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성(醫聖) 허준(許浚)과 동양 최고의 의학서(醫學書) 동의보감(東醫寶鑑)

우리 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읽히고 있는 책은 무엇일까?
지금으로부터 4백년전 간행되어 지금까지 읽히고 있는 책이 있다.
출판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까지도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3국에서 널리 읽히고 있는 책...
바로 구암(龜岩) 허준(許浚)이 지은 동의보감(東醫寶鑑)이다.
동의보감은 오늘날에도 한방에선 거의 교과서처럼 쓰이는 의학서이다.
아마도 우리 역사에서 이렇게 거듭해서 간행되고,
또 이렇게 오랫동안 계속해서 읽히는 책은 흔치 않을 것이다.
그야말로 우리 역사상 최고의 베스트셀러이자 오늘날까지 사랑받는 그야말로 스테디셀러인 것이다.
그런데 동의보감은 출판 초기부터 동양 3국에 대단한 인기를 얻었다.
그보다 훨씬 우리에게 한의학을 전수했던 중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자존심을 아랑곳하지 않고
구해가려고 애썼을 정도였다. 과연 동의보감은 어떤 책일까?
지난 1995년 11월 24일에 중국의 장쩌민 국가 주석이 한국을 국빈방문했다.
이날 국회 연설에서 장쩌민 주석은 한국과 중국 두 나라간의
오랜 우호관계를 예로 들면서 인사말을 시작했다.
장 주석 "우리 양국 인민은 2천여년 전부터 왕래 시작~ 17세기 편집된 동의보감도
우리 양국 문화교류사에서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뜻밖이었다.
장 주석이 2천년에 걸친 한국과 중국의 우호역사의 예로 든 것중의 하나가 바로 동의보감이었던 것이다.
허준의 동의보감은 1613년에 출간됐다.
그후 중국 사신들은 조선에 오면 으레껏 동의보감을 챙겨가곤 했다.
지금까지 중국에서만도 20여차례에 걸쳐 간행됐을 정도로, 동의보감은 중국에서 큰 인기를 누렸다.
박지원의 열하일기엔 당시 동의보감의 인기를 볼수 있는 내용이 실려있다.
중국에 사신으로 갔던 박지원은,
동의보감의 가격이 너무 비싸 책을 사지 못하고 단지 서문만을 베껴 올수밖에 없었다고 적고 있다.
그때 박지원이 베껴온 것이, 1763년 중국에서 처음 간행된 중국판 동의보감의 서문이었다.
동의보감을 보급하는 것은 천하의 보배를 나누어 갖는 것이라고 극찬하는 내용이다.
그 뒤 최근 상해에서 발간된 상해본이다.
동의보감은 이렇게 근래 들어서도 일본, 중국에서 계속해서 발간되고 있다.
당시 대단한 인기를 끌었던 동의보감은 지금까지도 동양의 세 나라에서 한의학의 고전으로 꼽히고 있다.
그것은 과연 무엇 때문일까.
동의보감은 전체 스물다섯권이 한질로 돼있다.
그런데 무엇보다 그 스물다섯권의 쳬계가 놀랍도록 일목요연하다.
먼저 동의보감은 내경, 외형, 잡병, 탕액, 침구 등 크게 5개의 편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전의 의서들에선 발견할수 없는 아주 독창적인 방법이었다.
전체 25권 중에서
목차가 2권이나 되는 동의보감.
5개의 큰 분류아래,
다시 부위별로 항과 목을 달고
그 아래 각각의 질병에 따른 처방을 싣고 있다.
'예) 외형편의 복항 복통치방 7
* 배가 아픈 환자의 경우 /
일단 외형편,
그리고 다시 복항을 찾으면 된다.'
이렇게 사전식으로 된 동의보감은, 언제든 손쉽게 질병에 대한 처방법을 찾을수가 있다.
당시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 일본에서 크게 인기를 얻은 이유중 하나가 바로 이런 실용성 때문이었다.
