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정 권 한민족정통사상연구소 소장> 우리 역사 깨우기에 바쁩니다 |
2005.04.01 12:00 |
‘우리역사 깨우기’에 일생을 바쳐온 김정권소장(62). 그는 요즘 독도관련 초청강의에 눈코 뜰 새가 없다. 20대, 4-H인으로 “농촌은 뿌리, 도시는 꽃이다. 뿌리가 시들면 꽃도 시든다”며 남도 땅 곳곳을 돌면서 농촌운동을 했고, 30대엔 신협활동으로 서민경제 살리기 운동을 했으며 5,18때는 투사로서 사회운동에 기여하다 40대부터는 역사학자로서 활동해 지금은 국보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김소장. “학문은 잘해야 한다” “학교교육이 오류에 빠져있다”고 말문을 튼 그는 “교육의 지도자, 선생님들도 우리사회변천사의 과정 속에 순수학문을 하기 어려웠고 눈치 살피며 ‘정치적 학문’을 할 수밖에 없었던 사회제약 속에서 성장했다” 면서 “일제강점시대, 국토해방기, 미군정통치기와 대한민국건국 이래 제1공화국에서 제7공화국에 이르기까지 아홉 번이나 격동하는 정부형태의 변혁 속에서 6·25, 4·19, 5·18 등의 큰 사건들을 겪으며 좌우익, 친일친미, 진보보수 등의 이데올로기 속에 역사는 왜곡될 수밖에 없었다”고 안타까워했다. 이어 “역사를 알면 예지능력이 생긴다”는 김소장은 “역사는 외우는 역사가 아닌 ‘생각하는 역사’여야 하고 나열식이 아닌 유적과 유물을 통한 생활사와 문화를 통한 정신사, 그리고 사건을 통한 정치사를 입체적으로 구성하여 그 시대에 들어가서 보는 사관의 관점이 중요하다”면서, 자신은 “눈앞에서 펼쳐진 80년 광주민주화운동이 반란사태로 왜곡되어지는 시대를 경험하고 민족혼을 일깨우는 ‘사실역사의 재조명’을 위해 산자로서 마땅히 희생해야겠다는 결심을 앞당기게 되었다”고 회상했다. 그간 그의 역사강의를 들은 청중만도 약160만 명에 달 한다. 우리나라에는 5백여 개가 넘는 역사 관련단체들이 있다. 그중 원로들의 학회 몇몇을 제외하고는 80년대 후반부터 생겨난 고구려연구회를 비롯해 대부분이 그의 강의를 접한 동지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어 그가 우리나라 역사를 재발견하는데 ‘씨알’의 역할을 공고히 했음을 인정받고 있다. 김소장은 “60년대 말, 김홍일장군 등과 ‘민족중흥회’을 만들어 역사연구를 하다가 고구려사에 비중을 두고 연구했다는 이유로 반공법의 적용을 받아 옥고를 치뤘던 복초 최인선생께 안양농민교육원(농촌문화연구소)에서 한국학(역사의 재발견)을 사사했다”면서 “자랑스러운 우리 민족사가 왜곡됐음을 안 순간, 우리역사연구에 집착하게 됐다”고 역사연구의 동기를 밝혔다. 이어 “독도는 역사적으로 5세기부터 신라가 우산도로 편입했고, 조선왕조실록 등에 ‘우리땅’으로 기록됐다”는 그는 “16~19세기 무렵에는 ‘자산도’ 혹은 ‘삼봉도’라 불리기도 하다가 석도(石島) 즉 독도(돌섬)로 썼다고 강조한다. 19세기말 대한제국정부의 ‘대한여지도’에서도 울릉도와 독도를 그려 넣고 독도에 우산(于山)이라 했다”면서 “1905년 일본은 정한의 저의를 품은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고 러일전쟁을 미국의 도움으로 유리하게 끝내면서 노골적으로 조선침략의 제1보를 내딛는 상징성을 띄며 울릉도를 지칭하던 ‘다케시마’라는 이름을 ‘독도’에 옮겨 붙이고 1906 최초로 시네마현에 편입했다”고 설명했다. 