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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기 일본皇宮은 백제계 ‘킹메이커’들의격전장

영지니 2010. 11. 19. 17:51

 

6세기 일본皇宮은 백제계 ‘킹메이커’들의격전장




일본 천황家와 한반도 渡來人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고대사 부분의 인명과 지명은 우리가 읽는 한자음으로 표기했음을 밝혀둡니다.(편집자 주)

나자신 환무(桓武:재위 781∼806) 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武寧王)의 자손이라고 ‘속(續)일본기’에 기록돼 있는 사실에 한국과의 연(緣)을 느낀다”는 아키히토(明仁) 일왕의 발언에 대해 한·일 양국에서는 상반된 반응이 나타났다. 이를 대서특필한 한국 언론과 달리 아사히(朝日)신문을 제외한 일본 언론은 침묵했다. 대서특필과 침묵 사이의 거리는 두 나라의 고대사에 대한 열린 마음만이 좁힐 수 있을 것이다.

환무천황의 어머니는 고야신립(高野新笠:다카노 니이가사)으로 광인(光仁:재위 770∼781)천황의 부인이었다. 환무천황은 재위 8년(789) 12월에 어머니 황태후가 죽자 이듬해 1월 장례를 치르는데, 그 장례 기사 끝 부분에 ‘황태후는 백제 무령왕의 아들인 순타(淳陀) 태자의 후손’이라고 ‘속일본기’는 기록하고 있다. 아키히토 일왕이 왜 이 부분을 언급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본 왕실과 백제 관련 기록은 ‘속일본기’뿐만 아니라 ‘일본서기’(日本書記)와 ‘일본고사기’(古事記) 등에도 무수히 나온다.

그런데 일왕의 이 발언이 필자에게 비상한 관심을 끈 이유는 일왕이 천황가의 가계(家系)에 대한 교육을 받는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일본 궁내성도서관에 존재하는 것으로 추측되는 한국 고대사 관련 자료를 일왕이 보았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일본 천황家는 어디로부터 왔는가

일왕 히로히토(仁)는 1946년 1월 신격(神格)을 부인하고 인간임을 선언했지만 아직도 어떤 일본인들은 일왕을 막연한 신적 존재로 생각하기도 한다.

실제로 제국주의 시절 일본은 천황의 시조는 하늘에서 강림했다고 가르쳤다. 천조대신(天照大神:아마테라스 오카미)으로부터 한 계통으로 계승되어 온 이른바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신성한 황통(皇統)이라는 주장이었다. 이에 대한 비판은 금기시되었고 억압당했다.

그 대표적 예가 역사학자 츠다 소키치(津田左右吉)에 대한 재판이다. 1942년(昭和 17년) 5월 나카니시 요이치(中西要一) 재판장은 비공개 법정에서 츠다 소키치에 대해 다음과 같은 사유로 금고 3개월, 집행유예 2년의 유죄판결을 내렸다.

“혹은 숭신(崇神:10대 천황)·수인(垂仁:11대 천황) 이조(二朝)의 존재를 가정한다고 말한다거나, 또 혹은 제기(帝紀) 편찬 당시에 있어서 중애(仲哀:14대 천황) 이전의 역대(歷代)에 대하여서는 그 계보에 관한 재료가 존재한 형적이 없고 그에 관한 역사적 사실도 거의 전하여 있지 않다는 등 황공하게도 신무(神武:초대 천황) 천황으로부터 중애천황에 이르는 역대 천황의 존재에 대하여 의혹을 품게 할 우려가 있는 강설(講說)을 감히 함으로써 황실의 존재를 모독하는 문서를 제작하고….”

그런데 황실의 존재를 모독했다는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은 츠다 소키치는 유명한 황국사관 신봉자였다. 이는 일왕의 시조에 대한 제국주의 일본의 고민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였다. 황국사관 신봉자가 황실의 존재를 모독했다는 혐의로 유죄판결받았다는 자체가 일본 황국사관의 한계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일본 황실의 가계를 역사적 사실로 끌어들이는 것이 황실 모독이 되는 자기모순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일본 천황가가 하늘이 아니라 땅에서 왔음을 설명하려 한 최초의 역사학자는 기마민족설의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다. 일본 엘리트들의 집합처이기도 했던 만철(滿鐵:만주철도) 출신의 그는 1948년 도쿄대학 교수로서 ‘일본 민족과 국가의 기원에 관한 심포지엄’에서 ‘북방 기마민족에 의한 일본열도 정복설’이라는 논문을 발표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일본 천황가의 기원이 하늘에서 내려온 천손(天孫)이 아니라 바다를 건너온 북방 기마민족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의 핵심이었다. 북방 기마민족이 한반도를 거쳐 일본 규슈(九州)에 상륙했으며 이들이 4세기말경 동쪽 기내(畿內)로 진출해 대화(大和·야마토) 정권을 세웠다는 것이었다.

