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의 업적 조명 - 부국대통령의 주요 업적 30가지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 조명
부국대통령의 주요 업적 30가지
우리나라 부국 대통령으로 산업화를 통해 '한강의 기적'이라는 유례가 없는 경제발전을 이룩한 박정희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이 1974년 5월 20일에 적은 휘호인 ‘내一生 祖國과 民族을 爲하여’ 1997년 10월 6일 경향신문이 '전문가 30인이 본 역대대통령 리더십'에 대해 총 전문가 30인이 평가한 목록을 차트로 만들어 썼던 기사의 내용 중
"박정희 대통령은 인물의 발탁과 운용에 두루 능했던 인사전략가로 평가됐다. 군부를 배경으로 한 직계에게 정권안보를 맡기고 전문영역에서는 기술관료들을 대거 등용한 점이 좋은 점수를 받은 이유다. 민정이양시 이른바 '방탄내각'과 경제개발 시기의 '돌격내각'이 대표적 성공사례로 꼽혔다. ······ 박정희 대통령은 집권 초반 당근과 채찍의 완급을 조절하여 권력을 창조적으로 절약한 것으로 평가됐다. 63년 상당수 군부세력의 반대를 무릎쓰고 5대 대선에 출마, 민선 대통령이 됨으로써 법적인 정통성을 추인받은 것이 대표적인 사례로 지적됐다. ······ 역대 대통령 가운데 이승만, 박정희 두 대통령의 지적수준은 상대적으로 높았던 것으로 평가됐다. 특히 박 대통령의 경우 지적 능력을 배경으로 주요 국정현안을 직접 관장함으로써 효율성을 극대화시킨 사례로 꼽혔다. 그는 재임당시 각 수석비서관들에게 교수, 전문관료, 언론인 등으로 구성된 전문가 모임과 토론을 하게 한 뒤 취합된 결론을 습득, 활용했다."
- 1997년 10월 6일 경향신문이 '전문가 30인이 본 역대대통령 리더십'에 대해 인천대 김학준 총장, 명지대 송재 총장, 서울대 명예교수인 김홍우(정치학), 최명(정치학), 김광웅(정치학),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인 노화준(행정학), 김준기(행정학), 서울대 법대 교수인 최대도(법학), 이상면(법학), 연세대 교수인 최평길(행정학), 김학은(경제학) 유석춘(사회학), 연세대 명예교수인 송복(정치사회학), 고려대 명예교수인 최장집(정치학), 최상용(인문학), 고려대 교수인 서진영(정치학), 김병국(정치학), 김호진(행정학), 서강대 교수인 손호철(정치학), 이화여대 교수인 진덕규(정치학), 임현백(정치학), 숙명여대 교수인 이남영(정치학), 한국외대 교수인 이정희(정치학), 한양대 행정대학원 교수인 공성진(정치학), 경희대 교수인 신정현(정치학), 전북대 교수인 정재길(법학), 전남대 교수인 김광수(정치학), 경북대 교수인 윤용희(정치학), 부산대 교수인 정용하(정치학), 전 정무장관인 이종률, 총 전문가 30인이 평가한 목록을 차트로 만들어 썼던 기사의 내용 중
박정희 대통령과 관련된 중요한 업적 30가지를 집필한 이유
박정희 대통령과 관련된 주요 업적 30가지를 집필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기본적으로 필자는 역사학도로서 중도이지만 정치적으로는 보수우파에 더 가까운 사람이다. 따라서 보수세력의 대표적인 대통령인 박정희 대통령과 이승만 대통령 중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주로 어떤 업적을 남겼는가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단편적으로 알고는 있지만,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업적을 행했고, 또 그 영향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많지 않기에 이렇게 나서게 되었다.
최근에 좌파적 역사단체로 알려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백년전쟁'이라는 동영상의 타이틀로 대한민국의 부국을 이끈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명확히 확인되지 않은 사실도 사실로 둔갑 및 엉뚱한 해석을 하여 십자포화를 쏟아붓고 있는 것을 보고 기본적인 지식과 이해가 없는 대중들이 자칫하면 잘못된 사고를 할 수도 있다고 판단하여 이렇게 글을 쓰게 되었다. 또한 이미 앞서 건국대통령 이승만의 주요 업적 30가지를 여러 자료들을 토대로 집필한 바가 있기 때문에 박정희 대통령 역시 이어서 집필하게 되었다.
따라서 부족하지만 최근에 한국현대사에 관심을 가지게 된 대한민국의 역사학도이자 20대의 청년 보수우파로서, 그 흐름에 맞춰 역사학의 인식을 전환하여 가장 많은 대중들이 찾는 인터넷을 통해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잘못된 선입견에 빠진 사람들의 인식을 바로잡고자 시간을 내어 집필하게 되었다. 본 글은 박정희 대통령의 주요 업적 30가지로 구성되었으며, 보다 정확한 출처를 통해 서술했음을 앞서 밝히는 바이다.
1. 대한민국 최초의 주민등록증 제도 실시
- 1968년 11월 21일에 18세 이상의 모든 국민에게 주민등록증이 발급되었다. 주민등록증 제도가 실시된 계기는 1968년 1월 21일에 있었던 1.21사태, 즉 김신조를 필두로 한 북한의 남파공작원들이 청와대까지 습격해 들어오자 그 뒤부터 실시하게 되었다. 1월 21일 북한 특수부대인 124군부대 소속 무장게릴라 31명이 청와대를 습격을 시도 하는 일이 있었다.
당시 한국군 복장에 수류탄 및 기관단총으로 무장한 이들은 휴전선을 넘어 서울 잠입에 성공하지만 자하문에서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린다. 이 사건을 겪은 뒤 정부는 전국민에게 단일 형태의 신분증을 나눠주어 필요할 때 신원을 정확히 확인하려는 취지로 만들었다. 주민의 동태를 파악하고, 남파 간첩 등의 불온분자 색출이 용이하도록 하기 위한 차원에서 발급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신분증 제도는 존재했었지만 체계적으로 정리를 하여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온 주민등록증 제도의 전통은 박정희 대통령의 시대 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 이후 이전에 있었던 시민증과 도민증은 폐지되었다. 주민등록증의 첫 발급자는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1968년 10월 말부터 전국민에게 12자리의 주민등록번호를 부여했고, 11월 21일부터 본격적으로 만들어주었다.
2. 친노동계급적인 서민을 위한 최초의 의료보험제도 실시
- 우리는 흔히 박정희 대통령 시대를 노동자들의 인권을 억압한 독재적인 시대로만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오히려 역설적으로 의료보험, 산재보험과 생활보호 등 소위 친노동계급적 성격을 가진 제도들이 노동운동에 대해 억압적이던 박정희 대통령 시대 때 도입되었다.
특히 1976년 의료보험법 개정을 통해 도입된 강제가입방식의 의료보험제도는 당시 재정적 부담을 우려한 경제기획원 등 정부 내 핵심 부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관철되었는데, 여기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정치적 결단이 크게 작용했다. 즉, 1972년 유신개헌 이후 학생, 종교인,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반체제 운동이 격화되면서 사회 안정 대책이 시급히 요청되었던 것이다.
동시에 1973년 북한이 세계보건기구(WHO)에 가입한 이후 국제 사회에서 자국의 무상 의료 시스템을 선전하자 당시에 북한과 경쟁을 벌이던 박정희 대통령이 이에 자극을 받아 의료보험제도를 도입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국민연금은 경제 상황의 악화로 무기한 연기된 대신 의료보험제도가 실시된 배경에는 일정한 기여금 납입 기간이 필요한 연금과 달리 시행 즉시 국민들에게 혜택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미국은 사(私)보험에 의존하고 있어 보험혜택을 못 받는 이들이 4700만명에 이른다. 맹장수술비가 1만 5000달러나 되고, 안경 맞추려면 안과 시력검사비로만 60달러를 내야 한다. 미국 시벨리우스 보건장관은 한국의 의료보험을 배우고 싶다고 할 정도로 미국은 우리나라의 의료보험제도를 실시하고 싶어한다. 번번이 의료보험 개혁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3. 친환경적인 그린벨트 설치로 산림을 보호하여 세계 4대 조림성공국의 반열에 오름
- 1971년 7월 30일, 건설부 고시로 서울 외곽지역에 그린벨트(개발제한구역)가 처음 지정됐다. 서울 중심부에서 반경 15㎞를 따라 폭 2∼10㎞ 지역의 서울, 경기 땅 454.2㎢(첫 발표 때는 467㎢)의 개발을 묶는다는 내용이었다. 도시의 무분별한 확산과 토지 투기 억제가 목적이었다. 그린벨트는 박정희정권 당시인 1971년부터 시행되어 도시의 무분별한 확장을 막고 난개발을 방지하는 중요한 방어책이 되어 왔다.
그린벨트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재산권 행사에 제약을 받게 되었지만, 그들의 희생으로 전 국민이 수혜를 얻는다. 정부는 당시 이를 공식 발표하지 않고 슬그머니 관보에만 실어 밀실행정을 행했다. 불만이 많았던 만큼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챙겼다. 관리근거가 도시계획법 시행규칙에 불과한데도 이를 개정할 때는 반드시 사전 재가를 받도록 해 결과적으로 군사정권 정책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성공사례로 남았다.
건설부 고시 447호로 발표된 도시계획법 시행규칙에 의거해서울 종로구 세종로 사거리에서 반경 15km 라인을 따라 폭 2~10km 구간이 '영구 녹지대’로 지정되었다. 문제는 그린벨트로 지정된 지역의 80%가 사유지였다는 점이었다. 이후 그린벨트 지역은 모두 8차례에 걸쳐 서울을 비롯 부산, 대구, 광주 등에 이어 1977년 4월 18일 마지막으로 지정된 전남 여수시 일대까지 합쳐 전국적으로 총 5,379㎢가 그린벨트로 묶였다.
전 국토의 5.4%나 되는 엄청난 땅이었다. 심지어 그린벨트 내 군부대 초소의 기왓장 몇 개를 바꾸는 것까지 건설부의 사전허락을 받도록 했다. 이 때문에 그린벨트는 박 대통령 생존시 단 한 번의 구역변경 없이 철저하게 그리고 강압적으로 관리되었다. 그린벨트를 잘못 관리한 공무원은 가차 없이 징계를 받았다. 1972년부터 1979년까지 무려 2,526명의 공직자가 관리부실로 파면, 감봉, 견책, 직위 해제 등의 징계를 받았다.
또한 그린벨트임을 알리는 푯말을 세우고, 경비행기로 항공사진을 주기적으로 촬영하여 과거의 사진과 비교, 무허가로 들어서는 건물이나 용도가 변경된 토지를 적발하여 원상 복귀시키기까지 했다. 이런 노력이 있어 그린벨트는 오늘날 '세계적으로 성공한 자연환경보전 사례의 하나'로 꼽히고 있고 박정희 대통령은 '후세에 찬란한 자연유산을 물려준 지도자'로 세계로부터 극찬을 받고 있다.
4. 학원-과외 전면금지 조치를 통해 계층의 대물림 현상을 완화하여 교육의 평등을 실현
- 보건사회연구원 여유진, 김문길 연구위원과 장수명(교원대), 한치록(고려대) 교수가 공동 발간한 '계층구조 및 사회이동성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상위 직종을 가진 아버지를 둔 아들이 역시 상위직종을 가진 확률은 53%였다. 반면 하위 직종을 가진 아버지를 둔 아들이 상위직종을 가진 확률은 29%였다.
부자(父子)의 직업정보가 있는 한국노동패널 6,466명을 분석한 결과 상위직종은 전문가ㆍ30인 이상 고용주ㆍ준전문가ㆍ공무원ㆍ중간관리자ㆍ화이트칼라(사무원)로 분류했고, 하위 직종은 영세자영업자ㆍ농부ㆍ숙련근로자ㆍ미숙련근로자ㆍ농업근로자로 분류해 직종을 이분화했다.
이런 계층의 대물림 현상은 과외금지 기간에 중ㆍ고교를 다닌 세대(1961~1985년생)에서 대폭 줄어들었다. 과외허용 세대의 경우 상층 출신과 하층 출신이 상층으로 귀착한 확률은 각각 41.9%, 17.9%로 그 차이가 23.9%포인트나 된 반면, 과외금지 세대는 각각 58.3%, 41.7%로 그 차이가 16.6%포인트에 불과했다.
즉 과외금지 세대는 과외허용 세대보다 7.3%포인트 만큼 더 계층간 이동이 활발했다. 과외금지 세대에 상층으로 올라선 비율이 전반적으로 높은 이유는 이 시기에 화이트칼라 직종이 늘어났기 때문이지만, 하층 출신이 상대적으로 더 많이 상층으로 올라간 것은 과외금지로 교육기회의 소득의존도가 낮아진 결과라는 뜻이다.
연령대별로 따지면 1976~80년생의 계층간 이동이 가장 활발했다. 하층 아버지를 뒀을 때 아들이 상층이 된 비율보다 상층 아버지를 뒀을 때 아들이 상층이 된 비율(오즈비ㆍodds ratio)이 1.66배 높았을 뿐이다. 1971~85년생은 줄곧 1점대 배율을 유지해 계층간 이동이 활발했지만, 과외금지가 풀린 1986년생 이후로는 다시 2.44배로 높아졌다.
