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전(靑田) 이상범
1897~1972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은 1897년 9월 21일 충청남도 공주에서 출생하였다. 1918년 서화미술회(書畵美術會)를 졸업하고 1925년부터 선전(鮮展) 특선 10회에 이르렀으며, 1927년부터 동아일보의 미술책임 기자로 근무하다가 1938년 손기정 선수 일장기말살사건으로 피검되었다. 1938년부터 선전심사위원을 역임하고 1947년 종합미전 심사위원이 되었다. 1949년 홍익대학교 교수, 1949년 이화여자대학교 강사를 겸하고 1953년부터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54년 예술원회원, 1956년 미술가협회 고문에 추대되고, 1961년 홍익대학교 명예교수를 역임하였다.
1963년 3·l문화상 본상, 1966년 서울특별시 문화상을 받았다. 작품세계는 초기에는 스승이었던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의 영향을 받아 남북종(南北宗) 절충화풍을 보였으나 점차 독자적 세계를 개척, 향토색 짙은 작품들을 그려냈다. 대표작품으로 창덕궁 경훈각 벽화, 원각사 벽화, 설로도(雪路圖), 고원귀려도(高原歸圖)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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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원무림(高遠霧林) 1968년, 종이에 수묵담채, 77×193㎝
산가(山家) 1950년대, 종이에 수묵담채, 24×48㎝
산가청류(山家淸流) 1960년대, 종이에 수묵담채, 63×129㎝
산가효색(山家曉色) 1950년대, 종이에 수묵담채, 91×176㎝
산고수장(山高水長) 1960년대, 종이에 수묵담채, 67×180㎝
임천고은(林泉高隱) 1960년대, 종이에 수묵담채, 128×45㎝
춘강어락(春江漁樂) 1954년, 종이에 수묵담채, 34×140㎝
춘산유거(春山幽居) 1960년대, 종이에 수묵담채, 83×84㎝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은 근대 한국화를 빛낸 화가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이미 30대 후반에 미술계의 춘원 이광수라는 평을 들었을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 그리고 지금도 대표적인 한국 근대 미술가를 뽑을 때면 항상 그는 첫 번째로 손꼽힌다. 그가 이처럼 유명한 것은 산수화에서 '청전양식'으로 불리는 독창적인 화풍을 이룩하고 우리 근대 미술의 자부심을 살려줬기 때문이다. 특히 그의 이러한 개성과 창의력은 우리의 자연과 고향에 대한 민족 공통의 정서와 미의식을 자극하고 국민적 공감력을 지닌 한국적 풍경을 탄생케 했다는 점에서 더욱 값지게 생각된다.
청전의 산수화를 보면 야트막한 산등성과 맑은 계곡을 그린 것이 한국의 전형적인 산촌의 풍경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 어느 곳의 실경(實景)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것은 절대로 관념산수가 아닌 것이다. 또 청전 산수화는 농부와 아낙네가 등장하는 시골풍경이지만 그것은 결코 농촌의 리얼리티를 담아낸 것이 아니라 번잡한 도회적 세속에서 잠시 벗어나 자연과 인간이 하나 되어 조촐히 살아가는 아름답고 온정이 깃든 우리네 마음속의 고향인 것이다. 그것은 한국인의 가슴속에 유전자처럼 전래되어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미지의 고향 풍경 같은 것이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청전의 산수화는 21세기에도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한 시대의 획을 긋는 화가로 칭송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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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화실 : 전 생활을 여기에서 모색
누하동 오가리五街里 구불구불 구불어진 골목길 막바지에 조그마한 화실 하나 장만한 지도 벌써 십여 년이 되었다. 나는 이 화실의 장치에 대한 관심보다도 내가 이 화실에서 작품을 구상하고 제작하기 위해서 조용한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에 무엇보다도 행복감을 느낀다.
참으로 나의 이 조그마한 화실은 나의 모든 창조적인 계기를 계시해 주고 정리해주면서 실현에 옮겨주는 유일한 일터이다. 나의 모든 생활과 생명이 이곳에서 이루어지고 이곳에서 모색된다. 나이 육십이 가까워가니 사고방법과 화풍이 젊은 사람들과 자연히 달라진다.