이 기마민족은 유라시아에서 동북아시아에 걸쳐 존재했던 스키타이·흉노(匈奴)·돌궐(突厥)·선비(鮮卑)·오환(烏桓) 등의 유목민족을 가리키는데, 우리 민족의 갈래인 부여와 고구려도 여기에 해당한다. 그런데 에가미 나미오는 막상 ‘한반도’라고 설명해야 할 많은 부분을 ‘대륙’이라고 막연하게 표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은 천황이 하늘이 아니라 북방 대륙, 그것도 한반도를 거쳐 온 세력이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4년 후인 1952년 와세다대학의 미즈노 유(水野祐) 교수는 3왕조 교체설을 주장해 만세일계의 신성한 황통에 메스를 댔다. 첫번째 왕실의 개조는 초대 신무 천황이 아니라 10대 숭신 천황이며, 두번째 왕조는 규슈(九州)에서 진출한 16대 인덕(仁德) 천황이 개조로서 앞 왕조와는 혈연관계가 없으며, 세번째 왕조인 현 황실은 앞의 왕통과는 관계 없는 26대 계체(繼體) 천황이 개조라는 주장이었다. 미즈노의 3왕조 교체설은 일본 학계에서 하나의 학설로 자리잡았지만 여전히 일본 천황가의 시조가 어디에서 왔는지는 베일에 싸여 있다.

오사카 사카이시 모즈에 위치한 닌토구 천황릉,대표적인 전방후원분으로 꼽힌다.



전남 나주 반남고분은 倭의 비밀 푸는 열쇠

1999년 필자는 이희근 박사와 함께 펴낸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1권’의 ‘잃어버린 왕국, 나주 반남고분의 주인공은 누구인가’에서 이에 대한 설명을 시도한 적이 있다. 전남 나주군 반남면 자미산 일대에 산재한 30여기 고분군(古墳群)의 주인공들에 대한 설명이었다. 이 중 덕산리 3호분의 경우 고분의 남북 길이가 46m이고 높이가 9m에 달할 정도로 거대한데, 이는 백제 도읍 부여나 공주의 고분들보다 큰 규모다.

이 고분들은 하나의 거대한 봉토(封土) 내에 수개 혹은 수십개 이상의 시신을 담은 옹관(甕棺:항아리 관)이 합장되어 있는 특이한 형태인데 큰 옹관은 길이가 3m, 무게가 0·5t이나 나가는 것이었다. 그 안에서는 금동관(金銅冠) 및 금동제(金銅製) 장신구와 손잡이에 둥근 테가 달린 환두대도(環頭大刀)가 출토되었다.

이러한 출토 유물들과 함께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라는 무덤 형태와 봉토 주변에 물을 담았던 흔적은 고분 주인공들의 성격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일반적으로 무덤과 물은 상극이라는 점에서 봉토 주변을 물로 채운 이런 무덤 양식은 전세계에서 이곳과 일본의 일부 고분 외에는 유래를 찾기 어려운 것이다. 나주 지역은 영산강 유역으로 예부터 일본과 통하는 주요한 뱃길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 반남고분군의 주인공을 왜인(倭人)과 연결시킨 최초의 시도는 일제 시기 일본인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1917년 반남고분군을 최초로 조사한 조선총독부 고적(古蹟)조사위원회의 곡정제일(谷井濟一) 등 4명의 위원들은 반남면 신촌리·덕산리·대안리 일대의 여러 고분들을 대대적으로 발굴한 후 한쪽짜리 간단한 보고서를 내놓았는데, 거기에 ‘왜인’이라는 구절이 들어 있는 것이다.

