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한(馬韓)
위지(魏志)에 이렇게 말했다. "위만(魏滿)이 조선(朝鮮)을 공격하자 조선왕(朝鮮王) 준(準)은 궁인(宮人)과 좌우 사람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서쪽 한(漢)의 땅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마한(馬韓)이라고 했다."
또 견훤(甄萱)이 고려(高麗) 태조(太祖)에게 올린 글에, "옛적에 마한이 먼저 일어나고 뒤를 이어 혁거세(赫居世)가 일어났으며, 백제(百濟)는 금마산(金馬山)에서 나라를 세웠다"고 했다.
최치원(崔致遠)은 이렇게 말했다. "마한은 고구려(高句麗)이고, 진한(辰韓)은 신라(新羅)다."(<삼국사기三國史記> 본기本紀에 의하면 신라新羅는 먼저 갑자甲子년에 일어났고, 고구려高句麗는 그 뒤 갑신甲申년에 일어났다고 했다. 여기에 말한 것은 조선왕朝鮮王 준準을 가리킨 것이다. 이것으로 본다면 동명왕東明王이 일어날 때에 마한馬韓까지 차지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때문에 고구려高句麗를 마한馬韓이라고 부른다. 지금 사람들은 혹 금마산金馬山이 있다고 해서 마한馬韓을 백제百濟라고 하지만 이것은 대개 잘못된 말이다. 고구려高句麗 땅에는 본래 읍산邑山이 있었기 때문에 이름을 마한馬韓이라 한 것이다)
사이(四夷)·구이(九夷)·구한(九韓)·예맥(穢貊)이 있는데, <주례(周禮)>에 직방씨(職方氏)가 사이(四夷)와 구맥(九貊)을 관장(管掌)했다고 한 것은 동이(東夷)의 종족이니 곧 구이(九夷)를 말한 것이다.
<삼국사(三國史)>에는 이렇게 씌었다. "명주(溟州)는 옛날의 예국(穢國)이었다. 야인(野人)이 밭을 갈다가 예왕(穢王)의 도장을 얻어서 바쳤다. 또 춘주(春州)는 옛날의 우수주(牛首州)인데 곧 옛날의 맥국(麥麴)이다. 또 혹은 지금의 삭주(朔州)가 바로 맥국(貊國)이다. 혹은 평양성(平壤城)이 맥국이다."
<회남자(淮南子)> 주(注)에는, "동방(東方)의 오랑캐는 아홉 종류나 된다"고 했다.
<논어정의(論語正義)>에는 "구이(九夷)란, 1은 현토(玄토), 2는 낙랑(樂浪), 3은 고려(高麗), 4는 만식(萬飾), 5는 부유(鳧臾), 6은 소가(嘯歌), 7은 동도(同屠), 8은 왜인(倭人), 9는 천비(天鄙)이다"라고 했다.
<해동안홍기(海東安弘紀)>에는, "구한(九韓)이란, 1은 일본(日本), 2는 중화(中華), 3은 오월(吳越), 4는 탁라(탁羅), 5는 응유(鷹遊), 6은 말갈(靺鞨), 7은 단국(丹國), 8은 여진(如眞), 9는 예맥(穢貊)이다"라고 했다.
이부(二府)
<전한서(前漢書)>에 이렇게 말했다. "소제(昭帝) 시원(始元) 5년 기해(己亥)년 두 외부(外府)를 두었다. 이것은 조선(朝鮮)의 옛 땅인 평나(平那)와 현토군(玄토郡) 등을 평주도독부(平州都督府)로 삼고, 임둔(臨屯) ·낙랑(樂浪) 등 두 군(郡)의 땅에 동부도위부(東部都尉府)를 둔 것을 말함이다."(내가 생각하기에 조선전朝鮮傳에는 진번眞蕃·현토玄토·임둔臨屯·낙랑樂浪 등 네 군郡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지금 이 글에는 평나平那가 있고 진번眞蕃이 없으니 대개 한 지방을 두 이름으로 불렀던 것 같다)
칠십이국(七十二國)
<통전(通典)>에 이렇게 말했다. "조선의 유민(遺民)은 모두 70여 나라로 나뉘어 있는데 이들은 모두 땅이 사방(四方) 백 리(百里)이다."
