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야할한국사

한반도에서 유럽을 침공한 흉노?

영지니 2007. 3. 11. 18:05

 

우리역사의 비밀에서 道不遠人님의 글 퍼 다듬음

 

 

 

한반도에서 유럽을 침공한 흉노?


제목이 너무 공격적이고 피상적일 수도 있겠으나 이 내용과 유사한 내용이 <12세기 초강대국 고려>라는 사이트에 이슈로서 기록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보다 좀더 구체적인 내용을 아래와 같이 서술하고자 한다.

실제 근자에 출판된 <<실크로드를 달려온 신라왕족>>이라는 책의 내용을 보면 신라경주에서 발견된 <말탄 기마상>에 대한 연원이 신라 독자적인 것 이 아니라 북방문화이 흐름이라는 일종의 민족적 교류의 결과였으며 바로

신라의 민족적 연원은 중국의 <한서>에 기록된 진한인들에 대한 민족적 서술시기 보다 훨씬 오래된 연원을 갖고 있었다고 보여지는데 고깔모자의 연원을 규명하는 것이다.

기마상에 있는 말탄 기마인은 고깔모자와 편두,그리고 솥단지를 말에 싣고 있는 모습인데 책의 저자는 말탄기마인의 모습이 바로 흑해연안,터키남부, 이란부근에 살고 있던 프리기아인으로 부터 유래한다는 다소 문화 동방이동설을 제시하고 있다.흑해로부터 시작하여 그 동쪽인 알타이 러시아 북스텝지대 그리고 아프카니스탄 그 동쪽인 천산산맥으로 이어지는 민족과 문화의 흐름길을 경유하여 보면 바로 신라인의 유래를 파악할수 있다고 하는것이다.

고깔모자 문화와 화려한 금동관 장식 그리고 금동장식품 들은 프리기아인,스키타이인,흉노족,그리고 신라인으로 까지 연결되는 문화의 동질성과 관련성이 한눈에 파악 되는것이다. 그리고 흉노,신라,가야문화에서 동일하게 발견되는 편두풍습,편두로인한 관자근육의 후면이동의 결과로 인한 찢어진 눈,직경이 좁은 금관모 ,적석목곽묘 등등...

이러한 관련성을 바탕으로 깔고 아래의 글을 읽어보시면 좀더 명확한 고대 신라사의 정리가 되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실제로 우리가 알고있는 게르만의 이동으로 인한 동로마의 패망 ,그 게르만을 이동케한 동유럽을 정벌한 훈족,훈족의 왕 <아틸라>가 이끌었던 그들의 동진 그것만이 아니라 훈족을 서로 움직이게 한 배경이 무었이었던지 그리고

민족적 연관성은 무었이 었던가에 대해 서양인이 추적한 흉노족에 대해서 서술한다.

서기 370년 바람과 같이 유럽 다뉴브강(현 헝가리) 초원에 진출한 훈족(흉노)에 대한 배경은 아직까지 미스테리로 남아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정확하게 어느 민족이며 아시아 어느 지점에서 출발해서 유럽으로 이동했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 대한 연구는 아시아 지역에서 거의 전무한 상태였고 훈족에 대한 연구는 유럽인 들이 300 여년 전 시작해 훈족이 흉노라는 베일이 벗겨지기 시작했다. 유럽에 진출한 훈족에 대한 기록은 로마인들이 많이 남겼으며 그 기록 중에서 훈족은 네모진 얼굴에 광대뼈가 툭 튀어나오고 납작한 코, 옆으로 가늘게 죽 찢어진 눈, 이마에 편두를 한 작달막한 사람들로 로마인들에게 혐오감을 주었든 이들은 분명 아리안족인 백인과는 거리가 먼 중앙아시아와 몽골 초원에 살든 몽골계 유목민족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이들은 유럽과 중근동을 지배하든 대제국 로마와 싸워 그들을 괴롭히며 로마로 부터 조공을 받아내면서 활동영역을 서유럽까지 넓혀 갔다. 이들과 끝임없는 전쟁을 치루며 조공으로 국력을 잃은 서로마는 끝내 침입해온 게르만족에게 힘없이 멸망했다.

