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궁.암자.정자

수원 화성 행궁

영지니 2010. 10. 31. 17:13

광교산 방향의 수원시내.

 

서문

 

북수문.

 

화성의 안과 밖.

 

동문 밖.

 

동문 밖.

 

동문 밖.

 

동문 안.

 

행궁의 신풍루.

 

행궁의 봉수당.

 

행궁 뒷편.

 

행궁 유여택. 

 

 

 

 

 

 

 

 

 

 

 

 

 

 

 

화성
원래의 수원은 지금보다 남쪽으로 약 8km 떨어진 화산< 華山 > 아래가 그 중심이었으나, 조선< 朝鮮 > 정조< 正祖 >가 동왕< 同王 > 13년(1789) 그의 생부< 生父 >인 장헌세자< 莊獻世子 >(속칭 사도세자< 思悼世子 >)의 원침< 園寢 >인 현륭원< 顯隆園 >(후에 융릉< 隆陵 >으로 추증함)을 양주< 楊州 > 배봉산< 拜峰山 >에서 현 위치인 수원의 화산으로 옮기면서, 그 아래에 있던 읍치< 邑治 >와 민가< 民家 >들을 수원 팔달산< 八達山 > 아래로 집단 이전시킴으로써 현재의 수원이 형성되었다. 정조< 正祖 >는 부왕< 父王 >인 장조< 莊祖 >에 대한 효심에서 화성천도< 華城遷都 >를 계획하고, 정조 18년(1794)에 축성공사< 築城工事 >를 시작, 2년 뒤인 1796년에 완공하였다. 이 화성은 실학자< 實學者 >로 불리는 유형원< 柳馨遠 >과 정약용< 丁若鏞 >의 성설< 城說 >을 설계의 기본 지침으로 삼아, 좌의정 채제공< 蔡濟恭 >이 성역< 城役 >을 주관하고 조심태< 趙心泰 > 등이 전력하여 이룩한 것으로 우리나라 성곽 중에서는 가장 과학적으로 구조물< 構造物 >을 치밀하게 배치하면서도 우아하고 장엄한 면모를 갖춘 것이다. 특히, 성곽의 축조에 석재< 石材 >와 전< 塼 >을 병용한 것 그리고 화살과 창검을 방어하는 구조뿐만이 아니라 총포< 銃砲 >를 방어하는 근대적 성곽 구조를 갖추고 있는 점, 또한 용재< 用材 >를 규격화하여 거중기< 擧重機 > 등의 기계장치를 활용한 점 등이 우리나라 성곽사상 가장 특기할 일이다. 성곽의 전체 길이는 5.52km이며 거기에 동쪽으로 창룡문< 蒼龍門 >, 서쪽으로 화서문 < 華西門 >, 남쪽으로 팔달문 < 八達門 >, 북쪽으로 장안문< 長安門 > 등 4대문을 내고 암문< 暗門 > 4개, 수문< 水門 > 2개, 적대< 敵臺 > 4개, 공심돈< 空心墩 > 3개, 봉돈< 烽墩 > 1개, 포루< 砲樓 > 5개, 장대< 將臺 > 2개, 각루< 角樓 > 4개, 포루< 포樓 > 5개 등의 다양한 구조물을 규모있게 배치하였다. 그리고 팔달산 아래에는 행궁< 行宮 >을 지어 현륭원< 顯隆園 >에 행차하는 임금이 일시 머물 수 있게 제반 시설을 갖추었던 것이다. 그런데 약 200여 년이 지나는 동안 성곽이 퇴락하고 제반 구조물이 무너지기도 하였으며, 특히 6·25동란을 통해 문루< 門樓 >가 파손되었다가 1975년부터 3년간 복원< 復元 >하였다. 이때에는 이미 시가지가 성터 일부를 점하고 있어서 팔달문에서 동서남루까지의 450m 구간과 방대한 행궁은 시가지의 형편상 복원하지 못하였다. (문화원형백과사전에서 옮김) 

 

