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광주--국 군 은 M-16-- 죽은자는 카빈소총
국군은 M16소총 소지 했다 는데
죽은 사람은 예비군 무기고 탈취한 카빈 소총 맞고 사망했다니???... 이번 탈북 특수군 출신들의 증언과도 일치하는 것 같다. ........................................................... ................. 인터넷 독립신문 에서 펌!! (표1 )광주사태 사망자 및 중·경상자 일람 구 분 ............... 계..........군......경찰....민간인 사 망.....189........23........4...... 162 부상자... 642...... 117....148.......377 중상....... 391........82......27.......262 경상....... 251........35.... 121....... 95 * 민간인 사망자 162명 중 117명이 M1/CAR에 의한 탄흔 자료:1982년 3월 육군본부 발행 <계엄사> ´표1´에서 민간인 사망자 1백62명을 검시 (檢屍)하여 사인(死因)을 규명한 결과, Ml과 카빈소총 에 의한 총상이 대부분인 1백17명이었으며, 타박상이 18명, 수류탄 파 편상이 12명, 찔린 자상이 11명, 화상이 4명이었다. 그런데 카빈소총을 가진 경 찰관은 모두 도주해버렸고, 계엄군은 M l6소총만을 소지하고 있었으며 , 총기 사용 대신 진압봉을 사용하도록 지급하였고, 최소의 자 위권 마저도 행사하지 않고 자중하다가 사태가 극도로 악화되어 부득이 5월 22일 정오부터 자위권 발동을 승인했으며, 이때도 공포를 쏘거나, 사전에 경고를 발하고 3회이상 정지명령을 내릴 것이며, 가능하면 위협 발사로 해산시키되 상황이 급박해서 불가피할 때에는 생명에 지장이 없 는 하퇴부(下腿部)를 사격토록 하였기 때문에 계엄군에 의한 사망자는 소수에 불과했다. 오히려 2M1l과 카빈소총은 난동자들만이 예비군 무기고에서 탈취하여 소지하였기 때문에 <<총상에 의한 사망자 1백17명중 88명 >>은 모두 난동자 자신들에 의하여 오발, 민가에 침입하여 일가 족 몰살 및 금품탈취, 강·온 양파 대립에 의한 총격, 그리고 군중 속 에서 양민학살을 계엄군의 소행으로 오인시켜 군중들로 하여금 계엄군 에 대한 적개심을 갖도록 하기 위한 의도적인 총격에 의하여 살해되었 다. 다만, 교도소 습격시 8명과 계엄군의 봉쇄선을 뚫기 위하여 기습한 난 동자 4명, 특공진압작전시 최후까지 총격으로 저항한 난동자 17명은 교 전중 계엄군에 의해 사살되었다. 그리고 타박상에 의한 사망자 18명은 탈취한 차량으로 난동을 부리다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이 판명되었으며, 수류탄 파편상에 의한 사망자 12명은 난동자들이 예비군 무기고에서 탈취한 수류탄 오발사고에 기인 된 것이었고, 계엄군은 수류탄을 지참하거나 사용한 일이 전혀 없었다. 또한 자상에 의한 사망자 11명 역시 난동자들이 계엄군으로 가장, 시민 들의 적개심을 불러 일으키기 위하여 그리고 민가에 침입하여 금품을 탈취하기 위하여 취한 소행이었으며, 화상에 의한 사망자4명은 난동자 들이 방화와 파괴를 자행하여 난동을 부릴 때 입은 피해였다. 따라서 계엄당국에서는 이러 한 사인을 의사, 변호사, 군수사기관, 시민대표들로 구성된 합동조사반 에 의거, 소상히 규명하되 유가족들로 하여금 확인토록 공시함으로써 1 백36명의 사망자 유가족들은 모두 난동자들에 의해 살해되었거나 총격 으로 습격 및 대항하여 부득이 살해되었음을 시인하고 인수해 갔으나 26명의 사망자에 대해서는 유족이 나타나지 않아 공원묘지에 가매장하 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순분자 들은 계엄군에 덮어 씌우는 유언비어를 퍼뜨렸으며 심지어는 천주교 문 제신부에게 작성·배포된 ´어느 목격자의 증언´이라는 유인물에서 " 공수병(空輸兵)들이 여자유방을 대검으로 도려내었으며, 임신부의 배를 갈라 태아를 꺼냈다"는 등,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내용을 유포시킴으로 써 시민들로 하여금 사실인양 믿고 흥분토록 유도하였다. 계엄당국에서는 이와 같은 사실을 목격한 시민들은 꼭 신고해줄 것을 당부하고 강조하였지만, 한 사람도 목격했다고 신고해온 사람은 없었다 . 또한 도청, 파출소, 방송국 등 건물 2백44동, 차량 8백82대, 시설물 8백84개소, 유류 3천여 드럼, 기타장비 1천9백25점 등이 파괴 및 소실(燒失)됨으로써 2백60억원 상당 의 재산피해를 가져왔다. 난동자들에게 피탈(被奪)된 무기는 군용이 5천8정이고, 민수용 엽총이 3백95정이었으며, 탄약은 소 화기탄 28만8천6백30발을 비롯하여 수류탄 5백62발, 폭약 3천여 상자. 그리고 군차량 34대, 경찰차량 50대, 아세아 자동차회사의 군납용 장갑 차 2대를 비롯한 각종 차량 3백28대, 기타 민간차량 3백67대를 각각 피 탈당했다. 광주사태는 인적(人的), 물적 손실뿐만 아니라, 온 국민이 입은 정신적 상처, 지역감정 대립 및 국민화합 저해, 외국에 미친 영향 그리고 그 후유증으로 인한 경기침체, 수출 및 관광객 격감 등 무형적인 피해 또 한 지대하였음을 감안할 때, 광주사태야말로 일대 민족적 비극이요, 역 사적 오점이었다. 광주사태가 악화되는 동안 북괴에서 시간별로 난동상황을 소상히 방송하며 선동한 사실이라든지 남해안으로 침투한 간첩 이창용이 광주시내로 잠입하려다 실패한 후 서 울로 올라와 5월 23일 검거된 사실, 5월 25일 광주시위군중 가운데 3명 이 독침피해를 입은 사건, 불온전단내용이 북과 주장과 일치되는 점, 도청난동자의 조편성이 빨갱이식 조직, 탈취한 차량에 적색 페인트로 시각(視覺) 자극 등으로 미루어 북괴 간첩이 광주사태에 편승하여 사태 를 더욱 악화시키고 전국적으로 확대시켜 정부를 전복코자 하였음이 분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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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 들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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