5. 1979년에 88 올림픽 유치를 위한 계획을 수립 및 구성
- 대부분의 사람들은 88 올림픽 유치가 전두환 대통령에 의해 시행된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것은 잘못된 사실이다. 사실 88 올림픽은 이미 박정희 대통령이 1977년부터 준비 작업을 해왔던 것이었다. 박정희 정부는 1979년 10월에 올림픽 유치계획을 발표한다. 그런데 그 뒤에 한 달도 되지 않아 박정희 대통령은 서거했다. 그럼에도 그로부터 9년 후 서울올림픽은 성공적으로 개최되어 경제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하며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주었다.
특히나 주목할 것은 이 올림픽 유치를 위해 IOC헌장에 따라 인종 및 종교와 정치상의 이유를 불문하고 전체 IOC 회원국 선수와 임원들에게 자유입국을 허용, 모든 선수들이 아무런 제한이나 차별없이 참가할 수있도록 보장할 것이며 경기종목도 빠짐없이 모두 실시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한 것에 있겠다. 즉, 소련과 중공은 물론 북한 등 미수교공산권에 대해서도 입국을 허용한다는 말이었다.
6. 미국 브로드웨이에 인류를 위해 큰 공헌을 한 외국인으로서 환영을 받는 카퍼레이드를 행함
- 1965년 5월 19일, 뉴욕시가 주최한 다운타운 브로드웨이 일대에서 하는 티커테이프 퍼레이드에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했다. 이 퍼레이드는 일명 '영웅행진'이라고 불리우는 퍼레이드로 역사적으로 인류를 위해 큰 공헌을 한 인물들을 위해 베풀어지는 영광의 카퍼레이드였다. 이 흔적은 지금도 미국의 브로드웨이 길거리에 남아있는데, 박정희 대통령의 퍼레이드 흔적을 바닥에 문구와 함께 석판으로 새겨놓았다.
아이젠하워 대통령부터 시작해서 맥아더 원수, 드골의 프랑스 대통령을 비롯해 달착륙 우주인들이 이 퍼레이드의 주인공이 되었는데, 한인으로서 이 뉴욕시 영웅행진의 영광을 누린 사람이 바로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첫 번째는 이승만 대통령이었는데, 박정희 대통령은 2번째 한국인으로서 영웅행진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7. 홍수와 가뭄, 환경을 대비해서 4대강 다목적댐 준공
- 박정희 대통령은 4대강 유역 개발사업을 실시했는데, 홍수와 한해(旱害)를 겪으면서, 유사 이래 계속된 이와 같은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한강과 낙동강, 금강, 영산강과 같은 큰 강에 댐을 만들고 작은 강에는 보(洑)를 지어 집중 호우 때에는 물을 가둬 수해를 줄이고 갈수기 때에는 물을 풀어야 한다고 봤다.
어떻게 보면 이명박 대통령이 시행했던 4대강 살리기 사업의 시발점은 박정희 대통령의 4대강 유역 개발사업과 통한다고 볼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4대강 살리기 사업은 지방을 살릴 수 있는 정책이었는데, 당시에는 이명박 대통령 때처럼 반발하는 국민들보다 오히려 반기는 국민들이 더 많았다.
물을 다스려 국민이 살기 좋게 하는 것이 위민(爲民)정치의 시작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또 지방에 사는 처녀들도 도회지 처녀들처럼 맑은 물이 흐르는 하천변에서 데이트를 하고 물놀이를 할 수 있어야 하고, 농촌지역의 학생들도 도시 어린이와 똑같이 뱃놀이를 하고 안전한 수영장에서 수영을 할 수 있는, 모든 국민이 잘사는 복지국가를 만들고자 했다.
물론, 박정희 대통령의 4대강 유역 개발사업의 중점적인 이유는 계절과 날씨에 따라 홍수와 가뭄에 시달리던 국민들의 고통과 피해를 줄여주고자 했던 것이었다. 이렇듯 홍수와 가뭄, 환경을 대비해서 4대강 다목적댐을 준공했던 것이다. 예컨대 1972년 11월 '동양 최대의 사력(沙礫)댐'으로 소양강댐이 선전되었다.
소양강댐은 1967년 4월 15일 착공되어 1973년 10월 15일 완공되었는데, 이 소양강댐은 경부고속도로, 서울지하철 1호선과 함께 박정희 대통령 시대의 3대 국책사업으로 꼽혔다. 이 사업을 맡은 정주영 회장은 비용을 3분의 1로 낮추면서도 훨씬 튼튼한 사력식 공법을 제안하여 실행에 옮겼다. 소양강댐 이외에도 안동댐, 대청댐 등도 만들어졌다.
8. 제주도의 명물 감귤사업을 조성하고 도로, 항만 등 국제적인 관광지로서의 입지를 구축
- 현재 제주도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관광지임과 동시에 제주도의 특산물로 대표적인 명물은 바로 감귤이다. 우리나라의 여느 지역들과는 달리, 제주도의 귤은 한라봉이라고 매우 크면서도 맛이 일품이다. 이런 제주도의 감귤사업과 관광지 조성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바로 197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주도 정책은 한마디로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과 같다.
외국인 상대관관산업이 수출보다 외화가득률이 높다는 것을 깨달은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에 제주도에 들려 외국인을 상대로 한 국제 관광지로의 개발할 결심을 하고, 청와대비서실에 제주도관광종합개발 계획의 입안을 지시했다. 그리고는 국내 신혼여행지에 머물러 있던 제주도에 1천억 원의 투자를 지시한다. 그 뒤에도 1976년에 5백억 원을 투자하였고, 80만 평의 중문관광단지가 들어섰다.
이외에도 5·16도로 개설, 어승생 수원지 건설 등 제주발전에 초석을 다졌다. 실제로 박정희 대통령과 제주도의 인연이 깊다. 박정희 대통령은 임기시절 제주도관광종합개발계획을 입안했고, 이를 토대로 서귀포시에 중문관광단지가 들어섰다. 또한 먹는 물이 부족했던 제주에 어승생 수원지를 만들어 '수돗물 혁명'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계획들은 1961년 9월 박정희가 최고회의 의장으로 있을 때, 초도순시차 처음으로 제주도를 방문하였을 때 계획되었다.
일정을 연장해가면서 제주도의 실정을 샅샅이 살펴본 후 미개발 자연자원과 민속 등을 자원으로 한 관광개발, 광활한 초원을 활용한 축산, 그리고 따뜻한 기후에 적합한 감귤재배를 진흥시켜 제주도를 개발하고 제주도민의 소득수준을 전국 시 도의 중위권 수준으로 끌어올릴 것을 결심하였기 때문에 이루어졌다.
또한 이어 박정희 의장은 제주북초등학교에서 가진 시국강연회에서 가장 시급한 해상교통의 개선책으로 악천후하에서도 제주해협을 쉽사리 드나들 수 있는 대형 여객선의 필요성을 강조한 후 3만여 명의 도민들에게 제주-부산, 제주-목포 간 대형여객선 투입을 약속하고 제주개발계획을 천명했다.
서울로 돌아오자 마자 내린 박의장의 지시에 따라 조달청은 제주항로에 대형 여객선을 건조, 투입시키기 위해 이를 국제입찰에 붙였다. 입찰 결과 일본의 조선소가 낙찰되고 63년 10월 12일 역사적인 취항을 하게 되었다. 이 배가 바로 제주-부산 간에 취항했던 890톤급의 도라지호이다. 이보다 두 달 앞서 정부는 국고보조로 국내에서 건조된 514톤급의 가야호를 제주-목포 간에 투입, 운항시켰다.
제주와 부산 그리고 목포를 잇는 대형 여객선 취항과 더불어 제주의 관광발전을 위한 획기적인 기반조성사업의 하나는 62년에 기공해서 63년 10월 11일 개통된 제주-서귀포 간의 제1횡단도로(5.16 도로)의 건설이었다. 이 5.16도로는 제주도의 경제발전과 관광개발의 촉진제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4시간 30분이나 걸리던 제주-서귀포 간 자동차 운행시간을 1시간으로 단축시켜 제주도를 1일 생활권으로 만들었다.
해상운송에 있어서는 77년 4월, 3천 톤급의 카페리 1호가 취항했다. 두 달 뒤인 같은 해 6월 3천 톤급 카페리 2호가 같은 노선에 취항해 바야흐로 여객선의 대형화, 수송의 대량화, 여객의 대중화 시대가 열렸다. 제주항의 건설은 1962년에 시작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67년부터의 제2차 5개년계획 그리고 72년부터 시작된 제3차 5개년계획에 지속적으로 책정되어 꾸준히 추진되고 있었다.
육상교통과 수송을 위한 도로건설에 있어서는 5.16도로(제1횡단도로) 이외에도 일주도로 중산간도로 및 1,100도로 등 총 4개 국도가 박대통령의 지시로 건설되고 재임 중에 개통되어 전국 15개 시 도 중에서 교통망이 가장 잘 발달된 지방자치단체가 되었다. 제주도의 관광지 조성은 바로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시작된 것이었다.
1964년 2월 연두순시차 제주도에 들린 박대통령은 제주도는 농업여건이 타 지방과 다른 만큼 전국 공통사업인 식량증산은 염두에 두지 말고 수익성이 높은 감귤을 적극적으로 장려하라는 특별지시를 내렸다. 이 특별지시에 따라 1965년부터 감귤 식재붐이 일기 시작하였으며 1968년부터 제주도는 감귤재배를 농어민소득증대사업으로 책정하여 장기저리자금으로 감귤과수원 조성자금을 지원하게 됨에 따라 1969년부터 획기적인 증식이 이루어졌다.
그 당시 우리 나라 과수 중 재배면적이 5천ha를 상회하는 5대 과수는 사과, 복숭아, 배, 포도, 감 등이었는데 감귤이 재배면적에 있어 사과 다음인 2위로 껑충 뛰었으며 1975년부터는 생산량에 있어서도 2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감귤재배 덕택에 1995년도 농가당 소득은 전국 9개 도 가운데 1위인 경기도보다 5만 5천원이 적은 2,721만 5천원으로 2위였고 농업소득만을 보면 전국 1위였다.
즉, 이 제주도 경제의 밑바탕이 된 감귤산업은 박정희 대통령이 일본에서 감귤나무를 들여오라고 명령을 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그 결과, 1978년에 드디어 제주도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조성이 되면서 관광객 100만 명이 돌파했다. 그리고 그 명맥은 지금까지도 계속 유지가 되고 있다. 그 덕인지 제주도에는 50~60대 이상의 장년층에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지지가 엄청나다.
9. 전국 일일생활권이 가능해진 사회, 경제 발전의 획기적인 계기가 된 고속도로 건설 프로젝트
- 이미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모두가 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알려진 박정희 대통령의 대표적인 프로젝트인 고속도로 건설계획. 1970년 7월 7일,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었다. 이 사업은 '단군 이래 최대의 토목 공사'라고 불렸고, 근대화의 성공적 진전을 상징하는 사례로 비춰졌다.
현재 경부고속도로 개통은 박정희 정권의 최대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됨으로써 비로소 '전국 일일생활권'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사회, 경제적 발전의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다. 경부고속도로는 총연장 대비 공사기간을 따져보면 세계에서 가장 빠른 시간 안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1964년 12월 독일을 방문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연장 20킬로미터였던 본-쾰른 간의 아우토반을 달리게 되었는데, 고속도로의 수송능력에 놀람을 감추지 못하였고, 경제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고속도로 건설이 필수적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고속도로 건설에 필요한 자금은 외국에서 빌리고, 도로 건설 이후 수익자부담 원칙에 따라 고속도로 이용자에게 거두어들인 통행료로 빌린 돈을 갚기로 했다.
박정희는 "이 공사는 민족의 피와 땀과 의지의 결정이며 민족적인 대예술작품"이라고 했고, 그의 경제 브레인이었던 오원철은 "경부고속도로는 박정희 대통령의 작품이다. 구상부터 계획, 감독, 검사를 혼자서 해냈다. 박 대통령은 우리나라 고속도로의 창시자요 대부이다. 경부고속도로는 역사상 박정희 고속도로로 남을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이 공사는 단순한 건설 공사가 아닌, 군사 작전과 같이 군대식 총력 체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공사였다. 오원철은 "고속도로 건설 동기, 추진 방법, 공사 방식이 모두 군대식이었다"고 평가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원래 1971년에 개통 예정이었으나, 무려 1년을 앞당겼다.
1961년 1인당 국민소득은 82달러에 불과했지만 1979년에는 1,636달러를 기록해 연평균 18퍼센트 증가했고, 수출은 연평균 38퍼센트 증가라는 경이적 기록을 세웠다. 절대 빈곤국이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발전한 것은 행운이나 우연이 아니라, 현명한 지도자의 선견지명 덕분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경제발전에 고속도로 건설계획이 큰 역할을 했다.
경부고속도로 계획이 발표된 직후 월간 <세대> 1968년 1월호가 각계 인사 100명에게 찬반 여부를 조사한 결과, 68%가 무조건 찬성, 27%가 조건부 찬성, 5%가 반대를 표했다. 하지만 야당을 비롯한 운동권 학생들은 박정희 대통령의 고속도로 계획에 극심한 반대를 했다. 당장 먹고 살기도 어렵고 차도 별로 없는 나라에 고속도로를 건설한다니 정신이 나간 것 아니냐는 논리였다.