그러나 나는 항상 낡은 형식에 그대로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것을 진격進擊하도록 모색하는 과정에 있다. 이러한 모색이 나의 화실의 최근의 분위기다. 나는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현대를 이해하고 현대를 연구하고 싶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나라의 고유한 민족성을 토대로 해야 한다고 본다. 어떻게 하면 서양사람과 또는 중국이나 일본과도 다른 우리나라의 독특한 정취를 나타낼 수 있는가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화실의 창 너머로 물건 팔러 온 여인이나 또는 시골사람들이 지나가다가 구경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반드시 그분들에게 "이 그림을 보시고 어떻게 느끼십니까" 하고 그 감상을 물어본다. 이리하여 어떠한 사람이라도 우리나라의 것이라고 느껴질 수 있고 알아볼 수 있는 그러한 우리 민족 고유의 정서를 나타내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민족 정서가 어떻게 하면 현대라는 이 시대에서 창조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내가 지금 화실에서 모색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이다.
나는 이 화실에서 이와 같이 하나의 새로운 것을 우리의 고유한 전통 밑에서 찾고 연구해 나아가려는 학도의 마음을 갖는다. 이러한 마음이 나를 항상 젊게 하고 언제나 진격한 작풍을 갖게 하며 또 앞으로도 내가 더 공부해야 한다는 것을 북돋워 주는 것이다.
아직 한 번도 갖지 못한 개인전을 나는 또 이 화실에서 꿈꾸어 본다. 참으로 단체전에 비해서 개인전이란 한 작가를 온전히 알 수 있을 것이며 또 그 작품의 진가도 알 수 있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개인전을 퍽이나 어렵게 보게 되고 좀처럼 열기가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 일생에 한 번은 반드시 가져 보겠다는 꿈이 살아 있다. 그것이 앞으로 1년이 될지 2, 3년이 될지 모르나 꼭 가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개인전은 그 작가의 생명과 생활의 숨김없는 결정체를 그대로 내놓게 되기 때문이다. [조선일보 1955-06-24]
소정(小亭)변관식
1899-1976
소정(小亭) 변관식(卞寬植)은 황해도 옹진에서 출생하였으며, 조선 왕조 마지막 화원 소림(小琳) 조석진(趙錫晉)이 외조부이다. 1910년 11세 되던 해 서울로 올라와 조석진이 교수로 있는 서화미술원에 입학하면서부터 그림 수업을 시작하였다. 그 후 1925년 일본에 건너가 일본의 수묵화풍을 접하기도 하였다. 귀국 후 전국을 돌아다니며 실경을 사생하는 등 새로운 화풍의 형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러한 여행을 통해서 얻은 실경에 대한 애착으로 향토색 짙은 독특한 실경산수(實景山水)가 발전하게 된다. 광복 후에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관여하기도 했다.
1956년 국전심사위원으로 참가한 변관식은 수상자 선정 과정에서 혼탁한 파벌 싸움이 끊이지 않자 점심 식사자리에서 냉면 놋대접을 집어던져 심산(心汕) 노수현(盧壽鉉)의 눈두덩을 찢고 말았다. 당시 <연합신문>에 국전심사의 불공정성을 폭로한 글을 기고한 후 그는 두 번 다시 심사위원을 맡지 않고 재야화가로서 화업에만 몰두하고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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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금강 삼선암(1959) 종이에 수묵 담채
해금강 총석정(1960) 종이에 수묵 담채
溪山秋色(1965) 종이에 수묵 담채
내금강 보덕굴 추색(1969) 종이에 수묵 담채
동리어귀(1950) 종이에 수묵 담채
설경(1940) 종이에 수묵 담채
水村 (1934) 종이에 수묵 담채
쌍벽담(雙僻潭) (1970) 종이에 수묵 담채
春景山水(1970) 종이에 수묵 담채
春景山水(1960) 종이에 수묵 담채
내금강 진주담(1974) 종이에 수묵 담채
변관식의 화풍은 마른 붓질을 더해 짙고 거친 분위기를 보이는 특징이 있다. 관념 속에 이상화한 산수가 아닌 현실의 산수를 그린 실경산수 화가이며, 또 겸재 정선이 개척한 민족적 산수화풍을 근대에 계승한 대표적 작가로 평가되는 변관식은 정선 이후 금강산 그림을 가장 잘 그린 작가로 꼽힌다.