사도세자

노론(老論)의 일당전제에 비판적이었기 때문에 정치적 모략에 의해 뒤주 속에 갇혀 죽었다(→ 사도세자사건). 사도세자(思悼世子)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이름은 선(愃). 자는 윤관(允寬), 호는 의재(毅齋). 어머니는 영빈이씨(暎嬪李氏)이며, 부인은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딸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이다. 이복형인 효장세자(孝章世子)가 일찍 죽고, 영조의 나이 40세가 넘었으므로 태어난 지 1년 만에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며, 10세 때 혼인했다. 어려서부터 매우 영특하여 3세 때 〈효경〉을 읽고, 〈소학〉의 예를 실천했다. 또한 일찍이 높은 정치적 안목을 가지고 있어서 1743년(영조 19) 관례(冠禮)를 행하고 나서 부왕이 당론(黨論)을 없앨 방법을 묻자 "여러 당인을 한결로 보아 함께 기용하면 된다"고 대답하여 칭찬을 받았으며, 궁관과 더불어 신임사화를 논하여 의리의 근원을 분명히 가려내기도 했다. 1749년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하게 되었다. 영조와 세자의 사이가 나빠지고 대립관계가 표면화되기 시작한 것은 1752년 신하들이 병석의 영조에게 약을 권할 것을 종용하자 이를 거절한 뒤부터였다. 세자는 영조가 약을 물리치는 것이 자신의 허물 때문이므로 약을 권할 면목조차 없다고 했으나, 이것이 영조의 마음을 몹시 상하게 했다. 세자는 대리청정을 하면서 여러 지방의 환곡에 대하여 덜어내고 더 받는 '부다익과'(芬多益寡)의 정사를 베풀고, 영세민을 괴롭히는 대동(大同)·군포(軍布)의 대전(代錢)·방납(防納)을 금지시켰다. 또한 영조 즉위의 의리와 명분에 관련된 신임사화와 같은 중요한 정치적 문제에 대해 부왕과는 다른 의견을 내놓아 대립이 심화되었다. 이에 그를 싫어하는 노론들과 이에 동조하는 정순왕후 김씨(貞純王后金氏), 숙의 문씨(淑儀文氏) 등이 영조에게 세자를 무고하여 영조가 수시로 불러 크게 꾸짖으니 마침내 병이 발작했다. 혜경궁 홍씨〈한중록 恨中錄에 따르면 이때 세자는 "함부로 궁녀를 죽이고, 여승을 입궁시키며, 몰래 왕궁을 빠져나가 평양을 내왕하는 등 난행과 광태를 일삼았다"고 한다. 1762년 정순왕후의 아버지인 김한구(金漢耉)와 그 일파인 홍계희(洪啓禧)·윤급(尹汲) 등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羅景彦)이 세자의 실덕과 비행을 지적한 10조목의 상소를 했다. 영조는 크게 노해 세자를 휘령전(徽寧殿)으로 불러 자결을 명했다. 세자가 끝내 자결을 하지 않자, 그를 서인(庶人)으로 폐하고 뒤주 속에 가두어 8일 만에 죽게 했다. 당시 영조의 탕평책(蕩平策)에 의하여 표면상으로는 당쟁이 주춤한 듯했지만 사실상 노론·소론 간의 대립은 심각한 상태였다. 즉위과정에서 노론의 지지를 받았던 영조는 즉위 후 계속 노론에게 제약되고 있었다. 결국 세자의 노론의 전횡에 대한 비판이 이러한 영조의 정치적 입장과 맞물려 그를 죽음에까지 이르게 한 것이었다. 이 사건은 이후 노론·소론·남인이 얽힌 시파(時派)·벽파(僻派)의 분쟁을 파생시킨 계기가 되었다. 죽은 뒤 바로 사도(思悼)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그의 아들인 정조가 즉위하자 장헌(莊獻)으로 추존되었다. 1899년(광무 3)에 다시 장조(莊祖)로 추존되었다. 능은 수원에 있는 융릉(隆陵)이다.

(백과사전에서 옮김) 

 

 

 

 

 

 

 

 

 

북수문 - 화홍문
수원 화성의 중간을 남북으로 흐르는 수원천 위에 북수문과 남수문 등 두개의 수문을 세웠다. 1794년 2월 28일 공사를 시작하여 1795년(정조 19) 1월 13일에 완성하였다. 북수문은 편액을 화홍문이라 하였다. 화華자는 화성을 의미하고 홍虹자는 무지개를 뜻하는 글자로 장쾌한 물보라가 수문으로 넘처나는 모습을 화홍관창華虹觀漲이라 하여 수원팔경의 하나로 꼽았다. 북수문은 화강암으로 쌓았으며 물이 통과하는 수문에는 쇠창살을 설치하여 외부의 침입을 차단하도록 하였다. (안내문에서)

 

 

 

 

 

 

