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족상잔(6.25 & 5,18 )

광주사태를 간첩이 선동했다고 보는 이유

영지니 2007. 3. 18. 22:03

북한 간첩이 개입-유도했다고 보는 근거를 아래에 열거합니다.

1) [북한은 5.18때 정찰국 소속 정찰대원 3개조를 광주에 파견했다](증5,  5.18사건의 사료 1항)

2) [당시 정보기관에서 입수한 첩보에 의하면 북괴가 9개조의 비정규전 부대를 투입함과 동시에 남침을 감행하기로 결정하고 광주사태가 악화일로에 있으니 더욱 전국적으로 확대되기를 기다리며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한다](계엄사 157쪽 6-8줄).

3) [북한 최대의 대남 연락소인 청진연락소에는 전문공작원만 1,200명이 있다. 명령을 받은 수십명의 정예공작원들은 남조선 침투에 대비해 쾌속정을 준비했다. 이 쾌속정은 일제 보트에 탱크 엔진을 장착한 것으로 최대속도가 60 노트에 이른다. 그런데 이미 유서를 서놓고 쾌속정에 무기를 싣고 있는 공작원들에게 작전중지 명령이 떨어졌다. 김중린이 시기를 놓친 것이다](증19, 평양은 망명을 꿈꾼다. 240쪽 끝줄로부터 241쪽 4줄).

4) 5.18 전후에 평소와는 달리 많은 간첩들이 잡혔다.
   ① 3.23. 한강하류로 수중 침투해 오는 간첩 3명 사살
   ② 3.25. 무장간첩선이 포항 앞 바다에 침입, 우리 어부 3명을 사살하고 도망하다가 해공군 작전에 의해 격침
   ③ 3.27. 금화지구 비무장지대에 3명이 침투, 그 중 1명만 사살
   ④ 5.12. 판문점 미군 순찰병에 총격
   ⑤ 5.15. 판문점 미군 순찰병에 총격
   ⑥ 5.20. 남해안으로 침투한 간첩 생포(증9, 계엄사 47쪽).  
   ⑦ 6.21. 서산 앞바다 무장간첩선 침투, 9명 사실, 1명 생포

5) 북괴에서 정규방송을 제쳐놓고 시간별로 난동상황을 소상히 방송하여 선동했고, 남해안으로 침입한 간첩 이창룡이 5.23에 검거되었고, 불온전단 내용이 북괴주장과 일치했고, 난동자 조편성이 빨갱이식 조직이었고, 차량에 적색페인트로 시각을 자극하여 공수부대 요원들까지 섬짓함을 느끼게 한 것은 분명 적색분자의 소행이었다(증9, 계엄사 142쪽, 5.18사건의 사료 40항, 53항 등).  

6) 난동자 중에는 가발 사용자와 복면을 한 자, 서울에서 왔다고 자처하는 자들이 다수 포함돼 있었다. 이들 중에는 불순분자가 상당히 있었을 것으로 본다(증9 157쪽, 5.18사건의 사료 41항).

7) 주요 지휘관에게만 작전개시 수 시간 전에 내일 새벽 1시라고 알려준 것이 시민군에 알려져 23세의 김춘심이라는 여성이 집 차에 확성기를 달고 이 사실을 알렸으며, 난동자들이 작전시간과 작전대상을 미리 알아 계엄군이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증9, 계엄사 161쪽, 5.18사건의 사료 42항).(패망한 월남에서처럼 5.18 당시에도 간첩이 계엄군에도 침투해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이를 아무런 정황증거 없이 아니라고만 주장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이상한 사람입니다).  

