 조선의 후기 중심지를 평양이라 비정하고 있는 기존 학설과도 대치되고 있다.
● 위만(衛滿)의 계통
반면 위만조선에 대해서는 그 실재에 대한 이론 대신에 위만이 조선인인지 연나라 사람인지에 대한 논의가 더 많다는 특징이 있다. '사기(史記)' 조선열전(朝鮮列傳), '한서(漢書)' 조선전(朝鮮傳),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 '삼국지(三國志)' 위지동이전(魏璡夷傳) 등의 사료에 따르면, 위만은 기원전 194년에 조선을 장악했고 그 손자 우거왕(右渠王) 재위기인 기원전 108년에 한나라에 멸망한다.
'삼국지'에 '위략(魏略)'으로 인용된 내용을 보자.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망명하여 오랑캐의 복장을 하고 동쪽으로 패수(浿水)를 건너 준(準)에게 항복했다. (위만이) 서쪽 변경에 거주하도록 해 주면 중국의 망명자를 거두어서 조선의 번병(蕃屛)이 되겠다고 준을 설득했다. 준은 그를 믿고 사랑하여 박사에 임명해 규(圭)를 하사하고, 백리의 당을 주어서 서쪽 변경을 지키게 했다. 위만이 (중국의) 망명자들을 유인하여 그 무리가 점점 많아지자 사람을 준에게 파견해 속여셔 말하기를, "한(漢)나라의 군대가 열 군데로 쳐들어오니, (왕궁에) 들어가 숙위하기를 청합니다."하고는 드디어 되돌아서서 준을 공격했다. 준은 만과 싸웠으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위만이 (번)조선으로 망명한 것은 중국 내부의 정세와 관련이 있다. 기원전 206년 한나라 초대 황제인 고조(高祖)가 천하를 통일하고 노관(盧館)을 연왕(燕王)에 봉했으나 노관이 모반하여 흉노로 도망갔고 연국(燕國)은 혼란에 빠졌다. (노관의 부하였던 - 펀주) 위만은 이 틈을 타서 연나라의 망명자 1000여명을 이끌고 패수를 건너 준왕에게 항복하는 것이다.
최남선(崔南善)은 위만을 연나라 사람으로 보아 이를 '위만의 도둑질'이라고 했으나 이병도(李丙燾)가 위만을 패수 이북 요동지방에 토착한 조선인 계통 유민으로 보면서 그가 조선 유민이라는 것이 통설이 되었다. 위만을 조선인 계통 유민으로 보는 근거로는 '사기(史記)'에 그가 '추결(趨結)에 만이복(蠻夷服)을 입었다'는 사실과 준왕이 요지인 국경수비대장을 맡길 정도로 신임했다는 점, 그리고 나라를 차지한 후에도 조선이라는 국호를 유지했다는 점 등이 제시된다. 그러나 '사기'나 '삼국지'에서 분명히 '연나라 사람[燕人]'이라고 기록된 위만을 '북상투[趨結]'와 '오랑캐 복장[蠻夷服]'이라는 것만으로 조선인으로 볼 수 있는지에 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번)조선의 도읍지를 장악한 위만은 기원전 193년~ 기원전 192년 경 한(漢)의 외신(外臣)이 되어 한나라와 외교관계를 정상화시킨 후 주변 나라들을 복속시켜 나갔다.
'사기'에 "위만(衛滿)은 군사의 위세와 재물을 얻게 되어 그 주변의 소읍(小邑)들을 침략하여 항복시키니, 진번(眞番)과 임둔(臨屯)도 모두 와서 복속하여 (그 영역이) 사방 수천 리가 되었다."고 기록한 대로, 주변 소국들과 진번, 임둔까지 복속시켜 강대한 국가로 발전시켜 나갔다.
이 때의 '사방 수천리'는 (번>위만)조선 전체 강역이 아니라 위만의 영향력 아래 있는 제한된 강역을 의미한다. 위만이 진번, 임둔 등지를 복속시킨 것은 그가 동쪽보다는 자신이 원래 살았던 서쪽 지향성을 갖고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위만조선(衛滿朝鮮)의 이런 확장 방향은 중원의 통일제국 한나라에 위협이 되었다. 한(漢)의 다섯번째 황제인 태종(太宗)이 즉위하자 장군 진무(陳武) 등이 "남월(南越)과 조선(朝鮮)은 진(秦)의 전성기에 내속하여 신하가 되었으나 그 후에 병력을 갖추고 험한 곳에 의지하여 중원을 엿보고 있습니다."라고 말한 것이 이런 사정을 말해준다.
위만의 손자 우거왕(右渠王)대에 이르러서는 더욱 적극적인 정책을 펼쳐 나갔다. 한의 망명자들을 적극 받아들이고 한나라 황제에 대한 입견(入見)을 거부했으며, 진번 주변의 여러 나라들이 한나라에 조공하려는 것을 막았다.