화성 성벽이 지동시장으로 끊어지고 남문인 팔달문도 수원시가지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팔달문-남문
보물 제 420호.팔달문은 장안문과 함께 성문앞에 또 한겹의 성벽을 쌓아서 문을 보호하는 시설인 옹성을 육축과 달리 전으로 쌓아 적의 포에 한 번에 무너지지 않도록 대비하였다. 모양이 독을 반으로 쪼갠 것과 같다고 하여 항아리 옹자를 넣어 옹성(甕城)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옹성벽에 반복되는 세로줄은 현안으로 짙은 그림자를 남기는 세로줄이 강하게 그어져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문화원형백과사전에서 옮김)

 

 

화성 안에서의 북문.

 

 

성 밖의 장안문 모습.

  

 

포루에서 본 북문의 위용.

 

성문옆에는 포루가 설치되어 적의 공격에 대비한다.

 

 

 

포루.

 

장안문-북문
수원에서 서울로 가는 관문역할을 하는 북문 장안문(長安門)은 또한 한양에서 출발한 임금을 맞이하는 정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장안문은 행궁의 왼쪽 편 동쪽에 사좌(巳座)해향(亥向)으로 자리했다. 높은 석축에 홍예문을 내고 그 위의 누각은 중층(重層)으로 하고 있다. 누각은 상하층 모두 정면 5칸 측면 2칸이며 기둥 위에는 다포식(多包式)의 화려한 공포를 짜서 건물의 위용을 더했다. 지붕은 추녀선이 지붕 꼭대기에서 처마 끝까지 길게 내려오는 우진각 지붕이며, 용마루와 추녀마루에는 취두와 잡상을 올려 멀리서도 특별한 격식을 지닌 건물임을 알 수 있도록 꾸몄다. 성외에는 옹성(甕城)을 반원형으로 둘렀다. 이 둥근 벽체는 벽돌로 축조되었는데, 돌로 쌓은 좌우의 성벽과 대조를 이룬다. 장안문의 좌우에는 적대가 하나씩 있는데, 북성적대(北城敵臺)이다. 이것은 높은 위치 가장자리에서 적을 좌우로 살피면서 공격할 목적으로 설치된 것으로 문의 위용을 더욱 높이는 역할들을 하였으며 현안을 3곳 설치하였다. 윗 부분에 여장을 두르고, 3면에는 11첩이 있고, 총안을 뚫어 놓았다. 장안문의 특징은 옹성의 출입문이 중앙에 나 있는 것이다. 보통 옹성의 출입문은 한쪽 모퉁이에 두기 마련인데, 여기서는 일부러 한가운데 출입문을 냈다. '화성성역의궤'에서는 장안문과 팔달문(八達門)의 옹성 중앙에 출입문을 둔 것은 사방으로 열리고 뚫린다는 화성의 정신을 반영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 만큼 화성에서는 유사시의 방어뿐 아니라, 평상시 사람이나 물자의 원활한 유통을 중요시했음을 알 수 있다. 또, 실학자 정약용의 건의로 옹성 출입문 위에는 누조(漏槽)라고 하는 큰 물통을 만들고 여기에 물을 흘려 내보낼 수 있는 구멍 다섯 개를 내고 이름을 오성지(五星池)라 하였다. 이것은 적이 성문을 불질러 파괴하려고 하는 공격에 대비, 이 구멍으로 물을 부어 성문을 보호하고 적의 공격을 저지시킬 목적으로 설치된 것이며, 다른 성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시설물이다. 홍예로 되어 있는 문의 안과 밖을 자세히 살펴보면 안쪽 홍예는 높이 19척(약5.85m) 너비 18척(약5.55m) 이고, 바깥 쪽 홍예는 높이 17척 5촌(약5.3m), 너비 16척(약4.84m), 전체 두께는 40척(약12.11m)이다. 안쪽의 좌우에 있는 무사(武砂)는 각각 아래 너비가 67척 8촌(약20.53m), 높이가 23척 5촌(약7.11m), 바깥 쪽의 좌우 무사는 각각 너비가 41척(약12.64m) 높이가 22척 5촌이다. 안팎의 홍예문 사이에 있는 좌우 무사의 높이는 각 21척(6.47m), 양쪽 선문(扇門) 안은 철엽(鐵葉)으로 하고 빗장을 설치하였다. 안팎의 홍예 위에는 장군 모양의 무사와 2층의 장대를 얹었으며 홈통을 네 곳에 설치하였다. 옹성 위의 작은 홍예와 연결되는 곳에 타구는 10 개(첩(堞)은 11개)를 벌여놓았다. 그리고 네모진 총혈(銃穴) 12개를 내었다. 동쪽과 서쪽의 여장(女墻)은 각각 작은 판자문을 두었고, 장(墻)에 세운 2층의 누는 전체 높이가 32척 9촌(약10.14m)이다. 아래층의 안은 7포 바깥은 5포로 정면 칸의 너비는 22척 5촌(약6.93m)인데, 바닥에는 널빤지를 깔았다. 오른쪽과 왼쪽 각각 한 칸 씩 협간(夾間)이 있는데 너비는 모두 12척(약3.7m)이며, 세로 2칸이고 전체 길이가 24척(약7.4m)이다. 서쪽 협간의 첫째 칸과 동쪽 협간의 두 번째 칸에는 각각 곡란층계(曲欄層階)를 설치하여 위층으로 통하게 하였다. 서쪽 층계는 북쪽에서 올라가며 동쪽 층계는 남쪽에서 올라간다. [서쪽 층계 아래에 살문(箭門)이 있는데 잠가두었다가 임금이 오실 때는 연다.] 위층은 안팎 모두 7포로 정면의 칸과 좌우 제 1협간은 너비가 모두 하층과 같고 두 번째 협간은 각각 너비가 9척(약2.77m)이며, 그 세로가 2칸 전체 길이는 18척(약5.55m)인데 모두 널빤지를 깔고, 사면에 널빤지 문을 달았다. 장안문의 공사비는 화성의 부대 시설 중 가장 많은 5만 8090냥 8전이 소요되었으며, 문루의 편액(偏額)은 전참판 조윤형(曺允亨 : 1795~1799)이 썼다. (문화원형백과사전에서 옮김)