이런 편리함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4백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한의학(韓醫學)의 골격을 이루며 영향을 미치고 있는 동의보감,
동의보감의 독특한 편제는 편찬당시 이미 중국과 일본에서 다투어 발행되며 세계성을 얻었던 것이다.
이렇게 동의보감은 당시의 동양의학 전체를 간편하게 종합해 정리한 의학 백과사전이다.
무엇보다 당시까지 동양의학을 주도하고 있던 중국을 훨씬 능가하는 획기적인 결과물이었다.
때문에 중국에선 "동의보감은 백성을 보호해주는 신선의 경전이요,
의사들의 비법을 담은 문서"라고 극찬했을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20세기 들어서는 독일에서도 번역출판 됐고 영역본도 간행됐다.
그 우수성을 대변하는 것이겠다. 그런 동의보감의 저자 허준은 당대 최고의 의사였다.
그리고 인체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허준은 인체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는 의사였다는 것을 알수있다.
또 허준의 동의보감엔 상당한 수준의 외과적인 치료술들도 담겨 있다.
허준은 과연 인체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었을까?
허준은 인체를 잘 알고 있었다.
동의보감의 첫 페이지에 나오는 신형 장부도. 인체의 장기와 각각의 특징을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는 이 인체도는 물론 해부도이다.
동의보감을 더 깊이 들어가 보면, 허준은 몸안의 오장육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장기에 대한 묘사는 거의 정확하며 해부를 하지 않고는 알수 없는 부분도 적지 않다.
위는 명치와 배꼽 사이에 있다.
인두에서 위까지의 길이가 1자6치이고 늘어나면 길이가 2자6치다.
음식물은 3말 5되가 들어갈수 있다고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매달린 박같이 생겼다고 묘사한 쓸개에 대한 관찰은,
현대의학에 비추어봐도 놀라운 경지를 보여준다.
김병운 한의사 "허준은 현대 과학으로도 명확한 내용 싣고...
쓸개 담낭이 간에서 담즘을 만들어 쓸개에 고였다가 분비된다는 내용은
당시 누구도 말하지 않은 부분이다."
동의보감에 그려져 있는 그림들은 나무 목각으로 거칠게 찍혔지만 내용은 비교적 섬세하다.
세세하게 묘사된 장기들의 위치며 숫자, 모양새는 놀랍도록 정교하고 정확한 편이다.
이렇듯 허준의 신형장부도는 현대의 인채도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그만큼 허준이 인체 내부를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동원 경희대 교수 "허준은 몸에 대한 관심이 다른 사람보다 컸다~
이제까지 보다 몸 부위에 대한 해부적인 모습이라든가 신체적인 특성을 다른 사람보다 월등히 강조"
동의보감엔 외과술도 상세히 나와있다
탕약을 짓고, 침이나 놓을 것 같은 한방 의학서라는 고정관념을 크게 깨뜨리는 부분이다.
그 한 예로 복부가 파열됐을 때 수술하는 법인 장두상지법.
"뱃가죽 파열로 장이 밖으로 나왔을 때,
삼이나 상백피로 실을 만들어 화예석을 바르고 봉합한다."
요즘같은 시대에도 큰 수술에 해당하는 외과 처치법이다.
동의보감에 따르면, 외과적인 봉합을 할 땐 뽕나무 껍질로 만든 상백피실을 쓰며,
큰 수술의 경우엔 초오산으로 마취를 시킨다.
초오산은 진통제 마취제 효과를 낸다.
극약에 가까울만큼 독성이 강한 약재인 초오와 다른 약재들을 섞어 마취제인 초오산을 만드는 것이다.
수술을 끝낸 후엔 소금물을 복용시켜 깨어나게 했다.
근대 서양의학이 도입되기까진, 모든 외과수술은 한방에서 담당해야만 했다.
임진왜란 등 전쟁을 겪으면서 수많은 사상자를 치료해야 했고 그에 따라 조선의 외과술도 발전했다.
