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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을 아십니까?

영지니 2016. 1. 9. 12:55
고 박정희 대통령의 인간적인 면모 

 


국립현충원 고 박정희 대통령 내외분 묘역.


 

1. 박정희 대통령의 편지

 

1978년 2월2일, 朴正熙(박정희) 대통령이 버스 안내양들의 방한복을 제작하던주식회사 태흥 사장에게 보낸 감사 편지이다.

당시 버스 안내양들의 방한 코트 제작을 의뢰받은

주식회사 태흥의 權泰興(권태흥) 사장은 방한 바지를 함께 제작,

무료로 납품 했다.

 

이에 朴正熙(박정희) 대통령이 감사 편지를 보낸 것이다.

이 편지에서 朴(박)대통령은 버스 안내양들을 어린 나이에 가정형편이 불행하여 상급학교에 진학도 못하고 직업전선에 나와서 고된 일을 하면서 국민들에게 봉사하고 있는 이들 少女(소녀)」라고 썼다.

 

버스 안내양들의 입장을 이보다 더 가슴깊이 사무치게 대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급 노동자의 삶을 대통령이 챙기는 이런 모습이 當代(당대)엔

국민들에게 거의 알려 지지 않았다.

 

홀아비가 된 朴(박) 대통령 주변을 둘러싼 권력의 장막이 이를 막고 있었고

밖에서는 유신 철폐를 외치는 야당과 재야 인사 들의 외침에 가려져 있었다.

朴대통령이 權泰興 사장에게 버스 안내양들을 대신해서

감사를 표시하는 문장들마다 마치 대통령이 안내양을

친딸처럼 여기는 마음씨가 곳곳에 배어있다.



(편지 원문)


時下酷寒之節(시하혹한지절) 貴體健安(귀체건안)하심을

仰賀且祝(앙하차축)하나이다.

 

 昨年(작년) 年末(년말)과 今般(금반) 舊正(구정)에 際(제)하여

서울과 全國(전국) 에서 勤務(근무) 하는 뻐쓰 案內孃(안내양)들을 위하여

따뜻하고 品位(품위)있는 防寒(방한)코드와 바지를 製造(제조)하여주시고

特(특)히 바지는 貴社(귀사)에서 無料(무료)로 膳賜(선사)까지 하여 주셔서

感謝不已(감사불이)하는 바입니다.

 

어린 나이에 家庭形便(가정형편)이 不許(불허)하여

上級學校(상급학교)에 進學(진학)도 못하고 職業戰線(직업전선)에 나와서

고된 일을 하면서 國民(국민)들에게 奉仕(봉사)하고 있는

이들 少女(소녀)들에게

조고마한 선물 하나씩을 보내어 그들의 勞苦(로고)를 慰勞(위로)하고

 

激勵(격려) 할까 하는 뜻에서 貴社(귀사)에게 付託(부탁)을 하였든 것인데

貴下(귀하)께서 그 趣旨(취지)를 忖度(촌탁)하시고 誠心(성심)껏

協調(협조)하여 주신 데 대하여 眞心 (진심)으로

感謝(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이 物品(물품)을 받는 案內孃(안내양)들도 이것을 알게 되면

眞心(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하고 보다 더 誠實(성실)한 마음가짐으로

自己(자기)들이 맡은 일에 誠心誠意(성심성의) 熱心(열심)히 일을 하리라고

믿습니다.

 

다시 한 번 感謝(감사)를 드리며

貴社(귀사)의 더욱 隆昌(융창)과 發展(발전)이 있기를 祈願(기원)합 니다.

1978년 2월2일 朴正熙(박정희)敬具(경구)


 


2. 아랫사람에게 담뱃불 켜 줘, 침실에는 효자손 두고 등긁어.....


박대통령은 가끔 청와대 식구들과 막걸리를 마셨다.

막걸리를 마실 때 옆자리 사람이 잔을 오래 놓아 두면

손수 젓가락을 저어 주면서 마시라고 권유했다.

