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석굴암 5층소탑의 범인
얼마전 석굴암이 위험하다는 기사가 나왔다.
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있다. 석굴암은 창건 당시부터 세조각으로 갈라져 있었다는 것이다.
“천개석(덮개돌)을 만들려고 돌을 다듬는데 갑자기 세 조각으로 갈라졌다. 분통을 터뜨리던 김대성이 깜빡 조는 사이, 천신(天神)이 내려와 다 만들어놓고 돌아갔다.”
<삼국유사> ‘효선·대성효이세부모’조에 나온 석굴암 창건 설화이다. 무슨 이야기인가. 석굴암 본존불 보호를 위해 원형돔을 쌓은 뒤 맨 꼭대기에 얹은 덮개돌을 다듬다가 세 동강 났다는 것이다. 분하게 여긴 김대성이 졸다가 천신(天神)의 도움으로 공사를 끝냈다? 이것은 비겁한 변명이다.
요컨대 공사책임자인 김대성이 덮개돌이 3등분이 됐는 데도 모른 체하고 공사를 마무리했다는 얘기가 아닌가.
그 때 세 조각 난 부실공사의 흔적이 130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역력하니 어찌할 것인가. 미술사학자 고유섭는 ‘영국에 세익스피어가 있듯 우리에게는 석굴암이 있다’고 했는데, 너무 어처구니없는 부실공사가 아닌가. 지금 같으면 김대성은 부실공사의 원흉으로 처벌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1300년 후에도 석굴암은 끄떡도 없다는 것이다. 이 무슨 조화인가. 창건 당시부터 갈라진 석굴암 천장이 지금도 창건 때와 똑같은 상황으로 버티고 있다니, 더 신기할 따름이다.
■감쪽같이 사라진…
도리어 석굴암보다는 그 주변의 부속문화재가 더 문제다.
석굴암은 갈라진 채 1300년 동안 끄덕도 없이 남아있지만, 석굴암의 5층 소탑과 감불(龕佛·불상을 모시는 불감 안에 모신 불상) 2점이 감쪽 같이 사라진 것이다.
벌써 100여 년 전 흔적도 없이 사라져 지금까지도 행방이 묘연하건만 이것에 신경을 쓰는 이들은 별로 없다.
먼저 석굴암 본존불 바로 뒤의 11면 관음상 부조 앞에 안치돼있던 대리석 5층 소탑이 사라진 연유를 알아보자.
1930년대 경주박물관장을 지낸 모로가 히데오(諸鹿央雄)의 회고를 보자.
“지금 석굴암 9면(11면의 잘못) 관음 앞에 남아있는 대석 위의 불사리가 봉납됐다고 추정되는 소형의 훌륭한 대리석탑이 있었는데…. 1909년 존귀한 모 고관이 순시하고 난 후 어디론가 자취를 감춰버린 것은 지금 생각해도 애석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경주의 신라유적에 대하여>)
여기서 말하는 ‘모 고관’은 누군가. 야나가 무네요시는 “오층석탑은 ‘소네 통감’이 가져갔다고 하는데….”(<석불사의 조각에 대하여>, 1919년)고 했다.
‘소네’는 1909~1910년 사이 한국 통감을 지낸 소네 아라스케(曾彌荒助)를 지칭한다. 이토 히로부미에 이어 2대 통감이 된 소네는 1909년 가을, 경주 지역을 초도 순시했는데, 그 과정에서 오층소탑이 증발된 것이었다. 소네는 한국통감으로 재직한 1년 남짓 동안 수많은 고서들을 수집, 일본 왕실에 헌상한 인물이었다.
“소내 통감이 부임한 이래 아국(我國·조선)의 고서를 수집함에 열중햇음은 일반 공지하는 바인데, 그 수가 2000여권에 달하고….”(<황성신문> 1910년 5월8일)
그가 한국 내 옛 집과 서원, 사찰 등에서 닥치는대로 수집한 서적 가운데 일부는 궁내청 서고에 ‘소네 아라스케 헌상본’이라는 이름으로 소장돼있었다. 그러다 1965년 한·일 국교수립 이후 반환문화재로 돌아와 현재는 국립중앙도서관에 들어가 있다.
그러나 소네가 가져간 것이 확실한 석굴암 내 오층소탑은 아직 행방이 묘연하다. 해방 이후 국내 전문가들이 백방으로 행선지를 추적했지만…. 이 때문에 석굴암은 제대로 된 탑상(塔像)을 구비하지 못한채 불상만이 있는 석굴이 되고 말았다.
