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야할한국사

대마도는 우리땅이 아니다

영지니 2010. 11. 18. 20:19

 

대마도는 우리땅이 아니다

 

 우리나라에는 주변국이 고질적인 문제를 일으키면 맞불을 놓으려는 사람들이 있다. 중국의 동북공정 문제가 불궈지면 요금원청도 우리 역사라는 사람들이 나서고, 일본이 독도문제를 일으키면 대마도도 우리땅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2005년에 시마네현이 다케시마의 날 조례를 통과시키자, 마산 시의회는 대마도의 날 조례를 통과시켰고, 올해 또다시 독도문제가 생기자 부산시의 여당의원들을 중심으로 대마도도 우리땅이라는 걸 교과서에 넣겠다는 움직임이 나타난다. 이 정권들어 뭘해도 욕먹던 여당이지만, 대마도 관련기사에는 이 일만큼은 지지한다라는 덧글이 많이 달린다. 여기에 뉴라이트교사연합까지 동참하고 나섰다.

 대마도가 우리땅이라는 근거를 보자. 먼저 대마도 주민들  B형간염 유전자 조사혀면 우리랑 같단다. 그리고 대마도에서 쓰는  말 중에는 우리와 같은게 많구나. 그럼 우리땅이란다. 아, 그렇구나. 그럼 LA에 있는 코리아타운도 우리 땅이로구나. 당장 HID는 미국대사관 앞으로 출동해 독수리의 목을 따며 코리아타운의 반환을 촉구해야 할 것이다. 차이나타운은 중국 땅일테니, 한중공조체계를 구축하면 되겠...아차, 연변조선족자치주도 우리 땅이니 그건 안 되겠네.

 또 일본열도보다 한반도에서 가깝단다. 아 그렇구나. 이건 다른 분 블로그에서 본 건데, 하와이는 미국본토보다 일본에 더 가깝다고 한다. 그럼 하와이는 일본땅이구나. 후쿠다 총리는 즉각 부시 대통령에게 하와이의 반환을 요구하라.

 이렇게 말하면 헛소리한다고 할 거다. 그러면서 각종 역사적 근거를 제시하며 대마도가 우리땅이라고 증명할 것이다. 좋다, 그럼 이 블로그의 타이틀에 충실하게 역사적 근거에서 대마도가 우리땅인지를 살펴보겠다.

 대마도가 우리땅이라는 근거라는 조선사대에 대마도가 나오는 지도들이나, <세종실록>이나 <동국여지승람>의 관련기록, 일본도 대마도를 자국영토로 여기지 않았다는 기록 등을 증거로 제시한다. 그런데 정말로 대마도는 우리 땅일까? 대마도가 우리땅이라고 제시하는 증거들이 제대로된 증거이기는 한 걸까?

  일본에서 대마도를 외국으로 여기던 생각이 많았던 건 사실인 거 같다. 정유재란 때 포로로 끌려갔다가 탈출한 강항의 <간양록>에서도 "대게 왜국에서 일기(壹岐)와 대마도를 외국 보듯이 하여 66주의 열에 끼지 못했던 것입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주의할 점이 있다. '일본이 대마도를 외국으로 생각한다.'라는 것은 단지 일본이 대마도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일 뿐이지, '대마도는 우리땅'이라는 증거는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마도가 우리땅인지를 증명하려면 조선인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실제로 영토로서 주권을 행사했는지를 따져봐야 한다. <간양록>에서만 하더라도 바로 일본이 대마도를 외국으로 여겼다는 저 기록이 나오기 전에 "신이 포로가 되어 왜의 땅에 와서 왜승에게 자세히 들어 보니, 평상시에 있었던 이른바 왜사(倭使)란 것이 모두 대마도주(對馬島主)가 보낸 사인(私人)이요, 이른바 왜의 국서(國書)라는 것도 모두 대마도주가 지어 보낸 위서(僞書)로서, (중략)대마도에는 수전(水田)이 한 이랑도 없는 까닭에 우리나라를 속여서 그 쌀을 받아다가 공사(公私)의 비용을 충당한 것입니다. "라거나 "전쟁이 일어나게 된 발단도 모두 의지(義智)의 꾀에서 나왔답니다. 섭진수(攝津守) 행장(行長)이 의지의 처부(妻父)입니다. 의지가 능히 제 힘으로는 적괴에게 통할 수 없으므로 행장을 통하여 우리나라 허실(虛實)을 자세히 고하였습니다."라여며 강항 역시 대마도를 외국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인용부분이 들어간 <간양록>의 '적중봉소'는 단순한 개인저작이 아니라 선조에게 올라간 내용이기도 하다. 
  
