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서적 , 역사서

삼국유사 - 1

영지니 2008. 1. 13. 19:40

 

삼국유사 (三國遺事)


 삼국유사 해제
<삼국유사(三國遺事)>는 <삼국사기(三國史記)>와 함께 현존하는 우리 고대(古代) 사적(史籍)의 쌍벽으로 일컬어져 온다.
<삼국사기>는 왕명(王命)에 의하여 사관(史官)이 저술한 정사(正史)로서, 체재(體裁)가 정연하고 문사(文辭)가 유창하고 화려하다. 이에 비하여 <삼국유사>는 선사(禪師) 한 개인의 손으로 이루어진 이른바 야사(野史)로서, 체재가 짜여지지 못했고 문사 또한 박잡(駁雜)하다 하겠다.

그러나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에서 찾아볼 수 없는 많은 값어치를 지니고 있다.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 마찬가지로 고구려·신라·백제 삼국의 역사를 기록한 사서(史書)이지만, 그 밖에 고조선·기자 및 위만조선을 비롯하여 가락 등의 역사가 포함되어 있다. 특히 고조선에 관한 서술은 오늘날 우리들로 하여금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할 수 있고, 단군을 국조(國祖)로 받드는 배달 민족의 긍지를 갖게 해 주었다. 만약 이 기록이 없었던들 우리는 삼국 시대 이전에 우리 역사를 중국의 사료(史料)인 <삼국지(三國志)>의 동이전(東夷傳)에 겨우 의존하는 초라함을 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삼국유사>는 당시의 사서 찬술이 규범에는 벗어나는 체재의 부정연(不整然)과 내용의 탄괴(誕怪)·잡다(雜多)함이 오히려 오늘날 이 책을 더욱 귀한 재보(財寶)로 여기지 않을 수 없는 소이(所以)가 되고 있다.

우선 <삼국유사>에는 단군 신화를 비롯한 많은 신화와 전설이 수록되어 있다. 실로 <삼국유사>는 우리의 신화와 원형적 옛 전설의 모습을 알게 하는 유일한 책으로 가위 설화 문학(說話文學)의 보고라 할 만하다. 게다가 이 땅 최고(最古)의 정형 시가(定型詩歌)인 향가(鄕歌) 14수가 실려 있어 <균여전(均與傳)>에 전하는 11수와 함께 주옥같은 가치를 지니고 있으니 국문학 관계로는 사서 이상의 귀한 보전(寶典)이 되고 있다. 수록한 향가의 수는 비록 많은 것이 못 되지만 향가를 집대성한 책으로 알려진 <삼대목(三代目)>이 전하지 않는 지금, <삼국유사>의 문학사적 가치는 실로 절대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밖에도 <삼국사기>에는 빠졌거나 또는 고의로 빼 버린 많은 사실들이 수록되어 있다. 불교에 관한 풍부한 자료와 신앙 사상·민속·일화 등 다방면에 걸친 내용은 모두가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물론 저자가 사관이 아닌 승려의 신분으로서 이 같은 책을 저술함에 있어, 더러는 인용서와 그 내용이 같지 않은 것도 있고, 잘못 전해져 오는 것을 그대로 수집·수록한 것도 없지 않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이 책 자체가 그 서명(書名)이 말하듯이 일사 유문적(逸事遺聞的)인 것이기 때문에 따르는 불가피한 것이라 하겠다.

이 책의 저자 일연(一然)은 고려 희종(熙宗) 2년(1206)에 경산(慶山)에서 출생했다. 속성(俗姓)은 김씨요, 이름은 경명(景明), 자는 회연(晦然)이다. 9세 때 출가하여 남해(南海)의 무량사(無量寺)에 들어가 수도 생활을 했다. 22세 때에 선과(禪科)에 급제하고 54세 때에 대선사가 되었다. 78세 때 충렬왕(忠烈王)이 승지(承旨)를 보내어 왕명으로 국사의 예를 갖추고자 하였으나, 굳이 이를 사양하므로 다시 근친의 장군을 보내어 국존(國尊)으로 책봉하고 궁내로 맞이해 들였다. 그러나 그는 궁성에 있기를 싫어하여 노모의 병을 빙자하고 구산(舊山)으로 내려갔다. 84세 되던 1289년 7월 8일 제자로 하여금 북을 치게 하고 자기는 의자에 앉아 여러 승려와 더불어 담소자약(談笑自若)하게 선문답을 하다가 갑자기 손으로 금강인(金剛印)을 맺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높은 덕과 깊은 학문으로 왕의 극진한 존경을 받았으며 많은 사람들의 추상의 대상이었다 한다.

