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FO(외계)

고대유물 속에서 외계인은 지구에 왔을까?

영지니 2010. 11. 14. 22:19

 

 

고대유물 속에서 외계인은 지구에 왔을까?

팔렝켄의 석관이 던져준 의문과 미스테리

 


위스의 유명한 작가이자 고고학 연구가인 에리히 폰 데니켄(Erich Von Daniken)은 고대 마야인들이 서기 683년경에 만든 한 무덤의 뚜껑으로 보이는 석관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일명 '팔렝켄(Palenken)의 석관'이 그것이다. 이 석관은 최초 발견당시에는 흔히 고대 왕들의 무덤 정도로만 인식되었다. 그러나 이 석관의 발견은 석관의 상층부 뚜껑에 새겨진 조각이 많은 주목을 받게 되었다. 왜 주목을 받았는지는 탁본을 보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 석관은 이후 많은 고고학자들과 내노라는 사람들이 한번쯤 관심을 가지게 된 고대 유물이 되었다. 왜냐하면 이 석관의 탁본에서 보여지듯이 현대의 기계를 조정하는 사람의 모습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서기 600년대에 만들어진 기계라고 보기엔 놀라운 조각이 말이다. 그것은 마치 1969년 달에 간 아폴로 우주인들이 탄새턴 로켓의 우주인들이 취했던 자세와 아주 흡사하고 현대의 비행기를 몰고 있는 사람이나 대포를 조정하는 군인들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마야인들은 우리가 아는 것 이상으로 달력을 사용하였고 고대 시대에도 태양의 위치를 정확하게 계산해 냈으며 숫자를 사용하기도 했다. 제는 이 석관에 대한 여러가지 학설이다. 현재 이 석관은 


첫째, 그냥 고대 마야왕의 무덤 관이라는 주장이 있다. 물론 이런 시각에서 보면 이 관은 고대 왕들을 표현하고 풍요와 평안을 빌던 하나의 주술적인 형태의 기원이 담긴 석관이라는 것이다.


둘째,당시 마야인들이 가졌던 어떤 기계에 대한 설명이라는 것이다. 그 기계는 왕실만이 사용이 가능한 특수한 것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셋째,외계인들이 하늘에서 이들 문명에 최초에 나타나 그들에게 기술을 전수했는데 당시 신으로 불리우던 외계인들로부터 전수받은 기술을 기록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에리히 폰 데니켄과 제커리어 시친등 외계문명 지구 이입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두드러지게 주장하고 있다.


넷째,아틀란티스 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석관의 기계가 고대 대서양에 있었다는 전설속의 문명인 아틀란티스에서 전해준 기술을 기록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스페인과 유럽의 정복자들이 남아메리카의 마야와 아즈텍 잉카 문명을  정복하러 갔을 당시 정복자들은 깜짝 놀랐다고 한다. 왜? 원주민들이 그들을 쌍수를 들어 환영했기 때문이다. 자초지종을 알아본 결과 이들은 자신들의 문명 건설 초기에 하늘에서 내려온 푸른 눈을 가진 백인의 체형을 한 神들에게서 농사의 기술과 천체관측 달력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을 배웠다는 것이다. 실제로 남미의 고대 문명권에서 파란 눈을 가진 신들의 형상들이 많은 유물로 발견된 바 있다. 그리고 얼마후 떠나간 신들이 수백년 동안 돌아오지 않다가 어느날 총칼을 들고 등장했으니 환영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그 환영이 이후 피의 역사로 바뀌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여전히 이 팔렝켄의 석관에 대한 주장은 여러가지로 분분하다. 외계인들은 과연 지구를 과거에 방문했던 것일까?