8) 박총리는 방송에서 대부분의 광주시민이 극소수의 폭도와 불순분자들이 퍼트리는 유언비어에 속고 있다고 말했다(증10, 총기 버리고 유혈사태 막자. 5.18사건의 사료 48항). 터무니없는 유언비어를 믿지 말자. 오열과 불순분자들이 배후에 있다는 선무 내용이 방송됐다(증10, 대화로 모든 문제 해결가능. 유언비어 믿지 말고 자제해야. 5.18사건의 사료 50, 54항)

9) 북한의 가장 큰 대남 공작부 3호청사는 몇 주간 밤을 새워가며 삐라를 만들어 광주로 보냈다(증19, 평양은 망명을 꿈꾼다, 241쪽 밑에서 3줄).(주: 광주사태는 9일간의 사태였습니다. 북한이 몇 주간 삐라를 만들어 내려보냈다면 광주사태는 적어도 사태발생 몇 주 전부터 북한이 개입하기로 기획한 것일 수 있습니다)

10) 광주사태가 악화되는 동안 북괴에서 시간대 별로 난동상황을 소상히 방송하며 선동한 사실, 광주로 침입하려다 삼엄한 경계로 들어가지 못하고 서울로 올라오던 간첩 이창룡을 검거한 사실, 3명의 독침 사건, 불온전단 내용이 북괴주장과 일치하는 점, 도청난동자들의 조편성이 빨갱이 식 조직이라는 사실, 구호들이 적색 페인트로 시각을 자극한 점 등으로 미루어 북괴간첩이 광주사태에 편승하여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고 전국적으로 확대시켜 정부를 전복코자 하였음이 분명하였다(증4, 33쪽 좌측 중간, 계엄사 142쪽 하단).    

11) 간첩설도 나돌았다. 누군가 전신전화국에 불지르자고 얘기하자 왜 불지르느냐, 이상하다, 혹시 간첩 아니냐고 경계하기도 했다(증4, 42쪽 좌하단).(주: 이렇듯 공공건물에 불을 지르는 행위는 광주 시민 자신들도 간첩 행위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무서, 방송국, 파출소, 동사무소 등 닥치는 대로 불사르고 파괴하는 행위, 무기고를 털어 무장하고, 교도소를 공격하고, 끝까지 결사 항쟁하는 행위들을 간첩행위로 보는 것이 죄가 될 수 없습니다).

12) 조사도 해보기 전에 정세균은 독침사건은 간첩의 소행이다라고 기자들에게 말해 광주사태를 좋지 않은 방향으로 몰고 갔다(증12, 92쪽, 좌측 중간. 518간부의 회고록).

13) 수습위에서 총기를 회수했다. 그러나 유일하게 총기가 회수되지 않은 곳은 기동타격대와 36인조 무장조였다. 36인조 무장조는 일종의 비상대기조였는데 이들은 수류탄, 대검, M-16자동소총으로 무장되어 함께 행동하고 함께 움직였다. 기동타격대는 시위 외곽순찰을 나가 있었기 때문에 무기 회수가 어려웠지만 무장조는 도청 민원실 강당에 있었다. 우리가 들어가자 그들은 입을 다물었다. 우리가 무기 회수에 대한 취지를 설명하자 그들은 물끄러미 처다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선생들만 애국자요? 우리도 애국 한번 합시다.  그들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 없었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한 사내가 일어났다. 우리는 무등갱생원에서 나온 사람들이오. 당신들은 총을 반납하고 돌아갈 집이라도 있소. 그러나 우리는 총을 반납하고 나면 돌아갈 집은커녕 밥 한끼 얻어먹을 데도 없소. 우리는 싸우다 죽을 겁니다(증12, 93-94쪽, 5.18단체측 인사의 회고). (주: 36명이 M-16으로 무장하고 이런 매너를 보였다는 것은 일반 시민이 아니라 특수 집단으로 보여 집니다. 선생이라는 표현은 북한에서 툭하면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정보기관에 오래 근무한 피고인은 이를 매우 잘 압니다. 광주시민은 나이가 든 사람에게 선생이라는 용어보다 어르신이라는 말을 잘 사용합니다).    

14) 우리가(공수부대) 전남대학교 교정에 처음 진주했을 때, 대부분의 구호가 붉은 글씨였다. 김대중 석방하라, 전두환 물러가라, 농민수탈금지. 우리 부대원들은 이를 분명 용공분자들의 소행이라고 믿었다(증17, 427쪽. 공수 작전병의 실명 수기).  

15) 붉은 색으로 쓰여진 구호가 계엄군에게는 충격적이었다. 섬듯한 내용과 붉은 글씨가 용공적 냄새를 진득 풍겼다(증6, 426쪽 제3단 7-19줄).