비문에 의하면 그의 저·편저로는, 어록 2권, 게송 잡서(偈頌雜書) 3권, 조동 오위(曹洞五位) 2권, 조도(祖圖) 2권, 대장수지록(大藏須知錄) 3권, 제승 법수(諸乘法數) 7권, 조정 사원(祖庭事苑) 30권, 선문 점송 사원(禪門拈頌事苑) 30권 등 불서(佛書) 80권이 넘었다고 하나 현재 전하는 것이 거의 없고, 어찌 보면 그로서는 희작(戱作)이라 할 수 있어 비문에도 적혀 있지 않은 <삼국유사>만이 유저(遺著)로 전해지고 있다.

<삼국유사>는 모두 5권으로 다음과 같은 체재로 되어 있다.

제 1권: 왕력 제 1(신라·고구려·백제·가락 및 후삼국의 연대표), 기이 제 1(고조선 이하 삼한·부여·고구려와 통일 삼국 이전의 신라의 유사)

제 2권: 기이 제 2(신라 문무왕 이후 통일 신라 시대를 비롯하여 백제·후백제 등에 관한 약간의 유사와 가락국에 관한 유사)

제 3권: 흥법 제 3(불교 전래의 유래 및 고승의 행적), 탑상 제 4(사기와 탑·불상 등에얽힌 승전과 사탑의 유레에 관한 기록)

제 4권: 의해 제 5(고승들의 행적)

제 5권: 신주 제 6(이승들의 전기), 감통 제 7(영험·감응의 영이한 기록), 피은 제 8(은둔한 일승들의 기록, 효선 제 9(효행·선행·미담의 기록)

<삼국유사>의 간행 연대는 확실히 알 길이 없으나 대체로 충렬왕 8년 전후, 즉 서기 1281∼1283년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삼국유사>의 고판본으로는 중종 정덕본과 그 이전에 된 듯한 판각의 영본이 있고, 시간본으로는 일본 토교 대학본, 조선 사학회본, 계명 구락부에서 간행한 육당의 교감본과 또 육당의 증보본이 있다. 그 밖에 안순암 수택의 정덕본을 영인한 일본 교토 대학본과 고전 간행회본이 있다.

이 책의 번역은 중종 임신본(壬申本)을 원본으로 했다. 때문에 흔히 유행되는 육당 증보본과는 간혹 틀리는 곳이 있을 것이다. 원문이 너무도 난해한 구절이 많아 역자로서는 힘에 겨운 작업이었다. 특히 향가의 번역은 더구나 완벽하다고 말할 수가 없다. 하지만 내 딴에는 충실히 다루려고 애썼다. 이번에 판을 바꾸어 내면서 먼저 판 번역에서 잘못된 부분이나 문맥이 매끄럽지 않은 부분은 바로잡아 독자의 이해를 돕도록 하였다. 삼가 제언(諸彦)의 질정(叱正)이 있으시길 빈다.