우거왕의 이런 정책은 한나라를 자극했을 뿐만 아니라 (번>위만)조선 내부에도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 예(濊)조의 "원삭(元朔) 1년(기원전 128년) 예군(濊君) 남려(南閭)가 우거를 배신하고 28만명을 데리고 요동으로 갔다."는 기록이 이를 말해준다. 우거를 배신한 남려가 예'군(君)'이었다는 사실은 (번>위만)조선도 한나라처럼 여러 속국들을 거느리고 있었음을 뜻하는 것으로, 이런 속국이 적어도 28만명 이상을 거느리고 있었다는 사실은 (번>위만)조선의 인구 규모가 이보다 훨씬 컸음을 추측하게 해 준다.{번조선도 이러할 진데 망하기 전의 단군조선(진조선)은 어떠하였으랴, 이 때는 단군조선의 국호가 대부여로 변경되고 엄청 혼란한 시기였음- 펀주}
우거왕에 대한 반발은 예군 남려만이 아니었다. '삼국지(三國志)' 위지동이전(魏璡夷傳) 한(韓)조는 "조선상(朝鮮相) 역계경(歷谿卿)이 우거에 반(反)하여 2000여호의 백성을 데리고 진국(辰國)으로 망명했다."고 적고 있는데 지배층의 잇따른 망명은 우거왕의 왕권 강화책에 대한 반발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진국이 바로 삼한 중의 진한이다. - 펀주)
우거왕은 이런 반발에도 굴하지 않고 왕권 강화책을 계속 펼쳤고, 이는 이 지역을 자국의 영향권 아래 두려는 한나라와의 충돌을 낳았다. 특히 우거왕이 주변 국가들의 한나라에 대한 조공과 무역을 통제한 것은 한나라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한(漢)의 일곱번째 황제인 세종(世宗)은 기원전 109년 섭하(涉何)를 사신으로 보내 협박과 회유를 병행했다. 우거왕은 한나라의 세계체제 속에 편입하라는 섭하의 제의를 거부했고, 아무 성과없이 귀국할 수 없었던 섭하는 국경인 패수에 이르러 전송나온 조선의 비왕(裨王) 장(長)을 창으로 찔러 죽이고 강을 건너 도주했다.
우거왕에게 모욕을 당했다는 섭하의 말을 들은 한나라의 황제 세종은 오히려 그를 칭찬하며 요동동부도위(遼東東部都尉)라는 벼슬을 내렸다. 섭하가 조선의 비왕을 살해했다는 소식을 듣고 격분한 우거왕은 패수를 건너가 섭하를 참살했다. 그러자 세종은 조선 정벌을 결심하고 군사를 일으켜 (번>위만)조선 침공을 감행하게 된다.
● 한(漢)은 과연 승전국(勝戰國)인가.
(위만)조선을 방치할 경우 이민족에 대한 통치체제가 붕괴할 것을 두려워한 한나라는 기원전 110년 흉노(匈奴)와 남월(南越)에 대한 정벌이 일단락되자 이듬해인 기원전 109년 가을 수륙 양군을 동원해 조선을 침공했다. 누선장군 양복(楊僕)은 제병(齊兵) 7천여명을 거느리고 산동반도에서 발해를 건너 왕검성(王儉城)을 공격했으나 우거왕(右渠王)이 직접 지휘하는 조선군에게 참패를 당해 10여일을 산중에 숨어 있어야 했다. 좌장군 순체(荀遞)는 요동 지역의 병사 5만명을 거느리고 고조선의 패수(浿水) 서군(西郡)을 공격했으나 역시 패배하고 말았다. (번>위만)조선은 한나라의 수륙 양군을 모두 패퇴(敗退)시킬 정도로 강력한 군사력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한나라의 황제인 세종(世宗)은 사자(使者) 위산(衛山)을 보내 강화회담에 임하게 할 수밖에 없었다. (위만)조선의 강화 대표는 우거왕의 태자였는데 그는 1만여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패수를 건너 강화회담에 임하려 했다. 그러나 위산과 순체는 태자에게 무장을 해제한 후 패수를 건널 것을 요구해 왔고, 이에 태자는 패수를 뒤로 한 채 군사를 거느리고 돌아가 버렸다. 위산이 세종에게 강화 결렬을 보고하자 화가 난 세종은 그의 목을 베어 버렸다.
강화(講和)가 결렬되었으니 전투가 재개될 수밖에 없었다. 순체는 왕검성의 서북쪽을 포위하고 양복은 성의 남쪽에 주둔해 공격했으나 우거왕이 수성전(守城戰)을 펼치자 몇달이 지나도 함락시키지 못했다. 이 때 한나라 군대 내부에 분열이 발생했다. 좌장군 순체는 맹렬한 공격을 주장한 반면 누선장군 양복이 이에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자 세종(世宗)은 제남태수(齊南太守) 공손수(公孫遂)를 파견해 전쟁을 지휘하게 했다.
