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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고대문명 '마야'

영지니 2010. 11. 15. 18:47

사라진 고대문명 '마야'

 

사라진 마야문명 1519년 11월 8일, 스페인의 헤르난도 코르테스(Hernando Cortes)장군은 400여명의 스페인 군인과 6000여명의 아메리카 원주민 부대를 이끌고 아즈테크 왕국의 수도인 멕시코 시티에 당도하였다. 코르테스 장군의 앞에서는 아즈테크 왕국의 황제인 목테스마 2세의 행렬이 지나가고 있었다.

코르테스 장군은 목테스마 2세의 장신구와 옷차림을 탐욕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

다. 코르테스 장군은 스페인 국왕에게 보물을 찾아 돌아가겠노라 약속을 맺고 스페인의 지원을 받아 그 곳에 도착했다.그는 목테스마 2세의 차림을 본후 많은 보물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결론을 내렸다. 서구인들은 항상 문명을 이해하려기 보다는 발견과 탐색, 약탈을 위해서 였고,이 곳도 예외는 아니었다. 코르테스는 성당을 세울 수 있도록 목테스마 2세에게 요청을 했고 그의 요청이 받아들여져 성당을 지을 수 있었다.

스페인 사람들은 멕시코 사람들을 개종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이유는 멕시코 인들이 원시적 형태의 종교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멕시코인들에게는 건장한 남자의 심장을 도려내어 높은 제단 위에 놓고 독수리나 매들이 날아와 그 심장을 뜯어먹는 종교의식이 있었다. 하늘에 있는 태양신은 젊고 힘있는 인간의 심장을 먹고 힘을 얻는다는게 그들의 신앙이었다. 이러한 의식을 스페인 사람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진설명: 피라미드의 북동쪽에 위치하는 '전사의 신전'의 최상부에 만들어진 '차코모르'라 불리는 조각상이다. 차코모르는 '신과 인간의 사자'라고 한다. 배 위에 얹혀 있는 접시는 산제물을 바칠 때 심장을 올려 놓고 태양의 은혜에 감사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도 '사산제물을 바치는 의식'은 많이 있었다. 치첸이차는 240년 동안이나 '피비린내 나는 종교 도시'로서 번영한 다음에 조용히 막을 내렸다.

 

 

축제를 하던 날, 스페인 군대에게 멕시코 사람 600여명이 죽임을 당하였다. 이에 멕시코인들은 격분하여 코르테스 장군에게 모여들기 시작했다. 코르테스 장군은 탈출을 시도하였지만 멕시코인들이 다리와 제방을 모두 부셔 버려 빠져 나갈 수 없었다. 코르테스가 데오카리 신전을 불태우자 멕시코인들의 분노는 최고조에 달하였다. 이 때, 목테즈마 2세가 국민 앞에서 무언가 말하려고 하였다.

사진설명: 테오티우아칸은 올멕을 근간으로 하여 기원전 2세기경에 멕시코 고원에 문화의 꽃을 가꾸기 시작했다. 외형은 4단으로 되어 있으며 축조기법은 "탈루드-탈블레로"방식 각 단별로 경사도가 차이가 있지만 데체로 43.5도이다. 현존 계단은 254개, 높이 64m, 밑변은 정사각형으로 한변의 길이는 224m, 전체크기는 약 2백50만m2가 된다. 테오티우아칸인들은 춘-추분날 한낯이면 완벽한 직선 그림자가 서면의 아랬단에 나타나도록했다. 이를 발견한 아즈텍인들은 그래서 "해"의 피라미드라 했던 것이다. 학자들은 테오티우아칸 도시의 한창 때의 인구를 12만에서 20만정도로 추산하고 있다.이는 해의 피라미드와 달의 피라미드를 축조하는데 드는 노동력을 산출하여 도시의 규모를 계산한 것이다

그러나 국민들은 이미 마음이 그에게서 떠난 뒤였다. 그에게 돌이 날라 들었고, 1520년 그는 그렇게 죽어 갔다. 스페인 사람들에 의해 마야 왕국은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보물에 혈안이 되어 모든 것을 파괴해 버렸다. 그로부터 300여년이 지난 1839년, 두 미국인에 의해 중앙 아메리카 유카탄 반도의 정글 속에서 찬란한 유적이 발견되었다. 거대한 계단식 피라미드의 신전, 넓은 도로와 궁전, 그리고 천문대, 원형 경기장 등이 발견되었다. 땅은 메마르고 강도 흐르지 않는 곳이었다. 게다가 그 곳은 정글 지대였다. 3년후 이들은 상세한 그림을 곁들여 책을 펴냈고 이러하여 마야 문명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1881년에 이 지역을 여행하던 영국인에 의해 마야유물들이 수집되어 대영 박물관에 기증됨 으로써 많은 자료가 공개되었다. 마야의 사회구조는 지배층과 피지배층으로 나누어진다. 지배층은 상당히 폐쇄적이었으며, 엄격한 신분사회였다. 사제들의 신전이나 귀족들의 궁전은 대부분 높은 구릉 위에 요새처럼 구축되었다. 이 건물들 주변에 평민들이 사는 오두막 집이 조밀하게 붙어 있었다.