이 민 수 씀

삼국유사(三國遺事) 차례
제 1권
기이(紀異) 제 1
고조선(古朝鮮) 왕검조선(王儉朝鮮)
위만조선(魏(衛)滿朝鮮)
마한(馬韓)
이부(二府)
칠십이국(七十二國)
낙랑국(樂浪國)
북대방(北帶方)
남대방(南帶方)
말갈(靺鞨)과 발해(渤海)
이서국(伊西國)
오가야(五伽倻)
북부여(北夫餘)
동부여(東夫餘)
고구려(高句麗)
변한(卞韓)과 백제(百濟)
진한(辰韓)
우사절유택(又四節遊宅)
신라시조(新羅始祖) 혁거세왕(赫居世王)
제2대 남해왕(南解王)
제3대 노례왕(弩禮王)
제4대 탈해왕(脫解王)
김알지(金閼智), 탈해왕대(脫解王代)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
미추왕(未鄒王)과 죽엽군(竹葉軍)
내물왕(奈勿王)과 김제상(金(朴)堤上)
제18대 실성왕(實聖王)
사금갑(射琴匣)
지철로왕(智哲老王)
진흥왕(眞興王)
도화녀(桃花女)와 비형랑(鼻荊郞)
천사옥대(天賜玉帶)
선덕왕(善德王)의 지기삼사(知幾三事)
진덕왕(眞德王)
김유신(金庾信)
태종(太宗) 춘추공(春秋公)
장춘랑(長春郞)과 파랑(罷郞)

제 2권
기이(紀異) 제 2
문호왕(文虎(武)王) 법민(法敏)
만파식적(萬波息笛)
효소왕대(孝昭王代)의 죽지랑(竹旨郞)
성덕왕(聖德王)
수로부인(水路夫人)
효성왕(孝成王)
경덕왕(景德王)·충담사(忠談師)·표훈대덕(表訓大德)
혜공왕(惠恭王)
원성대왕(元聖大王)
조설(早雪)
흥덕왕(興德王)과 앵무새
신무대왕(神武大王)과 염장(閻長)과 궁파(弓巴)
제48대 경문대왕(景文大王)
처용랑(處容郞)과 망해사(望海寺)
진성여대왕(眞聖女大王)과 거타지(居타知)
효공왕(孝恭王)
경명왕(景明王)
경애왕(景哀王)
김부대왕(金傅大王)
남부여(南扶餘)와 전백제(前百濟)와 북부여(北扶餘)
무왕(武王)
후백제(後百濟)의 견훤(甄萱)
가락국기(駕洛國記)

제 3권
흥법(興法) 제 3
순도조려(順道肇麗)
난타벽제(難타闢濟)
아도기라(阿道基羅
원종흥법(原宗興法)과 염촉멸신(염촉滅身)
법왕금살(法王禁殺)
보장봉로(寶藏奉老) 보덕이암(普德移庵)
동경흥륜사(東京興輪寺) 금당십성(金堂十聖)

탑상(塔像) 제 4
가섭불연좌석(迦葉佛宴坐石)
요동성(遼東城)의 육왕탑(育王塔)
금관성(金官城)의 파사석탑(婆娑石塔)
고(구)려(高(句)麗)의 영탑사(靈塔寺)
황룡사(皇龍寺) 장육(丈六)
황룡사(皇龍寺) 구층탑(九層塔)
황룡사(皇龍寺)의 종, 분황사(芬皇寺)의 약사(藥師) 봉덕사(奉德寺)의 종
영묘사(靈妙寺) 장육(丈六)
사불산(四佛山), 굴불산(掘佛山), 만불산(萬佛山)
생의사(生義寺) 석미륵(石彌勒)
흥륜사(興輪寺)의 벽화(壁畵), 보현(普賢)
삼소관음(三所觀音)과 중생사(衆生寺)
백률사(栢栗寺)
민장사(敏藏寺)
전후소장사리(前後所將舍利)
미륵선화(彌勒仙花)·미시랑(未尸郎)·진자사(眞慈師)
남백월이성(南白月二聖), 노힐부득(努힐夫得)과 달달박박(달달朴朴)
분황사 천수대비(芬皇寺千手大悲) 맹아득안(盲兒得眼)
낙산이대성(洛山二大聖) 관음(觀音)·정취(正趣), 조신(調信)
어산불영(魚山佛影)
대산(臺山) 오만진신(五萬眞身)
명주(溟州) 오대산 보질도 태자전기(五臺山 寶叱徒 太子傳記)
대산월정사(臺山月精寺) 오류성중(五類聖衆)
남월산(南月山
천룡사(天龍寺)
무장사(무藏寺) 미타전(彌陀殿)
백엄사(伯嚴寺) 석탑사리(石塔舍利)
영취사(靈鷲寺)
유덕사(有德寺)
오대산문수사(五臺山文殊寺) 석탑기(石塔記)