‘반남면 자미산 주위 신촌리·덕산리 및 대안리 대지 위에 수십기의 고분이 산재해 있다. 이들 고분의 겉모양은 원형(圓形) 또는 방대형(方臺形)이며 한 봉토 내에 1개 또는 여러 개의 도제(陶製)옹관을 간직하고 있다. 여기에서 발견된 유물 중에는 금동관과 금동신발, 칼(大刀 및 刀子)과 도끼·창·화살·톱이 있고, 귀고리· 곡옥(曲玉)·관옥(管玉)·다면옥(多面玉)·작은 구슬 등 낱낱이 열거할 겨를이 없을 정도다. 이들 고분은 그 장법(葬法)과 관계 유물 등으로 미루어 아마 왜인(倭人)의 것일 것이다. 그 자세한 보고는 후일 <나주 반남면에 있어서의 왜인의 유적>이라는 제목으로 특별히 제출하겠다.’

그러나 이들이 훗날 내놓겠다던 ‘나주 반남면에 있어서의 왜인의 유적’이라는 보고서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 반면 일제는 이 유적지를 방치했다. 20여년 후인 1938년 재발굴에 참여했던 아리미스 기요이치(有光敎一)의 “도굴의 횡액(橫厄)으로 이처럼 유례가 드문 유적이 원래 상태를 거의 잃어버렸다”는 회고는 일제가 일부러 도굴을 방조했다는 양심선언에 다름아니다.

한반도 왜인의 존재는 당시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의 실재를 통해 식민사관을 확립하려던 일제에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당시 일제는 ‘광개토대왕 비문’의 왜 침략 기사와 ‘일본서기’ 기사를 바탕으로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식민지로 경영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한반도 식민지배 정당성의 기초로 삼고 있을 때였다. 한반도 남부에서 왜인의 실재를 알리는 유물이 다수 출토되었다면 일제는 이를 근거로 임나일본부설의 실재를 주장했어야 했다. 그러나 일제는 내겠다던 ‘나주 반남면에 있어서의 왜인의 유적’이라는 보고서는 내지 않고 대신 도굴을 방조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반남고분군의 출토 유물들이 임나일본부설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설을 뒤집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반남고분군과 그 출토 유물들은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한 것이 아니라, 반남고분군을 축조한 정치세력이 고대 일본열도를 지배했다는 사실을 말해 주기 때문인 것이다. 즉 ‘일본열도→한반도’가 아니라 ‘한반도→일본열도’의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에 침묵 속에서 도굴을 방치한 것이었다.



일본 고분시대와 ‘삼국사기’ 신라본기 속의 倭

‘광개토대왕 비문’의 유명한 신묘년(서기 391) 기사는 ‘왜가 신묘년 이래 바다를 건너와 백제를 파하고, □□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而倭以辛卯年來 渡海破百殘□□新羅 以爲臣民)고 기록하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 일제는 식민지 시절 ‘일본서기’의 기사와 이 구절을 임나일본부 실재의 강력한 증거로 삼았다. 실제로 광개토대왕 비문은 왜 세력이 400년과 404년 두차례에 걸쳐 고구려와 대규모 전쟁을 치른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현재 일본 학계는 그 시기에 일본열도 내에는 이러한 정복전쟁을 수행할 정도로 강력한 정치세력이 존재하지 않았음을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왜가 고구려와 전쟁을 치른 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일본열도 내의 대화정권에서 보낸 정복군대가 아니라 한반도 내에 있던 왜 세력이 수행한 전쟁이 된다. 두 차례에 걸친 전쟁에서 패전한 한반도 왜인들은 영산강을 통해 일본열도로 건너가 정복왕조를 세우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일본 천황가의 시작이다.

이는 일본 고분의 변화에서도 확인된다. 일본사에는 고분시대라는 시기가 있는데 이는 전기(前期:3세기말∼4세기말)·중기(中期:4세기말∼5세기말)·후기(後期:5세기말∼7세기 전반)로 분류된다.

전기 고분은 기내 지방과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 연안에 분포하는 반면 중기 고분은 전국으로 확대되어 나타난다. 중요한 것은 전기 고분은 자연지형을 이용해 구릉지 등에 쌓은 반면 중기 고분은 평지에 쌓았는데, 그 규모가 거대하다는 점이다.

