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전 사진들
수원 장안문(長安門) 수원 화성(華城)의 북문으로 정조 때 건축되었다. 서울의 남대문과 비슷한 형태지만 규모가 더 크고 바깥에 옹성을 갖추었다. 무지개문 위에 2층 누각을 올리고 양쪽 계단으로 오르게 했다.
수원 화홍문(華虹門) 수원 화성의 북쪽 수문으로 북수문(北水門)이라고도 불렀다. 7개의 석조 무지개로 수문을 만들고 수문 돌다리 위에 다시 처마 곡선이 유연한 문을 만들었다. 왼편 뒤쪽으로 장안문이 보인다. 주변의 자연풍광이 아름답다.
건릉(健陵) 경기도 화성군 안녕리에 있는 정조와 효의왕후 김씨(孝懿王后 金氏)의 합장릉. 홍살문 뒤에 제례를 치르는 정자각(丁字閣)이 있다. 정조가 승하한 직후에는 부친 사도세자(思悼世子) 묘인 현륭원(顯隆園 ; 현재의 융릉) 동쪽에 능을 만들었지만 훗날 왕후와 합장하며 서쪽으로 옮겨 건릉이 되었다.
수원의 서호(西湖) 화성의 서쪽에는 농업용 관개시설로 만든 인공호수 축만제(祝萬堤)가 있다. 서호라고도 하며 정조 때 축조됐다. 항미정(杭尾亭)이라는 정자가 이곳의 경관과 풍치를 돋보이게 했는데, 사진은 항미정에서 바라본 서호 풍경이다.
수원 남제(南堤)의 버드나무길 남제는 수원 남쪽에 있는 저수지로 순조대에 축조되었다. 이 곳의 긴 버드나무길은 남제장류(南堤長柳)라 하여 수원8경 가운데 하나였다. 소에 물건을 싣고 지나던 장정이 사진에 담겼다. 우산을 든 모습이 인상적이다.
인천 부두 배에 실을 물건과 부린 물건이 즐비하게 쌓여있다.
개성 관아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은 조선시대에 개성부가 되어 유수(留守)가 파견되었다. 1906년 개성군으로 격하되었다가 1930년 다시 개성부로 환원되었다. 문루는 이층으로 위층엔 마루를, 아래층엔 4각으로 다듬은 돌기둥을 놓았다.
개성 선죽교 고려 말 정몽주(鄭夢周)가 피살된 곳으로 알려진 개성의 돌다리. 앞에 보이는 비각에는 정몽주의 사적을 새긴 비석이 있다. 아직도 정몽주의 혈흔이 남아 있다고 전해지는 다리 옆 시내에서 아낙들이 빨래를 하고 있다.
공산성에서 바라본 금강 공주 공산성(公山城) 쌍수정(雙樹亭)에서 금강을 내려다본 풍경. 인조는 이괄(李适)의 난을 피해 이곳에 잠시 머문 적이 있는데, 쌍수정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영조대에 세워졌다는 정자다.
충주 관아 비석 조선시대 관아 근처에는 전임 수령을 기리는 비석이 많았다. 대개는 수령들의 치적과 무관하게 만들어지곤 했다고 한다. 사진 전면의 비석에 새겨진 희미한 글귀로 보아 어느 현감의 ‘불망비(不忘碑)’였음을 알 수 있다.
함흥 남대문 함흥성의 정문으로 남화문(南華門)이라고도 불린 2층 누각. 왼쪽에 보이는 종각의 범종은 현종 때 주조된 것이라고 한다. 오가는 사람이 많고 상점이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함흥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함흥 향교 조선 초기에 현유(賢儒) 배향과 지방민의 교육 및 교화를 위해 창건되었다. 유생들이 모여 있는 누각이 제월루(霽月樓)다. 대성전과 명륜당 등 여러 건물이 들어서 있다.
회령 시가지 회령은 함경북도 국경지역으로 조선 후기부터 청국과 무역을 하던 곳이다. 두만강 연안의 이 도시는 탄광 덕분에 빠르게 발전했다.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지형의 회령 시가지에 소달구지들이 분주히 오간다. 오른쪽 산 중턱에 성문이 보인다. 전선줄이 하늘을 가른다.
배로 두만강을 건너는 풍경 두만강을 건너면 간도(間島)다. 많은 한국인이 궁핍한 생활을 벗어나기 위해 두만강을 건너 간도지방으로 이주했다. 두만강을 건너는 배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일본 관헌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흘러간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행주산성 주변 (0) | 2008.03.19 |
---|---|
70 여 년 전에 찍은 광개토대왕비 (0) | 2008.03.19 |
한국일보 특종사진 50년 (0) | 2008.03.04 |
중국 상하이에 있는 항일운동 유적지 (0) | 2008.03.04 |
UN 사무총장 직인 (0) | 2008.03.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