경부고속도로는 우리나라 2대 경제권의 중심인 서울과 부산을 연결하여 경제발전의 첩경이 되도록 하기 위한 이유에서 건설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미 1967년 초에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대한 방대한 구상을 끝내고 몇몇 구간의 노선까지 손수 결정해놓은 상태였다고 한다. 이처럼 고속도로는 박정희에게 근대화의 상징이자 경제개발의 꿈을 실현시킬 신앙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 결과, 1968년 12월 21일 우리나라 첫 고속도로인 서울-인천 간 경인고속도로가 개통되었고, 1970년 7월 7일에는 연장 428킬로미터, 4차선인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었다. 1973년에는 연장 251.8킬로미터, 2차선인 대전-순천 간 호남고속도로와 연장 176.5킬로미터, 2차선인 남해고속도로가 개통되어 영남지방과 호남지방을 연결하게 되었다.
또한 1975년에는 연장 201킬로미터, 2차선인 수원-강릉 간 영동고속도로가 완공되어 수도권과 영동지방을 연결하게 되었다. 고속도로가 만들어진 후 철도 위주의 수송 구조가 도로로 바뀌었고, 전국이 일일 생활권으로 연결되었다. 공업 단지도 전국 방방곡곡에 건설되었고, 산업 발전과 산업 생산성도 높아졌다. 고속도로 건설은 '한강의 기적'이라는 신화 창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헀다.
10. 농촌의 진흥과 국민의 근면, 자조, 협동정신을 일깨운 농촌혁명인 새마을운동 실시
- 박정희 대통령의 여러 공업화를 통한 급속한 경제발전은 도시의 엄청난 발전을 가져왔지만, 반대로 농촌의 쇠퇴를 가져왔다.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은 이러한 농촌을 다시 부흥시킬 방법을 찾아냈는데, 그것이 바로 새마을운동이다. 새마을운동은 박정희 대통령이 1970년 4월 22일 수해대책을 숙의하기 위한 지방장관회의에서 수재민 복구대책과 아울러 농촌재건운동에 착수하기 위하여 마을가꾸기 사업을 제창한 것에서 비롯된다.
이는 하나의 농촌혁명과도 같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9년 8월 4일에 경남북 수해지구를 시찰하면서 마을사람들의 자발적인 자조정신과 협동심에 큰 감동을 받았고, 이를 통해 그는 농민들의 근면, 자조, 협동정신을 일깨워 농촌을 개발해보자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착안해낸다.
그리하여 박정희 정부는 1971년 전국 3만 3,267개 마을에 시멘트 335포대씩을 무상지원하여 각 마을마다 하고 싶은 사업을 자율적으로 하도록 조성하였다. 이 결과는 2가지로 나타났는데, 한쪽은 정부가 무상공급한 시멘트로 부락민들이 자제 노력과 자체 자금을 투입하여 마을이 필요로 하는 숙원사업을 해냈다.
반면, 다른 한쪽은 시멘트의 무상공급을 받았음에도 뚜렷한 사업을 하지 못했다. 이러한 경과를 지켜보고 박정희 정부는 성과가 있는 1만 6,600개 마을에 대하여 또다시 시멘트 500포대와 철근 1t씩을 무상공급하면서 자발적인 협동노력을 장려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정부의 절대적인 지원으로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공장, 도시, 직장 등 한국사회 전체의 근대화운동으로 확대 및 발전되었다.
새마을운동은 박정희 대통령의 탁월한 리더십과 우수한 새마을지도자 양성, 그리고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시너지효과를 나타내면서 근대화와 경제성장이라는 성과를 이룬 것이었다. 덕분에 우리나라는 보릿고개를 청산하면서 산업혁명과 농업혁명을 단시일에, 그리고 동시에 성공시켰다. 이 새마을운동이 범국민적 근대화운동으로 조직되어 1970년대의 경이적인 경제성장을 가능케 한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자동차가 드나들 수 있는 마을은 30%에 불과해 나머지는 비좁고 꼬불꼬불한 고샅길에 가난이 엉켜 있는 형상이었는데, 새마을운동 덕분에 이런 농촌의 인프라를 획기적으로 바꾸어 놓았고, 농가소득 증가라는 눈부신 성과를 가져왔다. 1967년의 경우 농가소득이 도시가구의 60%에 불과하던 것이 70년에 평균 25만 6천원, 75년 87만 3천원, 78년 160만원으로 8년 사이 6배 이상 증가하며 도시 노동자의 소득을 상회하기 시작했다.
이 새마을운동은 이후 세계 각지로 퍼져 세계 약 100여개 나라에서 우리나라의 새마을운동을 배우고 있고, 또 배우려 하고 있다. 사실, 이러한 새마을운동은 우리 한류의 첫 물결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해외에서는 우리나라의 새마을운동에 주목하고 있으며, 이러한 운동을 주도한 박정희 대통령을 칭송하고 있다.
11. 자동차 산업을 육성하여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효자산업으로 성장시킴
- 1968년에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이 준공된 이후 현재 1공장부터 5공장까지 5개의 단일공장으로 구성되어져 있다. 1990년 6개의 차종에 56만대 생산능력에 불과했던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은 2010년 기준 13개 차종을 시간당 330대, 하루 6,600대를 생산한다. 연간 최대 150만대까지 가능하다. 설립 이후 2009년까지 차량 누계대수는 2,580만대에 이른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수출선적부두가 공장 내 위치해 수출기지로서도 최고의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산업으로 일컬어지는 자동차 산업 역시 박정희 대통령 시대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발전하기 시작했다. 1961년 5.16을 일으킨 직후 박정희 정권은 <자동차공업발전법>을 만들어 완성차 수입 금지, 국산화 정책, 수출 산업화 정책 등과 함께 자동차 산업을 활성화시켰다.
1962년 세워진 새나라자동차는 일본 닛산의 부품을 수입해 '새나라자동차'를 조립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새나라는 관세면제 등의 특혜를 받아 5.16 군사정권 초기 이른바 '4대 의혹사건'의 하나로 물의를 일으켰고, 수요 감소로 설립 다음해인 63년 5월 생산이 중단된 뒤 65년 이어 신진자동차가 설립돼 새나라자동차를 인수했다.
신진자동차는 도요타와 기술제휴로 '코로나'를 선보였다. 60년대 말에는 현대자동차가 미국 포드와 손잡고 '코티나'를 양산하기 시작했다. 70년대초에는 현대, 신진, 아시아, 기아산업 등이 4륜트럭 생산을 시작해 자동차 공업발전의 촉매역할을 했다. 이후 1975년 현대의 '포니'는 한국을 세계 15번째 자동차생산국가로 부상시켰으며, 1976년에 포니 6대를 에콰도르에 첫 수출했다.
그리고 1986년 소형자동차 '포니엑셀'을 처음 미국에 수출했다. 현대차는 포니를 만들고 약 10년간 적자에 시달렸는데, 국가가 나서서 해결해 주었다. 박정희 정권이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국내에서 외국차를 못 팔게 하고 독점가격을 보장해주면서 자동차 산업을 육성시킨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한국 자동차 산업은 세계 5위권에 진입할 정도로 급성장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지금과 같은 성장을 이루어낼 수 있었다. 1960년대 후반, 이웃나라 중국 대륙에 고속도로가 한뼘도 없을 때 산지가 7할인 이 작은 나라에 가당치도 않다는 고속도로를 닦으면서 박정희 대통령은 자동차를 만들자고 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자동차 생산계획 발표에 업계는 놀랐고, 교수와 지식층에선 후진국이 무슨 자동차냐고 반대했다.
국회의원이나 장관들도 자가용을 마련하기가 수월치 않았던 그 시절에 국내에서 자동차를 개발한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자동차 산업은 국가경제를 일으키는 효자산업으로 급성장을 했다. 먹고 살기도 힘든 시기에 이미 앞날을 내다보고 고속도로에 이어 자동차 산업을 육성하여 대표적인 산업으로 만든 것이다.
12. 화교 억제정책을 통해 서민들의 골목상권을 지키고 경제적인 자립과 자주성을 수호
- 현재 우리나라는 아시아 국가에서 거의 유일하게 화교가 제대로 정착하지 못한 나라에 속한다. 그 이유는 박정희 정권 아래에서 화교들은 큰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었다. 통화개혁이 그것이다. 화교들이 현금 소지를 선호하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는데, 통화개혁을 통하여 화교들의 현금이 하루아침에 휴지조각으로 변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로 인해서 화교의 생존이 박정희 정권 하에서 직접적으로 위협받았다. 또한 1961년 외국인 토지 소유 금지법의 시행에 따라 토지를 소유한 외국인은 정부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많은 화교들은 그 승인을 얻지 못했고, 그들의 토지를 시세에도 못 미치는 가격으로 매도해야 했다. 1970년에는 외국인 토지 취득 및 관리에 관한 법이 제정되었다.
이에 따라 한국 화교는 1가구에 1주택 1점포만 허용되었고, 그것도 주택면적은 200평 이하, 점포는 50평 이하로 제한되었다. 또한 취득한 토지의 건물은 자신만이 사용 가능했고 타인에게 임대할 수 없었다. 논밭이나 임야의 취득도 불가능하였다. 한국 화교는 요식업에서도 여러 제한과 차별 대우를 겪어야 했다.
중국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도 유독 차이나타운이 존재하지 않는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최근 한국을 방문하는 중국인 관광객들의 수가 부쩍 늘어남에 따라 이들을 대상으로 상업활동을 벌이기 위해 인천과 부산 등에 자연스럽게 차이나타운이 형성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중국인 이주 100년의 역사가 지난 지금까지 차이나타운이 건설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실로 크다.
이 같은 어려운 상황으로 한국 화교의 인구는 점차 감소해갔다. 이들은 1970년대 초부터 미국을 비롯하여 호주, 대만 등지로 이주하였다. 1960년대 말까지 4만 명을 헤아렸던 화교들 가운데 2만 명 이상이 외국으로 이주하였으며, 미국의 캘리포니아 주 지역에만 현재 8천여 명의 한국 화교 출신자들이 거주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부동산 취득제한, 거주자격 심사강화, 세무조사 등의 화교정책으로 한국의 화교들이 성장하지 못하도록 발목을 잡은 것이었다. 이와 같이 70~80년대에 화교들은 부동산 취득 등 부의 축적 수단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한국에 자리를 잡지 못하게 되었다.
13. 베트남전 파병을 통해 막대한 군사적, 경제적 이익을 통한 '베트남 특수'를 누림
- 베트남 파병으로 인한 특수는 한일국교정상화 청구비용과 함께 박정희 대통령의 1960년대 경제개발 신화를 이끈 쌍두마차로 불리운다. 이 베트남 파병을 통한 베트남 특수는 '한강의 기적'이라는 경제적 신화를 만드는 데에 충분했다. 베트남 파병은 박정희 대통령이 정치와 경제 이익을 노리고 미국이 생각하기도 전에 이미 먼저 시행착오를 내부에서 논의하고 제안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안보와 경제적 실리라는 두 마리 토끼를 이 기회에 잡으려고 했던 것이다. 베트남 파병은 결과적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의도한 거의 모두가 달성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는데, 한국 국방부 공개 자료에 따르면 군사 원조 증가분이 10억 달러, 미국의 한국군 파월 경비 10억 달러, 베트남 특수 10억 달러, 기술 이전 및 수출 진흥지원이 총 50억 달러의 외화 수입 효과가 발생했다고 한다.
미국의 일반회계국이 1973년에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과 관련해 미국 정부가 한국에 지불한 돈은 모두 10억 3000만 달러로 추정했다. 미국 국제개발처(AID)도 1966년부터 1972년 사이 한국이 베트남에서 벌어들인 외화 소득을 총 9억 2500만 달러 정도로 추산했다.
이러한 경제적 실리 이외에도 1950년 6월 25일에 일어난 6.25전쟁에서 막대한 비용과 군사를 지원한 미국이 사상 처음으로 지원을 받은 한국 정부를 외교적 동반자로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당시 베트남 전쟁에 대한 명분이 없었기에 미국의 편에 서서 참전하기를 국제사회는 꺼렸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미국에게 은혜를 갚았던 격이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중요한 것은 당시 베트남 전쟁에 대한 일반적인 국제사회의 시각이 인종전쟁, 즉 프랑스와 미국의 백인계와 베트남, 중국의 황인계의 인종전쟁이라는 불명예를 받았던 것인데, 이러한 인식을 깨기 위해서는 동양의 국가가 미국의 편에 서서 참전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국가는 바로 우리나라가 되었다.
이후 우리나라가 본격적인 베트남 파병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전쟁물자 및 용역을 제공받았고, 또 한국군의 장비 현대화와 차관 제공 등의 경제 및 군사지원을 미국으로부터 약속을 받아냈다. 그 결과 1968년 말 박정희 정부가 미국에 M-16 소총 10만 정 제공 및 공장 건설, 전폭기 17개 대대, 전략 공군 기지 건설 지원 등을 요청하여 요구 장비의 85% 수준을 약속했다.
