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야할한국사

어젯밤에 일어난 일을 역사는 알고 있다

영지니 2007. 12. 29. 22:35
 
광화문
 
 
어젯밤에 일어난 일을 역사는 알고 있다
개혁사상가 조광조를 왜 실패한 정치가라 하는가
[이야기가 있는 문화기행55]
 
보름달마저 구름에 가려 칠흑 같은 도성에 비상이 걸렸다. 거사를 주도한 훈구세력은 경복궁 한켠에 환하게 불 밝히고 쿠데타 지휘부를 설치했다. 현장에서 승정원 승지 윤자임을 비롯한 공서린, 안정, 이구 등 승정원 관리를 체포하고 홍문관 응교 기준, 심달원을 붙잡아 의금부에 하옥했다.

쿠데타 지휘부에 똬리를 틀고 앉은 심정은 야밤의 거사에 마침표를 찍기 위하여 대신들을 대궐로 불러들였다. 병조판서 이장곤은 연루자 체포에 들어갔다. 명을 부여받은 의금부 군졸들이 철릭을 휘날리며 영추문으로 뛰어나갔다. 병판 이장곤의 심복 금오랑은 조광조 체포 특명을 받고 건춘문 쪽으로 튀어 나갔다.

임금의 급한 부름이라는 전갈을 받고 파루가 울리기전 입궐한 대신들은 간밤의 사건에 아연실색했다. 죄인을 심문하지도 않고 조광조 일당을 ‘붕당죄’로 처형하겠다는 임금의 교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쿠데타 세력이 작성한 각본을 추인하고 동참하라니 난감했다. 신무삼간이 일으킨 옥사가 정의롭지 못하다는 것을 알지만 어디에 줄을 서야 할지 우왕좌왕했다.
 
 
경복궁 안쪽에서 바라본 영추문
 
“대사헌은 즉시 입궐하라는 어명이오”

조광조가 죄인이라면 정정당당하게 체포령을 내밀어야지 어명을 빙자한 유인책이다. 파루를 알리는 5고(鼓)가 울리기전 들이닥친 의금부 군졸들이 내민 신표는 임금의 수결이 어갑된 진짜였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차가운 새벽공기를 가르며 사간동 집을 나섰다. 이들에게 이끌린 조광조는 임금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의금부에 하옥되었다.

횃불을 밝히고 미명에 들이닥친 의금부 군졸들이 수상했다. 하지만 국가의 비상사태가 발생하여 임금이 부르겠지 라고 생각하며 금군을 따라나섰다. 조광조는 그들이 임금이 있는 편전으로 향하지 않고 의금부로 향하는 것을 보고 아차 싶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감옥에 들어가니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승정원 관리와 홍문관 관리들이 조광조를 기다리고 있었다.

현장을 목격한 윤자임의 얘기를 들어보니 간밤의 거사는 모사꾼 심정의 작품이라는 심중이 들었다. 병조판서 이장곤, 형조판서 김형산, 병조참지 성운이 주연과 조연으로 뛰고 있지만 연출자는 심정이라는 윤곽이 잡혔다. 그렇다면 기획자는? 그 범주에 희빈 홍씨의 아버지 홍경주와 이조판서 남곤이 떠올랐지만 임금은 아닌 것 같았다. 개혁이라는 같은 배를 타고 가는 임금을 최후까지 믿기로 했다. 
 
 
경복궁 근정전
 
심정, 그는 조광조의 천적이었다. 어느 사회 어느 조직에나 적이 있게 마련이지만 조광조에게 있어서 심정은 하늘이 맺어준 적이었다. 조광조보다 11살이 위인 심정은 젊은이들에게 떠받들어 지기를 좋아했다. 조광조가 사마시에 장원으로 정계에 입문하자 ‘똘똘한 젊은이가  들어 왔구먼’ 이라 생각하며 자신의 휘하에 두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조광조가 이조판서 안당의 천거로 조지서 사지가 되자 유쾌하지 않았다. 이판에게 선수를 뺏겼다는 생각에 기분이 나빴지만 또 기회가 오겠지 라고 마음을 추스렸다. 그런데 조광조가 뭔가를 보여주겠노라며 정시 문과에 응시하여 장원급제를 따고 승승장구 치고 나가자 견제하기 시작했다. 시기심 많은 심정에게 호적수가 된 것이다.

‘죽여 없애야지’ 라고 결심한 것은 조광조가 위훈삭제를들고 나오면서 부터다.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 임금을 옹립하는데 별로 공을 세우지 않은 자신의 주제를 심정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자신이 정국공신에 묻어 겨우 3등 공신을 유지하고 있는데 위훈삭제라니? 자신의 명줄을 끊는거나 다름없었다. 위훈삭제는 심정의 아킬레스건이었다.
 