제 4권
의해(意解) 제5
원광서학(圓光西學)
보양이목(寶壤梨木)
양지사석(良志使錫)
귀축제사(歸竺諸師)
이혜동진(二惠同塵)
자장정률(慈藏定律)
원효불기(元曉不羈)
의상전교(義湘傳敎)
사복불언(蛇福不言)
진표전간(眞表傳簡)
관동풍악(關東楓岳) 발연수석기(鉢淵藪石記)
승전촉루(勝詮촉루)
심지계조(心地繼祖)
현유가(賢瑜가), 해화엄(海華嚴)

제 5권
신주(神呪) 제 6
밀본최사(密本최邪)
혜통황룡(惠通降龍)
명랑신인(明朗神印)

감통(感通) 제7
선도성모(仙桃聖母) 수희불사(隨喜佛事)
욱면비 염불 서승(郁面婢 念佛 西昇)
광덕(廣德)과 엄장(嚴莊)
경흥우성(憬興遇聖)
진신수공(眞身受供)
월명사(月明師) 도솔가(兜率歌)
선율환생(善律還生)
김현감호(金現感虎)
융천사(融天寺) 혜성가(慧星歌) 진평왕대(眞平王代)
정수사(正秀師) 구빙녀(九氷女)

피은(避隱) 제 8
낭지승운(朗智乘雲), 보현수(普賢樹)
연회도명(緣會逃名), 문수점(文殊岾)
혜현구정(惠現求靜)
신충괘관(信忠掛冠)
포산이성(包山二聖)
영재우적(永才遇賊)
물계자(勿稽子).
영여사(迎如師)
포천산(布川山) 5비구(五比丘) 경덕왕대(景德王代)
염불사(念佛師)

효선(孝善) 제9
진정사(眞定師) 효선쌍미(孝善雙美)
대성(大城) 효2세부모(孝二世父母) 신문왕대(神文王代)
향득사지(向得舍知) 할고공친(割股供親) 경덕왕대(景德王代)
손순매아(孫順埋兒) 흥덕왕대(興德王代)
빈녀양모(貧女養母)



                                                  삼국유사(三國遺事)

제 1권
기이(紀異) 제1
첫 머리에 말한다.

대체로 옛날 성인(聖人)은 예절과 음악을 가지고 나라를 세웠고, 인(仁)과 의(義)를 가지고 백성들을 가르쳤다. 때문에 괴상한 일이나 힘이나 어지러운 일, 귀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제왕(帝王)이 일어날 때에는 반드시 부명(符命)을 얻고 도록(圖록)을 받게 된다. 때문에 보통 사람과는 다른 점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 뒤에라야 큰 변의 틈을 타서 대기(大器)를 잡아 대업을 이룩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하수(河水)에서 그림이 나왔고, 낙수(洛水)에서 글이 나와서 이로써 성인(聖人)이 일어났던 것이다. 무지개가 신모(神母)의 몸을 두르더니 복희(伏羲)를 낳고, 용이 여등(女登)에게 교접하더니 염제(炎帝)를 낳았다. 황아(皇娥)가 궁상(窮桑)이라는 들판에서 노는데 자칭 백제(白帝)의 아들이라고 하는 신동(神童)이 와서 황아와 교접하여 소호(少昊)를 낳았다. 간적(簡狄)은 알[卵] 하나를 삼키더니 설[契]를 낳고 강원(姜嫄)은 한 거인(巨人)의 발자취를 밟고서 기(充)를 낳았다. 요(堯)의 어머니는 잉태한 지 14개월이 된 뒤에 요(堯)를 낳았고, 패공(沛公)의 어머니는 용(龍)과 큰 연못에서 교접해 패공을 낳았다. 이 뒤로도 이런 일이 많지만 여기에선 다 기록할 수가 없다.