17) 우리나라 역사상 계엄군에게 총을 쏜 소요는 광주사태가 처음이다(증13, 69쪽, 좌측 하단).

18) 용의주도하게 만들어진 지하신문이 5.18-5.26 사이 9호까지 발행되어 계엄군 섬멸과 최규하 정권의 퇴진을 선동하였다(증4,  25-26쪽, 5.18사건의 사료 9항). (주: 지하신문 발행은 시설, 장소, 디자인, 내용 등을 갖추는 데 상당한 시간을 요합니다. 지하신문이 5.18 당일부터 발행됐다는 것은 5.18이 우발적으로 발생한 게 아니라 미리 계획된 것임을 웅변해 줍니다. 순수한 시민이 순발적으로 이런 지하신문을 발행할 수는 없습니다. 5.18은 배후 불순세력이 미리 준비한 사건입니다).  

19) 그런데 우려하고 근심했던 일이 터졌다. 하나는 26일 새벽 4시30분 서구  사구동 734-1 최던준씨(52) 집에 무장괴한이 침입, 최씨의 부인 최소례(35)와 아들 등 일가족 3명을 쏘아 살해했다. 다른 하나는 계엄군이 포위망을 압축해 온다는 소식이었다(증16, 476쪽. 광주 취재기자의 수첩 메모).(주: 이를 순수한 광주시민이 저지를 것으로 볼 수 없습니다).

20) 시민군의 한 사람이 월산2동 지도원동무라는 완장을 차고 있었다(증4, 41쪽, 5.18사건의 사료 18항).

21) 좌익수 170여명이 들어 있는 광주교도소를 5회나 공격했다(증10, 140쪽, 5.18사건의 사료 59항)

22) 소요가 진압국면에 들어섰을 때 계엄군에 발악적으로 저항했던 17명이 모두 희생됐다(증10, 143쪽. 5.18사건의 사료 64항).(주: 순수한 시민군이라면 이렇듯 발악을 해야 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23) 사망자 26명은 남한에 연고가 없는 시체였다(증9, 141쪽, 5.18사건의 사료 38항)(주: 남한에 연고가 없는 사망자는 의심의 대상이 됩니다. 현재도 망월동 묘지에는 연고자 없는 12명의 묘가 있습니다. 하다 못해 주유소에서 휘발유를 강탈해가다가 죽은 시민도 두둑한 보상을 받는데 어째서 연고자가 나타나지 않습니까).

24) 난동자들이 이리 시 폭파사건 시의 폭약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TNT를 도청지하실에 장전하고 광주시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겠다며 결사항전했다.  계엄군이 27일 새벽 01시에 특공 진입하여 뇌관을 뺐다(증9,  140쪽, 5.18사건의 사료 36항).(주: 이는 시민의 차원과 민주화 운동의 차원을 훨씬 넘습니다).

25) 무기고를 탈취했고, 방위산업업체에서 장갑차를 포함한 군수장비를 탈취하여 공격했으며, 세무서, 방송국, 파출소 등 공공 시설을 불태우고 치안과 행정을 마비시켰으며, 170여명의 좌익수와 3,800명의 죄수들이 들어있는 광주교도소를 5회에 걸쳐 공격했다(증9, 134-140쪽: 이는 순수한 광주시민의 행동 범위를 넘습니다).

26) 광주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작전이 이루어졌고 시민군의 동시다발적인 매복작전들이 연속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증4,  40-41쪽 및 증21, . (주: 매복작전은 북한이 전문으로 하는 무기이며 동시다발적인 작전 지휘는 순수 시민의 작품이라고 볼 수 없음).