 

박대통령은 담배를 권하고 손수 라이터를 켜 불을 붙여준 대통령으로도

여러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다.

박대통령의 침실에는 검도용 목도, 헬스용 자전거, 철봉, 칼빈총 등이 있었고,

머리맡에는 등을 긁을 수 있는 '효자손'이 있었다.

 

가려운 등을 긁어줄 수 있는 사람의 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역할을 할 육영수 여사는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어 있었고

근혜씨는 퍼스트 레이디 역할은 했지만

잠자리에서 등을 긁어줄 수는 없는 노릇.

 

그래서 나무로 된 효자 손이 침대를 지켰던 것이다.

대통령 집무실에는 부채와 파리채가 있었다.

 

만년의 벗 “방울이”

 


박대통령의 말년,

 

특히 부인 육영수 여사의 돌연한 죽음 이후는 쓸쓸함이 주변을 감돌았다.

박대통령은 늦은 밤 거실에서

혼자 텔레비젼을 보다가 의자에 앉아 잠이 든 적도 있었다.

 

그의 곁에서 쓸쓸함을 지켜 준 것은 '방울이'라는 강아지였다.

이런 쓸쓸함을 떨치기 위해 배드민턴,

줄넘기, 턱걸이, 철봉, 물구나무서기 등 운동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들도 그의 외로움을 해소시키진 못했다.

측근들의 눈에 비친 박대통령은 소탈하고,

정감이 넘치는 할아버지였고,

나라의 장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위대한 영도자였다.

혁명 이후 20년간 자신의 혁명목표를 세워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하루하루를 살아왔다.

 

이제 그 목표가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고 믿고,

독재자로 불리면서 지켜온 권좌에서 물러설 준비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박대통령의 역사는 10월 26일에 막을 내렸다.

대통령의 국장이 끝나고 집무실을 정리하러 들어갔을 때

벽에 걸린 달력은 10월 26일에 정지되어 있었다.

 

하루에 한 장씩 뜯겨지던 달력이 그렇게 멈춰 있는 것을 보고,

청와대 식구들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 달력을 아주 소중한 유품중에 하나로 보관하고 있다.

인간 박정희! 대통령의 역사는

그 날 그렇게 멈추었지만 영원히 잊혀질 수 없는 까닭에서다.

 


3. 박정희와 술


朴正熙(박정희) 대통령은 술을 좋아하기도 했고

술과 관련된 일화도 많이 남겼다.

朴(박)대통령과 술에 대한 이야기는 월간조선 85년 4월호

'朴正熙(박정희) 대통령과 술'이라는 기사에 자세히 나와있다.

 

그 기사에서 朴(박)대통령의 술과 관련된 부분을 발췌 수록해본다.

70년부터 9년간 대통령경제담당 특별보좌관으로 일했던

박진환씨는 이렇게 말한다.

 

 "오후 5시쯤 되면 대통령이 우리한테 전화를 했다.

'보좌관들 다 있어? 식사 같이 해' 이런 내용이었다.

그러면 우리는 6시에 식당으로 올라갔다.

 

우리는 막걸리가 너무 지겹게 나와서 오늘도 또 막걸린가 하고,

조금 먼저가서 식당에 목을 쏙 내밀고 살피곤 했다.

그때 막걸리통이 있으면 아주 질색을 했다.

 

어쩌다가 가뭄에 콩 나듯이 시버스 리걸이 나오는데

그것만 보면 우리는 얼굴이 환해져서 조그맣게 소리쳤다. '됐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식사습관이 어찌나 농민다웠던지

술상에선 예사로 김치를 손으로 집어 먹었고

김을 밥숟갈에 척 붙여서 먹었으며 닭고기를 먹을 때도

손을 잡고 먹음직스럽게 뜯어 먹었다고 한다.

 

58년 6월 말 당시 기자였던 Y씨는

1군 사령관이었던 송요찬 장군을 만나러 갔는데

송장군이 없어서, 참모장인 박정희 장군을 대신 만났다.