결국 허준도 이런 속에서 인체에 관한 상당한 수준의 지식과 외과술을 익혔을 가능성이 크다.
이처럼 허준은 당시 인체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고 보인다.
그런데 바로 그런 허준의 뒤엔 대단한 스승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오래전부터 구전돼온 허준 설화엔 제자에게 자신의 몸을 해부하도록 내준
허준의 스승에 관한 감동적인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허준은 그런 스승의 시신을 해부해봄으로써, 마침내 의학적인 완성을 이룬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당시는 엄격한 유교사회였다.
그런 우리의 전통의식에 비추어보면 당시로선 사람의 몸을 해부한다는 것은 생각할수도 없는 일이었다.
과연 허준은 당시 우리 사회의 윤리의식이나 정서에 상관없이 스승을 해부할수 있었을까?
아무리 의학적인 대의와 제자를 위해 살신성인하는 스승의 큰 뜻이라곤 하지만,
제자 된 도리로 허준은 과연 스승을 해부할수 있었을까?
서구에서 근대적 의미의 해부학이 처음 시도된 것은 (16세기) 이탈리아에서였다.
그러나 당시 서양에서도 해부를 한 사람은 악마로 취급했다.
해부술을 의학적 성과로 쳐 준 것은 아주 근세로 들어서의 일이다.
동양의 해부학은 먼저 중국에서 시작됐다
가장 일반적인 의학 입문서로, 1575년 쓰여진 의학입문에도 인체내부를 그린 장부도가 그려져 있다.
중국 최고의 고서인 황제내경에도 해부에 관한 기록이 보일뿐만 아니라,
중국에선 10세기 전반에 이미 부분별 장기의 모습을 그린 인체도들이 선보이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해부기록이 나오는 건 이익의 성호사설. "시신을 세번 해부한 후에
의술이 정통해 졌다"하는 전유형의 해부기록이 보인다.
참판벼슬까지 올랐던 전유형은 우리나라 최초의 해부학자인 셈이다.
이렇게 당시 조선의 경우 임진왜란을 전후해, 개별적으로 인체 해부에 관한 연구 성과들이 축적됐던 것이다.
임진왜란때 일본인들이 가져갔다고 하는 조선의 동인은 그 시기 조선의 의학수준을 대변한다.
해부는 아니지만 인체의 경락과 기, 혈의 흐름을 표시하고 있는데, 상당히 높은 수준에 이르고 있다.
70년 후에 만들어진 일본의 동인..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게 만들어져 있다. 그
러나 역시 인체 해부와는 무관하다.
조선의 것이든, 일본의 것이든 이 동인들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것은 인체 내부에 있는 장기의 모습들을 보이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바로 동양에서 생각하는 인체의 원리를 담고 있는 것이다.
몸을 정과 기, 그리고 신의 결합체로 보는 동양의학.
기의 흐름을 중요하게 생각한 동양의학의 몸을 표현한 것이다.
당시 동양 사람들이 생각한 인체는 정기신을 담은 그릇.
허준이 그린 신형장부도역시 서양해부도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실제로 허준의 신형장부도엔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기관들도 묘사돼 있다.
삼초는 3군데의 가상적인 신체기관일 뿐이다.
조선에서 해부는 금기시 되는 일이었다.
임진왜란때 해부를 했던 전유형은 이괄의 난에 연루되어 사형을 당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가 시신을 해부해 천벌을 받은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사람들의 인체해부에 대한 정서를 부분적이나마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런 조선에서 허준은 과연 해부를 할수 있었을까. 게다가 유학적 소양이 높았던 허준이 과연 스승을 해부 했을까.
허준이 그린 신형장부도는 동의보감보다 30여년 앞서서 출간된 중국의 의학입문,
그리고 유성룡이 편찬한 침경요결의 장부도와 닮아있다.
지금까지 허준이 해부를 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결국, 당시 조선의 유교적인 정서와 상황을 종합해보면
허준이 실제로 스승의 시신을 해부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할수 있다.