 과연 강항만 그렇게 생각했을가? 조선 정부의 공식입장은 어땠을까? 조선의 관찬 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대마도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대마도(對馬島) 곧, 일본의 대마주(對馬州)이다. 옛날엔 우리 신라[鷄林]에 예속되었었는데, 어느 때부터 일본 사람들이 살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이 부분은 흔히 대마도가 우리땅이라는 근거로 제시된다. 그러나 앞부분을 잘 봐라. 분명히 대마도가 일본 땅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과거에 신라에 속하기는 했는데, 지금은 일본 영토라는 걸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고려도 아니고 신라에 속해있던 게 어느 때 부터인가 일본인들이 살고 있다는 소리인데, 이게 대마도가 현재 우리 영토라는 걸 입증할 자료인가? 과거에는 그랬지만 지금은 아니라는 걸 입증하는 자료인가?

  대마도가 우리땅이라는 주장에서 도 자주 인용되는 게 <세종실록>에 실린 당시 상왕 태종의 말이다. 태종이 "대마도는 본래 우리 나라 땅인데, 다만 궁벽하게 막혀 있고, 또 좁고 누추하므로, 왜놈이 거류하게 두었더니,..."라고 한 부분이 대마도가 우리땅이라는 근거라는데, 글쎄 이것도 <신증동국여지승람>이랑 다를 게 별로 없다. 이것도 우리땅이엇긴 한데, 지금은 일본인들이 살게 내버려두고 있다는 거 아닌가? 이걸로는 좀 모호하다고? 그럼 이건 어떤가? 태종이 아직 현직 국왕이었을 때 한 말이다.

1407년에 대마도주가 조선 정부에 울릉도에서 살게 해달라고 요청하자 태종은 이렇게 말했다.

“만일 이를 허락한다면, 일본 국왕(日本國王)이 나더러 반인(叛人)을 불러들였다 하여 틈이 생기지 않을까?”


 여기에 남재(南在)가 별 문제가 없을 것으로 대답하니 태종은 다시 이렇게 말한다.

“그 경내(境內)에서는 상사(常事)로 여기지만, 만일 월경(越境)해 오게 되면 저쪽에서 반드시 말이 있을 것이다.”


 태종은 대마도에 사는 사람들을 울릉도에 옮기는 것을  '국경을 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이 대문에 일본국왕이 불만을 가져 외교문제가 생길것을 우려하고 있다. 대마도가 우리 땅이라면, 대마도에서 울릉도로 가는 것이 국경을 넘는 일도 아니고, 일본국왕을 걱정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세종실록>에는 태종 때 일본으로 사신으로 다녀온 박돈지가 구해온 일본지도를 다시 본 더 바친 기록이 잇는데, 이 지도에 박돈지는 이런 글을 남겼다.

“건문(建文) 3년 봄에 내가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비주수(肥州守) 원상조(源詳助)라는 사람이 그 나라의 명사라는 것을 듣고, 가서 보고 싶은 뜻이 있었는데, 원이 먼저 와서 보기를 요청하고 위로하기를 매우 후하게 하는 것이었다. 내가 인하여 그 나라의 지도를 보여주기를 청했더니, 원이 이 지도를 내어 주었는데, 상세하게 갖추어져서 완연한 한 지경의 방여도(方輿圖)였으나 오직 일기도(壹岐島)와 대마도 두 섬이 빠졌으므로 이제 보충하여 거듭 모사(模寫)하였다.”


 구해온 일본지도에 대마도가 빠졌다고 직접 그려넣기까지 하였다. 대마도가 조선 영토면 이럴 이유가 없지 않은가?

 이것이 대마도 정벌 이전이라 그런 거라고 반론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대마도 정벌 이후에는 대마도주가 스스로 조선에 속할 것을 청하여 경상도에 편입되었다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 그런 기록이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정말로 대마도가 우리땅이 된 것일까?


