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단원 김홍도

영지니 2016. 7. 8. 12:28

金弘道 1745년 ~ 1806년


<군선도> (1776년), 국보 제139호, 호암미술관 소장


서당(書堂)


타작


기와 이기


어장


활쏘기(射弓)


무동


논갈이


빨래터


고누놀이


행상


장터길


자리짜기


점괘

점심


주막


대장간


담배 썰기


길쌈


나룻배


노상파안(路上破顔)


 

단원 김홍도 산수화


단원 김홍도(1745~1806)는 그 고유색 짙은 조선 독자 문화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탄생하여 문화의 최후를 장식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던 화가이다.

  그의 5대조는 守門將을 지냈고 고조부는 종6품의 벼슬 ,증조부가 종4품의 萬戶를 지낸 중인 가문의 출신이다.타고난 그림 재주로 말미암아 圖畵署 畵員이 되었던 인물이다.  그는 7~8세 되던 해에 그의 천재성이 인정되어 사대부 화가 강세황(姜世晃)에게   인정받아 그의 훈도 아래 詩文書畵를 익혔기 때문에 성리학적 소양을 어느 정도 몸에 지닐 수 있었다.이를 바탕으로 조선성리학을 사상 기반으로 하고 있던 진경시대 문화를 본질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던 듯 하다.   단원은 그림 재주를 하늘로부터 타고난 것이었기에 모든 화과(畵科)의 그림에 능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산수,인물,화조,사군자,누각 등을 다 잘하는데 특히 당시 생활상을 그려내는 풍속인물화에 뛰어난 솜씨를 보이었고 신선과 고승을 그리는 도석(道釋)화는 누구도 따라 올 수 없는 경지였다 한다.   그의 그림들을 자세히 보면 어느 화과의 그림이거나 간에 모든 그림에 조선 고유의 색을 짙게 드러난다는 공통성이 있다.  

 산수화는 왕명을 받들어 금강산과 동해안 명승지를 그렸다는 해산첩<海山帖>에서 볼 수 있듯이 겸재의 사생기법으로부터 연유한 서릿발 준법으로 바위산을 표현하되,현재나 표암 강세황이 명대 남종화 기법을 수용해 들이면서 그 영향으로 변형시킨 부드러운 붓만을 가미하여 굳세고 씩씩하던 겸재의 붓질과는 다른 느낌이 든다.   이런 온건한 필법은 아마 말기 문화가 공통적으로 나타내는 세련미라고 보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기 때문에 진경시대 후기를 대표하는 화가로  단원이 지목되었을 수도 있다.

 

 

청심대(靑心臺) 44歲.1788年   30.4*43.7cm 개인소장

 

  보통 금강사군첩 60폭으로 알려져 있는 진경산수 화첩이다.1첩당 12폭씩 묶어 5첩으로 나뉘어

있는데 오동나무판을 겉표지에[금강전도]라는 표제가 묵서되어 있을 뿐 서문이나 발문 제화시

등은 일체 없다.각 폭마다 해당 진경의 명칭이 역시 묵서되어 있는데 단원 글씨는 아니다.

이 명칭 끝에 '檀園' '弘道'라는 두 방의 방형백문 인장이 폭마다 찍혀 있으나 이 조악한 인장은

 후낙관으로 이그림을 손상시키는 작용을 하였다. 본래 이화첩은 단원이 정조의 어명을 받들어

관도지방의 해산승경을 사생해 온 '봉명도사첩'이라는 꼬리를 달고 다녔다.

 

 총석정(叢石亭) 44歲. 1788年(정조12)   각 30.4*43.7cm 개인소장

 

 보통 금강사군첩 60 폭으로 알려져 있는  진경산수 화첩이다.1첩당 12폭씩 묶어 5첩으로

나뉘어 있는데 오동나무판을 겉표지에[금강전도]라는 표제가 묵서되어 있을 뿐 서문이나

발문 제화시 등은 일체 없다.