 

박장군은 Y씨를 맞아

'먼길에 오셨으니 그냥 갈 수 있느냐'면서 중국집에 가서 술대접을 했다.

둘은 배갈을 먹기 시작했다.

둘은 누가 술이 더 센가 시합을 해보자고 했다.

 

그래서 빈병을 나란히 눕혀가면서 마셔댔다.

이렇게 하고 보니 빈병이 24개가 될 때까지 마셨다.

 Y씨는 이것이 박대통령이 생전에 세운 최고기록일 것이라고 말했다.

박대통령은 술자리에 앉으면 먼저 앞에 놓인,

젓가락, 술잔, 재떨이 같은 것을 반듯하고 가지런하게 다시 놓았다.

 

 이렇게 주변을 깔끔하게 정리하는게 버릇처럼 돼 있었다.

그렇지만 술자리에선 참석한 사람들을 아주 편안하게 해줬다.

박대통령은 가끔 막걸리에 맥주를 타서 '맥탁'을 만들어 마시기도 했고

막걸리에 사이다를 타서 '막사이'를 만들어 마시기도 했다.

술에 취해서 기분이 좋으면 박대통령은

흘러간 옛노래인 '짝사랑(으악새)' 이나 '황성옛터'를 불렀다.


박대통령 주량은 육영수 여사가 흉탄에 쓰러진 74년 이후부터는

급격히 떨어졌다고 한다.

박대통령은 생을 마감하는 자리에서도 술과 함께 있었다.

1979년 10월26일 박대통령의 마지막 궁정동 술자리에서

그가 들었던 마지막 잔은 막걸리와 함께 좋아하던 시버스 리걸이었다.

 

<월간 조선 '한국의 대통령'에서 발췌>

 


4. 박정희의 헤진 혁대, 도금이 벗겨진 넥타이 핀.


1979년10월26일 저녁 경복궁 앞 국군병원에서는

이미 시체가 된 박정희를 놓고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필자의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서 인용한다.

 

두 정보부 경비원 유성옥과 서영준은 허리에 권총을 차고 있었다.

그 권총을 일부러 보이면서 둘러선 군의관과 위생병들에게

"꼭 살려야 해요" 라고 위협조로 말했다.

정규형 대위는 이우철 일병에게 심장 마사지를 하라고 지시했다.

 

이일병은 환자의 가슴 위로 올라가서 두 손을 포갠 뒤에

왼쪽 가슴을 몇 차례 강하게 눌렀다.

동시에 정 대위는 수동식 인공호흡기

'암부'를 환자의 입과 코에 덮어씌워 놓고

공기주머니를 눌러 공기를 허파로 밀어보냈다.

정 대위는 심장을 자극하여 박동하게 하는

강심제 에피네프린 20cc를 가슴에 주사했다.

심장마사지도 다시 했다.

 

한 20분간 응급소생법을 실시했으나 결과는 회생불능이었다.

정 대위는 "도저히 안되겠습니다"라고 했다.

송계용 소령이 "돌아가셨습니다"라고

곁에 버티고 있는 두 감시자에게 이야기했다.

"이 사람이 누구십니까.".

송 소령의 물음에 두 감시자는 대답이 없었다.

 

며칠 뒤 군의관 정규형 대위는 합수부에서 조사를 받을 때

"얼굴을 보고도 왜 각하인줄 몰랐는가"란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답했다.

"병원에 들어왔을 때는 얼굴에 피가 묻어 있었고

감시자들이 응급처지 중에도 자꾸 수건으로 얼굴을 덮었습니다.

 

그리고 시계가 평범한 세이코였고 넥타이 핀의 멕기가 벗겨져 있었으며

혁대도 헤져 있었습니다.

머리에 흰 머리카락이 약간 있어 50여세로 보았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사실로 미루어 각하라고는 상상도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일부에서 원수처럼 욕을 퍼붓고 있는 박정희는 죽을 때

'평범한 세이코, 멕기가 벗겨진 넥타이 핀, 헤진 혁대'를 차고 있었다.