로마의 어린이도 훈족이 온다면 울음울 그치게 할 정도로 전쟁터에 나가서 살아서 움직이는 모든 사람과 동물을 죽이는 잔인 하기가 이루 말 할 수 없는 그들이 유럽으로 출발한 근원지를 추적한 다큐가 독일과 미국에서 두 편 제작되었다.

독일 ZDF 방송에서 제작한 스핑크스, 역사의 비밀에서 독일 연출가인 옌스페터 베렌트와 미국의 코넬 대학 교수인 아이케슈미트 박사가 훈족을 집중 적으로 추적하면서 한반도 남단인 목곽적석 신라고분군에서 발굴되는 많은 유물을 검토한 후 내린 결론은 훈족이 아시아 최동쪽 한반도에서 출발 했을지도 모른다고 결론을 내렸다.

미국에서 제작된 훈족 다큐 Atilla, The king of Babarian 은 메모해둔 자료가 없어져 다큐제작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잊어 버렷지만 기억에 남은 그들은 중국과 미국의 역사 학자들이었다.

두편의 다큐를 비교해 보면,

독일 ZDF 방송에서 제작한 다큐는 철저하게 유물고증으로 훈족의 출발지가 한반도 일지도 모른다는 점을 고증을 해가면서 밝히고 있으며, 1997년 방영된 미국에서 제작한 훈족 다큐는 첫번째 화면에 한반도 지도가 나오면서 붉은 화살표가 한반도에서 만주 벌판으로 뻗어올라 가며 훈족의 출발지를 한반도 본토로  기정 사실화 하면서 훈족은 한반도 깊숙한 본토에서 출발했다는 설명이 이어지는 티비 화면을 보면서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다큐는 너무나 큰 충격이어서 다큐를 본 후 훈족의 자료를 찾아 오늘 이 시간 까지 책과 인터넷에서 훈족의 자료를 수집하는 계기가 되었다. 신라와 한반도에 정착한 훈족(흉노)이 서유럽으로 진출했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이해하려면 우선 우리가 알고 있는 피상적인 스키타이 민족에 대한 정보 보다는 이들에 대한 폭넓은 역사와 문화를 살펴보지 않고는 이해 할 수가 없다고 생각해서 스키타이민족에 관한 역사자료를 시작으로 유럽으로 이주한 흉노의 발자취를 그들이 남긴 유물을 비교해 가면서 살펴보려고 한다.

1,스키타이 민족과 역사

스키타이 병사들은 죽은 적병의 두피를 벗겨 양손으로 비벼서 부드럽게 만들어서 필요할 때 마다 수건처럼 사용했다. 그들 사이에서 두피를 많이 가진자가 존경을 받고 두피조각을 여러개 꾀매서 큰 두피수건을 만들기도했다. 적병의 머리를 잘라 두개골 윗쪽부분 안쪽을 금판으로 입히고 가죽으로 밖을 씌워 컵으로 사용했다.집안에 수많은 두개골을 금장식품과 함께 진열해서 찾아오는 손님에게 집주인은 자신의 용맹을 과시했다.

스키타이민족의 신화는 제우스의(Zeus) 아들 타기타우스(Targitaus)가 그들의 조상이라고 전해져오지 만, 문자가 없는 그들의 역사를 추정하기는 쉽지 않다.기원전 6세기경부터 우리가 알고 있는 독특한 스키타이 양식의 문화가 발달하기 시작했을 것이라고 알려졌다. 멜유코바(A.I.Melukiova) 는 스키타이인 들이 기원전 2천년 부터 기원전 7세기 사이에 몇 차례에 걸처서 볼가강-우랄 초원을 거처서 흑해연안까지 진출했다고 추정하고 있다.