또 동의보감 앞에 실은 허준의 인체도는,
허준이 직접 해부를 해보고 그렸다기 보단 문헌 등을 통해 전해진 당시의 해부학 지식을 인용했다고 보는
편이 역사적 사실에 가깝다고 볼수 있다.
결국, 허준이 스승을 해부했다는 이야기는 명의 허준에 관한 이야기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설화적인 살이 붙었을 가능성이 훨씬 크다고 볼수 있다.
그렇다면 허준에게 자신의 몸을 내줬다고 전해지는 허준의 스승 유의태...
그를 추적해보면 허준 이야기에 대한 어떤 실마리를 찾을수 있진 않을까?
허준에게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하는 그의 스승을 살펴보면 모든 것이 좀더 확실해질 것이다.
자, 그러면 허준과 그 스승의 이야기가 전설로 남아있는 얼음골 일대에서 다시 시작해 보자.
스승 유의태가 허준에게 몸을 내줬다는 전설이 남아있는 이곳 밀양 얼음골.
이 일대엔 약초가 많아 허준이 자주 다녀가곤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곳 천황사는 옛부터 치병을 기원하는 절로 유명했다.
그런데 그 옛날 이 절의 주지가 허준의 스승 유의태와 친했다고 한다.
이렇게 이 일대엔 허준과 그의 스승에 관한 이야기가 전설로 전해진다.
허준의 스승 유의태를 찾아서, 유의태의 활동무대였다고 하는 경상도 산청으로 향했다.
과연 허준의 스승이라고 알려진 유의태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먼저 유씨 가문을 찾아갔다.
그들이 보여주는 유씨 족보엔 허준의 할아버지 허혼의 이름이 보인다.
우연히도 이곳은 허준의 할머니인 진주 유씨의 친정가문이었다.
하지만 탐사단은 유씨 족보에서 허준의 스승이라고 알려진 유의태의 흔적을 찾을수 없었다.
결국, 탐사단은 이 가문 어디에서도 유의태의 흔적을 찾아내지 못했다.
허준의 스승 유의태는 과연 있는 것일까. 실제 인물이 아니라 전설속에 만들어진 가공의 인물은 아닐까.
그런데, 같은 경상남도 산청에서 비슷한 이름이 하나 있었다.
이름은 유이태. 죽어가는 사람도 살린다고 소문이 날만큼 이름이 높았다는 산청의 명의 유이태였다.
유의태와 경상도식 발음조차 비슷한 유이태.
이 집안 사람들은, 자신들의 10대조 할아버지 유이태가 바로 허준의 스승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는 분명 실존했던 인물로 대대로 후손들이 무덤을 돌봐오고 있었다.
유이태는 본래 거창사람이었다. 이곳 산청으로 옮겨와 터를 잡았고 이름을 날렸다고 전해진다. 그
의 의술은 멀리 조정에까지 알려져 임금이 그를 부를 만큼 이름을 떨치기도 했다.
그러나 국왕의 부름을 받고도 가지 않아 처벌하라는 논란이 일기도 했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전해온다.
그만큼 의술의 경지도 높았던 명의 유이태... 그가 바로 허준의 스승일까.
지금까지 알려져 있는 허준의 스승은 경상도 산청의 유의태...
그런데 경상도 땅에는 천하 명의 유이태가 살고 있었다.
조정의 부름을 거부하며 백성들을 진료한 명의 유이태는
중국천자의 병을 낫게했다는 전설을 만들어낸 대단한 의사였다.
그러나, 경상도 산청의 유이태는 조선 숙종 때 사람이다.
허준보다 100여년 뒤의 사람으로 허준의 스승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허준에 관한 이야기는 확실한 것이 없을까?
그가 언제 태어났고 몇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는가 하는 기본적인 사실조차도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조선최고의 의학자, 의성으로까지 추앙받았던 그에 관한 알고 있는 대부분은 전설이나 소설적인 이야기이다. 역사에서 허준이 소외받은 이유가 뭔지,
진정한 그의 모습은 어떤 것인지 역사속에서 명의 허준에 관해 찾아보도록 하겠다.
