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너 [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1775. 4. 23 런던~ 1851. 12. 19 런던. 영국의 낭만파 화가) 개요-19세기의 가장 위대한 풍경화가로 평가된다. 그의 작품은 빛과 색채, 표현주의적인 분위기로 인해 매우 폭넓고 웅장하며, 특히 바다를 표현한 작품이 뛰어나다.
초기생애와 작품-그의 아버지는 이발사였으며 어머니는 1804년 정신이상으로 죽었다는 것 외에는 알려진 바가 없다. 10세 때 미들섹스의 브렌트퍼드에 있는 삼촌에게 보내져 그곳에서 학교에 다녔다. 터너는 1789년 왕립 아카데미에 입학했으며 불과 15세에 수채화 전시회를 열었다. 여름방학 동안 스케치 소재를 찾아 전국을 여행했는데, 1789년 옥스퍼드, 1791년 브리스틀, 1792년 웨일스를 여행했다. 1794년에는 〈Copper Plate Magazine〉·〈Pocket Magazine〉에 실을 판화의 도안을 그리기도 했다. 1796년부터 왕립 아카데미에서 수채화뿐만 아니라 유화도 전시하기 시작했다. 최초의 유화 작품인 〈바다의 어부들 Fishermen at Sea〉은 달빛에 의한 변화를 그린 것으로 당대의 비평가에게 '독창적인 성향'의 작품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1799년에 준회원으로는 가장 어린나이인 24세에 왕립 아카데미에 선출되었으며 1802년에는 옛 대가들의 작품에 필적하는 대형 연작을 제출하여 아카데미의 정식회원이 되었다. 화가로서는 성공했지만 1800년 어머니의 병세가 악화되어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그의 아버지는 그와 함께 살면서 화실의 보좌 겸 총대리인으로 지냈다. 터너는 비밀스럽고 비사교적이었으며 약간 괴팍하기까지 했다. 1798년 세라 댄비라는 미망인과 사랑에 빠져 10년 정도 관계를 지속했으며 그녀와의 사이에 두 아이를 낳았다. 그러나 그는 결코 결혼하지 않았으며 돈에 인색한 사람으로 작품 제작에만 전념했기 때문에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그는 작품 소재를 찾기 위해 꾸준히 여행했다. 1797년 요크셔와 레이크디스트릭트, 1798년 웨일스, 1801년 스코틀랜드, 1802년 처음으로 유럽 대륙을 방문했다. 칼레 시까지의 횡단 여행은 험난했으며 이때의 경험을 〈칼레 부두 Calais Pier〉에 생생하게 담았다. 1807년 〈Liber Studiorum〉으로 알려진 100점의 판화 연작을 출판하는 대규모 사업을 시작했다. 그의 목적은 다양하고 폭넓은 자신의 작품을 영구 보존하는 것이었는데 주제의 일부는 기존의 유화와 수채화에서, 나머지는 〈Liber Studiorum〉을 위하여 특별히 고안되었다. 여러 명의 판화가를 고용했지만 작업의 모든 단계를 일일이 감독하고 자신이 직접 에칭하기도 했는데 모든 작품이 수많은 준비 그림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이 판화집은 역사적인 주제와 건축물, 산악지방, 전원, 바다경치 등 풍경화에 있어서 가능한 모든 양식의 구도를 담아 각 권에 5점씩 여러 권으로 묶어 출판되었다. 터너는 1807년 6월의 첫권 이후 71점의 판화를 출판했는데 1819년에는 흥미를 잃고 그만두었다.
중기-1800년대 후반 터너의 그림은 점점 밝아지 고 대기의 표현이 강조되었다. 〈St. Mawes at the Pilchard Season〉(1812, 테이트 미술관)이나 옥스퍼드를 그린 2점의 그림(1809~12, 전시 1812) 등 실재의 장소를 그린 그림에서도 딱딱한 지형도적 성격은 밝은 색채에 의해 완화되어 있으며 〈서리가 내린 아침 Frosty Morning〉과 같은 작품은 전적으로 빛의 효과에 의존하고 있다. 그는 성이나 시골의 대저택을 소유한 사람들에게 그것을 그려주는 화가로 큰 인기를 끌었으며 대표적인 작품으로 〈턴브리지의 서머힐 Somer Hill, Tunbridge〉·〈린리스고 궁전 Linlithgow Palace〉(1810, 리버풀 워커 미술관) 등이 있다. 바다를 주제로 다루는 데 있어서 뛰어난 솜씨를 발휘했으며 가장 야심적인 작품은 〈수송선의 난파 Wreck of a Transport Ship〉(1810, 리스본 걸벤키언 재단)이다. 1802년 그에게서 해양화 1점을 산 에그러몬트의 백작은 그의 정식 후원자이자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1810년 처음으로 요크셔의 판리홀에 있는 중요한 친구이자 후원자인 월터 폭스를 방문했으며 이후 폭스가 죽은 1825년까지 거의 매년 여름 몇 주일을 그곳에서 지내고는 했다. 그는 계속 멀리 여행했는데 1811~13년에는 데번셔·콘월·서머싯을, 1815, 1816년에는 T. D. 휘터커의 〈리치먼드셔의 역사 History of Richmondshire〉의 삽화로 쓸 20점의 수채화를 위해 요크셔를 여행했다. 다음해에 유럽으로 가 주로 워털루 전쟁터를 방문했으며 후에 이를 주제로 해서 어둡고 낭만적인 분위기를 지닌 〈워털루 전쟁터 The Field of Waterloo〉(1818, 테이트 미술관)를 제작했다. 1820년대에는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여러 지방 그리고 유럽을 번갈아가며 여행했다. 1821년 센 강을 주제로 섬세한 느낌과 푸른색 바탕의 수채화 연작을 제작했으며, 1825년에는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다음 해에는 뫼즈 강, 모젤 강, 루아르 강을 방문했다.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는 〈디에프 항구 The Harbor of Dieppe〉·〈쾰른:정기선의 도착:저녁 Cologne:The Arrival of a Packet Boat:Evening〉·〈모틀레이크 테라스:이른 여름 아침 Mortlake Terrace:Early Summer Morning〉(뉴욕 시의 프릭 컬렉션) 등이 있다.