베트남 파병은 이와 같이 베트남 특수를 통한 한국 경제의 도약을 가져왔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동시에 한국과 미국의 안보 체제가 더욱 강화되는 시너지 효과를 냈다. 뿐만이 아니라, 6.25전쟁 이후 군사훈련을 통해서 이론적으로만 학습하던 것을 베트남 전쟁을 통해 실질적인 전쟁경험 기회를 전투병들이 체험하여 안보의 중요한 역할을 했다.
14. 식량자급으로 가난을 해결하고자 다수확품종인 통일벼를 재배하여 녹색혁명을 이뤄냄
- 박정희 대통령은 식량자급이야말로 가난 추방의 첫걸음이자 국가안보의 요체라고 여기고 1960년대 중반 벼 신종품 개발을 지시했다. 1971년에 농촌진흥청이 개발한 다수확품종인 통일벼 재배가 시작되어 1974년에는 쌀 생산량이 3000만석을 돌파, 쌀 수입을 끝냈으며, 1975년에는 마침내 쌀 자급이 달성되었다.
또한 1976년에는 단군 이래의 최고 수확량을 기록했고, 드디어 쌀을 비축하기에 이르렀다. 즉, 5천년 역사상 처음으로 전국민이 쌀밥을 먹는, 우리 역사의 기념비적인 해가 된 것이었다. 기아를 몰아내려는 박정희 대통령의 의지와 정부와 농업공무원, 농민의 의지가 녹색혁명, 쌀 기적을 이뤄내고 보릿고개라는 비참한 시대에 살던 국민들을 굶주림에서 해방시킨 것이다.
개발도상국에서 식량의 자급자족을 이루면 '녹색혁명'이라고 일컫는다. 이 녹색혁명의 성공은 박정희라는 국가지도자의 완고한 집념과 공직자, 그리고 농민의 삼위일체가 이루어낸 결과물이었다.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는 청와대에 농업 담당과 새마을 담당 특보, 그리고 농업 담당 비서까지 3명의 참모가 있었는데, 그 다음 정권부터는 농업 관계 참모가 단 한명도 없었다.
한이 많은 보릿고개로부터 해방을 맞은 1976년의 쌀 생산량은 521만톤(3621만석), 10년 전인 1966년의 392만톤에 비하면 100만톤을 훨씬 뛰어넘는 수확이었다. 그런 뒤 1977년부터는 4천만석을 돌파해 세계 최고의 다수확국가로 탈바꿈했다. 그 과정에서 절미운동을 강력히 추진하며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주2회 혼분식을 실시했고, 1972년 12월부터는 주5회 정도로 늘려 단속을 했다.
식당에 수시로 암행단속반이 들이닥쳐 솥뚜껑을 열어보고 절미운동 위반은 중대한 범죄행위로 규정했다. 학교에서는 선생이 점심시간마다 도시락을 검사했다. 이와 같은 국민의 뜻에 반하는 행동을 했지만, 그 결과 식량증산과 절미운동은 1976년에 식량의 자급자족을 이루어냈고, 그 결과 비로소 외국쌀의 수입 중단을 공식적으로 선언하게 된 것이다.
1976년이라는 시기는 우리나라가 보릿고개라는 찢어지게 가난한 굶주림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했으며, 동시에 우리나라가 이제는 굶주림이 없이 어느 정도 자급자족을 통해 먹고 살 수 있는 기반이 조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녹색혁명은 식량자급이야말로 가난 추방의 첫걸음이자 국가안보의 요체라고 여겼던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한 관심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15. 훗날 2차례 남북정상회담의 기반을 닦은 남북적십자회담, 7.4남북공동성명 등의 대북정책
-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적인 자립과 자주 국방 이외에도 조국통일, 나아가 세계평화를 이루려는 현실적이고 단계적인 청사진을 구상하여 국정을 이끌었다. 흔히 북한과의 평화적인 시기로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때를 꼽지만, 그 시기에 행해진 남북정상회담과 같은 일들은 어디까지나 그 이전에 박정희 대통령이 기반을 닦아놓은 대북정책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컨대 박정희 대통령은 북한과의 체제경쟁 속에서도 남북한의 선의의 경쟁을 촉구한 1970년의 8.15평화통일구상선언, 인도적 차원의 남북적십자회담과 이산가족 찾기 운동, 1972년의 7.4남북공동성명과 이에 따른 남북조절위원회 회담, 그리고 1973년 평화통일외교정책선언과 6.23선언, 1974년 남북불가침협정 체결을 제의했다.
뿐만이 아니라, 평화통일 3대 기본원칙 제의, 1977년 대북한식량원조 제의, 1978년 남북경제협력협의기구 설치 제의, 1979년 무조건적인 대화재개 제의 등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준비도 착실하게 추진하였다. 이러한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주도된 남북한간의 체제 경쟁을 승리로 이끌고, 또 경제성장과 자주국방을 통해 부국강병을 이룩하고, 통일에 대비한 착실한 준비가 오늘날 우리가 통일을 대비하는 가장 중요한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특히나 주목할 것은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인데, 이 선언으로 남북조절위원회가 구성되는 등 분단 27년만에 처음으로 남북대화의 통로가 마련된 것이다. 이 성명에서 자주와 평화, 민족대단결의 3대원칙이 공식 천명되었는데, 이 3대원칙이 1991년에 합의된 남북기본합의서에도, 그리고 90년 시작된 남북 고위급회담에도 적용되어 그 이후까지 유지되었다는 점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대북정책은 큰 의의가 있겠다.
1971년의 7.4남북공동성명은 무력통일에서 평화통일로 통일 방식이 변경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이, 그러니까 서로 끊임없이 다투던 그 시기에도 북한과의 직접적인 대화의 창구를 마련하고자 노력했고, 또 이 노력의 성과들이 존재했었기 때문에 2000년 김대중 정권의 남북정상회담이 존재했던 것이며, 2007년 남북정상회담이 존재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6. 한일협정 체결을 통해 얻어낸 막대한 청구비용으로 1960년대 경제발전의 토대를 닦음
- 박정희 대통령은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가 한국의 국익에 부합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한국과 일본의 국교정상화를 통해 한국의 경제 발전뿐만 아니라 미래지향적인 관계 정립에 필수 요건임을 확신하고 밀어붙였는데, 일본을 이용해 발전하는 것 말고는 길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1963년 말부터 야당은 '대일 굴욕 외교 반대 범국민투위'를 구성해 투쟁에 나섰고, 이듬해 6월 3일에는 서울의 18개 대학생과 시민 등이 시위를 벌였다. 이는 6.3 사태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는데, 한일회담 막후 주역으로 공화당 의장을 맡고 있던 김종필이 사표를 내고 외유를 떠날 정도로 엄청난 반대에 부딪쳤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 관계에 관한 조약'과 이에 부속된 협정 4개 및 문서 25개에 서명함으로써 한일협정은 타결되었다. 이로 인해 청구권 및 경제협력협정에 따라 무상 공여 3억 달러, 유상 재정 2억 달러를 각각 10년에 걸쳐 분할해서 제공받기로 했으며, 양해 사항으로 민간 차관 3억 달러가 제공되었다.
이러한 한일협정은 경제 회생을 위한 의도도 있었지만 집권당인 공화당의 정치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36년간 '일제 식민통치의 한'까지 팔아먹은 전형적인 매국 외교라며 격렬한 비난이 그치지 않았다. 하지만 2005년 8월 26일 노무현 정부는 156권, 총 3만 5354쪽의 한일회담 전 과정이 담긴 외교 문서를 모두 공개했는데, 당시 민간위원으로 문서 공개에 참여해 샅샅이 문서를 살피고 정리한 전현수 경북대 교수는 2005년 8월 26일에 다음과 같이 문서공개관련 회견을 가졌다.
"나도 한때는 한일협정이 굴욕 회담이라고 생각했는데, 3만 6000장을 일일이 검토하면서 우리 정부가 국익을 대변하기 위해 비교적 최선을 다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물론 굴욕적인 36년 식민 지배를 통한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손해에 상당하는 보상은 부족하지만, 협상은 상대가 있는 것이다. 일본은 당초 8000만~1억 5000만 달러만 주려 했는데 우리 대표단이 최대한 액수를 끌어올렸다. 과거 청산이나 국익 유지와 옹호를 위해 당시 대표단이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사실, 이미 한국은 1951년 8월 13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서명국 자격을 얻지 못해 일본을 상대로 배상 요구를 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지금의 시점으로 봤을 때, 일본의 이러한 행태들을 본다면 한일협정에서 우리가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시간을 더 끌어 시일이 지난 뒤에 협정을 가졌다면 아예 한 푼도 받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졌을 가능성도 매우 크다. 이원덕 국민대 교수도 지적을 했듯이 말이다.
분명 당시 한국과 일본의 국교정상화는 1960년대 한국 경제를 경이적으로 발전하도록 이끈 견인차였다. 당시 한국의 총 외환 보유고가 2억~3억 달러에 불과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일본에서 유입될 자본은 엄청난 금액이었고, 덕분에 수교 이듬해인 1966년에 무려 12.4%라는 놀라운 경제 성장률을 달성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한일 국교 정상화의 결과물이었다. 이를 통해 제1차 5개년 계획을 연평균 8.5%로 초과 달성했고,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목표를 2년 앞당겨 1969년에 초과 달성한 것이다.
17. 경제적 자립위해 '산업의 쌀'인 철강산업을 육성시켜 세계적 규모의 철강업체 기반을 다짐
- 1968년에 포항제철이 설립되어 1973년부터 조업을 시작한 이후, 한국 경제 발전과 중화학공업의 근간을 이루며 포스코는 세계적 규모의 철강업체로 발전했다. 포항제철이 건설되기 이전, 우리의 철강 산업은 거의 전무한 상태였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자립 경제를 달성하기 위해 제일 먼저 '산업의 쌀'인 철강산업의 육성에 강한 의욕을 보였다.
이는 1965년 존슨 미국 대통령과 정상 회담을 위해 미국을 방문하면서 피츠버그 철강공업지대를 시찰하고, 미국의 제철소 건설 기술 용역회사인 코퍼스의 포어 회장을 만나 사업 실현에 필요한 외자를 조달하기 위해 국제 제철차관단을 구성할 것을 제의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1966년 12월, 미국의 코퍼스를 중심으로 5개국 8개사가 참여하는 대한국제제철차관단(KISA : Korea International Steel Associates)이 정식으로 발족했다. 그러나 1968년 세계은행(IBRD)은 한국의 종합제철 사업이 시기상조라는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한국의 제철소 건설 계획에 찬물을 끼얹었고, KISA도 차관도입에 난색을 표함으로써 자금 조달이 불가능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대통령은 포항제철을 강하게 추진하면서 결국에는 지금과 같은 세계적인 규모의 철강업체를 만드는 데에 기반을 닦았다. 이 세계적인 포항제철은 박정희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서 시작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제철산업의 적임자를 찾던 중 박태준을 떠올렸고, 즉시 그를 청와대에 불러 포항제철소 건설을 부탁했다.
박태준도 부담이 되서 여러 차례 거부를 했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포기하지 않고 끝내 박태준이 포항제철을 건설하도록 설득했다. 그리고는 원래 KISA가 한국에 조강 능력 60만 톤 규모의 제철소를 1972년 9월까지 완공하며 300만 톤까지 철강을 생산할 수 있도록 설계하기로 했다.
또한 건설 자금은 총 1억 3,070만 2,000달러이며, 그중 외자는 무려 9,570만 2,000달러, 내자는 3,500만 달러였는데 외자 지급이 거부된 것이다. 하지만 이 자금은 바로 한일협정 청구비용에서 충당하게 되었고, 포항제철 건설은 국제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 경제기획원은 전담반까지 설치하면서 포항제철 건설을 지원했다.
이렇게 1970년 4월 1일 착공식이 거행되었고, 드디어 포항종합제철의 1기 용광로 공사가 완공되어 점화로에 불을 붙였다. 쇳물이 나오기까지 21시간이 걸렸고, 마침내 나오기 시작했다. 이것이 대한민국 한반도 포항에서 최초의 쇳물이 쏟아진 것이었다. 이 포항제철은 일관제철소 설비를 가동시킨 지 단 1년 만에 그동안 투입된 외국자본을 모조리 갚고도 남는 40억 원의 흑자를 기록했다.
박정희의 전적인 지원과 격려, 그리고 박태준의 강력한 리더십에 의해 포항제철은 선진국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무사히 준공되어 전 세계를 놀라게 했던 것이다. 이후 포항제철은 지금까지 한 번도 적자를 낸 적 없는 국가의 중요 수출산업으로 성장했다. 조강 생산능력은 세계 1, 2위를 다투는 등 국가 발전의 최고 핵심산업으로 발전했다.
이것은 그야말로 박정희 대통령과 박태준이라는 포항제철을 건설한 CEO의 위대한 합작품이었던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강한 결단력과 포항제철 창업단의 불도저와 같은 리더십, 포항제철은 이러한 긍정적인 사고가 밑바탕이 되어 이제는 세계 굴지의 제철공장이 되었다. 포항제철의 성공은 단순하게 포항제철의 성공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포항제철은 국내의 철강산업을 선도하면서 한국경제를 선두에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한 것이다.