 

 대마도 영유권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자주 말하는 게 있다. 대마도 정벌 이후인 세종 2년, 대마도주가 스스로 예속을 청해 이를 받아들여서 대마도가 경상도에 속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마도는 보고도 경상도 관찰사를 통하게 했다는 거다.

 거짓말은 아니다. 실제로 <세종실록>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세종 7권, 2년(1420 경자 / 명 영락(永樂) 18년) 윤1월 23일(임진) 2번째기사

허조에게 명하여 도도웅와의 서한에 답서하게 하다


예조 판서 허조에게 명하여 도도웅와의 서한에 답서하게 하니, 그 글에 이르기를,

“사람이 와서 편지를 받아 보고 귀하가 진심으로 뉘우치고 깨달아서, 신하가 되기를 원하는 뜻을 자세히 알았으며, 돌려보낸 인구(人口)와 바친 예물은 이미 자세히 위에 아뢰어 모두 윤허하심을 받았으니, 실로 온 섬의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귀하가 요청한 바 여러 고을에 나누어 배치한 사람들에게는 이미 의복과 식량을 넉넉히 주어서, 각기 그 생업에 안심하고 종사하게 하였는데, 섬 안에는 먹을 것이 부족하니, 돌아간다면 반드시 굶주릴 것입니다. 또한 대마도는 경상도에 매여 있으니, 모든 보고나 또는 문의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본도의 관찰사에게 보고를 하여, 그를 통하여 보고하게 하고, 직접 본조에 올리지 말도록 할 것이요, 겸하여 청한 인장의 전자(篆字)와 하사하는 물품을 돌아가는 사절에게 부쳐 보냅니다. 근래에 귀하의 관할 지역에 있는 대관(代官)과 만호(萬戶)가 각기 제 마음대로 사람을 보내어 글을 바치고 성의를 표시하니, 그 정성은 비록 지극하나, 체통에 어그러지는 일이니, 지금부터는 반드시 귀하가 친히 서명한 문서를 받아 가지고 와야만 비로소 예의로 접견함을 허락하겠노라. ”

하였다. 그 인장의 글자는 “종씨 도도웅와(宗氏都都熊瓦). ”라 하였다.


 오, 진짜 기록이 있다. 그럼 이걸로 대마도는 우리땅?

 하지만 불과 1년도 안 되어 이런 기록들이 보인다.
 