스키타이인 최초의 기록은 기원전 7세기에 앗씨리아와 키메르인(Cimerians)에 대항한 동맹국으로 알려져 있고, 그 결과 키메르인들은 살든 영토를 잃고 스키타이인들에게 남쪽으로 쫓겨갔다. 기원전 674년 스키타이 파타투아왕은

(Partatua) 아씨라아 공주와 결혼으로 아씨라와 동맹관계를 굳히며 그들과 함께 카스피해의 메도스(Medos)지역을 정복했다. 메도스인들은 후에 스키타이인들을 서아시아지역에서 격퇴해 이들은 다시 폰티악(Pontiac) 초원으로 쫒겨났다.

스키타이민족이 어느인종에 기원을 두고있는지, 그들의 문화를 추적한 결과 그들의 문화는 인도북부[현북부 파키스탄 스르브나야(Srubnaya)]지방과 연계되였다는 사실과 해르도투스가 남긴 스키타이인의 언어 기록중 'pata" 죽이다,'spou' 눈,arima' 하나, 'oior' 남자 등이 남아있어  언어학자들은 스키타이인들이 사용한 언어를  인도-유럽어 어군 이전의 고대 언어로 분류하고 있어 이들의 출발지가 어디인지를 거의 정확하게 규명 할 수 있다.

말과 스키타이인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이들은 말을 타기 위해서 바지를 고안해 입은 최초의 인류라는 기록을 남겼으며(유럽인의 시각), 이들이 인류역사상 최초로 말을 길들여 타고 다닌 민족으로 추정되며, 말 등에 안장 없이 천을 깔고 달리는 말 위에서 등자도 없이 몸의 중심을 잡으며 전투를 벌이는 광경은 적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유럽과 중동에서 말을 전투에 사용할 수 있는 말 타는 기술을 전파시킨 민족은 스키타인들이며 유럽과 중동제국에서 말탄 사람이 몸의 중심을 잡아주는 등자를 사용하기 시작한 시기는 훈족이 유럽에서 몰락한 6세기부터 였다. 6세기이전 영화에서 등자가 있는 말을 타고 유럽인들이 싸우는 장면은 역사를 무시하는 허구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스키타이민족과 전쟁을 한 다리우스 대왕이 관찰한  일화는 스키타이인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는 장면이다. 한참 전쟁을 하는 중, 스키타이 병사들은 전쟁터 근처에서 풀을 뜯고 있는 토끼를 가끔씩 훔쳐보기 시작하다가 스키타이 병사들은 잽싸게 전쟁터를 벗어나 토끼사냥을 했다.다리우스대왕이 스키타이 전사들의 행위를 이해 할 수 없는 것처럼, 현대문명인인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눈에도 스키타이인들의 그런 행위는 이해 하기가 힘들다.

이들이 남부 소련지방과 알타이 지역에 남긴 수많은 고분들이 발굴되면서 이들에 대한 많은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며  초원에서  활동적으로 살았든 이들이 남긴 짐승을 대상으로 한 예술과 말에 대한 사랑을 알 수 있게 되였다.

야만족으로 무시했든 특이한 이민족에게서 문명인인 우리는 바지와 승마기술을 전수받았다.

BC 514년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대왕은 7십만의 대군으로 다뉴브강을 건너 소련의  초원으로 진격해 스키타이 정복길에 나섰다. 이를 맞은 스키타이인들은 그들의 전통적인 작전을 사용하며 페르시아군과 직접적인 전투를 회피하면서 계속 후퇴하는 이들에게 다리우스대왕이 전투를 독촉하자 이들은 이렇게 회답했다, 우리가후퇴를 하며 전투를 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새로울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평화시의 평상적인 생활 방식을 따를 뿐입니다. 우리에게는 집과 재산이 있는 마을도 없고 또 경작할 농지도 없습니다. 우리가 만일 그런 것들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전쟁으로 모두 잃을 것이라는  공포에 대왕의 군대와 대항해 싸울지도 모릅니다. 그래나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는 우리는 대왕의 군대와 전쟁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대왕이 우리와 진정 한판의 전투를 즉시 하고 싶으시다면 우리조상들의 무덤을 한번 건드려 보십시요, 그때 대왕은 우리가 싸울지 안 싸울지를 알게 되실 것 입니다.>

다리우스대왕에게는 이상한 전쟁이었다. 생각해보니 스키타이인과 전쟁으로 적에게서 얻을 수 있는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점령할 도시도, 건물도, 약탈할 아무것도 없었고 그곳에는 끝없이 넓은 지평선만 보이는 초원밖에 없었다.