18. 2001년~2012년까지 세계 1위를 놓치지 않았던 대표적인 조선산업의 기반을 다짐
- 1970년대 중화학공업의 성패를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 사업이 조선소 건설이었다. 조선소 건설은 돈도 기술도 없이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는 격이었다. 외국에 나가 손을 벌리니 돈을 빌려주겠다는 곳이 없었고, 정주영을 박정희가 거의 강제적으로 해외로 보냈다. 그 이후 청와대로 다시 돌아와 박정희 대통령과 의논을 한 뒤 조선사업은 시작되었다.
영국, 미국, 일본, 러시아 등 이들 국가들은 한결같이 군사강국인데다가 일자리 걱정을 하지 않았다. 특히 해양산업이 발달한 나라들이었다. 그에 비해서 우리나라는 울산 단지가 들어서고 일자리와 국민 총소득은 조금씩 늘어났지만 여전히 농사를 짓는 인구가 대부분이었고 거지는 넘쳐났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러한 대한민국의 현실을 보고 조선산업을 결심했다. 그는 이 산업만 성공한다면 자주국방도, 일자리 창출도 모두 해결될 것이라고 봤다. 그리고 이 조선산업을 통해 자연히 기계와 자연산업이 발달할 것이라고 보았다. 이런 대규모 산업은 정부 관료의 힘만으로는 부족했는데, 경제기획원 장관인 김학렬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정주영을 추천했다.
정주영은 조선산업을 위해 해외로 나가 기술 제휴와 차관 도입에 나섰으나 미국, 일본, 캐나다 등의 회사는 냉담하게 그를 돌려보냈고, 이에 포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포기한다면 국가사업에 있어 현대건설에게 도움을 주지 않겠다는 배수진을 치게 하여 정주영은 계속 시도하였고, 드디어 영국에서 차관을 빌려왔다.
4,300만 달러의 어마어마한 차관을 빌려 한국으로 돌아가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조선산업을 시작하기에 이른다. 그 결과, 조선소를 완공했고 리바노스가 발주한 26만 톤급 유조선 두 척을 건조했다. 한국 땅에서는 처음으로 세계적인 대형 유조선을 만든 것이었다. 오늘날 세계 1위 조선국이 된 것도 모두 박정희 대통령의 집념과 정주영의 추진력이 결합되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즉, 2001년부터 2012년까지 무려 11년을 대한민국이 조선산업에서 세계 1위를 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19. '공업입국' 신호탄인 공업단지를 조성, 경공업·중화학공업을 통한 경제개발의 기틀을 다짐
- 1962년 2월 3일, 울산에 공업단지 기공식이 열렸다. 이 공업단지 기공식은 '공업입국'의 신호탄이었다. 군복을 입은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울산공업단지를 혁명공약(경제개발)의 아이콘으로 내세웠다. 이 울산공업단지의 조성은 박정희에게는 경제개발의 거의 최초의 시도이자 계획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울산공업지구 설정 및 기공식을 가지기 이전에 이미 1962년 1월 27일에 울산을 중화학공업 우수 자연적 입지조건으로 결정하여 공포한 바가 있었다. 그리고 이후에 이 울산에는 여러 화학, 석유와 관련된 중화학공업이 실제로 시행되었다. 1960년대 초반에는 고작 생사 270만 달러를 수출했던 데 비해, 1970년에는 섬유류 수출이 3억 4,110만 달러나 되었다.
1960년대에는 노동집약적인 경공업 수출이 섬유류, 합판, 가발 등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수출을 증진하기 위해 대규모 공단이 조성되었다. 그 이후 1965년 3월 12일에는 구로공업단지의 기공식이 있었다. 또한 1967년 4월 20일에는 요소비료를 연간 33만 톤 규모로 생산하는 한국비료가 준공되었고, 1964년 5월 7일에는 울산정유공장 준공식이 있었다.
울산공업단지는 급속하게 성장했고 한국산업화의 중심지로 변모해갔다. 이후 이 울산공업단지에는 중화학공업에 속하는 현대자동차 공장이 1968년부터 가동에 들어갔고, 1972년에는 현대미포조선소가 준공됐다. 울산이 공업단지로 선정되면서 변변한 항만시설도 없는 곳에 기계와 시설자재를 실은 대형선박들의 왕래가 부쩍 잦아졌다.
당시 울산은 인구 8만 5000명 정도의 전형적인 농어촌에 불과했다. 하지만 1962년 1월 15일에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했고, 울산이라는 농어촌을 대한민국 최초의 공업도시로 만든 것이었다. 이후 우리 나라에서 석유화학제품이 생산되기 시작한 것은 1966년 카바이드법에 의하여 폴리염화비닐(PVC)을 생산해 낸 것을 그 효시로 한다.
우리 나라에서 본격적으로 석유화학공업이 시작된 것은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정부가 석유화학공업단지 건설을 추진하기 시작한 이후부터이다. 1964년 대한석유공사의 정유공장 가동으로 원료인 나프타의 국내 공급이 가능하게 되었으며,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기간중 섬유·플라스틱·타이어·세제 등 석유화학산업으로부터 원료를 제공받는 산업들이 개발됨에 따라 석유화학단지 건설의 필요성이 높아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업스트림 부문은 대한석유공사를, 다운스트림 부문은 충주비료를 주축으로 하여 1968년 3월 울산석유화학단지 건설이 추진되었다. 1970년에 대한석유공사가 울산정유공장 내에 석유화학의 방향족계 원료인 BTX(벤젠·톨루엔·크실렌)공장을 건설·가동하기 시작하였고, 1972년 10월에는 에틸렌 기준 연간 10만 톤 생산규모의 나프타 분해공장 및 9개 계열공장이 완전 가동되었다.
이로써 국내 석유화학공업은 대량생산으로 본격적인 자립의 터전을 마련하게 되었으며, 기초 유분에서 최종 제품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생산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공업단지의 신호탄으로 경공업을 하던 공업단지에서 이제는 더 나아가 중화학공업이라는 한층 성장된 공업단지가 되어 경제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하게 된 것이었다.
20. 서민들의 원활한 도로교통을 위해 서울지하철 1호선 개통
- 1968년에 원활한 도로교통을 위해 서울전차가 폐지되었다. 이후 서울로 이주해 온 도시 노동자들에게는 대량 수송이 가능한 대중교통이 하나 사라지게 되었는데, 결국 대한민국 철도청이 지하철에 대해 연구하였으나 다른 과제로 인해 묻혀버렸고, 당시 서울특별시장 윤치영과 김현옥에 의해 최초의 지하철 건설이 시작되었다.
예전에 철도청장을 지냈었던 양택식이 김현옥 후임으로 부임하면서 재임중에 지하철을 건설하겠다고 하였으나 김학렬 당시 경제부총리의 반대에 부딪혔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결국 지하철을 건설하겠다는 양택식의 편을 들어주었고, 일본과의 기술 제휴를 통해 지하철을 건설하겠다고 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서울지하철은 1호선이 1971년 4월 12일 착공해 3년 4개월 만인 1974년 광복절에 개통했다. 거리는 서울역~청량리로 7.8km 길이였다. 당시에는 서울역이 서울역앞역으로, 시청역은 시청앞역으로 불렸으며, 동묘앞역은 만들어지지도 않았던 때였다. 1971년에 일본에서 들여온 외자 94억원과 국내자금 240억원을 투입하였다.
대한민국 최초의 지하철이지만 일본의 기술협력과 엔 차관이 결합하여 논란이 되기는 했지만, 이 지하철 개통은 새로운 주거지역이 개발되고, 또 대단위 주택단지가 건설되고, 또 도시기능이 분산이라는 막대한 경제적 효과를 창출하고 있다.
21. 세계에서 1위를 지키고 있는 대한민국의 효자산업인 반도체 전자공업의 기반을 다짐
- 역사적으로 농경시대에는 농사를 짓는 기술이, 산업사회에서는 기계기술과 전자기술이 생존 수단이었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 시대가 바로 우리나라가 최초로 산업사회로 들어서는 시기였다. 바로 그 시기에, 박정희 대통령은 철강, 조선, 자동차, 반도체 등의 기간산업을 정부 주도형으로 기획하고 육성하였다.
중화학공업이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육성되던 시기인 1974년 1월에 한국반도체는 설립되었다. 국내 유수의 오퍼상인 켐코(KEMCO)가 기술집약적인 웨이퍼 가공 생산을 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 회사가 바로 이건희 눈에 띄었다. 1973년에는 오일 쇼크가 닥쳐 큰 폭풍에 휩싸였는데, 이건희는 한국은 부가가치가 높은 첨단 하이테크산업으로 진출해야 한다는 확신을 가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1974년에 한국반도체라는 회사가 파산에 직면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던 것이다. 30대 초반이었던 이건희는 아버지에게 한국반도체를 인수하자고 건의했지만 이병철 회장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건희는 물러서지 않았고, 결국 아버지의 도움을 받지 않고 뛰어들었다.
하지만 이병철도 반도체에 관심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1977년에 한국반도체를 인수했는데, 언젠가는 반도체사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병철은 이후 박정희 대통령을 찾아가 만났는데, 그는 "전자산업이 앞으로 한국을 먹여 살릴 산업이니 국가적으로 키워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박정희 대통령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바로 전자산업의 문을 열라는 지시를 내렸고, 일은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1970년대 중화학 공업 정책을 육성할 때 반도체는 당시에 최초로 국내에 도입되어서 연구가 시작되었다. 시제품을 만들고 본격적으로 제품을 내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였지만, 연구개발은 1970년대에 박정희 대통령의 승인과 적극적인 지원을 통해 기업체에서 시작되었다. 메모리형 반도체 산업육성정책을 연탄을 찍어내는 일, 또는 쌀농사를 짓는 것과 같다라고 보았던 것이다.
1980년~1990년대 반도체, 휴대전화기로 옮겨가게 된 것은 바로 1960~1970년대 수출드라이브 정책과 수출지향산업화 전략이 결실을 거둔 것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처음에는 수출을 확대했고, 이후 중공업, 선박, 화학, 자동차, 반도체, 소비재 전자제품에 집중적으로 투자를 하여 경공업과 중화학공업을 동시에 이룬 것이었다.
그 결과, 현재 삼성그룹 전자계열사 제품을 국내 외 유통, 국내 반도체 유통부문에서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1위의 공급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우리나라의 반도체 분야 1위는 1992년에 삼성전자가 메모리 반도체 세계 1위에 오르고 나서 지속되고 있다.
22. 외세에 의존하지 않고 자주국방을 통한 철통같은 국가안보를 계획하여 실현시킴
- 박정희 대통령의 자주국방에 대한 뜻은 1968년 2월 7일 경남 하동에서 열린 경전선 개통식장에서 처음 직접적으로 강조되었다. 박정희는 자주국방을 내세우면서 대미외교를 강화하여 월남전 파병을 결단하고 국군현대화 지원을 얻어내면서 방위산업을 육성했다. 박정희 정부의 자주국방 노력은 중화학공업화 추진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중화학공업 육성계획은 1971년 말 구상되어 1973년 1월부터 공식적으로 개시되었다.
이 계획은 한국의 산업구조를 고도화시키려는 경제적 동기도 있었다. 하지만 박정희가 당시 한국의 경제력에 걸맞지 않게 때 이른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한 데에는 정치, 군사적 동기, 즉 한편으로는 북한의 군사적 위협에 대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닉슨 정부의 주한미군 감축에 대응해야 한다는 목적이 더 컸다.
다시 말해 박정희는 중화학공업화를 통해 방위산업을 육성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한국군의 현대화와 자주국방을 달성해 북한의 위협과 주한미군 감축에 대비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자주국방 추진의 관건은 국방비 확보였다. 그 당시까지 한국의 국방비는 대개 경상비를 충당할 정도의 수준이었으며, 한국군의 전력강화는 미국의 군사원조에 주로 의존했다.
그런데 미국의 군사원조는 1973년을 기점으로 급속히 줄기 시작해 1977년경에는 거의 없어지게 되었다. 이에 박정희 정부는 미국이 주한미군 감축 대가로 1971년부터 5년 동안 한국군 현대화를 위해 제공하기로 한 15억 달러의 군사원주와 1975년부터 걷기 시작한 방위세를 재원으로 하여 강력한 자주국방 노력을 전개했다.
국방부에서는 1974년에 '전력 증강 8개년 계획'을 입안하였으며, 박정희 대통령은 이를 율곡계획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율곡계획은 남북 간의 전력 비교가 50대 100이라는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전차, 야포, 함정, 잠수함, 전투기 등의 국산화와 외부 조달을 계획하고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전력증강 8개년 계획으로 소총, 미사일, 전차 등이 국산화 되었고 해상, 해중 전력을 강화했다. 획기적인 자주국방태세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한국 정부는 1976년 예산부터 국방비를 배증하기 시작해 이후 3년 동안 해마다 크게 증가시켰다. 그 결과 1979년 국방비는 국민총생산(GNP)에서 차지하는 비중 면에서는 북한보다 작지만 액수로는 북한을 앞지르게 되었다. 한국은 이러한 국방비를 가지고 미국으로부터 현대식 무기, 예컨대 미사일과 전투기, 군함 등을 사들이는 한편 중화학공업화를 통해 육성된 방위산업을 토대로 하여 무기의 국산화에도 박차를 가했다.