이 시기에 쌓은 고분 중 하나인 코우야마(岡山)의 츠쿠리야마(造山) 고분은 길이가 360m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다. 언덕이나 구릉 등의 지형을 이용해 적은 노동력을 가지고도 일반 백성들에게 무덤 주인의 신성함을 강조했던 전기 고분시대와 달리 중기 고분시대는 막대한 노동력을 징발해 평지에 거대한 고분을 조성한 것이었다. 이는 정치 지배세력의 교체를 의미한다. 이 새로운 정치세력은 자연히 일본 천황가와 연결된다.

그런데 왜 세력은 백제와는 우호적이었던 반면 신라와는 시종 적대적이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혁거세왕 8년(서기전 50)부터 소지왕 22년(500)까지 약 52차례의 왜 관계 기사가 나오는데 대부분 침략이나 전투 기사다. 반면 백제와는 우호관계였음을 여러 군데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 신라본기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 22년(500)의 ‘봄 3월에 왜인이 장봉진(長峰鎭)을 쳐 함락시켰다’는 기사를 마지막으로 왜인의 기사는 신라본기에서 사라진다. 신라본기에 왜인 관련 기사가 다시 등장하는 것은 무려 165년 후인 문무왕 5년(665)이다. 문무왕 5년의 기사는 신라의 문무왕과 당나라 유인원(劉仁願), 그리고 백제 출신 웅진도독 부여융의 회맹문인데 여기에 ‘백제가 왜국과 결탁해 신라를 공격했다’는 내용이 있는 것이다.165년이라는 공백의 수수께끼는 나주 반남고분의 중심세력이 일본열도로 이주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이 정치세력은 백제의 멸망을 계기로 다시 한반도 역사에 깊숙이 개입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불교 전파와 권력쟁투, 백제계 호족 소아家의 슈퍼파워

일본 천황가와 백제의 관계는 그동안 수많은 학자들에게 비상한 관심사였다. 그간 여러 인사들이 백제 세력이 일본 천황가를 건설했다는 주장을 편 것이 이런 관심을 말해준다. 아키히토 일왕의 백제 관련 발언이 관심을 끈 것도 이 때문이다.

“무령왕은 일본과 관계가 깊어 이때부터 오경(五經)박사가 대대로 일본에 초빙됐다. 또 무령왕의 아들 성명왕(聖明王:성왕)은 일본에 불교를 전달해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일왕의 발언은 ‘일본서기’에 기록된 내용이다. ‘일본서기’는 흠명 천황 13년(552) 10월에 백제의 성명왕이 불상과 경론을 보냈다고 적고 있다. 백제 성왕은 노리사치계를 통해 “(불교를) 기내(畿內)에 유통시켜 부처님이 ‘내 법은 동쪽에 전해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실현시키려 한다”고 말하며 불교 수용을 촉구했다.

이 불교 수용을 둘러싸고 당시 왜국 내에서는 두차례의 종교전쟁이 일어난다. 흠명 천황과 백제계 호족 소아도목(小我稻目:소가노이나메)은 불교 수용을 주장한 반면 또 다른 호족 물부미여(物部尾輿:모노노베오코시)와 중신겸자(中臣鎌子:나가토미노)는 반대한다. 불교를 받아들이면 천지사직 180신(神)의 노여움을 살 것이라는 이유였다.

그러자 흠명 천황은 소아도목에게 불상을 주어 시험삼아 예배하도록 하자는 절충안을 제시했다. 사실 소아도목은 흠명 천황의 장인이었다. 소아도목은 자신의 두 딸 견염원(堅鹽媛:키타시히메)과 소매군(小妹君:오와누기미)을 흠명 천황에게 출가시켰던 것이다. 사위의 중재로 불상을 받은 소아도목은 소간전(小墾田)의 집에 불상을 안치하고 향원(向原)의 집을 수리해 사찰로 삼았다. 일본 최초의 사찰이었다.

천황과 백제계 호족 소아가의 적극 수용으로 왜국에 발을 디딘 불교는 그러나 곧 시련에 부닥친다. 역병이 창궐해 백성들이 죽어갔는데 반대파에서 그 이유를 불교 탓으로 돌렸기 때문이다. 불교 전파 때문에 전통신(傳統神)이 노해 역병이 퍼졌다는 것이었다. 물부(物部)와 중신(中臣) 등이 이를 빌미로 불교 억압을 주장하자 흠명 천황도 거부할 수 없었다. 백제 성왕이 보내 준 불상은 난파(難波)의 굴강(掘江)에 던져지는 신세가 되었다. 또한 일본 최초의 가람은 불태워졌다.