각 폭마다 해당 진경의 명칭이 역시 묵서되어 있는데 단원 글씨는 아니다.이 명칭 끝에

 '檀園' '弘道'라는 두 방의 방형백문 인장이 폭마다 찍혀 있으나 이 조악한 인장은 후낙관

으로 이그림을 손상시키는 작용을 하였다. 본래 이화첩은 단원이 정조의 어명을 받들어

 관도지방의 해산승경을 사생해 온 '봉명도사첩'이라는 꼬리를 달고 다녔다.

 

 

고사인물도[故事人物圖]


무이귀도(武夷歸悼) 111.9*52.6cm  간송미술관 소장

 

  무이산계곡을 노 저어 돌아온다는 유람의 화제를 그린 작품이다.무이산은 중국의 복건성

건녕부 승안현  남쪽에 있는 산이다. 36봉과 37암의 기암절벽이 빼어나게 솟고 굽이쳐

 흐르는 아홉 구비의 계곡이 특히 유명하여 <무이구곡>의 칭이 있는 복건 제일의 명승이다.

 

오류귀장[五柳歸庄]


111.9*52.6cm 간송미술관소장
 

  오류선생[五柳先生]이 시골집으로 돌아온다는 은거의 이야기를 화제로 삼았다.

오류선생은 [귀거래사]의 명문으로 유명한 도연명(陶淵明)의 호이다. 

 물가에 강조된 버드나무 두 그루가 오류선생의 향장(鄕莊)임을 알려준다.

버드나무 앞으로 하인의 영접을 받으며 배를 탄 도연명이 막 돌아오고 있는데 ,

배 위에 책과 술병이 보이는 것은 그가 가장 좋아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물가의 준수한 바위 뒤로 도연명의 조촐한 초가집이 보인다.사립문에는 그의 부인과

아이들이 줄지어 선 채로 주인을 맞고 있다. 유난히 고절하게 솟아오른 바위와 소나무는

도연명의 절개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화면 왼쪽을 보면 '五柳歸庄'과 '丹邱'라 쓰여있다.

제관과 그림이 안정된 조화와 평온함을 연출하여 은거의 주제와 잘 어울린다.

  

 

포의풍류도[布衣風流圖]


27.9*37.0cm개인 소장

 

 화제 머리의 두인은 주문호로인으로 인문은 '종심'이며 관서 말미의 주문방인은 '김홍도'이다. 화제는 "종이창에 흙벽 바르고 이 몸 다 할 때까지 벼슬 없는 선비로서 시가나 읊조리며 살리라. 단원이라고 되어 있다.

" 글 중에 보이는 내용은 무언가 작가의 내심을 토로한 것처럼 여겨져서 ,혹 자전적인 요소를 담은 작품이 아닌가,곧 작중인물이 김홍도 자신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낳게 한다. 그림의 주인공은 당비파를 연주하고 있다.이 악기는 향비파와 달리 목이 심하게 꺽이고 줄이 넷이다. 지금은 그 연주법이 단절되었으나 김홍도 당시에는 거문고 만큼이나 아악 연주를 대표하는 점잖은 악기였다.

아무런 배경없이 주변에 늘어놓은 집기들은 지/필/묵/연 문방사우와 서책,골동 등이며,파초잎 옆에  붓을 놓은 것은 선비가 그 위에 시를 썼다가 그대로 버렸다는 맑은 고사를 연상케 한다. 모두 세상에 뜻을 두지 않겠다는 것을 상징한다. 또한 보검은 무예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맡에 두어 삿된 것을 멀리한다는  벽사의 뜻을 가진다. 이 작품은 모두 거리낌없이 단 한 번의 붓질로 망설임없이 그었다.작품에서 암시하고자 하는 경계가 필법에 그대로 내비취어 보인다.