박정희의 자주국방 프로젝트에서 가장 야심에 찬 것은 핵무기 개발 시도였다. 1971년 닉슨이 주한미군을 감축하고, 중국과 관계를 개선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박정희의 안보에 대한 불안감은 고조되었다. 그는 사태의 진전에 따라 남한이 홀로 북한과 대결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이러한 안보적 불안감은 그로 하여금 핵무기 개발에 대한 유혹을 느끼게 했다.
그에게 있어 군사적 자립은 핵무기 자립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그는 미국의 핵우산을 신뢰하지 못하게 되었고, 남한 내에 수 백 개의 미국 핵무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핵폭탄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박정희는 대통령 직속기관으로 '국방과학연구소'를 설립했고, 산하에 '무기개발위원회'라는 비밀기관도 두었다.
그는 우선 프랑스와 접촉하여 핵무기의 원료인 플루토늄 제조용 재처리 시설 확보에 주력했다. 그는 미국과 캐나다에서 활동 중인 한국인 핵과학자들을 은밀히 포섭하는 한편 핵무기 개발에 필요한 장비와 소재들을 몰래 구입하기 시작했다. 1971년 주한미군 철수 이후 박정희는 핵개발을 포함하여 적극적인 자주국방정책을 추진했는데, 이 역시 미국의 정책과 배치되는 것이었다.
6.25전쟁 이후로 북한군 전차보다 뛰어난 성능을 지닌 전차의 보유는 우리 육군의 숙원이었다. 1976년 초 박정희 대통령은 청와대를 방문한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에게 ‘국산 전차 개발’에 매진해 줄 것을 당부했다. 이것을 계기로 현대중공업이 미제 M-48A1 전차 개량사업에 착수했고, 이후 현대로템(당시 현대정공)이 1987년 7월부터 K-1 전차(88전차)를 본격 생산하게 된다. 이어 1996년 미국과 기술협력을 통해 120mm 활강포를 장착하고 특수장갑을 채용한 K-1A1 전차를 개발하기에 이른다.
K-1A1 전차 개발을 계기로 우리나라는 독자모델의 전차를 생산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리고 2008년, 국방과학연구소(ADD)와 함께 현대로템은 독일의 레오파드, 프랑스의 르끌레르, 미국의 에이브람스 전차와 동급 또는 그 이상으로 평가받고 있는 K-2 전차 개발에 성공했다.
이외에도 1974년 12월, 1단 무유도(無誘導)로켓 '홍릉1호'가 창공을 갈랐다. 1978년 9월 26일엔 '백곰'이 충남 서산군 안흥 앞바다 목표에 명중했다. '백곰'뿐 아니라 대전차로켓 6발, 다연장로켓 구룡 56발, 중거리 무유도로켓 황룡 4발 등도 이어 실험에 성공하고 헬기, 대포, 탄약, 장갑차, 함정, 레이다, 미사일을 생산 및 항공기산업과 특수전차개발에 착수하여 자주국방의 효시를 놓는다.
23. 독립한 140여개 국가들 중 유일하게 과학진흥계획을 수립, 세계적인 과학국가 기반을 조성
- 박정희 대통령의 과학에 대한 관심은 유별났다. 1962년 1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착수한 데 이어 4개월 뒤인 그해 5월 제1차 과학기술진흥 5개년 계획을 수립했다. 또 박 정희 대통령의 과학기술 육성 정책은 1966년의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설립, 1967년의 과학기술처 발족, 과학기술진흥법 제정, 1971년의 한국과학기술원(KAIST) 설립 등으로 이어졌다.
KIST의 파격적인 인사제도는 고급 두뇌를 영입해 한국 과학기술사에 분기점이 되는 굵직굵직한 연구성과를 내놓았다. 특히 한국의 근대화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키워드가 바로 박정희 대통령이 수립, 시행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다. 경제개발 계획과 함께 시작된 국가적 차원의 과학기술 개발 로드맵인 과학기술진흥 5개년 계획은 경제개발 계획의 뿌리로서 기획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과학적 지식을 요하는 포병장교에 있었기 때문에 먹고 살기도 힘들었던 그 시절에 과학의 중요성을 이미 파악했다. 그리고는 과학을 발전시키기 위해 과학입국에 열을 올렸다. 박정희 대통령의 간곡한 요청에 따라 해외에서 혁혁한 성과를 내던 유능한 과학 인재들이 한국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은 과학의 중요성을 일찍히 깨닫고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을 설립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이 없었다면 이후에 대덕연구소, 전자통신연구소, 국방과학연구소 등도 없었다.
당시 KIST 박사들의 대우는 박정희 대통령보다 월급을 더 많이 받았을 정도였다.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기술이 필요하고 산업화가 필요하단 걸 절실히 느꼈었던 것이다. 그만큼 박정희 대통령의 직접적인 대우와 격려에 과학을 발전시키고자 많은 박사들은 자신들을 희생했다. 3~4년 사이에 귀국한 18명 중 4명이 스트레스 때문에 암으로 사망하기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 시절 이미 과학과 기술이야말로 경제 발전의 근간이 될 것이라 예견하고 있었다. 총 4회에 걸쳐 1981년까지 진행된 기술진흥 계획 속에서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수많은 근간들이 탄생하고 꽃을 피웠다. 1945년 2차 대전 후에 독립한 140여개 국가들 중 기술진흥 5개년 계획을 수립, 시행한 것은 대한민국이 최초라고 할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과학기술을 발전시키기 위해 필요한 확고한 리더십 원칙이 있었다. 첫째, 나라의 발전을 견인하기 위한 과학기술은 기능, 기술, 과학이 모두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했고 둘째, 이들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필요한 자본과 시설이 마련되어야 함을 알았으며 셋째, 이들을 이끌고 나갈 인재를 양성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필요함을 알았다.
1961년 대한민국의 국민소득은 79달러로 세계 최빈국 중 하나였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의 과학과 경제 개발이 초석이 돼 대한민국은 과학경쟁력 세계 3위, 기술경쟁력 세계 14위, 과학 인프라 세계 3위(2009년 기준)로 성장했다. 이러한 박정희 대통령의 공헌에 과학기술계 원로들은 박정희과학기술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기념관 건립 사업을 주도하고 있는 박원훈 KIST 연우회장(한국과학기술한림원 총괄부원장)은 "기념관 건립은 단지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향수 때문이 아니다. 과학기술의 중요성에 대한 한 국가지도자의 정확한 인식이 얼마나 국가발전에 기여했는지, 이공계를 기피하는 현 세태에서 살아있는 교육 현장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며 설립의도를 밝혔다.
24. 지금의 대한민국을 위해 헌신한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숭고한 기념사업을 정부주도로 추진
- 박정희 대통령은 조국에 대한 헌신을 했던 위인들을 기리고자 과거에 애국을 했던 분들과 관련된 많은 투자를 하여 사업을 진행시켰다. 아산시 백암리 일대는 이순신 장군의 옛집, 사당 등이 있는 곳인데, 1966년부터 1974년까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로 성역화사업이 행해졌다. 충무공 현충사 관리소는 성역화 작업이 진행 중이던 1968년 12월 31일 설립됐다.
소장 1명 아래에 서무과와 관리과를 두고 있으며, 이순신 묘계를 관할하기 위해 음봉분소를 두고 있다. 이렇게 박정희 대통령은 1974년에 이곳을 성역화하고 종합적인 조경공사를 하여 오늘의 경관을 갖추도록 하였다. 또한 충무공인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광화문에 지금까지도 굳건히 자리를 잡고 있다.
이 이순신 장군의 동상은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만들어졌는데, 이순신 장군 성역화작업과 함께 추진되었다. 동상은 1968년 4월 27일에 착공 7개월만에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금일봉으로 건립된 20M에 달하는 국내 최대규모의 동상이다. 일본의 기운이 너비 100m나 되는 뻥 뚫린 길을 타고 밀려 들어올 것을 걱정한다는 여론을 보고 받은 박정희 대통령이 "일본인들이 가장 무서워할 인물의 동상을 세우라!"고 지시한 것이다.
강감찬 장군도 역시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되면서 1971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애국조상건립위원회'를 만들어 전국 각 시, 군마다 위인의 동상을 세워 정신을 본받도록 지시하면서 수원의 팔달산에 자리를 잡게 됐다. 또한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에서 왜구 20만에 맞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송상현부사의 사당도 만들었다.
또한 안중근 의사 기념관도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1970년에 만들어졌다. 특히나 재정이 어려워 기념관을 준공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박정희 대통령의 귀에 들어가면서 정부 지원을 지시해 기념관을 준공하게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안 의사를 위해 남산 주변을 성역화하라고 지시해 추진위까지 만들어졌는데, 갑자기 김재규에 의해 시해를 당하면서 무산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안중근기념관'을 정부 지원으로 준공케 한 뒤 숭모회로 하여금 지난 79년 9월 안중근 의사 탄생 100돌을 기념해 안중근 기념관 정문 앞에 자신이 쓴 '민족정기(民族正氣)의 전당(殿堂)'이란 친필 기념비를 세우게 했다. 1979년 당시 숭모회 회장으로 있던 이은상과 박정희는 "안중근 의사의 위격(位格)을 이 충무공과 동격으로 높이는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기로 했었다.
이를 위해 청와대 정무수석 고건, 문공부장관 김성진, 서울시장 정상천 등으로 '안중근 의사 성역화 사업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정부와 숭모회는 성역화 장소를 두고 이견을 보이기도 했다. 정부는 강남지역의 국유지 10만평에 성역화를 건설하기로 한 반면, 숭모회는 남산공원 부지 1만평에 성역화 건설을 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이는 등 입장 차이를 보이다가 10.26 사태로 인해 성역화 추진이 무산됐다.
이외에도 미국에서 서거한 이승만 박사를 모셔다가 국립묘지에 안장하고 그를 기렸으며, 조선의 고종의 아들 영친왕이 일본에서 고생하자 모셔다가 이방자 여사와 덕헤옹주와 함께 창덕궁에서 지낼 수 있도록 배려를 해주었다. 또한 독립유공자들 유해를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했는데, 대표적으로 이봉창 의사가 있다. 1963년 10월 7일에는 동학혁명 기념탑 제막식도 가졌다.
25. 국민에게 '우리도 할 수 있다', '하면 된다'라는 긍정적인 리더십을 통해 자신감을 심어줌
- 박정희 대통령의 주요 슬로건은 3개로 요약할 수 있다.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와 '하면 된다', '우리도 할 수 있다'가 바로 그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러한 슬로건을 통해 경제적 리더십을 내세워 수천 년을 이어온 후진국의 사슬을 끊고 '한강의 기적'이라는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성장을 이룩해냈다.
사회, 경제적인 기반 없이 민주주의의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을 감안하면 박정희 대통령의 노력과 업적은 역사적 안목에서 보았을 때 민주주의 발전의 초석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하면 된다'라는 슬로건이 지금까지도 한국군대의 슬로건이기도 하다.
이러한 슬로건은 전체적인 영역, 즉 당시의 사회와 경제, 정치적인 측면 등 모든 측면에 그대로 적용이 되어 일종의 윤활유와 같은 중요한 역할을 해냈다. 한국에서는 사업이라든가 프로젝트를 만들 때 해서는 안 되는 말이 '못한다'라는 부정적인 말이다. 한국인들은 빈말이라도 '할 수 있다', 혹은 '문제없다', 혹은 '괜찮다' 등 긍정적인 말을 습관적으로 하게 된다.
바로 이러한 정신이 바로 박정희 대통령 시절부터 머리에 박혔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일본인은 확실한 것이 아니면 '모르겠다'라거나 '잘 못할지도 모른다'라는 소극적인 대답을 하는 것에 반해서 말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창학 정신이 어떻게 보면 30~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대한민국 국민의 정신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며 박혀있는 것이다.
50여 년 전 세계 최빈국에 희망이 없던 시절, 그 누구도 감히 꿈꾸지 못하였던 선진 조국의 비전을 가지고 '하면 된다', '할 수 있다', '우리도 한번 잘 살아 보자'라는 굳은 신념을 가진 박정희라는 한 가난한 나라의 뜻있는 지도자가 대한민국에 지금까지도 그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심리학에서도 '플라시보 효과'라고 의학 성분이 전혀 없는 약이라도 환자의 심리적인 믿음을 통해 치료 효과가 나타나는 현상이 이미 증명된 바가 있다. 즉,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도 그렇다고 믿거나 굳은 신념을 가지고 나아간다면 실제로 그렇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 효과를 박정희 대통령은 이미 30~40년 이전에 알고 있었고, 그 효과를 국민에게 전달했던 것이다.
26. 현재 세계적인 강남스타일의 중심지인 한강이남 개발, 즉 강남일대를 개발하는 사업을 실시
- 현재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지역인 강남, 현재 싸이의 '강남스타일'로 비단 우리나라에서만이 아니라, 세계적인 지역으로 우뚝 솟았다. 하지만 1970년대에 사람들은 그곳을 강남보다는 '영동'이라고 더 많이 불렀다. 영동은 영등포의 동쪽이라 붙여진 이름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명칭은 차츰 사라져 자취를 감췄다.