이처럼 불교 전파를 둘러싼 제1차 불교전쟁은 반백제계 물부가의 승리로 돌아갔다. 이로부터 약 30여년이 지난 민달(敏達) 천황 13년(584)에 백제의 위덕왕(威德王)은 다시 왜국에 미륵상 1구와 불상 1구를 보냈다. 이때 대신으로 있던 소아도목의 아들 소아마자(蘇我馬子:소가노 우마코)가 이 불상을 받아들였다. 소아마자는 아버지 소아도목으로부터 불교 수용에 관한 유언을 받은 터였다. 소아마자는 사방으로 사람을 보내 승려를 찾은 결과 파마국(播磨國)이라는 곳에 숨어 있던 혜편(惠便)이라는 고구려 출신 승려를 찾아 스승으로 삼고, 석천(石川)의 집에 불전을 지어 불법을 전파했다.

그런데 이때 공교롭게도 역병이 다시 창궐했다. 백성들이 다수 병사하고 천황까지 병에 걸리자 물부가와 중신가는 이를 다시 불교의 탓으로 돌렸다. 길흉화복을 하늘의 뜻에 돌리던 시대에 이처럼 강력한 명분은 없었고, 불교는 다시 억압받는 신세가 되었다. 물부수옥(物部守屋:모노노베모리야)은 소아마자가 세운 절에 가서 불상과 불전, 탑을 불태우고 허물었으며 타다 남은 불상을 난파의 굴강에 던졌다.

물부가 때문에 불교 수용이 거듭 좌절되자 소아마자는 비상한 수단을 결심한다. 불교 수용은 단지 종교의 문제가 아니라 왜국의 정치권력을 누가 장악하느냐의 문제였다. 백제계 소아가는 친백제계 세력들을 모아 물부가를 섬멸하기로 결심했다. 용명 천황 2년(587) 소아마자는 구호(廐戶:우마야도) 황자와 박뢰부(泊瀨部:하쓰세베) 황자 등 황실 인물들과 함께 물부가를 공격했다. 이때 물부가의 거센 저항으로 위기를 맞자 구호 황자는 백교목(白膠木)을 급히 잘라 사천왕상(四天王像)을 만들어 “적을 이기게 해 주면 반드시 호세사왕(護世四王:사천왕)을 위해 사탑을 건립하겠다”고 기도한다. 드디어 전투는 소아가의 승리로 끝나고 물부가는 멸망하고 말았다.

이로써 소아가의 명실상부한 왜국의 중심이 되었다. 사실상 천황가는 소아가의 얼굴마담이 되었다. 소아마자는 용명 천황이 사망하자 황위를 자신의 조카이자 사위인 박뢰부에게 주었는데 그가 제32세 숭준(崇峻) 천황이었다. 그러나 소아마자는 숭준 천황이 자신에게 불만을 품자 심복 동한직구(東漢直駒)를 시켜 숭준을 암살하고 제30세 민달(敏達) 천황의 부인이자 자신의 질녀인 취옥희(炊屋姬:도요미케가시키야히메) 황후를 즉위시켰다. 그가 제33세 추고(推古) 여제다.

그리고 손자뻘인 구호 황자를 황태자로 삼았는데 그가 바로 유명한 성덕 태자였다. 추고여제 시대는 표면상 추고 여제와 대신 소아마자, 성덕 태자의 3두마차 체제였으나 모든 실권은 소아마자에게 있었다. 정치는 소아마자의 몫이었으며 성덕 태자는 불교를 중흥시키는 역할을 담당했다.

592년부터 628년까지 계속된 추고 시대는 일본이 세계에 자랑하는 비조(飛鳥) 문화, 즉 아스카 문화를 만들어낸 문화의 시대였다. 그런데 이 시대는 곧 백제의 시대요, 아스카 문화는 곧 백제의 문화이기도 했다.