이렇게 볼 때 삼국(三國)의 시조가 모두 신비스러운 데서 나왔다고 하는 것이 어찌 괴이할 것이 있으랴. 이 기이편을 이 책의 첫머리에 싣는 것은 그 뜻이 실로 여기에 있다.

고조선(古朝鮮) 왕검조선(王儉朝鮮)

<위서(魏書)>에 이렇게 말했다.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단군 왕검이 있었다. 그는 아사달(阿斯達; 경經에는 무엽산無葉山이라 하고 또는 백악白岳이라고도 하는데 백주白州에 있었다. 혹은 또 개성開城 동쪽에 있다고도 한다. 이는 바로 지금의 백악궁白岳宮이다)에 도읍을 정하고 새로 나라를 세워 국호(國號)를 조선(朝鮮)이라고 불렀으니 이것은 고(高)와 같은 시기였다."

또 <고기(古記)>에는 이렇게 말했다. "옛날에 환인(桓因; 제석帝釋을말함)의 서자(庶子) 환웅(桓雄)이란 이가 있었는데 자주 천하를 차지할 뜻을 두어 사람이 사는 세상을 탐내고 있었다. 그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태백산(三位太伯山)을 내려다보니 인간들을 널리 이롭게 해 줄 만했다. 이에 환인은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환웅(桓雄)에게 주어 인간(人間)의 세계를 다스리게 했다. 환웅(桓雄)은 무리 3,000명을 거느리고 태백산(太伯山) 마루턱(곧 태백산太白山은 지금의 묘향산妙香山)에 있는 신단수(神檀樹) 밑에 내려왔다. 이곳을 신시(神市)라 하고, 이 분을 환웅천왕(桓雄天王)이라고 이른다. 그는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식·수명(壽命)·질병(疾病)·형벌(刑罰)·선악(善惡) 등을 주관하고, 모든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여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敎化)했다. 이때 범 한 마리와 곰 한 마리가 같은 굴 속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항상 신웅(神雄), 즉 환웅에게 빌어 사람이 되어지기를 원했다. 이때 신웅이 신령스러운 쑥 한 줌과 마늘 20개를 주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일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곧 사람이 될 것이다'했다.

이에 곰과 범이 이것을 받아서 먹고 삼칠일(21일) 동안 조심했더니 곰은 여자의 몸으로 변했으나 범은 조심을 잘못해서 사람의 몸으로 변하지 못했다. 웅녀(熊女)는 혼인해서 같이 살 사람이 없으므로 날마다 단수(壇樹) 밑에서 아기 배기를 축원했다. 환웅이 잠시 거짓 변하여 그와 혼인했더니 이내 잉태해서 아들을 낳았다. 그 아기의 이름을 단군 왕검(檀君王儉)이라 한 것이다. 단군 왕검은 당고(唐高)가 즉위한 지 50년인 경인년(庚寅年; 요堯가 즉위한 원년元年은 무진戊辰년이다. 그러니 50년은 정사丁巳요, 경인庚寅은 아니다. 이것이 사실이 아닌지 의심스럽다)에 평양성(平壤城; 지금의 서경西京)에 도읍하여 비로소 조선(朝鮮)이라고 불렀다. 또 도읍을 백악산(白岳山) 아사달(阿斯達)로 옮기더니 궁홀산(弓忽山; 일명 방홀산方忽山)이라고도 하고 금미달(今彌達)이라고도 한다. 그는 1,500년 동안 여기에서 나라를 다스렸다. 주(周)나라 호왕(虎王)이 즉위한 기묘(己卯)년에 기자(箕子)를 조선(朝鮮)에 봉했다. 이에 단군(檀君)은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뒤에 돌아와서 아사달(阿斯達)에 숨어서 산신(山神)이 되니, 나이는 1908세였다고 한다."

