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야할한국사

중국 사서의 조공관계 기술의 허와 실

영지니 2008. 4. 17. 00:17

 

조공관계의 허와 실

굳이 중국의 '정사'라고 치부되는 25사가 아니더라도 우리 역사서인 삼국사기三國史記를 보아도 우리민족이 세운 나라가 대륙에 세워진(그것이 한족漢族이나 기타 북방민족이 세운 나라든)나라에 수없이 조공을 한다는 부분이 많이 나온다.
하지만 우선 삼국사기의 경우 구 삼국사 등의 우리의 역사서나 중국의 송사나 신당서 혹은 구당서에서 많은 부분을 차용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우리가 조공을 했다는 부분은 오직 25사 안에서만 나온다.

그럼 우선 조공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알아보자.
조공은 그 기원이 한족韓族이 세웠다는 은이 무너지고 난 후 주대周代에 와서 만들어진 것이다. 알다시피 주는 봉건제를 채택하였다. 그리고 이 소국들과 주 왕실과(여기서 왕실이라 함은 황제라는 칭호는 진의 시황제가 처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 전까지는 가장 높은 칭호는 왕이었다.)의 관계를 제도화한 것이 조공이었다. 소국의 지배자들은 주 왕실에 의해 책봉을 받고 그 대가로 조공을 받친 것이었다. 그래서 주 왕실은 제후국들을 간접적으로 통치한 것이었다.

헌데 조공관계라는 것이 언제나 이와 같은 경우는 아니었다. 한漢의 초기 심지어는 한 무제와 같은 경우에는 북방의 흉노에게 번번이 밀려서 한에서 공물과 미녀를 받쳤으며, 송 역시 거란족에게 많은 양의 돈을 받쳤기 때문이었다. 즉 시대에 따라 바뀐다는 것이다.

우리민족 역사상 가장 진취적이었으며, 또한 우리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문화가 뛰어났던 고구려의 경우를 보자. 고구려의 영토가 가장 넓었다는 광개토대왕 때와 장수왕 때 대륙에는 북위나 남조 혹은 유연이 자리잡고 있었다. 우리가 여기서 보아야 할 것은 북위와 고구려의 관계이다.

북사北史에 의하면 고련 즉 장수왕때 고구려의 사신이 와서 조공을 하고 역대 황제들의 이름을 피하겠다는 국휘를 청하여 이에 그 정성을 가상히 여겨 원외산기시랑 이오를 파견해서 장수왕을 도독요해제군사 정동장군 영호동이중랑장 요동군공 고구려왕으로 삼았다하며, 그 후 해마다 조공을 했다고 한다. 분명 앞서 말한 바에 의하면 고구려는 북위의 제후국 정도로 인식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구려는 그 외 남조인 송에도 조공을 한다. 424년에 고련이 조공을 하고 송무제는 고련에게 정동대장군이라는 호칭을 주며, 안제는 사지절 도독영주제군사 정동장군 고구려왕 낙랑공이라는 호칭을 준다.
고구려는 이렇게 남조에 의해서도 호칭을 받으며 조공을 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본디 조공과 책봉 관계는 몇 가지 중요한 사안이 있다. 즉 피 책봉국이 먼저 책봉국과의 교섭에서 제후국으로서 상하의 의례를 준수해야 하며 대외관계에서 책봉국의 적대 세력과는 적어도 공식적인 우호 관계를 맺지 않아야 하며, 간혹 필요할 때에 조력군의 동원에 응해야 했다.

하지만 고구려는 북위뿐 아니라 남조와도 교류를 했다. 뿐만 아니라 돌궐족인 유연과도 교류를 했다. 이는 마땅히 피 책봉국으로서 해야 할 일이 아니었다. 만약 피 책봉국이 위의 사안을 지키지 않을 경우에는 책봉국이 응징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북위가 고구려를 응징했다는 기사는 단 한가지도 없다. 북위는 화북지방에 자리를 잡은 국가인데 위로는 유연이 있으며 남으로는 송 그리고 서로는 토곡혼과의 전쟁을 한창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고구려의 병력을 차출하진 못했다. 이는 마지막 사항에 위배되는 것이다.

그리고 장수왕 23년 즉 435년에 고구려는 북위에 사신을 보내서 북위 역대왕의 계보를 바치라고 요구했다. 이는 곧 나라의 역사를 바치는 것이며 신하의 나라가 임금의 나라에게만 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그것이 북위가 고구려에 행한 것이다. 또한 491년 장수왕이 죽자 북위의 고조는 소위모라는 흰색 모자와 포심의라는 상례 때 입은 베천으로 만든 옷을 입고 동쪽 교외로 나가 애도를 표하는 의식을 거행했으며 문자왕이 죽었을 때에도 마찬가지로 숙종의 어머너로 정권을 쥔 영태후가 슬퍼하며 동쪽 사당에서 애도를 표시했다 한다. 또 508년 엔느 당시 북위의 세종이 청주(산동성 지역?)에 고구려 시조를 제사지내는 고려묘라는 사당을 지어 주었다 한다.

이 몇가지 경우만 보아서도 고구려가 북위에 하는 조공은 단지 지극히 의례적인 것이거나 혹은 무역을 조공으로 둔갑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례로 송도 요에 항상 밀리면서도 요에게 공물을 받았다고 적고 있다.

그러면 송에 대한 관계를 어떨까.