백제 문화, 아스카 문화로 꽃피다

소아마자가 물부가를 주륙한 이듬해인 숭준 천황 1년(588) 백제 위덕왕은 승려 혜총(惠總) 등과 은솔(恩率) 수신(首信) 등을 왜국에 보낸다. 그런데 ‘일본서기’는 이때 백제 사신과 승려들이 태량미태(太良未太) 등의 사공(寺工)과 장덕백매순(將德白昧淳) 등의 노반박사(盤博士), 그리고 마내문노(麻奈文奴) 등의 와(瓦)박사와 백가(白加) 등의 화공(畵工)을 함께 데리고 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공은 사찰 건축가이고 노반박사는 금속 전문가, 와박사는 기와 전문가이고 화공은 화가다. 이들 백제에서 온 장인들이 일본이 세계에 자랑하는 비조 문화를 창출한 주역들인 것이다. 추고 여제 4년(596) 낙성한 법흥사(法興寺), 즉 아스카사는 백제에서 건너간 장인들에 의해 건축된 것이다.

‘부상약기’ 권3 추고기(推古紀)에는 ‘법흥사 탑에 사리(舍利)를 묻을 때 소아마자 이하 대관들이 모여 의식을 치렀는데 여기에 참가한 100여명의 사람들이 모두 백제 옷을 입으니 보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기뻐했다’는 기록은 이런 상황을 말해 준다. 추고 여제 15년(607)에 완성된 법륭사(法隆寺:호오류사)도 마찬가지로 백제계 소아가의 주도 아래 만들어진 아스카 문화의 금자탑이다. 성덕 태자는 물부가를 이기면 사탑을 건립하겠다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593년부터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짓기 시작했는데 이는 7세기 중엽에 완성되었다.

아스카 문화를 주도한 소아가가 백제계라는 데는 큰 이견이 없지만 막상 그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한 정설이 없다. 그런데 일본 교토부립대(京都府立大) 교수였던 카도와키(門脇禎二)는 소아가의 가계를 ‘삼국사기’에서 찾았다. 고구려의 남하에 따른 백제의 남천(南遷)과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다. 고구려 장수왕이 475년 대군을 거느리고 남하하자 서울을 빼앗긴 백제의 개로왕은 아들 문주(文周)와 목협만치(木滿致)·조미걸취(祖彌傑取) 등을 남쪽으로 이주시킨다.

이들은 공주에 도읍을 정하고 문주를 즉위시켜 조직을 재정비하는데 이 중 목협만치가 일본열도로 건너와 소아가의 선조인 소아만지(蘇我滿智:소가노마치)가 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 소아가는 물부가를 섬멸한 후 왜국의 정세를 좌지우지했다.그런데 추고 여제 29년(621) 성덕 태자가 세상을 떠나고, 이어 추고 여제 34년(626) 소아마자마저 죽고 그의 아들 소아하이(蘇我蝦夷:소가노 에미시)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파열음이 생긴다. 소아하이가 정권을 전횡했기 때문이다.

그는 추고 여제가 재위 36년(628) 세상을 떠나자 다수의 예상을 깨고 자신의 조카이자 성덕 태자의 아들인 산배대형(山背大兄:야마세 오오에)이 아니라 전촌(田村:다무라) 황자를 천황으로 추대했는데 그가 바로 34세 서명(舒明) 천황이다. 소아하이는 자신의 숙부 경부마리세신(境部摩理勢臣:사카이베마리세)이 이에 반대하자 그와 산배대형 일가를 주살해 버렸다.



백제계 소아家의 몰락 직후 이뤄진 신라 김춘추 訪倭

이렇게 유혈참극 끝에 즉위한 서명 천황은 재위 2년 정월 보황녀(寶皇女)를 황후로 맞이하는데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장남 중대형(中大兄:나카노오에, 훗날의 천지천황) 황자가 소아가의 전횡에 불만을 품으면서 일본 고대사는 다시 격랑에 휩싸인다.소아하이는 641년 서명 천황이 사망하자 아들 중대형 황자가 아닌 황후 보황녀를 즉위시킨다. 바로 황극(皇極) 여제다. 이 무렵 소아하이는 그의 아들 소아입록(蘇我入鹿:소가노 이루카)에게 국정을 맡기는데 소아입록은 부친 못지않은 전횡을 일삼았다.