또 <후한서(後漢書)>에는 "서한(西漢)이 조선의 옛 땅에 처음으로 네 군(郡)을 두었다가 뒤에 두 부(府)를 두었다. 법령(法令)이 차츰 번거로워지자 이것을 78개의 나라로 나누니, 이들은 각각 만호(萬戶)였다"했다(마한馬韓은 서쪽에 있어 54개의 조그만 읍邑을 가지고 있었는데 모두 나라라고 불렀다. 진한辰韓은 동쪽에 있고 12개의 작은 읍邑을 차지했는데 모두 나라라고 했다. 변한卞韓은 남쪽에 있어 역시 12개의 작은 읍邑을 차지했는데 이들도 저마다 나라라고 일컬었다).
낙랑국(樂浪國)
전한(前漢) 때 처음으로 낙랑군(樂浪郡)을 두었다. 응소(應邵)는 말하기를 이것을 "고조선국(古朝鮮國)"이라 했다.
<신당서(新唐書)> 주(注)에, "평양성(平壤城)은 옛 한(漢)나라의 낙랑군(樂浪郡)이다"했다.
<국사(國史)>에는 이런 말이 있다. "혁거세(赫居世) 30년에 낙랑(樂浪) 사람들이 신라(新羅)에 항복했다. 또 제3대 노례왕(弩禮王) 4년에 고구려(高句麗)의 제3대 무휼왕(無恤王)이 낙랑(樂浪)을 멸망시키니 그 나라 사람들은 대방(帶方; 북대방北帶方)과 함께 신라에 투항해 왔다. 또 무휼왕(無恤王) 27년에 광호제(光虎帝)가 사자(使者)를 보내어 낙랑을 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郡縣)을 삼으니, 살수(薩水) 이남의 땅은 한(漢)나라에 소속되었다."(이상의 여러 글에 의하면 낙랑樂浪이 곧 평양성平壤城이란 것이 마땅하다. 혹은 말하기를, 낙랑樂浪의 중두산中頭山 밑이 말갈靺鞨과의 경계이고, 살수薩水는 지금의 대동강大洞江이라고 한다. 어느 말이 옳은 지 알 수가 없다)
또한 백제(百濟) 온조왕(溫祚王)의 말에는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에 말갈(靺鞨)이 있다"고 했다.
이는 아마도 옛날 한(漢)나라 때 낙랑군에 소속되었던 현(縣)일 것이다. 신라 사람들이 역시 이곳을 낙랑(樂浪)이라고 했기 때문에 지금 고려(高麗)에서도 또한 여기에 따라 낙랑군부인(樂浪郡夫人)이라 불렀다. 또 태조(太祖)가 그 딸을 김부(金傅)에게 시집보내면서 역시 낙랑공주(樂浪公主)라 불렀다.
북대방(北帶方)
북대방(北帶方)은 본래 죽담성(竹覃城)이다. 신라 노례왕(弩禮王) 4년에 대방(帶方) 사람들이 낙랑(樂浪) 사람들과 함께 신라에 항복해 왔다(이것은 모두 전한前漢 때에 설치한 두 군郡의 이름이다. 그 후에 참람되이 나라라고 불러 오다가 이때에 와서 항복한 것이다).
남대방(南帶方)
조위(曹魏) 때 비로소 남대방군(南帶方郡; 지금의 남원부南原府)을 두었기 때문에 남대방이라 한 것이다. 대방의 남쪽은 바닷물이 천 리(千里)나 되는데 한해(澣海)라고 했다(후한後漢 건안建安 연간年間에 마한馬韓 남쪽의 황무지를 대방군帶方郡으로 삼았다. 왜倭와 한漢이 드디어 여기에 속했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말갈(靺鞨; 혹은 물길勿吉)과 발해(渤海)
<통전(通典)>에 이렇게 말했다. "발해(渤海)는 본래 속말말갈(粟末靺鞨)이다. 그 추장(酋長) 조영(祚榮)에 이르러서 나라를 세우고 국호(國號)를 스스로 진단(震旦)이라고 했다. 선천(先天) 연간(年間; 현종玄宗의 임자년壬子年)에 비로소 말갈(靺鞨)이라는 명칭을 버리고 오로지 발해라고 일컬었다. 개원(開元) 7년(己未)에 조영(祚榮)이 죽자, 그 시호(諡號)를 고왕(高王)이라 했다. 세자(世子)가 대(代)를 이어 왕위에 오르자 명황(明皇)은 그를 책봉하여 왕위를 잇게 했다. 사사로이 연호를 고치고 드디어 해동(海東)의 큰 나라가 되었다. 