박정희 정부는 저곡가 정책을 통해 도시화를 진행시키고, 산업 용지를 적극적으로 개발 및 공급하였다. 1960년대의 강남 개발은 이러한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1963년 지금의 강남 지역이 서울에 편입됐다. 1966년 김현옥 당시 서울시장은 서울 기본도시계획을 통해 강남권 개발을 추진했다.
1967년 11월에는 경부고속도로 건설 계획이 완료됐고 강남 일대 900만 평이 토지계획지구(영동지구)로 지정됐다. 그러나 당시 북한보다 1인당 국민생산이 뒤쳐진 상태여서 개발자금이 부족했고, 정부는 체비지(개발 비용 충당을 위한 판매용 토지) 사업을 통해 자금을 충당했다.
강병기 전 국토계획학회 회장에 따르면, 당시 강남의 사유지 소유자들은 부가가치를 위해 당시 허허벌판이었던 강남 땅에 학교, 공원 등의 시설을 짓고, 그 대금으로 토지를 공공용지로 바쳤다. 이들 중 일부는 체비지로 설정되어 재산가들에게 팔렸고, 이렇게 모인 자금으로 경부고속도로 등 도시기반시설 사업이 진행됐다.
체비지가 매각되지 않으면 개발자금이 모이지 않고 개발이 진행되지 않기에, 정부는 적극적으로 체비지 매각에 힘썼다. 그 결과 경부고속도로로 수용된 토지를 중심으로 집값이 가파르게 상승했다. 말을 먹이고 쉬어가던 거리라는 뜻의 말죽거리가 그 대명사다. 1966년 초 평당 200원에 불과했던 말죽거리의 가격은 순식간에 2~3천원으로 수직상승했고, 68년 말에는 평당 6천 원에 이르렀다.
박정희 정부는 강남 개발을 촉진하기 위해 1973년 영동지구를 개발촉진지구로 지정했다. 이 과정인 72년에 제정된 <특별지구 개발에 관한 임시조치법>에 따르면, 개발촉진지구에 땅을 구입해 주택 등을 지으면 이후 부동산 판매시 1967년에 제정한 투기억제세를 면제해 주었으며, 기타 재산세, 면허세, 도시계획세 등을 면제해 줬다.
강북 지역의 신규 유흥 시설 등의 설립을 금지하는 반면, 영동지구에는 허용했다. 당시 인구 희소지역이었던 강남을 관통하는 지하철 2호선을 개통하였고, 경기고, 경기여고, 휘문고, 서울고 등 전통의 명문 고등학교를 강남 지역으로 옮겼다. 1976년에는 고속버스터미널을 강남으로 이전했다. 또한 1974년에는 330만 평 부지에 25만 인구를 수용한다는 잠실 뉴타운 계획을 수립했다.
이러한 정책에 따라 1973년 5만 명에 불과했던 영동지구의 인구는 1978년 21만 명으로 급성장할 수 있었다. 강남구 학동(현 논현동)의 경우, 1970년 평당 2천 원에 불과했던 지가가 1~2년 사이에 10배가 뛰었다. 1974년에는 8만원까지 뛰었고, 이는 3년 만에 다시 두 배가 됐다. 79년에는 평당 40만원에 이르게 된다. 1963~1979년 동안 압구정동의 지가는 875배, 신사동의 지가는 1000배 상승했다. 이렇게 강남은 급속도로 발전을 했으며, 이후에 '강남스타일' 노래로 인해 한반도는 물론이고 세계의 중심이 되었다.
27. 전국에 있는 호국문화유산과 같은 우리나라의 중요한 문화재들을 발굴하고 정비
-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나라의 역사적으로 중요한 문화유산에 대한 관리에 신경을 썼는데, 1970년대 초에 사적 제502호인 불국사 청운교 및 백운교도 복원공사를 하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박정희 대통령은 1971년 7월 정소영 경제 제1수석비서관을 단장으로 하는 경주관광개발계획단을 구성였다.
이는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를 세계적인 관광지로 개발하도록 한 것이었고, 이 시기에 석굴암을 재보수하고 광화문을 재건했다. 1973년 7월 3일에 불국사 복원불사 회향식이 열렸는데, 이날 준공 행사에 참여하여 30여분간 새로 단장된 불이문, 대웅전, 회량, 무설전, 다보탑, 석가탑 등 경내를 둘러보았다.
또한 이외에도 화성을 복원했는데, 박정희 대통령은 화성 복원 의지로 1975년부터 시작한 수원 화성복원 공사에 예산 32억원(현재가치 1조원)을 들여서 수원시와 경기도가 중심이 되어 5년이라는 긴 시간의 노력 끝에 화성의 본래 모습으로 복원시켰다. 또한
이외에도 남대문 중수 공사를 준공했으며, 동대문 개축도 준공하였다. 문화재보수 5개년 계획을 수립했으며, 팔의사 창의탑을 준공했다.
또한 해인사 팔만대장경 판고 신축 및 보수를 했으며, 무형문화재와 기능 및 예능보유자 인정 전승사업을 시작했다. 석가탑 사리함에서 세계 최고 목판 인쇄 다라니경문이 발견되기도 했으며, 국립중앙박물관을 착공하고, 밀양 영남루를 보수, 서울 문묘 보수, 부여 정림사지 정비, 법주사 대웅전 보수, 종합민족문화센터를 기공했으며, 국립묘지정화사업 현충탄 건립과 문화재보호법 제정을 공포하는 등 무수히 많은 일들이 진행되었다.
사실, 당시의 모든 구호와 정책의 초점은 식량증산에 맞추어져 있었다. 먹고 살기도 바빴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즉, 문화는 정책 추진의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나라의 호국문화유산에 관심을 가지고 당시 수원성이라 불렀던 우리 역사의 자랑을 완벽하게 복원시켰다. 이외에도 현재 존재하는 대다수의 문화재가 박정희 대통령 때 복원되었다.
1970년대 초반에 박정희 대통령이 전국의 모든 문화유산을 조사하고, 그것을 가지고 문화재 관리행정의 체계를 잡으라는 지시를 통해 우리나라의 모든 문화유적을 조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쳐 지금 문화재관리청의 모든 관리행정의 기본을 이루고 있는 것이 바로 '전국 유적 총람(全國遺蹟總覽)'이다.
28. 야간중학 개설, 중학입시시험 폐지, 고교평준화와 같은 현대식 교육체계의 기반을 조성
- 1963년 8월 8일 국사교육 통일방안을 선포하였다. 1968년에 학자들을 초빙하여 국민교육헌장을 제정 반포하게 하여 새로운 시대를 여는 바람직한 한국인상, 국적 있는 교육의 전개를 강조하였고 이는 국민교육화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정치의 최우선 과제를 교육에 두었으며, 과학기술교육의 진흥을 목적으로 실업계학교 장려와 1973년부터 대덕연구단지 조성사업을 추진하였다.
1978년에는 한국정신문화 연구원을 설립하여 한국학 및 한국문화 연구의 본산을 조성하였다. 그런가 하면 1964년 1월 4일 시도 단위 교육자치제를 실시하여 시도 교육청에 교육행정권을 위임하기도 했다. 1968년 7월 15일 71년까지 중학입시시험을 폐지하는 등 입시개혁안을 발표한 반면, 10월 14일 대학교 입시 예비고사제를 69년부터 실시하게 하였다.
또한 국공립중학교증설 7개년 계획과 고등학교기관확충계획을 추진하였고, 1969년 11월에는 공장 근로자들을 위한 금성사 등 7개 대기업체에 회사 내에 이공계 실업학교 부설을 지시하였다. 1976년 5월 20일에는 국비 장학생을 선발하여 유학보내는 제도를 신설하였고, 1976년 7월에는 일반 영세 기업체들이 산집해 있는 공단 근로자를 위해 야간중학 개설을 지시하였다.
이외에도 1969년 장기종합교육계획시안을 마련했고, 1971년 2월 19일에는 국민윤리도 교과로 신설되었다. 또한 종합교육센터도 기공되었으며, 교육용 한자 1,781자를 선정하여 발표했다. 체육고를 신설하기로 결정했으며, 고교평준화 작업과 산업체 근로청소년의 교육을 위한 특별학급 설치를 기준령으로 의결했다.
29. 오일쇼크가 발생하자 이를 타개하기 위해 실리적으로 중동국가와 교류, '중동 특수'를 누림
-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박정희 정권은 정치적으로는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경제적으로는 그때그때 나타난 기회들을 잘 활용하여 극복해냈다. 예컨대 베트남 특수에 이어 1970년대에는 '중동 특수'가 경제개발 개혁의 성공에 큰 기여를 했다. 이러한 중동에 대한 진출은 3번째 외환위기인 1973년 10월에 발생한 제1차 오일쇼크의 영향으로 적자규모가 1974년에는 최초로 두 자리 수인 20억 달러를 넘어서며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진행된 것이었다.
1973년은 한국과 중동사이의 본격적인 경제교류에 있어서 역사적인 전환점이 되었는데, 한국정부는 중동 각 산유국들로부터 석유를 수입하는 동시에 경제개발에 필요한 자본조달을 하기위해 중동의 건설시장으로 진출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73년 10월 제4차 아랍-이스라엘 전쟁은 무엇보다도 처음으로 오일쇼크를 일으켰고, 그에 따라 유가가 4배로 급등하면서 이들 아랍 산유국들은 엄청난 '오일달러'를 축척하게 되었다.
이러한 막대한 오일달러와 구매력을 가진 중동시장은 한국의 가장 매력적인 상품 및 건설시장의 대상이 되면서 이슬람세계에 대한 지역연구도 활발히 진행되었다. 이후 박정희 대통령은 이 위기를 극복하고자 기존에 친미, 친이스라엘 정책에서 전환하여 실이익을 추구하고자 이스라엘과 적대적인 중동의 아랍국과들과 교류를 하며 적극적으로 중동의 특수를 위한 계획을 추진했다. 즉, 1973년 12월15일에 이스라엘의 점령지 철수 등 4개항의 친 아랍성명을 발표했던 것이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은 국내기업들의 중동 진출을 적극 지원하고 또 권장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1973년 6월에 삼환기업이 사우디아라비아의 카이바, 알울라 간 고속도로 공사를 수주한 것을 비롯해서 토목, 건축 분야를 중심으로 중동 진출이 시작되었다. 특히 현대건설의 중동 진출은 괄목할 만했다. 현대건설은 1975년에 바레인의 아랍수리조선소 건설 수주를 시작으로, 1976년에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9억 3,000만 달러에 수주하는 개가를 올렸다.
현대건설은 1975년부터 1979년까지 중동에서 51억 달러가 넘는 외화를 벌어들였는데, 현대의 총매출 이익누계에서 해외건설이 60%를 차지할 정도였다. 또한 국가적 지원 속에서 중동 건설의 총 수주액은 1974년의 8,900만 달러에서 1975년에는 7억 5,100만 달러로 급격히 증가했고, 1977년에는 33억 8,700만 달러에 달했다.
이는 1975년에는 전체 건설 수출액의 93%, 1977년에는 96%를 차지하는 규모였다. 1975~1979년 사이에 중동 건설을 통해 벌어들인 외화 수입은 총 205억 700만 달러였는데, 이는 총 수출액의 40%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이를 발판으로 삼아 그동안 외화 보유에 어려움을 겪던 한국경제는 상당한 힘이 생기게 되었다.
30. 외국에 대한 적극적인 외교를 통해 한국의 존재를 세계에 각인시켜 동반자로서 입지를 구축
-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는 먹고 살기도 힘든 그 시절에 외국에 대한 적극적인 외교정책을 펼쳐 아군을 형성하고자 했다. 북한도 역시 그 시절에 아군을 만들고자 외교에 신경을 썼는데, 북한은 아프리카와 같은 곳에 막대한 자본을 투입하여 동반자로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현명한 방법을 통해 외교를 진행해 한국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박정희 대통령의 외교는 일본에서부터 시작하는데, 일본 이케다 수상과 1차 회담을 1961년 11월 11일 가져 한일 관계 전반에 대해 토의를 하고 이후 재산청구권과 평화선문제를 토의하기에 이른다. 또한 케네디 대통령과 공동성명을 발표하며 회담을 가졌고, 후임인 존슨 대통령과도 정상회담을 가졌다. 국제의회연맹(IPU)에도 가입했으며, 서독도 방문하여 뤼브게 대통령과 에르하르트 수상과 회담을 가지기도 했다.
독일을 통해서는 박정희 대통령이 막대한 차관을 들여와 재정 1,350만 달러와 상업 2,625만 달러를 얻어냈다. 말레시이아와 월남, 동남아순방을 통한 태국과 말레이시아, 자유중국과도 교류했다. 또한 공산권과도 교류를 추진했으며, 서울에서는 제1차 아시아 태평양지구 각료회의를 개최하기도 했다. 아시아민족반공연맹 제12차 총회가 서울에서 개막하기도 했으며, 국제통신위성기구에 56번째로 가입했다. 이외에도 에티오피아와 교류했다.