역사에 기록조차 제대로 남아있지 않은 허준...
1991년 이전까지만 해도 허준의 무덤이 어디있는지, 실제 존재하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런데 1991년 민통선 안에서 발견된 허준의 무덤은 문인석은 쓰러져 뒹굴고,
무덤은 형체도 알아보기 어려웠다. 무덤은 파헤쳐져 푹 꺼진 상태였다.
누구도 알아볼수 없게 묻혀버린 기억속에서 세상으로 그를 끌어내려는 발굴이 시작됐다.
10년동안 허준의 흔적을 찾아 헤맨 한 역사학자의 노력 덕분이었다.
허준의 실체가 수백년만에 다시 세상으로 그렇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다시피 한 실정이다.
그나마 알려져 있는 것들도 정확하지 않다.
심지어 묘비에 적힌 허준의 출생연도 조차도 의문스럽다.
그는 1547년 생이 아닐 가능성이 더 높다.
허준의 출생연도를 확인할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소장하고 있는 진주박물관,
임진왜란 관련 자료들속에서 탐사단은 어렵게 단서 하나를 찾아냈다.
이 그림은 1604년 공신들의 모임을 그린 것이다.
허준은 임진왜란때 선조를 모시고 의주까지 피난을 갔었고
그 공으로 호송공신에 칭해졌고 때문에 허준도 이 자리에 참석했다.
그림 한쪽 옆엔 공신들의 인적사항이 적혀 있다. 물론 허준의 이름도 들어있다.
그런데 허준은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7년이나 빠른 기해생으로 나와 있다.
그렇다면 허준은 1539년에 출생하여 1615년에 7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는 말이 된다.
왜 이렇게 허준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다시피 한 걸까?
족보에도 그에 관한 기록은 부실하기만 하다.
정1품 당상관, 최고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허준. 그러나 허준은 족보에조차 번듯하지 못한 서자였다.
적서의 차별이 심한 조선사회에서 주로 중인들이 종사하는 기술직이었던 의원은
허준이 선택할수 있는 최선의 한 길이었는지도 모른다.
허준에 관한 공식적인 기록이 처음으로 보이는 것은 한 유학자의 개인 일기.
선조 때 이조참판까지 지냈던 미암 유희춘이 11년간에 걸쳐서 쓴 친필일기다.
1567년부터 쓰여진 이 미암일기엔 허준의 방문기록을 포함해 그나마 허준에 관한 기록들이 숨어있다.
2월 20일 허준이 왔다 1568년 내용이다. 그리고 허준은 이 한해동안 두달에 한번꼴로 유희춘을 방문한다.
그리고 유희춘의 일기를 보면 허준은 꽤 자주 유희춘을 방문한다.
허준은, 외삼촌인 김시흡의 소개로 유희춘을 알게 됐다.
그리고 미암일기에 자주 등장할만큼 유희춘과는 특별한 관계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미암일기엔 또하나 중요한 사실이 기록돼 있다.
유희춘은 1569년, 이조판서 홍담에게 허준을 내의원에 천거해 주도록 부탁한다.
그리고 곧 허준은 내의원에 들어간다.
결국 허준은 지금까지 알려진 것처럼, 의과를 거쳐 내의원에 들어간 것이 아니었다.
허준은 젊은 시절부터 이미 전라도 지역의 심약,
즉 약을 수집해 중앙으로 올려보내는 역할을 할 정도로 의원으로써의 이름을 얻고 있었다.
또 서울의 양반들 사이에서도 의술이 뛰어나다는 칭송이 자자하던 차였다.
내의원에 들어가게 된 허준은 그야말로 '물 만난 고기'와도 같았다.
그것은 조선시대 왕실의료기관이었던 내의원은 당시 새로운 의학과 최고의 의술을
모두 접할수 있는 앞선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의원에 들어간 허준은 당대 최고의 의관이었던 양예수를 만난다.