 
궁중여인들이 대궐로 무녀를 불러들여 굿을 했던 자리
 
물론 조광조가 발의한 위훈삭제는 타당성이 있었고 명분도 있었다. 백성들로부터 박수를 받을 만한 통쾌한 일이었다.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개국한 개국공신이 정도전 등 55명.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고 수양대군을 옹립하는데 앞장 선 정난공신이 한명회 등 43명인데 반하여 중종을 옹립한 정국공신이 박원종을 비롯하여 103명이나 되었다.

궁중여인들의 암투의 장으로 변질한 소격서를 혁파하고 숨은 인재를 등용하기 위하여 실시한 현량과는 미래지향적인 정책이었다. 하지만 위훈 삭제는 과거청산이었다. 또한 소격서와 현량과는 제도적인 개혁이었지만 위훈삭제는 인적청산이었다. 인적청산은 반발이 뒤따른다. 청산의 대상자들에겐 생사여탈이 달려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조광조 공과의 분수령이 된다.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신진사류가 힘을 비축하기 전에 우유부단한 임금 하나만 믿고 너무 성급하게 밀어 붙여서 화를 자초했다는 지적이다. 훗날 조광조를 학문적으로 존경했던 율곡 이이가 “뜻은 좋았으나 너무 성급했다” 고 평가한 것은 오늘날에도 음미해보는 완급조절이다.
 
 
경복궁 품계석. 조광조의 자리다.
 
새파랗게 젊은 나이 서른일곱에 대사헌에 올라 임금을 가르치려 들고, 삼공(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규찰하는 것이 심정의 눈에 가시처럼 껄끄러웠는데 기회는 이때다 싶었다. 이러한 심정도 훗날 천적 김안로를 만나 ‘왕의 여자’ 경빈박씨와 통정했다는 혐의로 사사되었으니 천적은 천적을 만나 먹히게 되니 천적 윤회가 있나보다.

새벽에 열린 긴급 어전회의에서 영의정 정광필이 중심을 잡고 쿠데타의 부당성을 통박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조광조에게 죄주는 것을 거두어 달라고 임금에게 간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날이 밝자 장안이 발칵 뒤집혔다. 백성들은 홍경주, 남곤, 심정 등 신무삼간을 손가락질 했고 조광조를 옹호했다. 민심이 천심이라 하지만 사태는 하늘의 뜻과 달리 흘러갔다.
 
 
천추전. 경복궁 서쪽에 있는 임금의 편전이다 
 
조광조를 따르는 성균관 유생들이 벌떼같이 들고 일어나 경복궁으로 쳐들어갔다. 광화문을 밀치고 합문에 이른 유생들은 통곡하며 농성에 들어갔다. 조광조가 갇혀있는 의금부 감옥으로 넣어달라고 아우성이었다. 임금은 이들의 목소리를 경청하기는커녕 오히려 진노했다. ‘다 잡아 넣어라’는 어명에 따라 150여명 전원을 하옥하려 했지만 전옥서가 만원이라 우두머리 이약수 등 몇 명을 하옥하는데 그쳤다.

뿐만 아니다. 젊은 엘리트 관리들이 들고 일어났다. 부수찬(副修撰) 심연원, 전 주서(注書) 이기, 안정, 전 대사간(大司諫) 이성동, 전 집의(執義) 박수문, 사간(司諫) 유여림, 장령(掌令) 이청,  김인손, 헌납(獻納) 임권, 지평(持平) 이희민,  이연경, 정언(正言) 이부, 김익, 홍문관 전한(弘文館典翰) 정응, 교리(校理) 송호지, 수찬(修撰) 권전, 저작(著作) 경세인, 정자(正字) 김명윤, 권장 등이 옥에 들어가기를 원했지만 윤허하지 않았다.

옥에 갇힌 조광조는 자신을 심문하려드는 병조판서 이장곤과 홍숙을 조롱했다. 특히 홍숙은 한성부윤에서 하룻밤 사이에 형조판서가 되어 자신을 국문하려드니 인정할 수 없다는 태도였다. 이것은 도덕적으로 깨끗한 자신의 결벽성을 믿고 공권력을 무시한 실책이었다. 조광조의 희망은 임금을 면대하여 임금이 직접 국문하기를 바랐지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양심이 살아있는 육조의 대신들이 조광조를 죄주는 것은 부당하다고 진언했다.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 등 삼사의 대간들이 극렬하게 간했지만 임금은 신무삼간이 마련한 시나리오에서 벗어나오지 못했다.
 
 
어전회의가 열렸던 곳이다
 
11월 16일 어전회의가 열렸다. 의정부, 육조, 한성부가 한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조율(照律)을 보니 지극히 놀랍습니다. 서로 붕비(朋比)를 맺었다는 말을 저들이 승복하지 않고 증거도 없는데, 이 율로 죄주면 성덕(聖德)에 크게 누가 될 것입니다. 면대하여 친계(親啓)하게 하여 주소서.”