세종 10권, 2년(1420 경자 / 명 영락(永樂) 18년) 10월 8일(계묘) 2번째기사
일본국 회례사 통사 윤인보의 선행 귀환 보고
  
일본국 회례사(回禮使) 통사(通事) 윤인보(尹仁甫)가 먼저 돌아와서 복명하여 계(啓)하기를,
 
“신 등이 처음 그 나라에 도착하니, 대우가 매우 박하며, 그 국도(國都)에 들어 오지 못하게 하고 심수암(深修庵)에 사관을 정해 주니, 국도와 거리가 가까운 30리쯤 되는데, 항상 병정을 시켜 지키게 하여, 그 나라 사람들과 통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중[僧] 혜공(惠珙)이란 자가 와서 묻기를 ‘들으니 명나라가 장차 일본을 치려 한다 하니, 진정 그러한가. ’ 하므로 대답하기를, ‘모르겠다. ’하였더니, 혜공이 또 말하기를, ‘조선이 명나라와 마음을 같이 한다는데 어찌하여 모르는가. 앞서 명나라가 환자(宦子)를 일본에 보내 조칙(詔勅)을 내렸는데, 「만약 신하로서 섬기지 않으면 조선과 같이 일본을 토벌하리라.」고 하였고, 얼마 뒤에 그 사신이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여 도망쳐 돌아간 일이 있으므로 의심이 나서 묻는 것이라. ’ 하였습니다. 또 그 국왕이 보당사(寶幢寺)에서 신 등을 불러 보는데, 그 국왕은 머리를 깎고 가리복(伽梨服)을 입었으며, 집사하는 사람들도 다 중[僧]이고, 시종하는 자가 10사람에 불과하더이다. 인견하고 나서는 신 등의 사관을 송월암(松月庵)에 옮겨 주고 대우가 조금 낫더이다. 중 혜공과 주송(周頌)이 와서 말하기를, ‘국서(國書)에 영락(永樂)을 썼기에, 우리 어소(御所)에서 그것을 싫어하여 경도(京都)에서 사신을 접견하지 아니한 것이니, 어찌해서 우리[日本]의 응영(應永) 연호(年號)를 쓰지 아니하였는가. ’ 하더이다. 어소(御所)라 하는 것은 그 나라 사람들이 임금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그 나라에는 부고(府庫)가 없고, 외국 사신이 오면 오직 부인(富人)으로 한 사람 지정하여 접대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라 하더이다. 또 어떤 사람이 비밀히 말하기를, ‘국왕의 거하는 곳이 체면을 가누지 못하여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싫어서 국도(國都)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 ’고도 하더이다. 국왕[御所]이라는 자는 매양 여러 절간[寺]으로 다니면서 재(齋)를 올리는 것으로 일을 삼고 있으므로, 그 명령이 가까운 국도(國都) 부근에나 통할 뿐이라고 하더이다. 토지는 다 강성한 종족(宗族)들에게 쪽쪽이 나누어져 있어, 무슨 일이든지 왕의 뜻대로 안 되어 갈 뿐이라 하더이다. 구주 절도사(九州節度使) 부자(父子)는 성심으로 우리를 대우하였고, 축전 주수(筑前州守) 등만원(藤滿員)과 일기 도주(一岐島主)는 다 원망하는 말을 하였고, 소이전(小二殿)은 또 말하기를, ‘거년에 조선이 우리 대마도를 쳐들어 왔으니, 우리가 병선(兵船) 2, 3백 척을 청하여 조선 해안 몇 고을을 쳐부셔야 우리 마음이 쾌하겠다. ’ 하며, 대마도 도도웅와(都都熊瓦)의 아우 도도웅수(都都熊守)는 또 말하기를, ‘내가 너희들을 가두어서 우리 대마도 사람으로서 너희 나라에 붙잡혀 가 있는 것과 같이 할 것이나, 본국과 더불어 통호(通好)하고 있기에 감히 그렇게 못하니, 그 붙잡혀 가 있는 사람들을 빨리 돌려보내게 하라. ’고 하더이다. ”하였다.

 
  이 보고를 접한 상왕 태종은 유정현 등을 불러 대책을 논의한다. 이 자리에서 박은과 이원 등은 상왕에게 “일본 국왕의 말은 족히 수죄(數罪)할 것도 없으나, 소이전과 도도웅수의 말은 가증하오니 마땅히 여러 장수를 보내어 엄중히 방비하여 기다려 보고, 만약 곧 와서 항복하지 아니하면 들어가 치는 것이 가할 것입니다. 지금 대마도 사자(使者)와 흥리인(興利人) 등을 다 구류하여 두게 하고, 구주(九州)에서 온 사자와 이미 구류된 왜인 중에 미약한 자를 가려서 돌아가게 하여, 우리 조정에서 병력을 신칙하여 사변을 대비하고 있는 뜻을 가서 전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라 아뢴다.

 자, 일본 영주는 조선이 우리 대마도를 침범한 것에 대한 보복의사를 나타냈으며, 종속을 청했다는 도도웅와의 동생도 조선을 '너희 나라'라며 외국으로 취급하고 있다. 하지만 그 발언이 건방진 것을 문제삼았지, "왜 우리 영토를 지들 땅이래?"라는 분노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실행하진 않았지만 또 한번의 대마도 정벌을 논의하였다. 만일 대마도가 조선 땅이라면, '반란진압'이나 '영토수복'이 되어야하는데, 그런 기미는 없다.

 심지어 이듬해 1월에는 상왕 태종도 “통신사 송희경이 돌아올 적에 정성(貞盛)의 아우 웅수(熊壽)가 말하기를, ‘지금 이후로는 서로 호시(互市)하지 아니하겠다. ’ 하였다 하니, 이로 본다면, 국교를 끊으려고 함이 분명하였던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국교라는 말은 설명할 필요도 없겠고, 호시다 '두 나라 사이의 교역'을 의미한다. 대마도가 조선 영토로 편입된 거라면 이런 용어를 사용할 이유가 없다. 조선은 여전히 대마도를 자국이 아닌 외국으로 보고 있었다. 대마도도 마찬가지였다. 