역사적으로 의림촬요로 보면 허준의 진짜 스승이었을 가능성이 큰 인물이다.
궁중 내의원에서의 이런 만남들과 의학적 수련으로 허준의 의술은 깊어가고,
허준은 서서히 전면으로 등장한다.
선조를 모시고 피난을 다녀온 후로 허준은 실질적으로 선조의 어의가 된다.
특히 허준이 광해군의 천연두를 치료하자 선조는 허준에게 당상관으로 벼슬을 올려준다.
그러자 사간원은 장장 3개월 동안에 걸쳐 허준의 벼슬을 취소하라는 상소를 집요하게 올린다.
중인 신분의 의원에 불과한 허준에게 감히 당상관이란 높은 벼슬을 줄수 없다는 반발이었다.
1608년 선조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또다시 허준에 관한 탄핵문제가 거세게 불거진다.
선조의 건강이 좋지 않은데도 강한 약을 함부로 써서 왕을 죽게 했으니 처벌하라는 것이었다.
사간원과 대사헌 관리들의 상소는 끈질기게 계속됐고 결국 광해군은 허준을 파직 시키고 귀양을 보낸다.
하지만 광해군의 배려로 멀리 가지 않고 도성밖으로 귀양간 허준은
그후 2년여동안 귀양살이와 복귀를 되풀이 한다.
그 와중에도 허준은 10여년이 넘게 편찬에 매달려온 의학서를 마침내 완성했다.
바로 동의보감이었다.
허준은 의서를 편찬한 후 동의보감라 이름지었다.
중국의 북의나 남의에 버금가는 결과물이라는 당당한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이렇게 허준은 우리 한의학의 뿌리를 만들었다.
허준의 동의보감은 1598년부터 장장 14년 동안에 걸쳐 완성 됐다.
당시 일본에선 허준의 출현으로 반도의 의학이 중국의 의학에 마침표를 찍었다고 칭송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와같이 동의보감은 당시 중국에 의존하고 있던 조선의학의 독립선언이었고
한국의학의 첫 자리매김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동의보감은 전문 의학서이다.
의원들 외에 양반 사대부들 사이에선 필독서로 꼽히기도 했지만,
일반 대중들이 보는 의서는 아니었다.
그리고 허준은 당시 왕실의 의사였고,
일찍부터 어의로 발탁됨으로써 일반 민중들과 접촉할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었다고 할수 있다.
그런데도 허준은 당시 일반 민중들에게 높은 칭송을 받았다.
또 당시의 어느 기록에도 제대로 나와있지 않은 허준에 관한 이야기가
지금까지도 일반 민중들의 입을 통해 계속 전해지고 있다.
심지어는 살을 붙여가면서까지 허준 신화를 만들어졌던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그 단서는 바로 동의보감에 있다.
임진왜란에 기근과 역병까지 겹쳐 국가적인 대비책이 절실했던 1596년,
선조는 허준 등 내의원 의원들에게 의서편찬을 명령했다.
"중국 의서는 너무 번잡하기만 할 뿐 참고하기 어렵다.
옛날부터 전해오는 처방 가운데 번잡하고 실용성이 적은 것은 버리고
진짜 보물 됨직한 처방만 골라 의학의 경전을 정리하라."
허준은 우리나라 의서는 물론 중국의 의서들까지 포함해 500여권의 의서들중에서
우리에게 꼭 필요하고 적절한 처방만을 골라냈다.
그것을 간추려 담은 것이 동의보감 25권으로, 거기엔 중요한 고전의서들이 총 망라돼 있다.
처방의 끝엔 반드시 출전을 밝혔고 허준은 자신의 경험을 덧붙이기도 했다.
그 모든 취사선택은 허준의 의학적 판단에 따른 것으로,
의학의 정수만을 가려 뽑은 것이 바로 동의보감인 것이다.
동의보감이 완성되자, 광해군은 그 보급에 나섰다.
형편이 어려웠던 때라 훈련도감 활자로 급히 찍어냈고, 그후 목판으로도 거듭 출판됐다.