허나, 임금은 거절했다. “조광조 등이 당초의 마음은 나라의 일을 그르치고자 하지 않은 것일지라도 조정에서 이와 같이 죄주기를 청하였으니 죄주지 않을 수 없다. 조광조와 김정은 사사(賜死)하고 김식, 김구는 장 1백에 처하여 절도(絶島)에 안치(安置)하고, 윤자임, 기준,  박세희, 박훈은 장(杖)을 쳐 외방(外方)에 부처(付處)하도록 하라.”

이때 판부(判付) 기사관(記事官) 채세영과 이공인이 목숨을 걸고 임금의 말을 맞받아치고 나왔다. “조광조 등에게 어찌 다른 뜻이 있었겠습니까? 나라의 일을 위하고자 하였을 뿐입니다. 대신에게 다시 물어서 판부하시는 것이 어떠합니까?” 용기 있는 행동이다.
 
 
만춘전경.복궁 동쪽에 있는 임금의 편전이다 
 
불쾌한 빛으로 임금이 말했다. “이 일은 상세히 의논하였다. 이른대로 판부하라.” 임금의 하명을 받은 김근사가 채세영의 초필(草筆)을 빼앗아 판부를 만들고자 하였으나 채세영이 붓을 가지고 뒤로 물러나며 붓을 내놓지 않았다. 이것은 어명을 거역하는 것이다. 목숨을 내놓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소신 있는 행동이다.

“이것은 중차대한 일입니다. 임금의 말이 한번 내리면 고치기도 어려운 것이니, 대신을 불러서 의논하게 하소서.” 채세영에 이어 김근사가 말했다. “대신들에게 다시 물어서 판부하시는 것이 어떠합니까?” 죽기를 각오하고 진언했다.

참으로 용기 있는 언행이다. 초필을 쥐고 있는 신하로서 면전에 있는 임금에게 노여움을 사 죽임을 당할지라도 역사를 두렵게 생각하는 행동하는 양심이다. 임금도 양심에 가책을 느꼈는지 한발 물러났다.

“조광조, 김정, 김식, 김구 등의 죄가 다 같은가 차이가 있는가?”

기다렸다는 듯이 영의정 정광필이 말했다. “저 4인의 죄상이 같은지 다른지 모르겠으며 임금께서 무슨 율로 죄주려 하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털끝만한 죄라도 실정보다 지나치게 벌준다면 크게 성명(聖明)에 누가 될 것입니다.”

“이것은 조정에서 죄주기를 청한 일이므로 가볍게 죄줄 수 없다. 조광조, 김정은 사사하고 김식, 김구는 절도에 안치하는 것이 어떠한가?”
 
 
임금의 자리
 
임금은 신무3간이 손에 쥐어준 각본에서 한발작도 벗어나지 못했다. 지난 3월. 조광조가 낙마하였을 때 사간동 집으로 어의를 보내준 임금이다. 7월에도 조광조가 몸져누웠을 때 어의를 보내 위로했던 왕이다. 그렇게 총애를 아끼지 않았던 임금이 조광조를 역적에 적용하는 대명률로 처단하겠다는 뜻이다. 이에 영의정 정광필이 놀란 빛으로 부복(俯伏)하여 말했다.

“확실한 일일지라도 성명의 조정에서 어찌 이 율로 사류(士類)를 죄줄 수 있겠습니까? 조광조 등은 나라의 일을 위하였을 뿐입니다. 신이 비록 미열(迷劣)하여 전하를 선(善)으로 인도하지는 못하나 어찌 살륙(殺戮)하는 일로 임금을 인도하겠습니까? 저 사람들의 심지는 조금도 비뚤지 않은데 어떻게 사사(賜死)할 수 있겠습니까?”

조광조를 심문하는데 참여한 형조판서 홍숙이 나섰다. “신이 추관(推官)으로서 추국(推鞫)에 참여하였는데, 조광조 등이 말하기를 ‘성명을 믿고 국사를 위하고자 하였을 뿐인데 도리어 이렇게 되었다.’ 하므로, 듣고서 매우 감동되었습니다.”

죄를 들춰내고 강하게 응징하자고 나서야 할 심문관이 이렇게 나오니 임금도 난처해졌다. “이것은 중한 일이므로 갑자기 결단할 수 없다. 반복하여 깊이 생각해서 결단하겠으니 대신들은 우선 물러가도록 하라.” 신무삼간의 또 다른 밀지(?)를 받아야 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임금이다.
 
* 이글은 오마이뉴스와 sbs에 송고했습니다.
 
출처 : 낙송의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