그의 집무실과 침실 화장실 물통에는 벽돌 한 장씩 들어 있었다.

물을 절약하기 위해서. 그의 집무실에는 선풍기와 파리채가 있었다.

 

기름 절약을 위해서 한여름에도 에어컨 사용을 통제했던

그는 문을 열어놓고 선풍기를 틀면서 더위를 견뎠다.

벌레가 들어오면 파리채로 잡았다.

그가 죽을 때 입고 있던 바지는 허리 부분을 수선하여 늘린 것이었다.


趙甲濟 月刊朝鮮 편집장

 


5. 박정희와 정조(正祖)


개인의 응어리 민족차원서 푼 초인(超人)

 "책을 놓지 않았던 유교적 교양인....." 추진력은 골돌한 사색에서.....

1979년 11월3일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고 박정희 대통령 영결식에서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이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영전에 바칠 때

국립 교향악단이 연주한 곡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작곡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였다.


낮은 음에서 시작되어 고음으로 치다른 뒤 꼭지점에 도달했다가

급격하게 사라지는 이 장엄한 곡은 니체가 쓴 같은 이름의 책 서문을

음악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곡처럼 박정희는 토종 한국인으로 태어나서

초인(짜라투스트라)처럼 살다가 영웅에 어울리는 최후를 남기면서

사라져갔다.

 

이 니체의 책 서문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인간이란 실로 더러운 강물일 뿐이다.

인간이 스스로를 더럽히지 않고 이 강물을 삼켜버리려면

모름지기 바다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박정희는 질풍노도의 시대를 살면서

영욕과 청탁을 같이 들이마셨던 사람이다.

영웅이란 한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고 그 시대를 담는 그릇이며

새로운 시대를 빚어내는 용광로이다.

 

그는 시대 정신을 반영하고

그 시대의 요구를 담아 현실 속에서 구현하는 사람이다.

영웅은 보통 난세에 나타나서 불꽃처럼 살다가 홀연히 사라진다.

그리하여 후세에 오래오래 계속되는 논쟁점을 남긴다.

바다처럼 청탁을 함께 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암살 순간에도 "난 괜찮아".


니체가 말한대로 스스로의 혼을 더럽히지 않고

청탁을 함께 쓸어담았다가 이를 소화하여 한반도라는 화폭에

큰 그림을 그렸다는 점에서 박정희는 김일성과 차원을 달리하는 인간이다.

김일성은 권력으로 부패했으나 박정희는 권력을 쥐고도

끝까지 맑은 혼을 유지하였다.

 

63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시절에 쓴 '국가와 혁명과 나'에

그가 인용하여 실은 시의 한 구절은

 '2등 객차에 불란서 시집을 읽는 소녀야 나는 고운 네 손이 밉더라'였다.

 

그는 이 시를 인용한 뒤에 '고운 손은 우리의 적이다'고 덧붙였다.

이 책 끝장에서 박정희는

'가난은 나의 스승이고 군림 사회와 특권 계층을 증오하는 것은

나의 생리'라면서

'서민 속에서 나고, 자라고, 일하고,

그리하여 그서민의 인정 속에서 생이 끝나기를 염원한다' 고 했다.

 

박정희는 1979년 10월26일 저녁 7시40분

김재규가 벽력 같은 고함을 지르면서 차지철을 쏠 때,

그리고 차지철이 실내 화장실로 달아날 때,

이어서 김재규가 일어서서 4∼5초쯤 주저하다가

박정희의 가슴을 향하여 발사할 때 미동도 하지 않고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이는 곁에 있었던 두여인의 일치된 증언이다.

차지철이 실내 화장실 문을 빼꼼이 열고

"각하 괜찮습니까" 하고 물었을 때 박정희는 "난 괜찮아"라고 했다.

두 여인이 "각하 진짜 괜찮습니까"라고 했을 때

그는 또다시 "난괜찮아"라고 했다.

 

이 순간 그는 관통상으로 인해 등에서는 선혈을 콸 콸 쏟고 있었다.