다리우스대왕은 철군 외에 다른 선택이란 있을 수가 없었다. 철군하는 대왕의 군대에 스키타이군대는 다뉴브강까지 따라 가면서 대왕을 괴롭혔다. 그일이 있은후 다리우스 대왕은 다시는 다뉴브강을 건너 북쪽 초원으로 스키타이 정벌을 포기하고 결국 승리는 스키타이인들 에게로 돌아갔다. "성을 쌓고 도시를 건설하는 자는 망하고, 초원에서 끝없이 이동하는자가 승리 한다는 몽골 초원의 유목민들의 믿음은 스키타이민족에서 유래한 말이 틀림 없을 것이다"

기원전 7세기부터 3세기까지 스키타이민족은 흑해초원 북쪽부터  흑해, 돈강(Azov해로 흘러 들어가는 러시아 중부의 강)동쪽 부터 서쪽 다뉴브강까지 차지했다. 스키타이 부족 중 최고의 위치는 지배층에 속하는 부족이며, 다음이 초원에서 유목생활을 하는 부족, 최하위층이 농경생활을 하는 부족으로 이들은 지배부족과 유목민의 지배를 받았다.

스키타이민족의 융성기는 기원전 4세기~3세기초에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문화발전에 최전성기였다. 수많은 유목민족인 스키타이인들이 정치 경제 상업의 중심지인 흑해연안 카맨스코 고로다스케 amenskoe Gorodishche) 지역에 정착해 살기 시작했다. 또한 이시기인 기원원 339년 스키타이왕 아테아스(Athesas)는 스키타이 제 부족을 통합해서 영토를 확장해 트레시안(Tracian)국경인 다뉴브강까지 진출했다. 아태아스왕은 나이 90에 마케도니아의 필립공(Philip, 그리스의 정복자 알랙산더 대왕의 부친)과의 전투에서 전사했으나 스키타이 왕국은 그의 죽음에도 부강한 국가 형태를 유지하다가 기원전 3세기 말 서쪽으로 부터 처 들어오는 켈트(Celt)족과  트레시안(Tracian)족, 동쪽에서

처들어오는 사마시안(Samathians)족에게 밀려 스키타이인들은 이들에게 흡수되며 역사의 장에서 사라졌다.  

2, 스키타이 민족의 생활과 풍습

스키타이인의 가족구성은 1부 다처제로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였다. 그리스인들은 이들이 모계사회였다고 보고 있으나 고고학자들이 남부소련 지방에서 발굴한 그들의 묘는 그리스인들의 주장이 잘못 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다. 사회적으로 지위가 있는 사람은 몇 명의 처를 거느리며 사후에는 그의 형제나 아들이 그의 처를 소유 할 수 있었다.

스키타이 여자들은 별다른 권한 없이 집에서 자녀들을 돌보며 사는 존재에 불과했다. 스키타이인의 이웃인 사마시안(Smartian) 여자들이 말을 타며, 남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전쟁에도 참여하는 활동적인 생활과  비교해 볼 때 스키타이인 여자들은 마차를 이용해서 자식들과 함께 이동을 하는 정도의 능동적인 생활을 했다는 사실을 확인 할 수 있다.

물고기와 야생의 짐승이 풍부한 이들에게 양식은 항상 풍부했다. 이들의 기본식품으로는 현재도 중앙아시아 유목민의 중요한 식품인  발효한 말우유, 치즈, 파 마늘 콩 등이 이들의 주식이었다 .헤로도투스가 본 스키타이인들은 열정적인 모습으로 아래와 같이 표현했다.수염을 기른 얼굴에 깊숙하게 패인 눈에 검은 눈동자와 바람결 치는 긴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1947년 2천년전의 스키타이인 묘지에서 발굴된 그들의 시신에서 굽이 달린 부드러운 장화와 함께 이들이 문신을 한 사실도 밝혀졌다. 그들의 신앙은 무속신앙으로 미신을 믿으며 귀신을 쫏는 부적을 사용하기도 했다. 귀신을 쫒아내고 길흉을 점치는 무당은 특별한 집안에서 배출되며 최고의 무속인은 에나리스(enarees) 라고 불려진 남자 무당이다. 남자와 여자의 중간 즉 반남반녀로 불려진 이 남자 무당은 여자의 목소리를 내며 항상 여자 옷을 입고 생활했다.