전선(戰線)에 온 공손수에게 순체는 양복이 (번>위만)조선 측과 내통하고 있다며 그를 체포하지 않으면 (번>위만)조선군과 합세해 자신들을 공격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말을 들은 공손수는 양복을 체포하고 수륙 양군을 통합한 후 이 사실을 세종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군사체제의 변경에 분개한 세종은 앞서 위산을 죽인 것처럼 공손수도 죽여 버렸다. 할 수 없이 한나라 군사들은 다시 왕검성을 맹렬히 공격했으나, 우거왕의 강력한 저항으로 사상자만 속출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계속되자 (번>위만)조선군 내부에도 분열이 발생했다. 조선상(朝鮮相) 노인(路人), 한음(韓陰)과 니계상(尼谿相) 참(參), 장군 왕겹(王鉗) 등이 오랜 전쟁에 지쳐 강화(講和) 쪽으로 돌아선 것이다. 이들이 강화로 돌아선 데에는 한나라의 이간책(離間策)과 우거왕의 왕권 강화책에 대한 반발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고, 더 이상의 전쟁에 반대한 한음, 왕겹, 노인은 한나라로 도망갔다. 참은 성문을 열어 항복하려 했으나 대신 성기(成己)가 우거왕을 대신해 굳게 지키는 바람에 실패했다.
강공보다는 회유책이 효과적임을 확인한 한나라는 다시 (위만)조선 내부 분열책을 시도했다. 좌장군 순체는 우거왕의 아들 장항(長降)과 노인(路人)의 아들 최(最)로 하여금 조선의 백성들을 회유하게 하면서 끝까지 저항하고 있는 대신(大臣) 성기(成己)를 죽일 것을 지시했다. 드디어 대신 성기까지 살해되면서 성은 함락되었다. 기원전 108년 여름, 1년 이상을 끌어온 위만조선(衛滿朝鮮)과 한나라 간의 전쟁은 (위만)조선 지배층의 내부 분열로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내부분열이 아니라 조선(단군조선)족 4인방(참,협,음,최)이 각자 순수조선족 독립의 기치를 내걸고 합심하여 한나라군을 물리친것임. - 펀주}
결과는 외형상 한나라의 승리였으나 내용적으로는 고조선의 자멸(自滅)이었다.(외형상으로도 조선족의 승리요, 내용적으로도 조선족의 승리였다. - 펀주)
이는 '사기(史記)' 조선(朝鮮)조의 전쟁 관련자 상벌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고조선을 멸망시키는 데 성공한 좌장군 순체(荀遞)는 포상을 받기는커녕 "공(功)을 다투고 시기해 계획이 어긋나게 했다."는 이유로 참형(斬刑)을 당했으며, 누선장군 양복(楊僕)은 "많은 병사를 잃었다."는 이유로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었는데, "주살함이 마땅하나 속전(贖錢)을 바쳤다."는 이유로 겨우 목숨만 부지한 것이었다. 앞서 위산(衛山)과 공손수(公孫遂)는 전쟁 과정에서 이미 처형된 뒤였다.
사마천(司馬遷)의 평대로 "양군(兩軍)이 함께 욕을 당하고 장수로서 후(侯)에 봉해진 자가 아무도 없다."는 엄중한 문책을 당한 것이다.
반면 (번)조선 지배층으로 공을 세운 니계상(尼谿相) 참(參), 상(相) 한음(韓陰), 장군 왕겹(王鉗), 우거의 아들 장항(長降), 노인(路人)의 아들 최(最)는 모두 후(侯)에 봉해졌다. 이는 고조선의 멸망이 한나라의 승리가 아니라 고조선의 자멸이었음을 말해주는 증거이다.(이들 4인방은 조선족으로서 봉기를 일으켜 한나라에 대항해 독립한 것이다. 이를 지나인들이 제멋대로 각색한 후 제후로 봉한 것이라고 적어 놓은 것이다. 춘추필법의 극치를 보여주는 사례임 - 펀주)
(번>위만)조선은 기원전 108년 한나라의 공격으로 이렇게 멸망했다.
한나라는 위만조선 옛 영토에 자신들의 행정 구역인 군(郡)을 설치해 통치(이 지역은 조선인의 자치지역이었음. 그래서 후에 고구려에게 정복당한 후 쉽게 동화 되었던 것이다. - 펀주)했으나 이는 일부에 그쳤고,
(단군)조선의 옛 강역(진한과 마한 지역 - 펀주)에서는 부여와 고구려를 비롯해 많은 국가들이 분립하여 일어났다.
이렇게 열국시대(列國時代)가 시작되고 있었다.
출처; 휴머니스트(humanist) 版 '살아있는 한국사 -한국 역사 서술의 새로운 혁명
해설; 이덕일(李德一)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출처 : | 역사, 천부경과 홍익인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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