  이상의 자료들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일본에는 대마도를 외국으로 보는 사람도 있긴 했지만, 반대로 자국 영토로 인식하는 경우도 분명히 존재했음을 알려준다. 하지만 조선은 외교 국방의 최고결정권자 상왕 태종이 대마도를 '외국'으로 인정하고 있다. 조선에서 대마도에 영토의식을 드러낸 기록을 찾아도 '옛날에 그랬다.'이지 '지금도 그렇다.'는 없다.

  게다가 대마도가 경상도에 속해있다고 한지 1년도 안 되었는데도 대마도와 조선이 다른 나라 임을 입증하는 기록들이 남아있다는 것은, 경상도에 속하게 한다는 조치 자체가 조선국왕이 명나라 황제에게 책봉받는 거 수준의 형식적인 절차였음을 의미한다. 

 실제 고려나 조선에서 대마도주에게 벼슬을 내린 기록은 있지만, 고구려왕도 중국에서 관직을 받은 적이 있으며, 발해왕은 발해국왕도 아닌 발해군왕으로 책봉된 바도 있다. 그러니 관직제수로 대마도가 우리땅이면, 고구려 발해도 중국사다. 심지어 조선도 명나라나 청나라의 지방정권이다. 대마도가 고려의 목마지, 말을 기르던 곳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우리나라에는 몽골이 말을 키우던 섬이 있다. 그럼 몽골에게 영유권이 있나?

 내친 김에 독도는 우리땅 노래에도 나오는  <세종실록 지리지>까지 찾아봤다. 그랬더니, 대마도에 관한 얘기 나온다. '(경상)
도 수군 도안무처치사(右道水軍都安撫處置使)는 거제(巨濟) 오아포(吾兒浦)에 있다. 병선 28척, 군사 2천 6백 1명이다. 예전에는 제포(薺浦)에 있었는데, 금상(今上) 원년 기해에 대마도(對馬島)쳐서 파하고 처치사를 이곳으로 옮기도록 명하였다.' 라고. 세종 때 우리땅 됐다면서 왜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대마도 지리를 안 기록했나?

 이런, 대마도가 우리 땅이라는 근거자료의 출처라는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세종실록>에서 대마도가 우리땅이 아니라는 증거를 찾아냈다. 더욱 중요한 건, 그나마 다 인용하지도 못했다는 점이다. 그것도 <세종실록> 한정이고, <조선왕조실록> 전체로 확대할 경우는 물론, 실록 이외의 사료를 포함하면 필자가 소개한 사료는 빙산의 일각도 안 된다. 마음내키면 이 글을 3편, 4편도 쓸 수 있다는 소리다.

 그럼 조선지도에 대마도가 나오는 건 무슨 일이냐고? 비슷한 경우가 더 있다. 조선지도에는 만주의 지명이 나오는 경우도 있다. 만주는 옛 고구려의 영토로, 조선 역시 고구려를 이어받았으니 이는 곧 조선의 옛 땅이라는 생각이 많았다. 그리고 이 중 요동방면은 중국으로 가는 교통로다. 또 이 일대는 여진족들이 사는 곳으로 때로는 조선군이 국경을 넘어 군사작전을 펼치기도 하는 지역이었다. 이정도면 조선의 영토가 아닌 만주가 조선지도에 나오기도 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우리 고토라는 영토의식에서 외교, 국방상 필요한 실리적 이유 때문에라도 만주를 파악하는 건 필요한 일이다. 그리고 이 이유들은 정확히 대마도에게도 대입된다. 신라에 속했다, 일본으로 가는 길목이다, 왜구토벌로 정벌도 한적이 있다, 만주랑 똑같지 않은가?

 이 세가지 이유 중 하나, 혹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대마도를 지도에 포함하였지만, 실제 주권이 미치는 곳은 아니었고, 조선 정부가 자국 영토가 아니라는 걸 인정하였으니, 대마도는 우리 땅이 아닌 것이다. 교토에서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 영토로 나온 고지도가 나온다고 그걸 증거자료로 인저해줄 것도 아니잖나?