후기생애와 작품-그는 말년에 더욱 유명해지고 부유해졌으며 이전보다 은폐된 삶을 살았다. 왕립 아카데미의 원근법교수였지만 여러 해 동안 활동하지 않다가 1838년 교수직을 사임했다. 1839년 첼시에 작은 별장을 구입하고 신분을 숨긴 채 부스라는 가명으로 살았다. 늙은 가정부가 그를 돌보면서 그의 개인생활을 철저하게 보호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곳의 화랑을 방문하기가 쉽지 않았다. 터너는 여행을 계속하여 생애의 마지막 15년 동안 이탈리아·스위스·독일·프랑스를 다시 둘러보았다. 관찰자들에 의하면 해외방문기간 동안 지칠 줄 모르는 의욕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터너의 유품 중 약 1만 9,000점에 이르는 드로잉은 이러한 작업에 대한 열정을 입증하고 있다. 초기작품들은 건축물과 자연의 세부에 대한 정확한 관찰력을 보여주고 있지만 후기에 와서는 덩어리를 꾸밈없이 표현함으로써 전체적으로 빛과 색채의 효과를 강조하고 있다. 구도는 움직임과 공간을 제시함으로써 더욱 유동적으로 바뀌었다. 한편 〈노럼 성과 일출 Norham Castle, Sunrise〉·〈갑과 갑 사이에 배가 있는 일출 광경 Sunrise, with a Boat Between Headlands〉(1835~45, 테이트 미술관) 등에서는 흰 바탕에 매우 엷은 채색을 입혀 단순한 색채 표시만을 보여준다. 터너는 이러한 상태의 그림을 그대로 아카데미에 보내고 전람회가 공식으로 개최되기 전에 출품 작품을 아카데미 회원들에게 공개하여 세부 묘사를 첨가하거나 자신의 작품이 대중에게 공개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특수한 문제들을 보완하면서 작품이 걸리게 될 위치와 조명 등 작품을 둘러싼 특수한 환경을 고려하여 마지막 순간까지 작품을 조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터너가 이러한 기회까지도 적극 이용했다는 것은 그가 뛰어난 솜씨를 지니고 있었으며 때로는 동료들의 그림을 깊이 숙고했다는 것(또는 반대로 잘 알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면 해양화인 〈Helvoetsluys〉에서는 컨스터블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크게 부푼 빨간 부표가 보이는데 1832년 왕립 아카데미에 전시된 〈워털루 다리의 개통 Opening of Waterloo Bridge〉에서는 빨간 부표가 완전히 사라졌다. 이러한 수법은 터너가 죽을 때 그의 스튜디오에서 발견된 가볍게 손질된 많은 그림을 해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화려한 추상화는 그가 보여준 낭만적 작품들보다 현재 훨씬 더 높이 평가되고 있다. 당대에 상당한 인기를 끌었던 고대 로마와 베네치아의 흥미 있는 주제를 환상적으로 복원한 작품들을 제외하고 후기의 대표적 작품으로는 물 속에서 떠오르는 정령과 일몰, 그리고 달빛을 대담하게 결합시킨 〈헤로와 레안드로스의 이별 The Parting of Hero and Leander〉(1837, 런던 국립미술관)과 낡은 배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그린 〈해체를 위한 마지막 정박지로 끌려가는 '파이팅테메레르호', 1838 The 'Fighting Téméraire' Tugged to Her Last Berth To Be Broken Up, 1838〉·〈비와 증기와 속도:그레이트 웨스턴 철도 Rain, Steam, and Speed:the Great Western Railway〉 등이 있다. 젖빛을 발하는 〈에우로파의 계단에서 본 베네치아 Venice from the Steps of the Europa〉(1842)는 터너가 아직 살아 있을 때인 1847년 런던 국립미술관에 기증되었고 그곳에서 전시된 그의 첫 그림이다. 터너가 불과 물의 요소들에 열중했다는 것은 2편의 그림인 〈불타는 국회의사당 Burning of the Houses of Parliament〉과 대규모 스케치인 〈바다에서의 불 A Fire at Sea〉(테이트 미술관), 〈로켓과 푸른빛 Rockets and Blue Lights〉(1840, 매사추세츠 윌럼스타운 클라크 미술연구소)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터너는 1851년에 죽어 세인트폴 대성당에 묻혔다. 그는 유언을 통해 그의 그림들을 전시할 수 있도록 미술관을 세운다는 조건으로 정부에 그것들을 기증하고 '쇠퇴한 미술가들'을 위한 자선단체를 설립하도록 14만 파운드에 이르는 그의 재산을 정부에 기증하고자 했다. 터너의 유산 중 그림과 데생들은 국가에 귀속되었지만, 돈은 오랜 소송 끝에 그의 먼 친척들에게 돌아갔다. 1908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조지프 듀빈 경이 그의 작품들을 수용하기 위해 테이트 미술관 내에 별실을 마련했다. 1928년 템스 강의 범람으로 테이트 미술관의 창고가 침수되자 그뒤 안전을 위해 그의 모든 데생과 수채화들은 대영박물관으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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