 

 

 

 

 

 

 

서북각루에서 서문, 남문 방향.

  

서북각루에서 서장대 방향.

 

 

화서문-서문
성의 서문으로서, 동남으로 묘좌(卯坐)유향(酉向)에 자리잡고 있다. 화서문(華西門)의 홍예나 문루의 제도는 창룡문(蒼龍門)과 같다. 다만 성벽의 일부가 휘어져 있는데, 이것은 지형에 맞추어 성을 쌓은 결과이다. 수문청은 문안 남쪽 가장자리에 위치해 있다.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건물이며, 이익공(二翼工) 5량 구조의 팔작 지붕에 겹처마 집 이다. 화서문은 주변 지형이 평탄하지 않았기 때문에 좌우에 적대를 두지 않았다. 그 대신 주변을 멀리 감시할 수 있도록 서문 옆에는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을 세웠다. 화서문의 특징은 창룡문과 같이 옹성의 출입문이 한쪽 구석에 나 있는 것이다. 일반 읍성의 경우 북쪽에 관청이 자리해서 동서 방향으로 길이 나기 때문에 동문, 서문이 주 통행문이 되었다. 그러나 화성에서는 남북 방향으로 주 통행로가 열려 있었기 때문에 동문과 서문으로는 사람들의 발길이 뜸했다. 화서문은 창룡문보다 더 한적했다. 문을 나서 봐야 소금기 있는 땅이 펼쳐져 있을 뿐, 마땅히 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화성 동쪽과 서쪽에 길이 나 있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성문을 연 것은 화성이 사방으로 연결된 큰 도시라는 점과 성문을 열면 장차 문밖이 번성해질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라 하겠다. 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안팎으로 홍예를 설치했으며, 안 쪽은 높이가 16척(약4.84m) 너비가 14척(약4.24m), 바깥 쪽은 높이가 15척(약4.54m) 너비가 12척(약3.63m), 전체 두께는 30척(약9.09m)이다. 안 쪽 좌우의 무사(武砂)는 각각 아래 너비가 9척(약2.72m), 좌우의 와장대는 길이가 각각 20척(약6.06m)이고 돌계단은 각각 14층이며 너비는 9척(약2.72m)이다. 바깥 쪽 좌우 무사의 너비는 각각 25척(약7.57m) 높이는 18척(약5.45m)이며, 안팎 홍예 사이의 좌우 무사는 높이가 각각 22척 5촌(약6.81m), 양쪽 대문은 철엽(鐵葉)으로 싸고 빗장을 설치하였다. 타구가 6개 있고, 방은 총혈(銃穴)도 6개가 있다. 공사비는 1만 2668냥 8전 1푼이 소요되었고, 편액(偏額)은 좌의정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이 썼다. (문화원형백과사전에서 옮김) 

 

 

 

동문 성 밖의 모습. 