근대 전통회화의 거목으로 꼽히는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이 모범생 같은 삶 속에서 안온하고 순응적인 농촌 풍경들을 그렸다면 변관식은 기개가 넘치는 강렬한 그림들을 그렸다. 개인사에서도 저항적인 풍모가 강했다. 인간사의 속됨을 싫어했고 방랑벽이 심했다. 평생 야인을 자처한 그의 그림은 아름답고 편안한 청전 이상범의 그림에 가려 생전에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의 사후에 본격적으로 조명되기 시작한 '소정양식'의 요체는 먹을 엷게 찍어 윤곽을 만들고 그 위에 먹을 켜켜이 올려가는 적묵법과 진한 먹을 튀기듯 찍어 선을 파괴하는 파선법의 질박한 터치. 여기에 역동적이고 파격적인 구도, 해학적인 인물상 등은 강인한 생명력을 자랑하는 한국인의 심성에 더없이 맞아 떨어지는 것이었다.
작품으로는 외금강 옥류천(外金剛玉流泉), 외금강 삼선암(外金剛三仙巖), 누각청류, 비폭도(飛瀑圖), 내금강 진주담, 설경산수(雪景山水), 만추(晩秋), 강촌유거(江村幽居) 등이 있다.
'폭풍의 화가' 변시지
바람, 바다, 말
난무_ 한국작가로는 유일하게 미국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상설 전시되어 있는 변시지의 두 작품 중 하나.
변시지 기념 초청전 ‘폭풍, 갈 수 없는 곳, 나를 따르지 마라’가 12월 10일부터 1월 9일까지 KBS제주방송총국 개국 60주년을 기념해 제주도립미술관에서 개최되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특히 변시지의 ‘제주시대’ 즉, 80년대 이후 작품들로 구성돼 있어 제주에서의 작품세계를 한눈에 깊이 있게 감상해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거친 바다, 젖은 하늘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나그네
기다림
기다림
소식
제주바다
이어도
고립
생존
말과 까마귀
폭풍의 바다 1
폭풍의 바다 2
폭풍의 바다 5
폭풍의 바다 8
폭풍의 바다 13
희망, 의욕, 평화, 그리고 사랑
점 하나
변시지는 1926년 제주도 서귀포에서 태어났다. 변시지가 아버지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간 것은 다섯 살 때인 1931년. 제주바다를 건널 때 소년이 가슴 깊이 품은 제주. 소년은 제삿날 지붕에 뿌린 잡식을 먹던 까마귀의 기억과 조랑말을 타던 추억, 한시도 쉬지 않고 얼굴을 때리던 바람을 배와 함께 실었다. 스물셋에 일본의 광풍회전(光風會展) 최고상을 수상하여 화제를 모았던 그는 1957년 귀국하여 서울대, 서라벌예대 교수를 역임하다 1975년 마침내 제주로 돌아간다. 실로 44년 만의 귀향이었다.
2011년이면 85세가 되는 원로작가 변시지는 주로 제주의 바람과 바다와 말을 그린다. 한 마리의 바닷새와 돌담의 까마귀와 쓰러져가는 한 채의 초가(화가의 말에 따르면 그 초가는 할머니가 사시던 집이라 한다)와 소나무 한 그루와 마침내 이 모든 것을 휘몰아치는 바람의 소용돌이... 그의 이러한 풍경 속에는 어김없이 구부정한 한 사내가 바람을 마주하고 서 있는데, 이러한 변시지 회화의 기본 구도 속에는 형언할 수 없는 비애와 고독감이 고즈넉하게 녹아 있다.
변시지의 그림이 세계에 알려지게 된 것은 인터넷을 통해서였다. 1997년 변시지가 인터넷에 올린 그림을 본 미국 야후사가 요청하자 그림 사용을 허락하였고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세계 100대 화가’에 등재되는 계기가 된다. 또한 미국 워싱턴 스미소니언 박물관에는 한국작가로는 유일하게 변시지의 작품 2점이 상설 전시되고 있다.
변시지 예술의 구도자적 순례는 대지와 바람의 뒤섞임 속에서 마침내 황토빛으로 열렸으며 그것은 이제 그의 사상이 되었다. 그는 자연 속에서의 인간의 실존적 위상을 바라보는 우주적 연민, 달관과 체관의 어떤 높은 경지에 와 있는 듯하다.
<열화당 미술문고 변시지>의 저자 서종택 교수는 “변시지의 그림처럼 예술과 풍토, 지역성과 세계성, 동양과 서양이 함께 만나는 희귀하고도 소중한 사례는 아직 없다"고 결론 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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