 

 

송하취생도[松下吹笙圖]


109.0*55.0cm  고려대학교박물관소장

   김홍도의 도속인물 중에는 신선만을 크게 부각시켜 배경을 등한시하거나 전혀 그리지 않기도 하며 이 그림과 같이 배경 내에 신선을 나타내기도 한다.배경이라고 해도 신비경이 아니며 평범한 소재로 노송만을 대담하게 수직을 포치시켜 소탈하면서 조용하고 그윽한 장면을 보여준다. 노송을 한 중앙에 수직으로 내리 긋는 구도는 김홍도에 앞서 18C 대표적 문인화가 이인상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화면의 중앙부분은 노송줄기로 좌우로 여백이 많으며 조금 넓은 우측에 장식적인 효과마저 드는 이행의 제발이 있다. 소나무는 좌하단 모서리에서 시작하여 그 상부는 화면 밖으로 이어진다. 솔잎이 성근 늙은 줄기가 부각되어 신선과 함께  상징성을 부여한 듯하다. 편한 자세로 앉아 생황을 부는 신선의 의습선은 고른 필선으로 동적인 형태가 아니어서 소나무와 대조되어 더욱 걸 맞는다.

 

 

사녀도(仕女圖)


  37歲, 1781年  紙本淡彩    121.8*55cm簇子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배경없이 9분면(分面)의 사녀를 입상(立像)으로 오른쪽 상단 '신축사월사능위연파과주인작(辛丑四月士能爲煙波觀主人作)'의 간기(干紀)와 관지가 있는데 같은 해 김홍도는 정조어진(正祖御眞)을 모사(模寫)하기도 하는 등 한창 성가를 드날릴 때였다. 이미 신선이나 초상(肖像) 등 인물화에 있어서는 틀잡힌 격조를 이루었고 무르익은 상태였다.

 

 머리에 꽃을 꽂은 잠화사녀(簪花仕女)로서 정두서미법(釘頭鼠尾法)으로 그렸으며 조용하고 차분항 여인의 표현을 의식함인지 필선(筆線)이 비교적 고르며 묵색도 옅은 편이다. 세련된 용필은 주춤하거나 망설인 기색을 보이지 않는 유려한 백묘(白描) 기법을 바탕으로 해서 화면에서 튀지않는 담청(淡靑)과 담갈색(淡褐色)의 가채(加彩)가 도드라지며 단원이 추구했던 미인의 정형(定型)을 알려준다.

 

 화본풍(畵本風)이 역력한 여인의 얼굴은 의습의 빠르고 속도감있는 필선과는 구별된다. 이그림에서 가장 정성을 기울인 부분으로 이목구비를 그렸다. 머리올의 표현과 안면의 처리에 있어 부분적으로 보이는 홍조는 시선을 모은다.

     

     

    송하맹호도(松下猛虎圖)


       金弘道 畵虎   李寅文 畵松  絹本彩色     90.4*43.8cm.  호암미술관 소장

     

     좌하에 '士能'이라는 김홍도의 묵서가 있고 그 아래 주문방인 '金弘道印'과 백문방인 '士能'이있다. 좌상에는 '豹菴畵松'이라는 묵서와 백문방인 '姜世晃印'이 있는데 두 관서의 필치는 동일하다.  호랑이는 슬금슬금 걷다가 무언가가 의식된 듯 갑자기 정면을 향해 머리를 돌린 순간을 포착하여 그려졌다.

     

    이러한 자세는 조선시대 맹호도에 전형적인 것으로서, 호랑이의 백수지왕(百獸之王)다운 위엄이 정면을 향한 머리와 화폭을 가득 채운 포치에 의해 강조된 것이다. 호랑이는 극사실에 가까운 묘사로 육중한 괴량감이 느껴지는 동시에 민첩유연한 그 생태도 실감나게 표현되어 있다. 특히 잔붓으로 세밀하게 그려진 터럭과 한호의 특징인 얼룩무늬의 자연스러움은 놀랍다고 할 수밖에 없다

      

 

 

 

 

옥순봉도 (玉筍峯圖)

 

 

金弘道(1745∼1806?) , 朝鮮 1796年, 종이.水墨淡彩, 26.7×31.6, 寶物 782號

김홍도 만년의 대표작 『병진년화첩(丙辰年畵帖)』 중의 한 폭으로, 단양팔경(丹陽八景) 중 하나인 옥순봉(玉筍峯)을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을 그린 병진년(1796)은 김홍도가 정조(正 祖)의 초상화을 잘 그린 공로로 충청도 연풍의 현감(縣監)에 임명받아 1795년까지 재직한 직후이다. 이 시기에 김홍도는 사생(寫生)을 바탕으로 한 진경산수화에서 한차원 더 나아가 서정성이 두드러진 이상화된 현실세계를 표현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조어산수 (釣魚山水)