27) 불온목적의 유언비어들 즉 여자를 발가벗긴 채 세워놓고 칼로 유방을 도려내어 죽였다,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 사람들의 씨를 말리려 왔다, 경상도 군인들만 골라서 왔다, 공수부대들은 젊은 놈은 모조리 죽여라, 광주시민 70%는 죽여도 좋다는 구호를 공공연하게 외치고 있다 등은 순수한 시민이 지어낼 수 없는 프로급의 작품입니다(증4, 24쪽, 5.18사건의 사료 7항)

28) 총상으로 죽은 시민의 72.2%가 시민군이 가진 M-1과 칼빈에 의해 사망했다(증9, 140쪽 중간. 5.18사건의 사료 11항).(주: 이는 불순세력의 의도적인 소행이며, 그 목적은 광주시민을 흥분케 하는 술책이라고 봅니다. 이는 불순세력이 개입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게 하는 결정적 요인의 하나라고 봅니다. 5.18단체는 이를 뒤집는 통계와 해석을 아직 제시한 바 없습니다)  

29) 10대의 어린이가 돈을 받고 벽돌이 든 리어카를 끌었다(증7, 43쪽 하단. 5.18사건의 사료 23항)

30) 계엄군에게 대화를 유도하면서 사람들을 모으고, 사람들이 모이면 군의 격분을 유도하고, 군중이 공격하면 대화를 하던 사람들이(40-50대 나이) 뒤로 빠지면서 교묘한 방법으로 군중의 공격을 유도했다(증7, 47쪽, 5.18사건의 사료 25항. 100항). (주: 이는 고도로 훈련받은 전문 프로집단의 개입을 암시함)    

31) 주머니에 돈이 든 어린애가 세무서 커텐에 불을 지르는 것을 잡았는데  어느 청년들이 불을 질러라 해서 질렀다 하더라. 타일러서 풀어주었는데 새벽에 세무서가 다시 불타더라(증7, 47쪽, 5.18사건의 사료 26항)

32) 광주 전역이 시민군에 의해 장악됐고, 치안부재-무법천지가 됐다. 이들은 진지를 구축하고, 시민군을 편성하고, 장기전에 대비했다. 어린 아이들에게 껌과 과자를 주며 합세를 권장했다(증9, 138쪽, 5.18사건의 사료 33항) (주: 특히 어린이를 전투에 합류시키는 것은 부도덕한 행위이이기도 하지만, 이는 공산주의자들이 한국전과 월남전 등에서 어린이를 방패막이로 사용하는 전형적인 수법입니다. 이를 어찌 순수한 광주시민이라고 볼 수 있습니까).

33) 시민군들은 시체를 가지고 왔다 갔다 하며 시민들의 적개심을 불러일으켰고, 도청 앞 관장에 시체를 진열시켜 합동장례식을 거행한다는 명분으로 시민들의 모임을 유도했다(증9, 137-138쪽. 5.18사건의 사료 33, 34항). (주: 이는 공산주의식 심리전 수법입니다. 피고인은 군의 전략정보 교육을 받은 바 있고(1등), 군의 정보기관(1972-1974)과 국정원(1980)에 근무하면서 심리전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 이는 분명 순수한 광주시민의 행위가 아닙니다)    

34) 비록 발단은 학생시위에서 출발했지만 조직적이고 치밀한 배후 조종과 교묘한 난동을 통해 광주시민의 지역감정을 유발-흥분시킨 데에는 고첩과 불순분자들의 책동이 있었다(증10, 141쪽,  5.18사건의 사료 63항).

35) 전옥주(32세)라는 여자가 확성기로 물러서지 맙시다. 전두환은 물러가라 등 가두방송을 하여 시민들을 독려했다(증11, 257쪽. 5.18사건의 사료 73항),  

36) 5.21일 새벽 05:20분, 광주역 앞 군중 200여명이 집결하여 있는데 여자가 지금 일어나야 산다며 선동했다(증11, 647쪽. 5.18사건의 사료 84항).

37) 5.27일 03:00분 도청 앞에서 여학생이 방송을 통해 시민을 선동했다(증11, 6555쪽. 5.18사건의 사료 89항), 21일 자정에 여인이 확성기로 선동 방송을 했다(증14, 439쪽. 5.18사건의 사료 125항), 새벽 2시에도 여인이 시민을 선동하는 방송을 했다(증14, 406쪽. 5.18사건의 사료 114항).