그 땅에는 오경(五京)·십오부(十五府)·육십이주(六十二州)가 있었다. 후당(後唐) 천성(天成) 초년에 거란(契丹)이 이것을 쳐서 깨쳤다. 그 뒤로는 마침내 거란에게 지배를 받게 되었다."(<삼국사三國史>에는 이렇게 말했다. "의봉儀鳳 3年, 고종高宗 무인년戊寅年에 고구려의 남은 무리가 그 여당餘黨을 모아 북으로 태백산太伯山 밑에 의지해서 국호를 발해渤海라고 했다. 개원開元 20年 경에 당唐의 명황明皇이 장수를 보내서 발해渤海를 토벌했다. 또 성덕왕聖德王 32年, 현종玄宗 갑술甲戌년에 발해渤海·말갈靺鞨이 바다를 건너 당唐나라 등주登州를 침범하자 현종玄宗은 이를 쳤다." 또 <신라고기新羅古記>에 이런 말이 있다. "고구려高句麗의 구장舊將 조영祚榮의 성姓은 대씨大氏이다. 그는 남은 군사를 모아 태백산太伯山 남쪽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발해渤海라고 했다." 위의 여러 글을 상고하건대 발해渤海는 바로 말갈靺鞨의 별종別種이다. 다만 그 갈라지고 합한 것이 서로 같지 않을 뿐이다. 또 <지장도指掌圖>를 상고해 보면 발해渤海는 만리장성萬里長城 동북東北 모퉁이 밖에 있었다)
가탐(賈眈)의 <군국지(郡國志)>에는, "발해국(渤海國)의 압록(鴨綠) ·남해(南海) ·부여(扶餘) ·추성(추城) 등 사부(四府)는 모두 고구려(高句麗)의 옛땅이었다. 신라(新羅) 천장군(泉井郡; <지리지地理志>에는 삭주朔州의 영현領縣에 천정군泉井郡이 있었으니 지금의 용주湧州이다)에서 추성부(추城府)에 이르기까지 도합 39역(三十九驛)이 있다"고 하였다. 또 <삼국사(三國史)>에는 "백제(百濟)의 말년에 발해·말갈·신라가 백제의 땅을 나누어 가졌다"고 했다(이 말에 의하면 발해는 또 나뉘어서 두 나라가 된 것이다).
신라 사람들은, "북쪽에는 말갈이 있고 남쪽에는 왜인(倭人)이 있고, 서쪽에는 백제가 있으니 이것이 바로 나라의 해가 된다"고 했고, 또 "말갈은 땅이 아슬라주(阿瑟羅州)에 연접되어 있다"고 했다.
<동명기(東明記)>에는, "졸본성(卒本城)은 땅이 말갈(혹은 지금의 동진東眞이라 함)에 연접되어 있다. 신라의 제6대 지마왕(祗摩王) 14년(丑乙)에, 말갈의 군사가 북쪽 국경으로 크게 들어와 대령(大嶺)의 성책(城柵)을 습격하고 이하(泥河)로 지나갔다"고 했다.
<후위서(後魏書)>에는, "말갈은 바로 물길(勿吉)이다"고 했고, <지장도(指掌圖)>에는, "읍루(읍婁)와 물길(勿吉)은 다 숙신(肅愼)이다"했다.
흑수(黑水)와 옥저(沃沮)에 대해서는 동파(東坡)의 <지장도(指掌圖)>를 보면 "진한(辰韓) 북쪽에 남북의 흑수(黑水)가 있다"고 했다. 상고하건대, 동명제(東明帝)는 왕위(王位)에 선 지 10년만에 북옥저(北沃沮)를 멸망시켰고, 온조왕(溫祚王) 42년에 남옥저(南沃沮)의 20여 집이 신라(新羅)에 투항(投降)했다. 또 혁거세(赫居世) 52년에 동옥저(東沃沮)가 신라에 와서 좋은 말을 바쳤다고 했다. 그러니 동옥저(東沃沮)란 땅도 있었던 것이다.
<지장도(指掌圖)>에, "흑수(黑水)는 만리장성(萬里長城) 북쪽에 있고, 옥저는 만리장성 남쪽에 있다"고 했다.
이서국(伊西國)
노례왕(弩禮王) 14년에 이서국 사람이 와서 금성(金城)을 공격했다. 운문사(雲門寺)에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제사납전기(諸寺納田記)에 보면, "정관(貞觀) 6년 임진(壬辰)에 이서군(伊西郡)의 금오촌(今오村) 영미사(零味寺)에서 밭을 바쳤다"고 했다. 금오촌은 지금 청도(淸道) 땅이니 청도군(淸道郡)이 바로 옛날의 이서군인 것이다.