金弘道(1745∼1806?) , 朝鮮 1796年, 종이. 水墨淡彩, 26.7×31.6, 寶物 782號

 

김홍도는 40대 후반에 이르러 일상생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풍속이나, 인물, 화조의 소재를 산수배경 속에 그려내는 '사경산수(寫景山水)'의 경지를 보여주게 된다. 이 작품은 그러한 '사경산수'의 대표적인 예로 볼 수 있는데, 옆에 전시된 <옥순봉>과 함께 {병 진년화첩(丙辰年畵帖)}에 들어 있다. 한 사람이 삿갓 쓴 사람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무엇인 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그들 사이에 오가는 친밀한 감정이 화면 전체에서 느껴진다.

 

 

부상도 (負商圖)

 

金弘道(1745∼1806?), 朝鮮 18世紀 末∼19世紀 初, 종이.水墨淡彩, 27.0×38.5

 

김홍도의 풍속화는 일상적인 서민 생활의 단면을 흥미롭고 실감나게 표현하여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데, 이런 풍속화를 당대에는 보통 '속화(俗畵)'라고 불렀다. 무거운 봇짐을 지고 성벽 밑을 지나가는 두 사람을 묘사한 이 작품은 단원이 만년에 이룩한 시정 넘치는 풍속화 의 경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화면 왼쪽 위에 쓰여진 "단구(丹邱)"는 김홍도가 만년에 단원 (檀園)과 함께 즐겨 사용한 별호(別號)이다.

   

 단원도 


그림의 제목이 김홍도의 호를 사용한 것처럼 위의 그림은 단원 김홍도의 생활의 한 단면을 그려낸 것입니다. 자신의 집에서 그가 절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을 불러 놓고 김홍도는 거문고를 연주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 위에 적힌 시는 그의 친구가 지은 것이구요. 나무가 많은 집에서 친구들과 시를 읊고 악기를 연주하는 그의 풍류가 부럽게 느껴집니다. 조금만 더 여유를 부릴 수 있다면 이런 낭만도 가질 수 있지 않나 싶네요.  

 

 명경대
정선이 그린 금강산 그림과 비견되고 있는 김홍도의 금강산 그림인 명경대. 그 또한 금강산 관광 후에 이 그림을 그렸는 데요. 정선이 실제로 경치를 마주하고 나서 자신의 감정을 담아 그림을 그린 것에 비해 김홍도는 자신의 감상보다는 실제의 모습을 중시하여 그림을 그렸습니다. 과장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린 금강산은 실로 절경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죽서루


이 그림도 김홍도가 금강산을 그린 <금강사군첩> 중 한 장면입니다. 지도를 그린 것처럼 매우 정확하고 사실적으로 그려낸 것이 약간은 건조해 보이기도 합니다. 가로 43센티미터, 세로 30센티미터의 작은 그림이지만 찬찬히 들여다 보면 굽이쳐 흐르는 강물을 끼고 여유롭게 세워져 있는 죽서루의 모습이 결코 작지 않습니다.  작은 비단에 그려진 그림 속 풍경은 매우 넓고 깊습니다.

 

 봄맞아 지저귀는 까치


봄에 핀 복숭아꽃 주변에서 까치들이 모여 지저귀고 있는 모습입니다. 맑고 깨끗한 색과 선을 사용하여 여백의 공간을 충분히 살리고, 그리 많지 않은 수의 까치와 북숭아 나뭇가지들을 그려낸 것이 신선과도 같은 그의 심성을 잘 표현한 듯 합니다. 이 그림처럼 그의 마음 속에는 물욕이나 권력욕과 같은 무언가를 가득 채우기 보다는 적당히 비워 있었습니다
 

 

 

 

老年花似霧中看

 

 

사인암

 

도담삼봉

 

호취

  

기우도강도

 

경작도

 

묘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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