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도 유형문화재 제94호 구룡사지 당간지주
충남 공주시 반포면 상신리 389번지 외 4필지는 충청남도기념물 제39호 공주구룡사지(公州九龍寺址)로 지정이 되어 있다. 구룡사지가 있는 상신리는 계룡산의 북으로 뻗은 자락에 절터가 있으며 이 지역을 법당골, 부도골 등으로 부르고 있다. 마을에는 많은 석조물 조각들이 흩어져 있는데, 주변에서 〈구룡사〉 라고 찍힌 기와조각이 발견되어 구룡사터라고 부르고 있다. 마을의 안쪽 절의 입구로 추정되는 곳에는 당간지주가 서 있으며, 주춧돌과 장대석, 부도의 받침돌이 남아 있었는데, 현재 국립공주박물관으로 옮겨 놓았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당시에는 규모가 큰 절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으며, 백제와 통일신라시대의 유물들로 보아 백제 후기나 통일신라시대 전기에 만든 것으로 보여진다.
구룡사지는 계룡산의 사방에 있는 절집에서 북쪽에 해당하는 곳이다. 동에는 동학사, 서에는 감사, 남쪽에는 신원사, 그리고 북쪽에는 구룡사가 있다. 구룡사를 제외한 나머지 절집들은 난을 당하기는 했지만 아직 건재하고 구룡사만 사라진 셈이다.
구룡사가 있던 공주시 상신리는 계룡산 자락 골 안에 자리 잡고 있다. 대전 유성에서 공주 공암 쪽으로 가다가 보면 좌측으로 동학사로 가는 길이 있다. 이곳을 박정자 고개라고 부르는데 조금 직진으로 가면 온천리에서 좌측으로 계룡산 쪽으로 난 길이 있다. 먼저 나오는 곳이 하신리 마을이고 그 곳을 지나면 상신리 마을이 나온다. 대전, 공주를 가는 길에서 상신리 까지는 6km 정도가 된다.
상신리 입구 개울가에 있는 바위 위에는 소나무 한 그루가 장겹게 서 있다.
바위에는 글을 음각해 놓은 것들이 봉니다. 오래된 듯 흐릿하다.
15년 전 방송국 일을 할 때 취재를 하려고 몇 번 들렸던 상신리마을은 참 운치있는 마을이었다. 마을 안길은 흙길에 돌이 듬성듬성 박혀있고, 바닥에 떨어져 있던 소의 배설문조차 그 운치를 더했다는 생각이 든다. 마을의 담장은 돌로 쌓아 놓아서 그 위로 담장이가 타고 오르는 것이 퍽이나 시골스럽고 인상적이었던 곳이다.
상신리는 찾아 들었을 때 처음 만나는 것은 바로 개울 곁에 있는 커다란 바위 위에 솟아있는 한 그루 소나무 때문이었다. 그 소나무가 어찌나 그리도 생명력이 있고 멋있어 보였는지 모른다. 이번 길에도 그 소나무는 그렇게 한 결 같이 바위 위에 뿌리를 박고 서있었다. 그러나 어딘지 그 싱싱하던 푸름을 잃은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바위에는 무엇인가를 적어 놓은 듯한 흔적들도 희미하다. 아마 장수를 위해 이름이라도 적어 놓은 것은 아닐까?
마을 안에서 본 마을 입구의 장승 - 좌측이 천하대장군, 우측이 지하대장군이다.
상신리를 지키는 천하대장군과 지하대장군 - 마을 입구에 마주보고 서 있다. 솟대도 보인다.
마을로 들어서는 첫집인 식당에 서 있는 선돌 - 이 돌에도 금줄이 묶여져 있다.