소아하이 부자는 자신의 조묘(祖廟)를 갈성(葛城)의 고궁(高宮)에 세우고 팔일무(八佾舞)를 추었는데 8일무는 황제만이 추게 할 수 있는 춤이었다. 따라서 왜국의 국왕도 아닌 일개 호족이 팔일무를 추었다는 사실은 자신이 국왕보다 우위에 있음을 공개적으로 선언한 것이었다. 나아가 소아하이 부자는 미리 쌍묘(雙墓)를 만들고 대릉(大陵)을 소아하이의 묘, 소릉(小陵)을 소아입록의 묘로 삼았다.

소아 부자는 가묘를 조성하며 180부곡(部曲)의 백성들을 징발해 황실의 불만을 샀다. 이때 동원된 백성들 중에는 상궁(上宮)의 유부(乳部) 백성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황실에 소속된 백성들이었던 것이다. 중대형 황자는 이런 전횡에 불만을 품고 소아가 섬멸을 결심한다.

이와 관련하여 필자는 최근 출간한 ‘오국사기’(五國史記:전3권)에 자세한 내용을 서술해 놓았다. 책에서 오국이란 고구려·백제·신라 외에 중국과 일본을 말한다. 당시 삼국사는 한반도를 뛰어넘어 중국사와 일본사를 연결시켜 서술해야만 그 진실을 파악할 수 있다는 의도였다.

중대형 황자가 태극전의 참변이라는 정변을 일으켜 소아입록을 참살한 때가 645년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641년 즉위한 백제의 의자왕은 자신을 견제해온 호족들을 숙청하고 신라와 전쟁상태에 돌입했으며, 644년에는 당 태종이 고구려를 공격해 여당대전(麗唐大戰)이 벌어진다. 중대형 황자가 전격적으로 칼을 뽑아 황실 위에 존재하던 소아입록을 참살하던 그때 만주벌판에서는 고구려와 당나라가 치열한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 전쟁은 비록 고구려와 당나라 사이의 전쟁이었지만 신라와 백제도 여기에 모든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특히 신라와 적국이었던 백제는 친신라국인 당나라의 고구려 공격이 남의 일이 아니었다. 왜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군사적으로 개입할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중대형 황자는 이런 국제정세의 변화를 이용해 645년 6월 태극전에서 소아입록을 주살한 것이었다. 이 정변으로 황극여제는 퇴위하고 중대형의 숙부인 효덕(孝德) 천황이 즉위한다.

이를 일본사에서는 대화개신(大化改新)이라고 부른다. 일본은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이를 ‘천황을 능멸하던 호족을 제거한 것’이라며 도쿠가와(德川)가를 제거하고 천황 친정을 단행한 것과 동일한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중대형 황자가 백제계 호족 소아가를 섬멸한 이듬해인 646년 신라의 김춘추가 왜국을 방문하는 것도 이 시기의 역사를 오국(五國)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당위성을 설명해 준다. ‘일본서기’는 ‘신라가 상신(上臣) 대아찬 김춘추 등을 사신으로 파견하여… 춘추를 인질로 삼았다. 춘추는 용모가 아름답고 쾌활하게 담소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김춘추가 인질이라는 기사는 과장이지만 그가 왜국으로 간 것만은 사실이다. 김춘추는 642년 딸 고타소 부부가 백제의 공격으로 사망하자 원수를 갚기 위해 고구려에 청병(請兵)하러 갔다가 실패했다. 복수를 위해 절치부심하던 김춘추는 왜국에 반백제 쿠데타가 발생해 중대형 황자가 정권을 잡았다는 소식을 듣자 풍랑 험한 현해탄을 건너 왜국을 찾은 것이다.그러나 김춘추는 백제를 공격하기 위한 왜국 군사를 빌리는 데 실패했다. 그러자 김춘추는 2년후 아들 법민(法敏:훗날의 문무왕)을 데리고 당 태종을 찾아가 군사를 요청한다.



10년만에 親백제계로 돌아선 황태자 중대형

태극전의 정변으로 황태자가 된 중대형은 정변후 소아가의 세력기반이었던 비조를 떠나 난파(難波:지금의 오사카)로 천도했다. 그러나 그는 막상 난파궁이 완성된 653년 다시 비조로 돌아왔다. 비조는 백제계 소아가의 세력기반이 됐던 지역이라는 점에서 이는 중대형이 친백제계로 다시 돌아섰음을 의미한다. 효덕 천황이 천도를 거부하자 중대형은 자신이 퇴위시킨 어머니 황극 여제와 효덕 천황의 부인인 간인 황후(間人皇后:하시히도노기사기)까지 데리고 아스카로 천도하는데 간인황후는 황극 여제의 딸이자 중대형 황자의 동생이었다.