스키타이인들은 왕이 사망했을때 시위적인 애도의 슬픈 행위는 장기긴 계속 되였다. 모든 부족이 모여 40일 동안 장례의식은 거대하게 치러지며, 슬픔을 표시했다. 왕의 직계 가족들은 머리를 몽땅 자르거나, 귀와 앞이마나 코와 팔에 칼로 그어 상처를 내어 슬픔을 표시했다. 왕의 장례식때 그가 생전에 애용하든 무기와 모든 집기를 함께 묻은후 장례를 주관하는 집단은 왕의 처중에서 한사람과, 술시중인, 하인과 전령을 목졸라 죽이고 그가 생전에 애용하든 말을 죽여 왕의 주위에 함께 묻었다. 무덤은60 휘트 높이로 봉분을 만들었다.

이것으로 왕의 장례식이  끝난것이 아니다. 왕이 죽은지 일년 후에 왕을 가까이서 모시던 최고 50여명의 젊은 사람들을 목졸라 죽여 왕의 무덤 주위에 묻어 사후 왕의 시중을 들게 했다. 헤르도투스가 기록에 남기지 않은 부분은 스키타이 전사들이 남긴 힘차고 생동감 넘치는 예술품들이 있다. 기원전 6세기경 스키타이 인들은 동물을 주제로 자연적인 모티프의 장신구를 창조해내기 시작했다. 스키타이인들이 선호하는 동물은 첫째 사슴을 시작으로 말, 야생염소, 산돼지, 곰, 늑대, 고양이과 짐승,독수리 물고기 등 이었다.

스키타이인의 문화는 기원전 1,000 년 전에 이미 중국의 북쪽 유목민에게까지 전파되었다.지난 2백년간, 알타이 파직과  중앙아시아 남부시베리아에서 스키타이 고분의 발굴로  부장품이 출토되면서 스키타이민족의 예술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고분에서 출토된 부장품 중에서 세계인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수많은 금으로 제작된 장신구이다.

스키타이인들이 번성기에 알타이지방까지 진출해서 황금광이 많았든 그 지역에서 황금을 채굴해 사용했을 것 이라고 추정하는 이유는 알타이 지방에서 금의 산출이 많았기 때문이다.금으로 만든 혁대와 장식품 및 수많은 금장신구, 금관 같은 장식품은 스키타이문화가 한반도 남단까지 영향을 미처 스키타이 문화가 꽃을 피웠다는 사실은 신라의 문화가 이들의 영향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다.

신라금관과 아프가니스탄 금관은 스키타이문화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지구상에서 금관을 제작한 국가는 한국과 아프가니스탄 두 나라 외에 없다.

3, 훈(흉노)가 서유럽으로 이동한 이유

훈족(흉노)이 서유럽으로 이동을 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중앙아시아와 극동지방에 있었든 천재 지변이었다. 4 세기 초엽부터 5년간 기온이 1도가 내려가 유목민족과 농경민족에게 생명과도 같은 풀과 농작물이 냉해로 자라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유목민인 훈(흉노)족은 자연재해를 피하기 위해 만주를 거처 중앙아시아 초원을 따라 한반도 깊숙한 본토로 부터 대이동을 시작해 만주를 거처 초원을 따라 북상해서 서쪽으로 이동했다.