광해군은 계속 출간을 격려했고 출판 당시 지방 사회에도 널리 보급됐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중앙의 의료혜택에 한계를 느낀 지방의 약국계에선 대단히 환영을 받았다.
1648년에 마련된 강릉의 약국계 규정에도 동의보감에 관한 내용이 발견된다.
편제의 실용성 에도 동의보감엔 특기할만한 것들이 적지않다.
급성간염이 전염된다는 것은 최근에 밝혀진 일. 그러나 허준은 이미 동의보감에서 이같은 사실을 적고 있다.
또 동의보감에서 처방하는 주요약재의 90% 정도가 향약이다.
우리 주변에서 쉽게 얻을수 있는 약재들인 것이다.
허준은 그동안 써오던 중국약재에서 과감히 벗어났다.
이전까지 당약이란 이름으로 비싼 중국산 약재를 썼지만,
동의보감 이후엔 우리 약으로 대체, 쉽고 싸게 이용할수 있게 한 것이다.
당시 조선에서 쓰는 약재들의 대부분은 중국에서 수입되는 당약이었다.
동의보감에선 중국에서 수입해온 약재일 경우 반드시 당약이라고 표시를 달았다.
당시 당약의 경우 약값은 무척 비쌌다.
때문에 일반 민중들은 약 한첩 제대로 먹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목숨이 달려 있어도 여간해선 약을 사먹을수 없었다.
만기요람을 보면 당약중에 하나인 완청은 3.7그램의 가격이 당시 쌀 10말에 버금가는 가격이었다
같은 중량의 금값보다도 더 비쌌을 정도로 중국약들은 고가였다.
전쟁후엔 약값이 10배이상 뛰기도 했고,
심지어 당약중엔 향약의 270배까지 비싼 것도 있었다.
결국 당시 일반 서민들에겐 당약은 '그림의 떡'이었다.
이런 형편을 잘 아는 허준은 동의보감에 과감하게 단방처방을 넣었다.
말 그대로 한가지 약재를 써서 치료하는 처방이다.
고급약재 수십가지를 섞어 짓는 약에 비하면 자연히 약의 효능이란 측면에선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단방엔 바로 민중들을 생각하는 허준의 정신이 가장 잘 담겨있다.
여러 가지 약재들을 섞어 고급 처방을 쓸수 없는 대다수 일반 민중들에겐 무엇보다 희소식이었다.
계를 들어가면서까지 몸보신을 위한 약을 먹을수 있는 소수보다는
목숨이 달려있어도 약 한번 쓸수 없는 민중들을 위한 배려였다.
허준은 동의보감을 통해 약과 현실에서 소외된 일반 백성들,
아파도 약 한번 먹기가 '하늘의 별따기'던 대부분의 민중들에게 기회를 줬다.
또 우리 것을 찾은 허준으로 인해 이름없는 우리산 우리들의 약재들도
비로소 이름을 얻고 의미를 얻게 된 것이었다.
소외된 자들의 아픔을 알았던 의사 허준의 마음씀이었다.
당시 의서는 특권층의 것이었다. 결코 한문을 모르는 일반 민중들의 것이 아니었다.
허준은 그런 한문을 모르는 일반 민중들을 위해 많은 한글 언해본 의서들을 간행했다.
비로서, 일반 백성들도 쉽게 의서를 접할수 있게 됐다.
이렇게 약과 의원이 양반이나 사대부 등 특권층의 전유물과도 같았던 시절,
허준의 동의보감엔 의료혜택에서 소외된 일반 민중들을 배려하는 허준의 의학정신이 담겨 있다.
허준의 이런 의학적 성과는 훗날 제중신편 이나 이제마의 사상의학 등 많은 의학서의 토대가 됐다.
허준은 결코 소외된 일반 민중을 잊지 않았다.
또 당시 동양의학을 망라하는 최고의 의학적 성과를 이뤘지만 늘 '민중을 위한 약'을 잊지 않았다.