특히 “한일의정서 작성 후 일본의 횡포에 두려워하던 우리 조정이 독도를 시네마현에 편입한 것에 대해 항의하지 못했던 것이 ‘묵인’하게 된 결과를 낳게 됐다” “그러나 그 후 순종(융희)때에 이르러서 어업관련 모든 서적에서 ‘독도를 우리 땅’이라고 기록하고 선포했을 때는 일본 측이 묵인했다”는 사료증언을 한 그는 “일본의 속내야 뻔히 아는 바이지만 이런 모든 진실을 다 알고 있는 미국이 중립적 입장에 서서 독도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고 있는 저의에 더 큰 의혹이 있다. 국제분쟁으로 이끌려는 일본과 우리나라의 중간에서 ‘어부지리’를 노리는 미국을 주시 한다”고 말해 미국에 대한 많은 시사점을 남겼다. 한편 “고구려 문제는 독도보다 더 심각하다“는 김소장은 고대 모든 기록에는 고구려가 우리 땅임을 증명하지만 일제이후 변절된 우리 사학계는 다분히 신라위주의 역사관으로서 고구려를 남진의 침략자로 기술하는가 하면 요녕성의 갈석산에서 시작되는 만리장성마저도 우리나라 황해도의 사리원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병도학파의 왜식사학계에 문제가 있다”라고 지적하면서 “고구려와 신라인의 조상이 되는 소호금천씨와 동이족의 역사와 동이문자(韓文을 漢文으로 歪曲)까지 중국에 상납하고 우리상고사를 배척하는 역사학계는 반성해야한다”고 질타했다. 담양군 창평 출신인 김소장,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항상 1번인 자신의 왜소함 때문에 “몸집이 작은 만큼 크게 생각하고, 체중이 가벼운 만큼 무겁게 행동하자!”며 스스로 좌우명을 가슴에 품을 만큼 범상치 않은 아이였다. 하지만 어머니를 간호하느라 중학교에 입학한 해에 60일을 결석했다. 그럼에도 돌아가신 어머니, 2학년때도 어머니 대신 갓난 누이를 길러야했다. 그러나 야속하게 누이마저 가버리자 3학년 후학기는 학교에 가는 것을 아예 포기하고 방황하기 시작했다. 졸업식에는 꼭 오라는 연락을 받았지만 “그 깐 졸업장이 뭐야? 하고 불참했다. 그럼에도 졸업장을 보내온 광주살레시오가 철이 들면서부터는 눈물겨운 모교로 심중에 자리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그의 눈시울은 이미 젖어있었다. 그에게 16살은 특별하다. 새어머니와 갈등이 기폭제가 돼 아버지께 뼈아픈 ‘훈계’의 말씀을 듣고 아무도 없는 뒷동산에 올라가 해가 넘어져갈 때까지 한없이 울고 또 울었다. 며칠 후 “아버지께 10년 단위로 여든 살까지의 ‘인생설계서’를 작성하여 드리고 이제는 필요한 사람이 되겠노라고 맘먹었다”고 고백한 그는 “그 후 어느 곳에서든 ‘정의’라고 판단되면 자신을 올인하며 아버지께 드린 계획서대로 살고자 노력했다”고 회상한다. 현재 한국4-H원로회의 공동대표이기도 한 그는 청년시절 4-H를 통해 농업기술과 야학으로 상록수역할을 했고, 전남 4-H역사상 대통령상 봉황기를 처음으로 받았다. 전남농민의 사기진작과 농도(農道)로서의 명예를 드높였다고 금남로를 꽉 메운 시민들의 박수와 환호를 받으면서 상무군악대를 따라 퍼레이드로 농성동 진흥원까지 행진하던 생각을 하면 지금도 가슴이 뛴다고. 30대엔 함석헌 선생의 ‘씨알의 소리’를 전하며 유신독제에 대항하고, 신용협동조합운동을 통해 풍요로운 삶을 지향했다. 