 


국 천문학의 부흥을 이끈 전도사였던 작고한 천문학자 칼 세이건(Cale sagan)은 '두개의 은하에서 동시대에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방문할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고 밝힌 바 있다. 한마디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외계문명 이입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그것은 어디까지나 미개한 인간의 생각이지 고도의 기술을 가진 문명세계에게 우주방문과 탐사중 지구를 방문했을 확률은 매우 높다'는 주장을 내어 놓고 있다. 현재까지 인류는 태양계 밖에 바글바글(NASA의 표현 그대로)한 지구와 같은 수억개의 행성들을 허블 망원경으로 바라보면서 감탄만 할 뿐 감히 그곳까지 여행을 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것은 우리의 기술이 미개한 수준이기 때문이고 우리는 외부의 적이 아닌

내부에서 한식구끼리 피의 전쟁을 벌이기에 급급하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그 바글바글하다는 태양계 밖은 고사하고 코 앞에 화성에도 가지 못하고 있는가? 인류가 해마다 전쟁준비와 군수무기 생산을 위해 쓰고 있는 돈의 단 10%만을 투자한다고 해도 인류는 불과 3년 안에 화성에 유인 착륙할 것이 분명하며 현재 하루에 1$도 안되는 돈으로 배고픔에 시달리는 20억 명의 극빈층도 지구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문제는 우리 안에 있는 것 같다. 팔렝켄의 석관과 관련된 많은 학설들 중 무엇을 믿는가? 어떤 주장을 신뢰하는가는 여러분의 판단에 맡기고자 한다. 하지만 개인적인 견해를 전제로 하건데 외계인들이 이 지구를 방문한 것은  분명한 사실로 확신하고 있으며 그들의 방문은 직접 간섭만 하지 않을 뿐 계속되고 있다고 보고 있다.

 

 


[플러스 정보 +]

마야 (Maya) 문명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마야문화가 번성한 지방은 3개 지역으로 구분되나, 그 중심을 이룬 것은 과테말라 북부의 페텐지방으로부터, 서쪽은 멕시코의 타바스코, 동쪽은 벨리즈지방에 이르는 중앙지역이다. 여기에 유카탄반도(半島)의 북부지방 및 과테말라고지(高地), 차파스지방으로부터 태평양 연안에 이르는 남부지방 등 2개 지역이 포함된다.

언어연대학적 연구에 따르면 마야어족의 조상은 북아메리카 인디언의 작은 부족으로서, 이들이 남진(南進)해서 BC 3000년대 중반에 서부 과테말라 고지에 정착한 것이라 한다. 그 후 1000년 사이에 이 부족이 두 어족으로 갈라져 하나는 북서로 진출하여 멕시코만(灣) 연안의 아스테크어족(語族)을 형성하였고, 다른 하나는 북쪽으로 나아가 페텐저지(低地)에서 유카탄지방에 이르러 유카테크어족이 되었다. 다시 BC 1000년대 전반에 마야 어족의 모체(母體)로부터 촐 및 촌탈 등 두 어족이 갈라져 나와서 중앙지방의 저지에 들어가 북부의 유카테크어족과 접촉하였다.
E.톰프슨에 따르면 촐어족이 마야 고전문화를 창조한 것이라 한다. 초기 마야에 관한 고고학적 자료는 극히 드물어 과테말라 태평양연안의 오코스(BC 1500) 및 콰도로스(BC 1000) 문화나 과테말라 고지카미날퓨 유적(遺蹟)의 알레파로기(期) 및 라스 차루카스기(BC 5,6세기경)에서도 이들 문화 후에 형성되는 고전(古典) 마야적인 특징은 볼 수 없다. 그러나 초기 마야의 기원에는 멕시코의 올멕 및 이자파문화의 영향이 컸다는 학설이 거의 굳어졌다. 가장 오래 된 마야적 문화는 페텐지방 서부의 시에문화와 북부의 마몬문화인데, 마몬문화의 연대는 BC 5세기로 추정되어 카미날퓨의 라스 차루카스기(期)와 비슷하다.

시에문화는 고전 마야유적인 알탈드 사크리피시오스와 세이발의 하층에서, 또한 마몬문화는 와샤크툰과 티칼의 하층에서 볼 수 있다. 이 문화에 이어 카미날퓨의 밀라프로레스기(期)와 중부 저지(低地) 마야지대의 차카넬문화에 이르러 마야문화의 기본양식이 확립되었으며, 밀라프로레스기에는 그 뒤에 발달되는 신성문자(神聖文字)의 원형(原型)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