38) 시위대가 앰프를 단 차량으로 도로를 돌아다니며 방송을 했다. 어떤 여자가 애끓는 듯한 소리로 시민들을 자극했다. 목소리와 억양이 마치 이북에서 대남방송을 하는 여자의 목소리와 같아 전율을 느꼈다(증13,  83쪽, 5.18사건의 사료 103항).

39) 여성이 확성기를 통해 애절한 목소리로 밤새내 시위를 선동했다(증4,  40쪽. 5.18사건의 사료 14, 32 항 외 대수 자료).

40) 여인들의 방송은 특수전으로 단련된 우리들을 겁먹게 했다(증17, 432쪽. 5.18사건의 사료 147항).

41) 5.26.12시경 도청 앞에서 시민들을 기동타격대로 조직, 5-6명을 1개조로, 각 조마다 조장1명, 타격대원 4-5명, 군용 짚 차 1대, 무전기 한 대, 카빈으로 부장, 실탄 1클립으로 무장시켜 7개조로 편성했다. 지휘계통은 상황실장-기동타격대장-부대장-조장(7개조)-조원으로 설정했다(증11, 266쪽, 5.18사건의 사료 80항). (주: 이는 우발적이고 즉흥적인 시민 저항이 아닙니다).

42) 윤상원 형은 민청학련사건으로 구속됐다가 특사로 풀려났다. 5월 19일까지의 시위의 주체는 대학생들이었는데 그 후에는 시위의 주체가 학생들에게서 윤상원이라는 노동자가 이끄는 노동자들에게로 넘어갔다. 그리고 이때부터 시민군의 시위로 성격이 바뀐다. 노동자들을 선동하여 경찰서를 부수고 경찰서와 예비군 무기고의 무기들을 탈취한 것도 윤상원이라는 노동자가 주동하였다. 21일 그는 이 유혈 시위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광주 외곽 지역까지 시민군을 보내 습격하여 경찰서와 예비군 무기고의 무기들을 탈취해 오게 한다(증12, 55-59쪽).(주: 윤상원은 사망했으며 5.18의 영웅으로 칭송되고 있습니다)  

43) 5.18의 기동타격대 구성원은 그 80%가 17살에서 22살 사이의 청년이었고, 대부분이 학생이 아닌 도시근로자, 노동자, 점원, 실직자, 점원, 구두닦이, 품팔이, 식당 종업원, 품팔이 등 소외받고 억눌려왔던 기층민중이며 이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싸웠다. 지금까지는 광주민중항쟁이라는 말을 썼지만 나는 5월혁명이라고 부르고 싶다(증12, 65쪽, 5.18 주역이자 국회의원인 정상용의 회고).(주: 이는 5.18단체 측 인사의 증언이며 계엄사의 분석과 일치합니다. 기층민들은 스스로의 철학에 의해 나섰다기 보다는 누군가에 의해 조종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습니다. 이들 기층세력이 대한민국 민주화의 주역이라면 대한민국 국민은 이들보다 못하다는 말이 되는 게 아닐까요? 또한 이는 북한의 대남혁명 전략인 이른바 계급혁명(민중혁명:노동자-농민 즉 냉대받는 기층세력들에 의한 혁명)에 해당합니다)

44) 수습위원회는 김대중을 석방하라는 조건을 내놓았다(증12, 90쪽. 좌측 하단).(5.18은 김대중과 관련 있었다는 걸 의미합니다)

45) 광주사태의 주요 원인은 지역감정과 학생 시위에 편승한 김대중 일당, 용공 및 불순 세력의 조직적인 배후조종, 광주로 내려간 재경 극렬 학생들의 선동 및 가세, 대정부 불만 및 지역감정에 불을 지른 악성 유언비어 때문이었다(증4, 30쪽 하단).  

46) 이날(5.24) 집회에서는 철야데모에서 마이크를 잡고 시민들의 참여를 절규했던 전모여인(32)을 간첩용의자로 붙잡았다. 시민들은 그녀가 한동안 사라졌다가 나타났고, 주소 등 횡설수설하는 게 의심쩍다고 여겨 계엄분소에 넘겼다. 시민군은 정부 당국이 광주 사태를 간첩 등 불온 세력과 결부시킨 게 마음에 걸려 22일에 이어 이날까지 2명의 혐의자를 잡아 이첩한 것이다(증16, 474쪽 하단). (주: 간첩이 없었다고 단언할 사람은 없습니다. 민들도 간첩이 끼어 들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 인정한 것입니다. 간첩이 있으면 시민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속을 수 있는 것입니다. 광주시민이라 해서 교묘한 선동 전술에 넘어가지 말란 법이 없습니다).