 

 

중간계층은 없으며, 소수의 지배층이 다수의 평민을 지배하고 있었다. 마야인들은 대부분 농사를 짓고 살았으며, 평민들은 그들의 수확물의 2/3를 귀족 과 사제들에게 바쳤고 나머지 1/3만을 소유할 수 있었다.마야인들은 밀림에 도시를 건설하고 넓은 도로를 만들었다. 마야인들은 높이 70m에 이르는 피라미드와 전체 500만톤에 이르는 성채, 그리고 길이 16km의 직선 도로 등을 건설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거대한 작업을 하는데 별다른 도구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금속 도구를 가지지 못했고 수레도 없었다. 오로지 사람의 힘만으로 그 밀림 속에 공사를 벌였던 것이다.

마야인들은 건축술뿐만 아니라 천문, 수학, 의학에서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천문학에서는 놀라울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1년의 정확한 길이는 365.2422일인데 마야인들은 356.2420일로 알고 있었다.또 보름달의 간격을 29.53020일로 계산했는데 실제 29.53095일과 별 차이 없다. 그들의 건축물에 나타나는 돌조각의 모양이나 절단은 윤년이나 윤달의 삽입이라고 한다. 건물을 지을 때도 역법에 의해 일정한 주기로 지었다고 한다. 마야에서는 이러한 천문학을 바탕으로 주기가 다른 3개의 달력을 사용하였다. 하나는 기원전 3114년 8월 11일을 기준으로 하는 장기력인데 왜 이 날이 기준인지는 알 수가 없다. 또, 260일력과 365일력도 함께 사용하였다. 260일력은 1에서 13의 숫자가 20개의 날과 연결되어 한 주기를 이루는 달력이다. 그리고 365일력은 18개월이 각각 20일이며, 나머지 5일이 별도의 1개월을 이루어 19개월이 한 주기가 된다. 마야의 이런 역법은 고도로 발달되고 복잡하여 제대로 설명하자면 책 한권은 된다고 한다.

 

치첸에 있는 천문대는 최초이자 최고인 마야의 원형건축물이다. 이 복구된 건물은오늘날에도 현대의 천문대처럼 작동한다. 이 원형건물은 밀림 너머 세개의 단구위로 우뚝 솟아 있다. 내부에서는 나선형 층계가 꼭대기 망루로 이어진다. 둥근지붕은 천창(天窓)과 입구가 별들을 향해 배열되어 별이 반짝이는 하늘의 감명 깊은장면을 밤마다 보여준다......

......마야인들은 천왕성과 해왕성을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치첸 천문대의 망루는왜 가장 밝은 별들을 향해 배치되지 않았을까?

세계에서 가장 신비스러운 수수께끼의 문명을 들라면 거의 모든 고고학자들이 마야 문명을 지목한다. 어째서 마야 문명을 인류 역사가 생긴 이래 가장 신비한 수수께끼 문명이라고 평가하는 것일까? 마야 문명은 중앙아메리카의 중심부인 현재의 멕시코, 벨리즈, 과테말라, 온두라스, 엘살바도르에 걸쳐 있었으며 자연적인 지형에 의해 세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하나는 광대한 열대림으로 덮힌 페텐 지구, 다른 하나는 우수마신타 분지와 파시온 강 지구, 나머지 하나는 유카탄 저지대 지구이다. 그 면적은 남한의 3배 정도인 약 30만km2이다.

 

기원전 2500년에 시작한 마야족은 기원전 300년까지는 형성기였으며 그 뒤에 전고전(前古典) 시대가 이어진다. 마야족은 서기 68년경에 이미 지금의 온두라스에 우와하쿠톤이라는 도시를 지었다. 그들은 약 120년간 그곳에 살았으며 그후 2km쯤 떨어진 페텐, 특히 티칼로 도읍을 옮기면서 전성기를 맞아 그곳에서 5세기 초까지 거주했다. 그후 마야족은 도읍을 건립했다가 버리고 또 건립했다가 버리는 일을 되풀이했고 이 고전시대는 9세기 말까지 이어진다. 한편 유카탄에서는 5세기부터 도시가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150년 후 문예부흥이 일어나고 유카탄 도시들이 페텐의 고전 문화를 물려받는다. 유카탄의 마야문명은 8~9세기에 전성기를 구축한다.

마야 문명 중 가장 놀라운 것은 그들이 도시를 건설한 곳이 그야말로 인간이 살기에는 아주 부적합한 열대 우림 속이라는 것이다. 마야인들의 우주관에 의한 세계의 중심지인 팔렌케조차 열대 우림 속에 있다. 그들은 팔렌케야말로 여러 신과 사람, 옥수수의 기원인 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왜 그토록 척박한 밀림 속에 그토록 웅장한 건축 문화를 건설하였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이 세계의 중심지라고 믿었던 팔렌케조차 9세기부터 방치되었음은 물론 마야 문명을 구성하였던 사람들조차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이다.

출처 : 신비여행가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