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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락서원-여헌 장현광 향사

영지니 2008. 1. 20. 18:06

 

 

  동락서원 전경

 

 

 

  遵道門 편액

 

 

 

  준도문

 

 

 

  동재 근집재 편액

 

 

 

 

 

  서재 允懷齋  

 

 

 

 

 

  중정당(강당) 정면에 걸린 동락서원 편액   克菴 이기윤 성주군 월항면 巖浦 本京山

 

 

 

  중정당

 

 

 

 

 

  중정당 오른편 복두꺼비 바위가 경덕묘를 향하고 있다.

 

 

 

  경덕묘

 

 

 

 

 

  여헌 영정

 

 

  여헌 선생이 직접사용하였던 유품들

 

 

  여헌신도비 우의정 미수허목(眉叟 許穆: 1595~1682)撰 . 우부승지 조덕린書

 

 

  어디를 가보나 비슷한 우리의 현실인데 본 신도비도 ...

  비신과 이수 그리고 비좌는 초대형인데도 비각은

 매우 협소하니 답답하기가 그지없다.

  지금부터라도 좀 신축이나 개보수때 고려하였으면하는 바램이다.

 

 

  천연대 바위

 

 

 

 

 

  동락서원앞 수령380여년의 은행나무

 

동락서원     경북 구미시 임수동 373      
이 서원은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1637)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조선 효종 6년(1665) 제자들이 건립한 건물이다.
숙종(肅宗) 2년(1676)에 사액서원이 되었다.

고종(高宗) 8년(1871)에 철폐되었다가 1932년(임신) 廟宇를 중건하고 영정을 봉안하였으며,

1971년 6棟을 복구하였다.

 

원내(院內)에는 출입문인 준도문(遵道門). 근집재(槿執齋). 윤회재(允懷齋). 중정당(中正堂).

경덕묘(景德廟), 신도비각(神道碑閣).고사(庫舍) 등의 건물이 있다.

동락이란 동방(東方)의 이락(伊洛)이란 뜻이라고 한다. 

여헌 선생의 영정과 유품인 가죽신, 삿갓, 우의대, 대지팡이 등이 보존되어온다.

 

 

 

1576년(선조 9) 재사(才士)로 천거되었고,

1595년 유성룡(柳成龍)의 천거로 보은현감을 지냈다.

그 뒤 형조좌랑·순천군수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광해군 때 합천군수, 인조 때 지평·집의·

이조참판·대사헌·지중추부사 등에 20여 차례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학문에 전념했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이 진압된 후 부름을 받아

인조에게 정치에 대한 건의를 했고,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각 주·군에 격문을 보내

근왕(勤王)의 군사를 일으켰다.

이듬해 삼전도에서의 항복 소식을 듣고

동해안의 입암산에 들어가 6개월 후에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