허준의 의학정신... 그 바탕은 바로 민중이었다.
오늘 우리가 조선의 의사 허준을 더욱 높이사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내용출처 : [기타] http://www.korea9000.net/zboard/zboard.php?id=bbs_data_mojip&page=10&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48
(출처 : '의성(醫聖) 허준(許浚)과 동양 최고의 동의보감(東醫寶鑑)' - 네이버 지식iN)
*의학사상
허준은 〈동의보감〉의 집례에서 말하기를 "중국의 동원(東垣)은 북의라 하고 단계(丹溪)는 남의라 했다. 의에 남북의 이름이 있는데 우리나라는 동방에 치우쳐 있고 의약의 도가 연면하게 끊이지 않은, 즉 우리나라의 약을 일러 동의라고 할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허준이 중국의학과 대별되는 우리의 전통의학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이것을 바로 세우기 위한 염원을 품고 있었음을 반증하는 말이다. 이것이 그의 주된 저술인 〈동의보감〉의 이름에서 동의라는 말을 드러낸 이유이기도 하다 . 허준이 활약하기 전부터 우리나라는 중국의 난삽한 의학이론에 침식되어 백성들이 병고에 시달리고 있었다. 중국과는 자연환경, 자라는 동식물, 음식, 질병 등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독자적인 의학이 발전해야만 했으나 당시만연한 사대주의 사상은 중국에 경도되어 독자적인 의학이 뿌리내리지 못했다. 이런 환경에서 허준은 중국의 의서를 참고할 때도 반드시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우리 현실에 맞는 부분만 채택했다. 당대에 최고로 꼽히던 진단서는 중국의 고양생이 쓴 〈찬로맥결〉이었는데 허준은 이 책을 동의보감 저술시에 전혀 인용하지 않았다. 그외에도 허준은 우리땅에서 나는 향약을 중시하고 향약을 쉽게 쓸 수 있도록 그의 저술에서 자세하게 서술하려고 했다. 허준이 민족의학의 전통을 분명하게 세운 후 비로소 민족의학은 그 토대를 이루었다.
허준은 어려서 서자로 자랐기 때문에 민중의 고통을 체험했고, 그 후로도 늘 고통받는 가난한 민중들의 입장에 서 있었다. 그 단적인 예가 〈언해두창집요〉·〈언해태산집요〉·〈언해구급방〉 등 우리말로 된 의서로 이를 간행하여 양반사대부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이 병고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려고 애썼다. 또한 〈동의보감〉에도 반드시 향약명을 함께 써서 이 땅에서 나는 약초를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중요한 점이다. 전쟁으로 인해 모든 것이 부족했던 당시의 백성들에게는 큰 혜택이었다.
허준은 "건강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것은 육체와 정신을 단련하는 것이고 약과 침은 그 다음"이라는 선진적인 의학사상을 강조했다. 이 소박한 의학사상은 허준의 진보적 의학사상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는 마음과 몸을 단련하고 수양을 잘하면 병을 미리 막아 오래 살 수 있는데 이것을 모르고 병의 치료에만 매달려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일단 병이 생긴 다음에는 제때에 치료하여 불행을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정상적인 생체의 생리적 메커니즘에 대해 쓰고 몸을 건강하게 하는 방법을 제시한 다음 질병의 병리적 메커니즘과 증상 및 치료 처방과 예후에 대하여 썼으며 끝으로 해당 병의 치료에 효과가 있는 단방문들과 침구법을 밝히는 독특한 서술체계를 세웠다.
허준은 우리민족 의학사상 가장 탁월한 의학지식과 이론을 가졌던 사람으로 그때까지 발전, 지탱되어왔던 민족의학을 과학이론적인 면과 실용적인 면에서 새로이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림으로써 의학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며 무엇보다도 의료사상적 측면에서 민족의학·민중의학의 지향을 분명히 함으로써 근대민족의학의 지향점을 건설했다. 허준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의 의학발전에도 크게 기여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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