■범인은 일본 퉁감
또 있다. 오층소탑이 증발하던 무렵의 일이었다. 석굴암 내 주벽 위쪽에 배치된 10개의 감실(龕室)에 하나씩 안치돼있던 작은 불상 가운데 2점 등이 사라진 것이다. 일본인으로서 대한제국 정부의 주석서기로 일했던 기무라 시즈오(木村靜雄)의 회고를 보자.
“나의 부임 전후에 도아(盜兒·도둑놈)들에 의해 환금(돈주고 빼앗음)되어 내지로 반출되어 있는 석굴암 불상 2구(軀·감불)와 다보탑 사자 일대(3구)와 기타의 등롱(燈寵·사리탑) 등 귀중물이 반환되어 존보상의 완전을 얻는 것은 나의 종생의 소망이다.”(<조선에서 늙으며>, 1924년)
무슨 말인가. 기무라는 당시 절(불국사)을 지키던 스님 몇 명에게 돈 몇 푼 쥐어주며 반강제로 석조물들을 약탈해간 일본인들을 ‘도아(盜兒)’ 즉 ‘도적놈’이라 지칭한 것이다. 특히 지키는 사람이 없었던 석굴암에서는 석굴 본존의 뒤편 둔부를 무자비하게 때려 파괴했다. 그 곳에 혹 들어있을 복장유물을 꺼내기 위한 만행이었다. 불국사 다보탑에서는 상층기단 네 귀퉁이에 있던 돌사자상 4개 가운데 상태가 좋은 3개를 언제인지도 모르게 약탈해갔다. 또 대웅전 뒤에 있던 섬세한 조각 장식의 석조사리탑 역시 약탈당했다.
이 중 석조사리탑(1906년 반출 추정)은 몇 번의 전매 끝에 와카모토 제약회사 사장이던 나가오 긴야(長尾欽彌)의 소유로 돼있다가 조선총독부로 반환됐다. 그 때가 1934년의 일이다. 극적으로 귀환한 석조사리탑은 현재 보물 61호로 지정돼 있다. 그러나 석굴암 감불 2점과, 다보탑 돌사자 3점은 기왕에 언급한 석굴암 5층소탑은 지금도 오리무중이다.
■석굴암을 전체 이전하라?
가슴 철렁한 순간도 있었다. 앞서 인용한 기무라의 회고록을 보자. ‘마치 자신의 공인양 자랑하는 내용’이 들어있다.
즉 한일합방 직전, 소네 통감이 관찰사(경북도지사)를 통해 불국사의 주조불과 석굴암 전부를 경성으로 운송할 것을 엄명하고, 운반 비용의 견적서를 올려보내라고 지시했다는 것. 그러나 ‘경주의 고적을 아끼는 그(기무라)의 마음에서 그같은 폭명(暴命)에 맹종할 수 없다고 버티는 사이 한일합방이 추진되면서 유야무야 됐다는 것.
그런데 <동아일보>(1961년 11월2일)를 보면 석굴암의 전체 이전은 합방 이후에도 추진됐다는 내용이 나온다.
“곧 합방이 되었는데, 데라우치 총독이 ‘이런 보물을 산중에 방치하는 것은 아까운 일이다. 이것을 전부 뜯어 서울로 운반하라’고 지시했다. 업자들이 경주로 내려왔으나 모두들 데라우치를 두고 ‘미친 사람’이라고 욕하고 돌아갔다. 이리하여 석굴암은 (현장에서) 수리공사를 착공하게 된 것이다.”
통감부 시절이든, 총독부 시절이든 불국사 철불과 석굴암 불상 전부를 뜯어 서울로 운반하라는 기상천외한 지시를 내렸다니…. 그러나 지역민심이 얼마나 사나왔는지, 업자들조차 데라우치를 ‘미친 놈’이라 욕하고 돌아갔다는 것이다. 당시 일제의 계획으로는 석굴암 불상들과 불국사 철불을 모두 해체한 뒤 토함산에서 40리 내려온 동해안 감포를 통해 선박으로 인천까지 운반하는 것이었다. 역사학자 이홍직 박사는 “석굴암 석조물을 반출한 이력이 있는 통감(소네를 지칭)은 불국사와 석굴암의 보물마저 송두리째 일본으로 옮겨 가려고 했을 것”이라 확신했다. 사실이라면 지금 생각해봐도 모골이 송연하지 않은가. (끝)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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