어디서든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한 그는 신용협동연합회의 자원지도역을 맡았고 광주밀알신협, 광주, 목포 YWCA , 광주, 해남 YMCA, 등 멀리 압해도까지 광주전남에 72개의 임의조합(법인등기 전의 조합)을 다니며 교육하고 설립했다. 또 5·18때 시민방송과 질서유지를 도우며 끝까지 도청과 분수대를 떠나지 않아 ‘광주투사의 대명사’로 알려지기도 한 그는 “84년 12대 화순곡성담양 국회의원으로 출마해 당시 상황에서 5·18을 과감하게 규탄하고 폭로했으며 “녹두색 두루마기를 입고 마치 녹두장군처럼 유세장을 포효했다”는 이야기를 할 때는 멋쩍게 웃기도 했다. 하지만 “5·18과 관련 어떤 명예나 혜택도, 동지들의 영전에 산자로서의 죄스러움 심정으로 논할 수 없었다”는 그는 “5·18을 ‘폭도’ ‘소요사태’ ‘고정간첩과 무장공비가 손잡은 반란’이라고 왜곡되어진 서울의 민심을 보면서 ‘결코 진실을 밝히겠다’며 모든 것을 걸었고, 자녀들까지 온 가족이 나서서 민주화투쟁과 더불어 몸싸움을 하다가 속칭 닭장차를 수없이 탔고, 경찰서마다 돌며 흩어진 가족을 찾으러 다니는 경우도 있었다”고 회고했다. 80년대, 그의 외로운 외침을 보며 ‘기인’ ‘역사에 미친 광인’이라 했다. 그러나 그는 어떤 권력이나 배 고품에도 굴하지 않고 ‘대한민족사관연구회’를 통해 초대문교부장관이던 안호상박사와 임승국교수, 최태영박사 등의 원로들로부터 역사 강론을 펴기 시작한다. 이어 ‘한국정통사상연구소’설립하고 이유립 선생의 제자들과 만나서 ‘사단법인 한배달’ 창립회원으로 참여했으며 민족통일을 대비해 ‘사단법인 고구려연구회’ 등을 설립했다. 돌아보면 ‘미약하고 팍팍한 싸움’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서울대학을 비롯 58개 대학과 국방부와 군사령부, 국가기관, 경영자협의회 그리고 기업체들을 통해 하루에도 두 세군데 씩 강의를 하며 전국을 누볐다. 근래에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비한 고구려사특강과 일본의 ‘독도영유권도발’과 역사교과서 왜곡에 대응하는 강의를 폭넓게 펼치며 역사의 진실을 이끌어 가고 있다. 동학혁명과 광복운동에 참여했던 할아버지. 그에게 “아무리 지식이 많고 훌륭한 생각을 해도 원초적으로 자기를 지킬 힘이 없으면, 그것을 탐내는 자에게 이용당하고 만다”면서 7살 때부터 단전호흡을 시작으로 유도, 검도 등을 깨우쳐 주셨다. “할아버지의 얼을 많이 이었다”는 그는 70이 되면 향리 선산이 있는 곳에 가서 민족사관정립의 산실역할을 할 연구소를 건립하여 후학을 양성하며 여생을 보내리라 한다. 그가 “이제라도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시마네현 독도조례 제정이 자극제가 되어 역사에 대한 국민적 눈뜸이 시작된다면 퍽 다행이다”라고 말 하는걸 보면서 그의 삶이 “오직 민족번영의 주류인 씨알들에게 민족혼의 불씨를 지피는 일이구나!”에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근세사에 ‘역사 찾기의 산증인’이 될 그의 인생이 귀하고도 기대된다. |
출처 : | 낙송의 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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