당시 고구려와 북위 사이에는 북연이라는 작은 소국이 있었는데 이것은 고구려 측에서 북위와 고구려 사이와의 일종의 스펀지와 같은 역할이었다. 헌데 북위의 파상적인 공격으로 북연이 위태롭자 북연에서는 고구려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되고 북위의 공격으로부터 백성들과 왕족들이 고구려로 도망을 하게 된다. 당시 상황은 고구려군이 도착하고 백성들과 왕족을 고구려로 데려가는 도중에도 북위군은 고구려군을 공격할 수 없었다고 하니, 위에서 말한 바로 조공이란 의례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남조와의 관계를 보자. 앞서 말한 바대로 고구려도 남조에 조공을 하고 벼슬을 받았다 하는데 북연왕이 고구려에서 살면서 자신의 환경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방약무인하게 지내자 장수왕이 그의 시녀들이나 종을 몰수했다 한다. 그러자 북연왕이 송에 지원을 요청하게 되고 또 북쪽으로 진출할 속셈이었던 송 역시 왕백구에게 군사 7천명을 주자 고구려에서는 장군 손수와 고구를 보내 북연왕을 죽이자 왕백구가 기습을 하여 손수를 사로잡고 고구를 죽이자 송의 군사를 전멸시키고 왕백구를 잡아 송으로 보냈다 한다. 송에서는 고구려의 눈치를 보며 왕백구를 하옥시켰다. 이것만 보아서도 송에 했던 조공 역시 의례적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또한 백제가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송에 사신을 보내려하자 고구려가 수군을 동원하여 막은 경우가 있으며 그것은 북위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경우 역시 피 책봉국에서는 해서는 안돼는 행동이지만, 남조나 북조에서는 고구려에게 항의할 수 없었다.

다시 북위로 가보면 고구려가 유연과 함께 지두우를 분할했다. 당시 지두우는 북위에 조공을 보냈다 하는데 고구려가 이를 유연과 함께 분할했다 함 역시 피 책봉국으로 같은 피 책봉국을 공격하거나 임의로 복속시키면 안돼는지만, 북위는 고구려를 공격할 수 없었다.

이는 당시 동아시아의 국가들의 서로 먹고 먹히는 관계에 놓여 있었으며, 그 관계를 조정하는 쪽은 고구려였다. 북위는 사방으로 적이 놓여 있는 상황이었는데, 정통 한족임을 자처하는 남조와는 정통성 싸움이 있었으며, 막북의 지배자인 유연과의 전쟁 역시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남조 역시 마찬가지였으며, 유연 역시 북위와 싸우면서 매번 식량이 부족하여 고구려로부터 식량을 수입하였으며, 북위는 후방을 안전하게 하기 위해서는 고구려의 눈치를 보아야 했다. 남조 역시 고구려의 수군을 의식하여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국사책에서도 나오는 내용이지만, 당시 북위는 고구려의 사신을 남조에 이어 서열 2위로 보앗다고 하는데 남조의 사신은 같은 한족漢族의 경쟁자로 보았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는 말이 있으며 또한 남조의 사신이 고구려의 사신이 자신과 동급에 놓여 있다는 것에 항의를 했다는 내용이 남사에 나와있을 정도로 실상은 고구려의 사신이 서열 첫 번째의 대우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이는 고구려 뿐 아니라 백제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백제는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서 북위에 사신을 보내는데 처음에는 고구려의 수군에 의해서 가지 못하고 두 번째에는 비록 사신이 가긴 하지만 풍랑 때문에 북위의 황제의 뜻이 담긴 서한(북위에서도 고구려를 의식하여 고구려의 후방에 있는 백제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이 백제로 오지 못하자 곧 사신을 보내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경우를 봐서 조공이란 시대에 따라 자신의 필요 이유로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 마지막으로 간단하게 책봉을 알아보기로 하자.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고구려의 왕에게는 도독요해제군사 정동장군 영호동이중랑장 요동군공 고구려왕이나 사지절 도독영주제군사 정동장군 고구려왕 낙랑공과 같은 호칭을 주었다고 하는데, 여기서 종동장군이나 사지절이라는 것은 정1품에 속하는 벼슬이다. 즉 파격적인 것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래도 타국의 왕에게 벼슬을 받았다는 것은 결국 복속이 아니냐는 말도 있을 지 모르겠지만, 대진국(발해)을 세운 대조영에게 신라 측에서는 대아찬 벼슬을 준다. 이는 성골이 아니면 오를 수 없는 벼슬이다. 그렇다고 해서 대진국이 신라보다 힘이 약해서 신라측에서 벼슬을 내리는 것은 아닐 것이다.

끝으로 본인이 예전에 종횡무진한국사에 대해 글을 올린 적이 있다. 그때 책의 저자는 '동아시아에서는 일본을 제외하고는 모두 중국에게 벼슬을 받고 조공을 했으므로 동아시아의 역사는 크게 중국과 일본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라고 했는데 사실 이것은 일본인 西 定生의 [6~8世紀の東てシて] (岩波講座日本歷史)에 나와 있는 글과 하등 다를 바 없는 내용이다. 즉 동아시아 대륙의 역사를 책봉국인 중국의 역사와 그에 부수된 주변적이고 종속적인 피책봉국들의 역사와 그에 대비되는 섬나라 일본 역사의 독자성을 부각시켜서 전근대 시기의 동아시아 역사를 중국사와 일본사를 축으로 구성하려는 이른바 '책봉체제론'과 같은 것이다.


 

출처 : 이선생의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