오가야(五伽耶)
<가락국기駕洛國記>의 찬贊을 상고해 보면, 자줏빛 끈 하나가 내려와 둥근 알[난卵] 여섯 개를 내려 주었다. 이 중 다섯 개 알은 각 읍邑으로 돌아가고 한 개는 이 성城에 있어서 수로왕首露王이 되었고, 각 邑으로 돌아간 다섯 개는 각각 다섯 가야伽耶의 주인이 되었다 한다. 그러므로 금관국金官國이 이 다섯 개의 수에 들지 않은 것은 마땅하다. 그런데 <본조사략本朝史略>에는 금관金官까지 그 수에 넣고 창녕昌寧까지 더 기록했으니 잘못이다)
아라(阿羅; 야耶라고도 했다)·가야(伽耶; 지금의 함안咸安)·고령가야(古寧伽倻; 지금의 함녕咸寧)·대가야(大伽耶; 지금의 고령高靈)·성산가야(星山伽耶; 지금의 경산京山 혹은 벽진碧珍)·소가야(小伽耶; 지금의 고성固城)이다.
또 본조사략(本朝史略)에는, "태조(太祖) 천복(天福) 5년 경자(庚子)에 오가야(五伽耶)의 이름을 고쳤다. 즉 1은 금관(金官; 김해부金海府로 됨), 2는 고령(古寧; 지금의 가리현加利縣이 됨), 3은 비화(非火; 지금의 창녕昌寧이니, 고령高靈의 잘못인 듯 싶다)요, 나머지 둘은 아라(阿羅)와 성산(星山)이다"했다(위 주注와 같다. 성산星山은 혹 벽진가야碧珍伽耶라고도 한다).
북부여(北扶餘)
<고기(古記)>에 이렇게 말했다. "전한(前漢) 선제(宣帝) 신작(神爵) 3년 임술(壬戌; 전 58) 4월 8일에 천제(天帝)가 흘승골성(訖升骨城; 대요大遼 의주醫州 지경에 있음)에 내려왔다. 오룡차(五龍車)를 타고 도읍을 정하여 왕이라 일컫고 국호를 북부여(北扶餘)라고 하고, 스스로 이름을 해모수(解慕漱)라고 했다.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扶婁)라 하고 해(解)로 씨(氏)를 삼았다. 왕은 뒤에 상제(上帝)의 명령으로 도읍을 동부여(東扶餘)로 옮겼다. 동명제(東明帝)는 북부여(北扶餘)를 계승하여 일어나서 졸본(卒本州)에 도읍을 정하고 졸본부여(卒本扶餘)가 되었으니, 이것이 곧 고구려(高句麗)의 시조(始祖)이다(아래에 보인다).
동부여(東扶餘)
북부여(北扶餘)의 왕인 해부루(解夫婁)의 대신(大臣) 아란불(阿蘭弗)의 꿈에, 천제(天帝)가 내려와서 말했다. "장차 내 자손을 시켜서 이곳에 나라를 세울 터이니 너는 다른 곳으로 피해 가도록 하라(이것은 동명왕東明王이 장차 일어날 조짐을 말함이다). 동해(東海) 가에 가섭원(迦葉原)이라는 곳이 있는데 땅이 기름지니 왕도(王都)를 세울만 할 것이다." 이에 아란불(阿蘭弗)은 왕을 권하여 그곳으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동부여(東扶餘)라 했다.
부루(夫婁)는 늙도록 자식이 없었다. 어느 날 산천(山川)에 제사를 지내어 후사(後嗣)를 구했는데, 이때 타고 가던 말이 곤연(鯤淵)에 이르러 큰 돌을 보고는 서로 대하여 눈물을 흘렸다. 왕이 이상히 여기고 사람을 시켜 그 돌을 들추어 보니 거기에 어린애가 하나 있는데 모양이 금빛 개구리와 같았다. 왕은 기뻐하여 말했다. "이것은 필경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주시는 것이로구나."
그 아이를 거두어 기르면서 이름을 금와(金蛙)라고 했다. 차츰 자라자 태자(太子)로 삼았고 부루(夫婁)가 죽자 금와가 위를 이어 왕이 되었다. 그리고 다음의 위를 태자 대소(帶素)에게 전했다.
지황(地皇) 3년 임오(壬午)에 이르러서 고구려왕(高句麗王) 무휼(無恤)이 이를 쳐서 대소를 죽이니 이것으로 나라가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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