세계의 암살사를 다 뒤져도

이런 초인적인 장면을 발견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준비없이 맞이한 상황에서 그가 보여준 이 모습이야말로

인간 박정희의 꾸밈없는 진면목이다.


육영수는 선을 볼 때

박정희가 구두 끈을 푸는 뒷모습이 좋았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인간은 앞 모습은 꾸밀 수가 있지만 뒷모습은 꾸밀 수가 없다.

뒷모습이야말로 그 인간의 참 얼굴일 것이다.

 

총알이 허파를 꿰뚫고 지나간 뒤에도

"난 괜찮아"라는 말을 한 그의 마지막 모습이

바로 우리가 본 그의 뒷모습이었다.

이런 행동은 죽음과 오랫동안 대면해 왔던 사람,

그리하여 죽음과 친구가 된 사람만이 자연스럽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이리라.

 

그는 어머니가 임신 했을 때 지워버리려고 그렇게 애썼던 생명이었다.

44세에 며느리를 둘이나 둔 어머니는 박정희를 임신하자

간장을 두 사발이나 마시고 기절해 보기도 하고

높은 데서 뛰어내려 상처를 내보기도 했다고 한다.

무거운 것을 배에 얹어서 뒤로 넘어져 보기도 했으나

뱃속의 생명은 지워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태어나서는 안 될 생명'이 태어났고

이 인물에 의하여 이 나라가 천지개벽의 변화를 겪었으니

운명적이란 말로써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박정희는 지옥의 문턱까지,

그리고 인생의 골짜기까지 떨어졌던 경험을 여러 번 했던 사람이다.

 

남로당에 포섭되었다가 탄로가 나서 전기고문을 받는 가혹한 수사 끝에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그의 인간됨을 아낀 많은 사람들의 운동에 의해서

생환했다.

그때 동거하던 이 모 여인은 가출하여 그를 버렸고

피난 중 부산의 어느 술집에서 이상한 관계로 재회했다.

 


마음은 여리지만 간은 컸던 사람.


박정희는 실연과 가난과 그에 따른 인간적 수모,

식민지 생활의 울분,

해방 후 사상 대결에서 겪었던 비참함을 하나의 거대한 응어리로 만들어

가슴 속 깊이 묻어두었던 사람이기도 하다.

 

 이 응어리를 개인적 차원에서 해소하려 하지 않고

민족적 차원에서 풀어간 점에서 그가 혁명가임을 확인하게 된다.

이 응어리는 그의 동력원이었다.

이 응어리로 해서 그는 미국에 도전하는 엄청난 오기를 부릴 수 있었다.

 

타고난 반골인 그는 경제개발을 통해서 물질적인 기반을 확보한 다음,

우리의 운명을 우리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주국가의 건설을 최종목표로 설정했던 것이다.

 

박정희는 소심담대한 사람이었다.

즉 마음은 여리고 부끄럼을 타며 간은 큰 사람이었다.

육영수와 선을 보러갈 때는

가슴이 떨려서 소주 한 병을 마시고 간 사람이

총구 앞에서는 태산처럼 의연했다.

 

그의 집무실은 서재로 불렸다.

그는 책을 손에서 떼지 않는 유교적 교양인이기도 했다.

정확한 용어 선택과 늘 핵심을 찌르는

그의 말은 박정희가 1급 지식인이었음을 보여준다.

 

박정희의 추진력은 골똘한 사색에서 나왔다.

그가 이룩한 엄청난 물질적인 성취의 바탕이 되었던

이 정신력을 간과하고는 박정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말년의 박정희는 아내를 잃은 허전함으로 해서 내면이 해이해졌다.

그를 둘러싼 권력의 갑옷은 차지철 경호실장의 월권에 의해서 경직되어 갔다.

이 허전함과 경직됨의 틈바구니에서 김재규의 총탄을 허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로 하여금 영웅으로 죽게 만든 김재규는

저승에서 박정희로부터 "고맙다"는 말을 들었을지 누가 아는가.

 


글쓴이 : 김두영(전 청와대 비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