당나라 <배구전(裴矩傳)>에는 이렇게 전한다. "고려(高麗)는 원래 고죽국(孤竹國; 지금의 해주海州)이었다. 주(周)나라에서 기자(箕子)를 봉해 줌으로 해서 조선(朝鮮)이라 했다. 한(漢)나라에서는 세 군(郡)으로 나누어 설치하였으니 이것은 곧 현토(玄토)·낙랑(樂浪)·대방(帶方;북대방北帶方)이다."

<통전(通典)>에도 역시 이 말과 같다(한서漢書에는 진번眞蕃·임둔臨屯·낙랑樂浪·현토玄토의 네 군郡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세 군郡으로 되어 있고, 그 이름도 같지 않으니 무슨 까닭일까?).


위만조선(魏(衛)滿朝鮮)

<전한서(前漢書)>의 조선전(朝鮮傳)에는 이렇게 씌어져 있다. "맨 처음 연(燕)나라 때부터 진번(眞蕃)·조선(朝鮮; 안사고顔師古는 말하기를, 전국戰國 시대에 연燕나라가 처음으로 이 땅을 침략해서 차지했다고 한다)을 침략해서 이를 차지하고, 관리들을 두어 변방(邊方)의 요새(要塞)를 쌓았다. 그 뒤에 진(秦)이 연(燕)을 멸망시키자 이 땅을 요동군(遼東郡) 변방에 소속시켰다. 한(漢)나라가 일어나자 이 땅이 너무 멀어 지킬 수 없다 하여 다시 요동의 옛날 요새(要塞)를 수리해서 쌓고 패수(浿水)로 경계를 삼아(안사고顔師古는 말하기를, 패수浿水는 낙랑군樂浪郡에 있다고 했다) 연(燕)나라에 소속시켰다.

연(燕)나라 왕 노관(盧관)이 한(漢)나라를 배반하고 흉노(匈奴)에게로 들어가니,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은 망명(亡命)해서 무리 1,000여 명을 모아 요동(遼東)의 요새지를 넘어 도망하여 패수(浿水)를 건넜다. 여기에서 진(秦)나라의 옛 빈 터전인 상하(上下)의 변방에 자리를 잡고 살았다. 차츰 진번(眞蕃)·조선(朝鮮)의 오랑캐들과 또 옛날에 연(燕)과 제(齊)에서 망명(亡命)해 온 자들을 자기에게 소속시켜 왕이 되어 왕검(王儉; 이기李寄는 땅이름이라 했고, 신찬臣瓚은 말하기를 왕검성王儉城은 낙랑군樂浪郡의 패수浿水 동쪽에 있다고 했다)에 도읍했다. 위만(衛滿)은 군사의 위력(威力)으로 그 이웃의 조그만 읍(邑)들을 침략하여 항복시켰다. 이에 진번(眞蕃)과 임둔(臨屯)이 모두 복종해 와서 그에게 예속되니 사방이 수천 리나 되었다. 위만은 아들에게 왕위를 전하고 손자 우거(右渠; 안사고顔師古는 말하기를, 위만의 손자 이름이 우거右渠라고 했다)에게 이르렀다.

진번과 진국(辰國)이 한나라에 글을 올려 천자(天子)를 뵙고자 했으나 우거(右渠)는 길을 가로막고 지나지 못하게 했다(안사고顔師古는 말하기를, 진국辰國은 진한辰韓이라고 했다). 원봉(元封) 2년에 한나라에서는 섭하(涉何)를 보내어 우거를 타일렀지만 우거는 끝내 명령을 듣지 않았다. 섭하(涉何)는 그곳을 떠나 국경에 이르러 패수에 당도하자 말을 모으는 구종(驅從)을 시켜서 자기를 호송(護送)하러 온 조선의 비왕(裨王) 장(長; 안사고顔師古는 말하기를, 장長은 섭하涉何를 호송護送하는 자의 이름이라고 했다)을 찔러 죽였다. 그리고는 곧 패수를 건너 달려서 변경 요새를 넘어 자기 나라에 돌아가 이 사실을 보고했다.

