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만행(왜란)

독립투사 윤봉길 의사

영지니 2010. 4. 12. 19:57
 
 
 
       
       
       

       
            "23세, 날이 가고 해가 갈수록 
            우리 압박과 우리의 고통은 증가할 따름이다.

            나는 여기에 한 가지 각오가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뻣뻣이 말라 가는 삼천리 강산을바라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수화(水火)에 빠진 사람을 보고
             그대로 태연히 앉아 볼 수는 없었다.
            여기에 각오는 별것이 아니다.



            나의 철권(鐵拳)으로 적(敵)을 즉각으로
             부수려 한 것이다. 이 철권은 관(棺)속에 들어가면
             무소용(無所用)이다.늙어지면 무용이다.


            내 귀에 쟁쟁한 것은 상해 임시정부 였다.
            다언불요(多言不要), 이 각오로 상해를 목적하고
            사랑스러운 부모형제와 애처애자와 따뜻한 고향산천을 버리고,
            쓰라린 가슴을 부여 잡고 압록강을 건넜다."


            <유서 中에서>





            *생가(충남 예산)

             

            "고향에 계신 부모 형제 동포여!
            더 살고 싶은 것이 인정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택해야 할 오직 한 번의
            가장 좋은 기회를 포착했습니다.
            백 년을 살기보다 조국의 영광을
             지키는 이 기회를 택했습니다.

            안녕히, 안녕히 들 계십시오."



            <두 아들 앞 유서 中에서>

            *상해 임시정부 청사 사적관 윤 의사 사적전시관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을
             찾아와 한 잔 술을 부어 놓으라...."
             
            <어록 中에서>


            *묘소(효창공원)
             
            사람은 왜 사느냐 이상을 이루기 위하여 산다.
            보라 풀은 꽃을 피우고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
            나도 이상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를 다짐하였다.
             우리 청년시대에는 부모의 사랑보다 형제의 사랑보다
             처자의 사랑보다도 더 한층 강의(剛毅)한 사랑이 있
            는 것을 깨달았다. 나라와 겨레에 바치는 뜨거운
             사랑이다. 나의 우로(雨露)와 나의 강산과
            나의 부모를 버리고라도 그 강의한 사랑을
            따르기로 결심하여 이 길을 택하였다.
             
             


            *중국 상해 '홍커우' 공원
            1932년 4월 29일, 이곳에서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났던 곳.일본의 천장절과 승전기념일
             행사에 폭탄을 투척.
             
             

            안타깝게도 매헌 윤봉길 의사 의거 현장엔 중국의 문학가 루쉰의 동상이...




            * 거사 기념석


            * * 최후 순국 장면








            * 매장 장면


            ** 장제스 대만 전 총통의 친필

            올드뮤직의향기™



            * 1967년 윤봉길 의사 유족들에게
            전달해준 친필 붓글씨 민당 장제스
            정부의 지원을 받을수 있었는데
             장제스는 
            "중국의 백만 군대가 못한 것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 냈다."고 극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