미국에서 제작한 Atilla, The King of the Babarian 에서 훈족(흉노)의 대이동이 한반도에서 출발했다고 주장하는 근거를 확인하기 위해서 방영한 케이블 방송인 The Learning Channel 방송국에 편지로 문의를 했으나 Discovery 방송과 통합 되였다는 사실을 통보받고 통합한 Dicocery 방송에 편지로 문의 하자 두 방송국이 통합된 후 수천개의 다큐중 찾기기 힘들다는 통보를 받아 아직도 그 다큐제작에 관여한 학자들에게 문의를 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에서 제작한 훈족(흉노) 다큐와 달리 독일방송에서 제작한 훈족추적 다큐역사의 비밀 제작에 참여한  베린토와 슈미트 박사는 한민족과 훈족이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는 고증으로 한반도 남단 가야 지방에서 출토된 청동솟 유물과 훈족(흉노)가 서쪽으로 이동하며 거처간 지역에서 발굴된 훈족(흉노)의 청동솥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1924년 경주시 노동동 금령총에서 발굴된 국보인 기마인물상(국보 91호)에서 말 잔등에 실려있는 청동솟 처럼 훈족(흉노)도 말 잔등에 청동솥을 싣고 다녔다. 청동솥에서 발견되는 문양이 한국의 머리 장식에 서도 많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들었다. 훈족의 이동로에서 동복(銅복)은 30여개가 발견 되였고  높이가 50-60 cm 무게는50kg 이 넘는 무게를 가지고 있다. 이들의 청동소솥은 훈족의 이동경로 외에는 이외의 동복은 발견되지 않는 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경주고분에서 출토된 기마인물상은 전형적인 유목민의 차림새이다. 삼각모와 말 잔등에 실려이는 동복(청동솥)은 훈(흉노)의 동복과 같은 형태다. 기마인물은 편두를 했다고 보고 있으며,미스테리 처럼 남아있는 금관의 직경이 작은이유는 신라왕들이 편두를 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설득력이 있다. 기마인물상의 발이 등자를 사용하고 있다. 훈족이 사용하든 등자와 같은 형태의 등자는 유럽인들에게는 신병기였다. 등자는 훈족이 유럽을 유린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동복은 유목민의 상징적인 유물로 스키타이식과 흉노식 두 가지 형태가 있다. 흉노의 동복이 스키타이식과 구별되는 것은 몽골계 유목민이 스키타이민족의 문화를 계승하면서 독자적인 형태의 동복으로 발전시켜 장식이 거의 없는 스키타이식 동복과 달리 화려한 문양이 있고 손잡이의 형태가 다르다.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동복은 북한과 중국 길림지역에서 발견되였고 북부중국 초원과 내몽고 오르도스지방, 남부소련, 헝가리 등지에서 발견되고 있다.

남부 깊숙한 한국의 경주고분과 김해의 가야고분인 대성동에서 발견되는 흉노식 동복은 북방계인 흉노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유물이다. 청동솟의 용도는 유목민 족장들이 사용하든 용기로 제례의식에 사용하는 고기를 삶을 때 쓰는 용기다. 국보인 말 탄 기마인물이 말 잔등에 동복을 싣고 있어 그 주인공은 족장의 지위에 있는 실제 피장자의 모습일 수도 있다.기마인물상이 쓰고 있는 삼각모자와 복식은 전형적인 유목민이 사용하는 것이며 말 안장과 등자는 훈족이 사용 하던것과 같다고 주장했다.

훈족은 유럽에 알려지지 않은 등자를 사용했다. 등자는 말탄 사람이 마상에서 몸의 중심을 잡을수 있게 가죽이나 신발주머니처럼 만들어 말 안장에 연결시켰다 훈족이 말 타고 활을 쏘며 공격해오는 모습은 유럽인들에게 경이적이고 두려운 모습으로 보인 것은 훈족이 등자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일부글은 한수선씨 글에서 인용함)

감사합니다.





치우비 (2005-05-30 17:02:35)  

좋은 글 잘 봤습니다. 한가지 의문이 있는데요. 훈족에 대해 훈족 자신들이 서술한 것들이 없다고 합니다. 스스로의 기록을 남긴 것들이 없어 서양인들의 기록이나 유물을 통해 아는 것 밖에 없다고 하는데요. 그 이유는 그들이 문자가 없었답니다. 그런데 한반도에서 출발했다는 전제 하에서라면 문자를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요? 어떤 이유로 인해 잊은건가.. 혹시 제가 잘못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아는 것 있으시면 답변 부탁드립니다.