한나라 천자는 섭하를 임명하여 요동의 동부(東部) 도위(都尉)를 삼았다. 조선은 섭하를 원망하여 불의에 그를 쳐 죽였다. 천자는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을 보내서 제(齊)에서 배를 타고 발해(渤海)로 건너가 조선을 치게 하니 병력은 5만이었다. 좌장군(左將軍) 순체(荀체)는 요동으로 나와서 우거(右渠)를 쳤다. 우거는 지세가 험한 곳에 군사를 내어 그를 막았다. 누선장군(樓船將軍)은 제(齊)의 군사 7,000명을 거느리고 먼저 왕검성(王儉城)에 이르렀다. 이때 우거는 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누선(樓船)의 군사가 얼마 되지 않는 것을 정탐해서 알고 곧 나가서 누선을 공격하니 누선이 패해 달아났다.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은 군사들을 잃고 산 속으로 도망해서 죽음을 면했다. 좌장군(左將軍) 순체(荀체)도 조선의 패수 서쪽을 쳤지만 깨뜨리지 못했다.

천자는 누선장군과 좌장군의 형세가 이롭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이에 위산(胃散)을 시켜 군병(軍兵)의 위력을 가지고 가서 우거를 타이르게 했다. 우거는 항복하기를 청하고 태자(太子)를 보내어 말[馬]을 바치겠다고 했다. 그리하여 1만여 명이나 되는 병력을 거느리고 바야흐로 패수를 건너려 하는데 사자(使者)인 위산과 좌장군은 혹시 변을 일으킬까 의심하여 태자에게 일렀다. '이미 항복한 터이니 병기(兵器)는 가지고 오지 마시오.' 태자도 사자인 위산이 혹 자기를 속여 해치지 않을까 의심하여 마침내는 패수를 건너지 않고 군사를 데리고 돌아갔다. 이 사실을 천자에게 보고하자 천자는 위산을 목베었다. 좌장군(左將軍)은 패수 상류에 있는 조선 군사를 깨뜨리고 바로 전진하여 왕검성 밑에까지 이르러 성의 서북쪽을 포위했다. 누선장군도 역시 왕검성 밑으로 와서 군사를 합쳐 성 남쪽에 주둔했다. 우거가 굳게 성을 지켜 몇 달이 지나도 함락시킬 수가 없었다.

천자는 이 싸움이 오래 되어도 끝이 나지 않자 옛날 제남태수(濟南太守) 공손수(公孫遂)를 시켜서 치게 하고, 모든 일을 편의에 의해서 처리하게 했다. 공손수는 우선 누선장군을 묶어 놓고 그 군사를 합쳐서 좌장군과 함께 급히 조선을 공격했다. 이때 조선의 상(相) 노인(路人)과 상(相) 한도(韓陶)와 또 이계(尼谿)의 상(相) 삼(參)과 장군(將軍) 왕겹(王겹; 안사고顔師古는 말하기를, 이계尼谿는 지명地名으로 이들은 모두 네 명名이라고 했다)은 서로 의논하여 항복하려 했으나 왕은 이 말을 좇으려 하지 않았다. 이에 한도(韓陶; 음陰)와 왕겹(王겹)은 모두 도망해서 한나라에 항복했고 노인은 도중에서 죽었다. 원봉(元封) 3년 여름에 이계(尼谿)의 상(相) 삼(參)은 사람들을 시켜서 왕 우거를 죽이고 한나라에 항복했다. 하지만, 왕검성은 아직도 함락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거의 대신(大臣)인 성기(成己)가 또 자기 나라를 배반했다. 좌장군(左將軍)은 우거의 아들 장(長)과 노인(路人)의 아들 최(最)로 하여금 자기들의 백성을 타이르고 성기를 죽이도록 했다. 이리하여 마침내 조선을 평정하고 진번·임둔·낙랑·현토(玄토)의 네 군(郡)으로 삼았다.

 

출처 ; http://www.sunslif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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