47) 심지어는 열 몇 살 먹은 애들도 와요. 물어보니까 누가 돈을 주면서 앞에서 끌라고 했답니다. 힘없는 아이는 앞장세우고 시킨 사람들은 뒤에서 미니까 애가 앞장서서 나갈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불순세력이 배후에 있다는 얘기 아닙니까? 하지만 단서가 없으니까 말을 하지 못합니다(증7, 43쪽 하단).(주: 아이들과 부녀자들을 앞세우는 것은 한국전과 월남전에서 공산세력이 늘 사용했던 기본전술입니다. 공격을 피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지만, 한국군을 어린아이와 부녀자들을 죽인 야수로 몰기 위한 심리전입니다)  

48) 광주 진압에 참가했던 장병 153명의 100%가 광주사태는 배후가 있는 폭동이며, 순수한 데모를 불순한 배후 세력이 조종. 폭동화 했다고 생각하며 이를 숭고한 민중항쟁이라고 생각하는 장병은 단 한 명도 없다(증7, 45쪽 중간).

49) 부대원들을 향해 난폭하게 달려온 차를 간신히 저지시켰습니다. 운전수를 잡아 이유를 물었습니다.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내가 맞아 죽는데 안 할 수 있느냐, 할 수 없이 한다고 대답했습니다(증7, 53쪽 중간). (주: 배후조종이라고 생각합니다).  

50) 5.18은 신군부가 유도했다(증15, 월간조선 1988.3월호 382쪽) (주:고소인들은 누군가에 의해 유도당했다는 게 명예훼손이라고 하지만, 5.18단체 측 고소고발인들 스스로가 신군부의 유도설을 인정한 것입니다. 5.18단체는 모든 유언비어와 자료들까지 군이 날조해 낸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날조하고 유도한 것은 국군이지 간첩이 아니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새로운 자료를 내놓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억지요 날조라고 봅니다 

    

하나 하나의 자료는 첩보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위에 나열한 첩보들을 모아놓고 보면 5.18에는 간첩들의 개입이 있었고, 그들의 책동이 있었다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안보는 단 1%의 가능성에 대비하는 주제입니다. 하지만 위에서 열거한 첩보들을 종합해보면 평가자에 따라 100%에 가까운 확률을 가지고 광주사태는 좌익이 배후 조종한 사건이다라고 말할 수 있게 할 것입니다. 

    

간첩들은 눈에 보이는 게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간첩을 경계해야 안전이 보장되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한국 대부분의 역사적 사건은 좌우 이념대결의 역사입니다. 역사를 이념적으로 보아야만 하는 것이 우리의 운명입니다. 

    

누가 간첩이라는 것은 밝힐 수 없지만 저것은 간첩의 소행일 것이다라는 추측은 가능합니다. 이를 공학계통에서는 'PROXY APPROACH'라고 표현합니다. 생산량을 직접은 측정할 수 없어도 전기사용량만 보면 생산량을 알 수 있습니다. 간첩을 직접적으로 잡지 못해 누가 간첩인지는 알 수 없어도, 간첩의 소행을 보면 간첩이 개입됐다는 사실까지는 유추할 수 있습니다.

직접적인 증거를 대지 못한다 해서 과학세계와 선진국의 분석분야에서 통용되고 있는 통계학적 유추기법까지 금지하는 것은 야만입니다. 더구나 단 1%의 가능성에 대비하라는 안보계 절대절명의 표어를 허무는 인민재판은 금지돼야 한다고 봅니다. 광주사태에 대한 인민재판 식 역사평가는 한국의 안보를 포기하는 행위라고 봅니다.  

                    

2003.2.26 / 지만원

 

 


 

출처 : 세상사 바로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