 그래도 조선인들도 대마도가 신라 것이었다고는 인정하지 않았느냐, 일본인들도 그걸 인정하는 기록 많다, 랄 사람도 있을 거 같다. 그렇게 말하면 필자는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신라면 최소 천년전이다. 천년전에 지금과 똑같은 국경선을 가진 나라들이 얼마나 되겠나? 천년 전 연고로 우리땅이라면 전세계가 영토분쟁으로 날을 지새워야 한다. 게다가 신라가 대마도를 어느 정도로 지배했는지도 정확히 고증할 수가 없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는 실성이사금 때 왜인들이 대마도에 병영을 설치했다는 기록은 있는데, 언제 영토로 편입했다는 기록은 없다. <삼국사기>는 왜곡됐을 거라 말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지 몰라 말해두는데, 신라장군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을 기록하여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역사적 근거를 제공해주는 사료가 바로 <삼국사기>다.


 대마도로 건너간 신라인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신라의 영향력이 강해졌을 가능성은 있지만, 그 영향력이 관리를 파견하여 직접 지배하는 정도인지, 속국의 형태인지, 신라계의 입김이 센 반독립국 수준인지, 정말 영향력을 행사하기는 한 건지 알 수가 없다. 천년하고도 더 거슬러 올라가, 어느 수준으로 지배했는지를 알 수 없는, 더 솔직히 말하면 지배한 사실 자체를 고증할 수 없는 땅을 우리 땅이라고 주장하겠다고? 외국인들이 보면 독도가 일본 땅이라는 게 더 합리적으로 보일 걸?(오해할 사람 꼭 있을 거 같아 덧붙이는데, 독도는 우리땅이다. 대마도가 우리땅이라는 논리와 비교하면 그렇다는 거다.)

 
 자, 아무리봐도 대마도는 우리땅이 아니다. 그 근거가 너무 궁색하다. 그나마 그 근거는 같은 출처에 의하여 논파당할 것들이 많으니, 그거라고 하기도 민망하다. 

 1편을 올리고나니, 뭐하러 이런걸 이야기하느냐, 우리도 우기면 좀 어떠냐, 라는 식으로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왜 이야기하냐고? 사기를 칠거면 제대로 치기라도 하던지, 아니라는 증거가 잔뜩 있는데 사기를 칠 수 있냐? 일본도 하는데 왜 우리는 못하냐고? 이런 사람들은 일본 극우랑 같은 수준 되고 싶냐면 못 알으들으니,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해주겠다. 일본은 국력, 국가인지도, 해외홍보수준 모두 우리를 앞선다. 그리고 사람이 안 살던 섬이었는데 자기네가 접수했다고 말한다. 사정 모르는 외국인에게는 그럴듯해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대마도에 같은 식으로 하면? 일본보다 처지는 나라가, 심하게는 왠 듣보잡 국가가 최소 수백년전, 아니 <삼국사기>에도 왜인들이 병영을 설채했다고 하고, <삼국지> 위지 동이전도 대마도를 왜의 영역으로 기록하니, 천년 이전부터 일본인들이 섬을  살던 섬을 지들 땅이라고 한다. 이게 먹힐 거 같은가? 증거도 빈약하고, 사기쳐서 등쳐먹으려는 상대보다도 힘도 딸리면서, 어설프게 따라하겠다고? 독도만 빼앗기면 다행이겠다 싶다.

  그나마 독도문제가 나올 때마다 관심 끌도 싶어하는 인물이나 단체 정도가 나서는 수준이라면 그러려니 하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걸 여당 국회의원님들께서 믿고 교과서에까지 넣겠다니, 이러다가 외국에서는 독도가 우리땅이라는 근거까지 별거 아닐 걸로 간주할까 겁난다. 그리고 대마도가 우리땅이라는 논리를 중국은 고구려 발해가 중국사라는 논리로 받아칠테니, 이거 맞불 놓다가 우리집만 태워 먹는 거 아닐까?

 그래서 난 대마도는 우리땅이 아니다라고 앞으로도 말할 거다. 그게 오히려 나라를 망치는 길이고,  나라를 위하여 조용히 하라는 논리는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굉장히 위험한 발상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아니니까.

 

출처 ; http://bloggernews.media.daum.net/news/1510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