 

 

 道不遠人 (2005-05-30 18:05:20)  

제가 볼때는 2가지 학설이 있을수 있는데 하나는 서방기원설 이고 둘째는 동방기원설입니다. 하지만 둘중 어느하나도 무시할수 없다고 봅니다.그들의 민족과 문화이동루트를 본다면 결코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넘어왔다고 보기가 불분명합니다.다만 유물론적 증거를 대고 그랬을것이다 하는것 입니다. 제소견에는 적어도 BC1500년이전서 부터 2000년동안 신라의 지역까지 거치면서 혼혈과 문화적 융합이 일어났을 것 이라고 보는데 우리와 같은 황인종의

모습이 있는 지역은 농경지역 정도이고(물론 확장되었지만)실제로 중국의 감숙성,영하성,산서성까지 회족이 차지 하고 있는것을보거나 실제로 신라의 석탈해 이사금까지도 이란계로 보고 있는것을 보면 동일계열 민족이라도 자연과 문화적 상황에 의해 문자의 유뮤가 갈라졌을 것 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이 프로그램을 제작한 ZDF의 제작진도 고증을 거쳤겠지만 黃禍論이 근간에 깔린것 아닌가 하는 개인적 생각입니다. 실제로 일각에서는 중국의 은왕조가 동이계열이지만 흉노계열 일수도 있다고 조심스럽게 판단합니다. 은왕조가 문자를 갖게 된것은 정착하여 농경생활을 하기 시작해서가 아니었을까요?

 

 

 홍승희 (2005-05-31 18:37:14)  

은과 흉노는 같은 계열이었다가 은이 먼저 정착생활로 들어선 것이라고 봐야 타당하겠지요. 동이라는 말은 어차피 화하족들이 자신들의 동쪽 땅에 사는 사람들을 지칭한 것일 뿐이니 그들과 북방의 흉노가 굳이 다른 민족이라고 나눌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흉노의 노는 화하족들이 자의적으로 붙인 것이고 그들의 종족 명칭은 흉이었을 것입니다. 흉과 훈은 문자화 과정에서 달라진 것일 뿐 애초의 음을 같았을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우리가 스스로를 부르는 한과도 어느 시점쯤에서 하나로 만날 수 있는 음들이지요. 이제 차츰 화하족들의 자기 편의적으로 붙인 명칭들을 걷어내고 본래의 음을 찾아보는 노력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홍승희 (2005-05-31 18:42:14)  

문자와 관련해서 한가지 우리가 고정관념을 갖고 있어서 그림문자들이 문자로 인식되지 못하는 경우를 상정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제까지 글은 직선으로 써나간다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지만 우리 고대의 글들이 꼭 그 원칙에 맞았을지는 의문입니다. 특히 글의 내용에 따라서는 원의 형태로 이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고 어떤 특정한 형상을 따라 독특한 순서로 배치됐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요? 어쩌면 신라 금관의 여러 도형도 그것이 문자였을 수 있구요. 문명은 결코 외길로만 달려온 것이 아닐 것이라 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오늘날의 역사 해석은

 너무 일직선을 지향함으로써 고대의 진실을 가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구이 (2005-06-01 02:23:30)   저도 이와 비슷한 글을 예전에 한번 올린 적 있었습니다. 아마 그때 내용이 대충 로마를 멸망에 까지 이르게 한 것이 훈족인데 이 훈족이 여러가지 서양의 유물이나 기록들을 통해 살펴볼때 고구려라는 것이죠. 그들은 말을 타고 활을쏘는 기마궁수가 탁월했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구려의 활인 "역궁" 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었어요. 아 잘 기억이 안나네요. 아틸라,훈족,독일,고구려 이것들이 연관되었던 글이었는데 방금 찾으려고 검색해보니까 글은 못찾겠는데

위의 4단어들이 연관된 그런 글들을 많이 찾아볼 수 가 있네요.

 

출처 : 역사, 천부경과 홍익인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