 

동문 성 안의 모습.

  

 

파노라마 모습.

 

 

 

봉수대.

 

 

동남각루 안과 밖. 이 누각을 끝으로 수원시가지로 인하여 성이 끊기고 지동시장이 이어진다.

 

 

창룡문-동문
창룡문(蒼龍門)은 화성의 동문으로서, 유좌(酉坐)묘향(卯向)으로 앉았다. 장안문(長安門)이나 팔달문(八達門)과 비교하여 문의 규모도 작고, 형태도 간략하다. 특히 석축 위 누각이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고 격식 또한 낮다. 여장 안에 있는 누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고 기둥 위에는 새의 날개 모양을 한 간단한 첨차가 2중으로 놓인 이익공(二翼工) 으로 단층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수문청(水門廳)은 3칸으로, 문안 북쪽 가장자리에 있다. 창룡문의 경우 주변 지형이 평탄하지 않았기 때문에 좌우에 적대를 두지 않았다. 그 대신 주변을 멀리 감시할 수 있도록 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을 세웠다. 또 동문 바로 옆에는 쇠뇌를 쏠 수 있는 동북노대(東北弩臺)를 두어 멀리 팔달산 정상의 서노대(西弩臺)와 마주 대하도록 했다. 창룡문의 특징은 옹성의 출입문이 장안문(長安門)이나 팔달문(八達門)과 달리 한쪽 구석에 나 있는 것이다. 일반 읍성의 경우 북쪽에 관청이 자리해서 동서 방향으로 길이 나기 때문에 동문, 서문이 주 통행문이 되었다. 그러나 화성에서는 남북 방향으로 주 통행로가 열려 있었기 때문에 동문과 서문으로는 사람들의 발길이 뜸했던 것이다. 본래 화성의 동쪽으로 용인으로 통하는 큰길이 나 있었지만, 남문 주변에 가게가 늘어서 있고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기 때문에 용인으로 가는 사람들은 사람의 왕래가 거의 없는 창룡문을 이용하지 않고 팔달문을 지나다닌 것이다. 이는 조선시대 일반 읍성에서 사람들이 동문과 서문을 주로 이용하는 것과는 매우 다른 모습이었다. 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안팎으로 홍예를 설치했으며, 안 쪽은 높이가 16척(약4.84m) 너비가 14척(약4.24m), 바깥 쪽은 높이가 15척(약4.54m) 너비가 12척(약3.63m), 전체 두께는 30척(약9.09m)이다. 안 쪽 좌우의 무사(武砂)는 각각 아래 너비가 30척(약9.09m) 높이 18척 5촌(약5.6m)이며, 좌우의 와장대는 길이가 각각 20척(약6.06m)이고 돌계단은 각각 14층이며 너비는 9척(약2.72m)이다. 바깥 쪽 좌우 무사의 너비는 각각 25척 높이는 18척(약5.45m)이며, 안팎 홍예 사이의 좌우 무사는 높이가 각각 17척(약5.15m), 양쪽 대문은 철엽(鐵葉)으로 싸고 빗장을 설치하였다. 타구가 6개 있고, 방은 총혈(銃穴)도 6개가 있다. 옹성(甕城)과 성문의 좌측은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바깥문은 설치하지 않았다. 형태상으로 서울의 흥인지문과 비슷한 점이 많다. 옹성 안쪽에 벽돌 누조(漏槽) 4개를 설치했으며, 바깥쪽에 현안 3개를 뚫어 놓았다. 여기에 여장(女墻) 4첩을 설치하고, 원근 총안 14개를 설치하였다. 옹성의 뒤에는 회다짐을 하였고, 그 남쪽 가장자리에 돌층계를 설치하여 위로 원성(元城)에 통하게 되어 있다. 창룡문의 공사비는 1만 3335냥 7전 3푼이 소요되었고, 편액(偏額)은 판중추부사 유언호(兪彦鎬, 1730-1796)가 썼다.

(문화원형백과사전에서 옮김)

 

현판에는 연무대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가 동장대.

   

동북공심돈.

 

 

동북노대.

 

 

서장대와 서노대.

 

 

 

 

 

효원의 종각.

 

포루.

 

 

서장대에서 내려다본 수원시가지. 멀리 광교산도 보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