뿐만 아니다. 654년 효덕 천황이 사망한 뒤 중대형 황자는 의외의 인물을 즉위시켰다. 자신이 직접 퇴위시켰던 어머니 황극 여제를 10년만에 복권시킨 것이다. 황극여제의 시호가 제명(齊明)으로 바뀌었을 뿐 동일인물이었고, 황태자는 여전히 중대형이었다. 그의 이런 이해할 수 없는 행보는 왜 황실과 백제의 관계를 떠나서는 결코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결국 중대형 황자는 자신이 백제계라는 사실을 명확히 깨달은 것이었다. 황극 여제가 다시 즉위하자 백제는 150명이라는 대규모 사절단을 보내 이를 축하한 반면 신라와는 655년과 656년을 끝으로 사신 왕래가 단절된 것도 이의 한 방증이다.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자 제명 여제와 중대형 황자는 대규모 백제구원군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661년 백제구원군 파견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제명 여제가 사망하자 중대형은 칭제(稱制:즉위하지 않고 소복을 입고 정사를 보는 것)하면서 구원군 파견을 주선한다. 그는 1차로 662년 왜국에 와 있던 의자왕의 아들 풍(豊:‘일본서기’에는 豊璋으로 나옴)에게 170여 척의 배를 주어 귀국시켜 백제부흥군의 임금이 되게 한다.

그리고 663년 무려 400여척의 배와 2만7,000여명의 대군을 보내 백강(白江:금강) 하구에서 나당연합군과 결전한다. 백강을 붉게 물들였던 이 전투는 나당연합군의 승리로 돌아갔는데 패전 소식을 들은 일본인들은 이렇게 한탄했다.

“주류성이 항복했다. 일을 어떻게 할 수 없다. 백제라는 이름은 오늘로써 끊어졌다. 조상들의 무덤이 있는 곳을 어찌 또 갈 수 있겠는가?”(‘일본서기’ 천지 천황 2년 9월7일字)

중대형 황자, 즉 천지 천황은 664년 쓰시마(對馬島)와 이키시마(壹岐島), 그리고 쓰쿠시(筑紫) 등 한반도와 가까운 곳에 병력을 주둔시키고 봉화를 설치한다.

그리고 한반도와 가까운 사가(佐賀)현과 후쿠오카(福岡)현, 그리고 에이메(愛媛)현 등에 산성을 쌓는데 이 산성들이 백제식 산성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 현재는 조선식 산성이라고 불리는데 일본 역사상 이런 유형의 산성들이 존재했던 때는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는 나당연합군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백제를 잃은 왜국은 나라를 완전히 재편해야 했다. 백제가 멸망하자 왜국의 역사는 비로소 한반도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사정은 왜국의 국호 변화에서도 나타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10년에 ‘왜국이 국호를 고쳐 일본이라 하고 스스로 말하기를 해 뜨는 곳에 가깝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지은 것이라 하였다’는 구절과 ‘일본서기’ 천지 천황 7년(668)에 ‘일본의 고구려를 돕는 장군들이 백제의 가파리빈(加巴利濱)에 묵으면서 불을 피웠다’는 구절들이 나오는데 그 시기들이 신라의 삼국통일과 맞닿아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백제 성왕이 불상을 보냈을 때 소아도목이 “서쪽의 여러 나라가 다같이 예배하고 있는데 일본이 어찌 혼자 배반할 수 있습니까?”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일본이라는 언급이 나오기는 하지만 이 역시 후일에 삽입시킨 ‘일본’은 아니다. 그러나 백제에서 독립된 국가의 의미로 ‘일본’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때는 백제 멸망 이후였던 것이다. 백제가 멸망하자 대규모 구원군을 보내고 끝내 고구려마저 나당연합군에 멸망하자 왜국은 한반도와 독립된 일본으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이처럼 일본 고대사는 한반도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제국주의적 침략 개념이 아니라 동북아 고대사 자체가 그렇게 전개된 것이다. 이는 후세 사람들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 결코 뒤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출처 ; http://www.sunslif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