주목할 것은 1973년 12월 15일에 이스라엘 점령지 철수 등 4개항의 친 아랍성명을 발표하여 국익을 우선시하며 위기를 타개하고자 새롭고도 파격적인 외교를 시도했다는 것이며, 제3세계에 대한 외교활동도 역시 강화했다. 또한 아시아의원연맹 총회를 서울에서 개최하기도 했고, 이러한 결과로 1979년 11월 30일에는 수교 국가가 무려 117개국으로 증가하는 쾌거를 거두었다.
<참고자료>
<경제개발의 길목에서>, 남덕우(국민대학교에서 정치학,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로 졸업하고 미국 오클라호마 주립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국민대학교를 거쳐 서강대학교에서 강의하다 1969년 재무부 장관에 임명되면서 경제관료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이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대통령 경제담당 특별보좌관을 지내며 1970년대 개발경제의 주역으로 일했다. 제14대 국무총리로서 14여 년의 공직 생활을 마감하고 1983년부터는 한국무역협회 회장, 산학협동재단 이사장을 지내며 한국무역센터를 건설하는 등 ‘무역 한국’을 위해 고군분투해왔다. 한미경제협의회 회장, 태평양경제협력회의(PECC) 상임위원, 한국태평양경제협력위원회(KOPEC) 회장, 동아시아경제연구원(API) 회장, 동북아경제포럼 한국위원회 위원장, 동서문화센터(EWC) 이사, 세계무역센터협회(WTCA) 이사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일협력위원회 회장, 한국선진화포럼 이사장으로서 대한민국 경제의 영원한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다)
<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30년>, 강만수(서울대 법학을 전공했으며, 미국의 뉴욕대에서 경제학석사를 받았다. 1970년 행정고시를 통해 공직에 발을 디딘 후 재무부 보험국장, 이재국장, 국제금융국장, 세제실장, 주미대사관 재무관, 국회 재무전문위원, 관세청장, 통상산업부 차관, 재정경제부 차관으로 일했으며, 이후 한국무역협회 상근부회장을 역임했다. 주요 경제부처를 거치면서 때론 정책입안자로, 때론 정책결정자로 부가가치세부터 금융ㆍ부동산실명제, 보험ㆍ금융시장 개방에 이르기까지 한국경제의 중요 정책들이 도입, 시행되는 현장에 참여했고, 1997년 외환위기 때는 재정경제부 차관으로서 IMF지원자금 협상과 금융감독ㆍ중앙은행제도 개편 등 금융구조개혁을 위해 노력했다. 현재 디지털경제연구소 이사장으로, 연구와 함께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과학대통령 박정희와 리더십>, 김기형(초대 과학기술처 장관), 김상선(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사무총장), 김석준(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 원장), 김영섭(서울대 공과대학 객원교수), 금동화(전 KIST 원장), 나도선(한국엔지니어클럽 부회장, 전 한국과학문화재단 이사장), 노석균(영남대 교수, 과실련 공동대표), 박원훈(과학기술한림원 총괄부원장), 서정만(전 국립중앙과학관장), 임기철(대통령실 과학기술비서관), 전상근(전 경제기획원 기술관리국장, 전 과학기술처 종합기획실장), 정근모(전 과학기술처 장관), 정윤(한국과학창의재단 이사장, 전 과학기술부 차관), 최영환(전 한국과학문화재단, 과학기술처 장관), 최외출(영남대 교수, 박정희리더십연구원장), 홍재학(전 국방과학연구소 연구부장, 전 한국항공우주연구소장)
<스티브 잡스와 26인의 부자들(세계를 뒤흔든 27인의 부자들에게 배우는 돈 버는 기술)>, 이수광(대한민국 팩션의 대가로 1983년 <중앙일보>에 「바람이여 넋이여」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제14회 삼성문학상 소설 부문, 미스터리클럽 제2회 독자상, 제10회 한국추리문학 대상을 수상했다. 이수광은 오랫동안 조선시대 살인사건 기록에 남다른 관심을 기울여왔으며, 냄새가 물씬 풍기는 생생한 역사서를 집필해왔다. 오랫동안 방대한 자료를 섭렵하고 수많은 인터뷰를 하면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역사의 지혜를 책으로 보여주는 저술가로 유명하다. 우리나라에서 팩션형 역사서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는 베스트셀러 작가이다)
<CEO 역사에게 묻다>, 김경준(경영컨설팅 회사 딜로이트(Deloitte)의 전무로 일하는 경험을 바탕으로 개인과 회사를 위한 '경영코칭' 과 시대를 읽는 경영코드들을 제시하는 작가이다. 그의 주 분야는 장기전략 수립 및 구조조정을 통한 기업 경쟁력 회복인데, 쌍용투자증권의 애널리스트 업무, 쌍용경제연구소, 쌍용정보통신을 거치며 컨설팅 업무에 경력을 쌓아왔다. 또한 각종 신문과 잡지에 컬럼을 연재하고 있으며, MBC라디오 '손에 잡히는 경제' ‘글로벌 프리즘’ 코너, KBS1라디오 '시사플러스'‘안방 MBA’와 울산MBC '이광현의 시사매거진' ‘재미있는 글로벌컨설팅’으로 대중들에게 인지도를 알렸다)
<궁극의 문화기행(박물관을 통해 본 우리 문화사, 이색박물관 편)>, 이용재(명지대학교 건축과 대학원에서 건축평론을 전공했고 건축전문출판사를 설립했다. 이후 건축 잡지사 편집장, 건축 현장의 감리를 역임했다. 이후 인터넷에 건축 이야기를 연재하기 시작해 인터넷에 연재한 글을 모아『좋은 물은 향기가 없다』를 출간하였다. 두 번째 저서로『왜 이렇게 살기가 힘든거예요』를 출간, 공중파 방송을 비롯한 수십 개 언론에 조명을 받는다. 또『딸과 함께 떠나는 건축 여행』을 출간하여 6개월 만에 1만 권을 판매하고 교보문고에서 팬 사인회도 열었으며, ‘KBS TV 책을 말하다’에도 출연하였다)
<박정희>, 김성진(서울중학, 고려대학교 등에서 수학했다. 이후 한국일보와 동양통신에서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하여 동양통신 워싱턴 특파원 때 박정희 대통령의 방미를 현지 취재했으며 정치부장 겸 편집부국장을 거쳐 청와대 대변인, 문화공보부장관 등 요직에서 박 대통령을 9년 넘게 보좌했다. 유신시대에는 전통적 한미우호관계를 계속 돈독히 유지하고자 ‘한국미술 5천년 전시회’를 미국 전역의 주요 도시에서 순회·개최했다. 뉴욕 전시 때에는 특히 한미정상회담을 아울러 개최하려고 비밀리에 기획하고 있었으나 10.26유고사태로 결실을 보지 못했다)
<인문학 콘서트3>, 이어령(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56년 「한국일보」에 『우상의 파괴』를 발표, 문단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며 등장한 그는, 문학이 저항적 기능을 수행해야 함을 역설함으로써 '저항의 문학'을 기치로 한 전후 세대의 이론적 기수가 되었다. 20대의 젊은 나이에 파격적으로 「한국일보」 논설위원이 된 이래, 1972년부터 월간 「문학사상」의 주간을 맡을 때까지 「조선일보」 「한국일보」 「중앙일보」 「경향신문」 등 여러 신문의 논설위원을 역임하며 우리 시대의 논객으로 활약했다)
<박정희와 개발독재시대(5ㆍ16에서 10ㆍ26까지)>, 조희연(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사회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남가주대학교(USC)에서 한국학 객원교수와 영국 랑카스터대학교,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교(UBC)에서 교환교수를 지냈고, 비판사회학회장을 역임했다. 현재는 학술단체협의회 공동대표이며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겸 NGO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또한 성공회대학교 통합대학원장과 민주주의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20세기 이야기(1970년대,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김정형(성균관대 도서관학과를 졸업했다. 조선일보 편집국 조사부로 입사해 현재는 독자센터에 근무하고 있다. '역사 속의 오늘'이란 제목으로 조선일보(2002.12~2003.11)에 1년, 주간조선(2004.9~2006.8)에 2년 연재하고, CBS 라디오의 한 프로그램에서도 같은 이름으로 방송전파(2006.6~7)를 탔다. 월간지 뉴스메이커에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2010.1~2011.12) 제목으로 2년 동안 연재했다)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현대사>, 서중석(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서울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9년부터 1988년까지 동아일보사 기자로 재직했다. 역사문제연구소 소장, 일본교과서바로잡기운동본부 공동대표,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 위원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올바른 역사 정립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경제상식 충전소>, 최진기(고려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한림대학교 사회학과 대학원에서 수학했으며, 동부증권에서 근무했다. 입시학원인 메가스터디에서 사회탐구 영역을 강의하면서 전국 사회탐구 영역 점유율 1위를 기록했으며, 현재는 비타에듀 학원에서 그 명성과 기록을 이어가고 있다. 중앙대학교 행정대학원 외래 객원 교수, 한영회고·김포외고·명덕외고 논술특강 강사로 활동했다)
<지리 블로그(지구 환경 그리고 우리의 터전)>, 이민부(현 한국교원대학교 지리교육과 교수로 서울대학교 지리교육학과와 환경대학원을 졸업하고 미 유타대학교 지리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지형학회 편집위원장, 한국지역지리학회 부회장, 대한지리학회 홍보부장, 지리올림피아드 특별위원장, 대한지리학회 회장 및 육군사관학고 환경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상생의 경제학(더불어 성장하는 따뜻한 시장경제)>, 김선빈(공공정책실 수석연구원), 강성원(공공정책실 수석연구원), 김창욱(경영전략실 수석연구원), 박 준(공공정책실 수석연구원), 김갑수(공공정책실 수석연구원), 이동원(공공정책실 수석연구원), 채승병(경영전략실 수석연구원), 최희갑(아주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 한 준(연세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대한민국 리더십을 말한다(한국형 리더십의 미래)>, 최익용(중동고등학교와 국민대학교 행정학과를 졸업했다. 경희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석사학위, 세종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기무부대장, 연대장, 학군단장, 부사단장 등을 역임하고 육군 대령으로 전역했다. 군에 있는 동안 육군대학과 국방대학원을 졸업했다)
<박정희 일화에서 신화까지>, 김인만(동화작가로 지은책으로는 제3회 동쪽나라문학상 수상작인 장편동화 <날개없는 천사의 노래>(1995)와, 박정희 테마에세이집 <임자, 막걸리 한잔 하세>(2007) 등이 있다. 1946년 인천에서 태어나 건국대 축산과를 중퇴했고, 출판사에서 오랜 세월 책을 만들다가 전업작가의 길을 고행하고 있다)
<이병철 거대한 신화를 꿈꾸다(삼성 이병철 회장 탄생 100주년 기념작)>, 김찬웅(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영화 시나리오 작가와 홍보 업무 등을 거쳐 대기업 사보와 출판사 편집장으로 근무했다. 소설 쓰기를 좋아해 젊은 시절 몇 편의 소설을 발표한 바 있다. 현재는 출판기획자 겸 작가로 활동 중이다)
<한국기업을 살리는 9인의 경영학>, 이채윤(세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문학과 창작 잡지에 소설이 당선된 뒤부터 전업 작가의 길을 걷고 있다. 시민문학사 주간과 인터넷서점 BOOK365의 CEO를 역임했다. 다수의 저서와 역서를 출간했다)
<일본에게 절대 당하지 마라>, 호사카 유우지(동경대학 공학부를 졸업하고 1995년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석사를 졸업, 또 동대학원에서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박사를 졸업(정치학 박사)을 했다. 현재 세종대학교 일어일문학과 교수로 있다.)
<이야기로 읽는 대한민국 경제사>, 석혜원(서울대학교 소비자 아동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현재 메트로은행 서울지점 부지점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한국외교사와 국제정치학>, 하영선(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외교학과 교수이고 한국평화학회장이다. 서울대학교 국제문제연구소장과 미국학연구소장 등을 역임했다)
<이건희 스토리(생애와 리더십)>, 이경식(서울대 경영학과와 경희대 대학원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전문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논쟁으로 읽는 한국사2(근현대)>, 역사비평 편집위원회
<지역학의 현황과 과제>, 한국외대대학원지역학연구회
<WE CAN DO 박정희 리더십>, 박정희육영수연구원
<“박정희 前 대통령도 4대강 유역 개발사업 추진”>, 동훈 전 비서관 위클리공감 인터뷰 기사, 대한민국 정책포털 공감코리아
<<한일협정 문서공개>“굴욕회담 아닌 치열한 외교戰 결과”>, 최형두 기자, 문화일보 기사
<[정치] 박정희 vs 김대중·노무현 향수, 누가 더 진한가?>, 좌용철 기자, 제주의 소리 기사
<[시사토크 판] 안영옥 "KIST 설립은 박정희 대통령의 선견지명">, TV조선 인터뷰 영상
<[정치] 40년 전 박정희 향수가 김대중-노무현 눌렀다>, 김정호 기자, 제주의 소리 기사
<"안중근기념관의 박정희 친필은 역사의 수치">, 조호진 기자, 오마이뉴스 기사
<과외금지 세대 '계층 사다리' 많이 탔다>, 이진희 기자, 한국일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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