바위를 지나면 마을로 들어가는 우측 산자락에는 천하대장군이, 좌측 개울가에는 지하대장군이 솟대와 함께 서 있다. 상신리는 산제(山祭)도 함께 지내는데 이 마을은 산제를 정성들여 지내지 않아 염병이 돌았다고도 하고, 마을의 장승터에서 나무를 자른 사람이 화를 당했다고도 한다. 그래서 정월 열나흩날이 되기 전에 미리 장승이 있는 곳에 금줄을 치면 그날부터 외지인은 상신리로 들어갈 수가 없다. 정월 초, 마을 주민 중에서 생기복덕(生氣福德)을 가려 제관을 선출하면 그날부터 금기를 지키게 된다. 우리 풍속에는 제를 지내는 제관들의 금기는 통례적으로 부부가 합방을 금지하고, 비린것과 날것을 먹지 않으며, 매일 냉수에 목욕을 하고, 출타를 금하는 등 까다롭게 지켜야 할 것들이 많다.
상신리의 장승은 양편에 2기씩 서 있는데 눈이 치켜뜨고 이를 드러내고 있는 모습이다. 복판에는 각각 <天下大將軍>과 <地下大將軍>이라고 묵서를 해 놓았다. 장승을 지나면 마을 첫 집이 식당이다. 그 모서리에는 금줄을 매어 놓은 선돌이 보인다.
당간지주가 서 있는 옆 돌담 위에 쌓아놓은 장작더미. 그나마 옛 정취가 배어있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집집마다 돌담을 쌓고 그 위로 담장이며 호박 넝쿨이 타고 있던 곳이다.
마을 우물은 덮개가 덮혀있고 물은 마른득 흐르지 않는다.
흙길로 정취가 있던 마을 안길은 시멘트로 발라버려 옛 모습이 사라져버렸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차를 돌릴 수 있는 공터가 보이는데 그 앞에 당간지주가 있다. 이번에 찾은 당간지주 옆에는 삼층으로 너와집을 짓고 있어 주변이 산란하다. 한편에는 돌담 위에 쌓아 놓은 장작더미가 그래도 옛 정경을 떠올리게 만든다. 마을 안쪽 돌담은 그대로인데 집들이 많이 변했다. 하기야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는데 강산이 한번 하고도 반이나 변한 세월이었으니 어찌 옛 모습 그대로이길 바랄쏘냐?
안편으로 깊숙히 들어가 보니 마을 공동 우물은 덮개를 덮어 놓았고, 그 맑은 물이 흐르던 물길은 메말라버렸다. 마을 안길이 예전에는 흙길에 돌을 박아 놓아 걷는 기분이 좋았는데 지금은 온통 시멘트로 발라버려 삭막한 기분마저 든다. 어즈버 세월이 이리도 변하게 만들었을까? 마을을 돌고 보니 무엇인가 섭섭한 기분이 든다. 그대로 있기를 바란 내가 잘못이긴 하지만.
과거에 구룡사가 어느 정도의 절집이었는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현존하는 동학사, 갑사, 신원사의 규모로 볼 때 아마 그 정도의 절집이 아니었을까 추측을 할 뿐이다. 계룡산 북쪽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구룡사지에 남아있는 당간지주. 윗부분은 떨어져 나가고 여러 개의 조립된 기단 위에 서 있다. 기단면에는 장방형으로 구획된 내구에 연화문이 장식되어 있고 지주 사이에는 원형의 철통을 세웠던 주좌가 남아 있다.
오랜 시간 이곳을 찾는 수많은 사람들과 무언의 대화를 했을 구룡사지 당간지주. 곁에 새로 공사를 하는 3층짜리 너와집이 다 지어지면 더욱 초라하게 보이지는 않을까 염려스럽다. 10년이 훨씬 지나 찾은 상신리 구룡사지. 2007년 1월 25일. 바람도 없는 날, 갑자기 지나가는 한 줄기 바람결에 날리는 흙먼지가 눈을 맵게 만든다. 세월이 지났으니 모든 것이 변해야하겠지만 변화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만든다. 오늘 또 마음의 아름다움을 하나 상신리에 버려두고 길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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