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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日人마을, 알고보니 첩보 본부?

영지니 2007. 12. 31. 23:31

 

 

부산의 日人마을, 알고보니 첩보 본부?

왜관
다시로 가즈이 지음
정성일 옮김 | 논형 | 367쪽 | 1만8000원

지금의 부산 용두산공원 일대 10만평에 1678년부터 1872년까지 무려 200년 동안이나 ‘일본인 마을’이 존재했다. 왜관(倭館). 조선시대 일본인의 입국과 교역을 위해 설치했던 장소다. 조선 정부가 그런 장소를 만들어 준 이유는 명백했다. ‘일본인들을 가둬두기 위해서’였다. 바다를 건너 온 그들이 내국인과 섞이는 것을 막으려고 한 것이었다.

조선 초기의 왜관은 임진왜란으로 인해 폐쇄됐다. 1609년 기유약조로 다시 국교가 열리자 왜관은 지금의 부산 수정동 일대에 복구된다. 그리고 1630년부터 무려 30여 년에 걸친 끈질긴 교섭을 통해 왜관의 확장 이전이 실현된다. 그것이 이른바 ‘신(新) 왜관’으로 불리운 초량(草梁) 왜관이었다. 이곳은 이른바 ‘쇄국 시대’의 일본이 일본 땅 밖에 두었던 유일한 일본인 마을이었다.

과연 200년 동안 그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한일관계사 전공인 다시로 가즈이(田代和生) 일본 게이오대 교수는 방대한 자료와 실증적인 분석을 통해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공백’을 파고든다. 외관상으로 분명 닫힌 공간이었던 초량 왜관은 오히려 양국간의 문화와 정보가 교류하는 역할을 했다.

경계를 몰래 빠져 나온 일본인들은 한가롭게 등산을 하거나 시를 읊는가 하면, 조선 수군이 실시하는 방위훈련도 관찰한다. 현실은 조선 정부의 뜻대로 되지 않았던 것이다. 조선의 요리상과 김치가 일본인들에 의해 기록되는가 하면, 일본 술과 스기야키 요리에 맛을 들인 조선인도 생겨나게 된다.

 

 
▲ 작자 미상의‘초량왜관도’. 1678년부터 약 200년 동안 부산포에 존재했던 초량 왜관은 조선과 일본의 문화·정보가 교류하는‘열린 공간’의 역할을 했다.
일본인들이 왜관을 통해 바랐던 1차적 목적은 ‘무역’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일본측의 끈질긴 ‘애걸’로 조선측이 ‘특혜’를 베풀어 준 것 같지만, 실상은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사실상 이 무역의 주체는 대마도주 소(宗)씨였고, 그들은 국서(國書) 위조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역을 확장해 막대한 이득을 챙겼다. 반드시 조선산(産)에 매력을 느낀 것도 아니었다. 1684년의 경우 일본이 조선으로부터 사들인 전체 물품의 액수 중 중국산이 80%나 됐다.

이 책에서 가장 놀라운 부분은 6장 ‘조선을 조사하다’다. 도쿠가와(德川)막부 8대 쇼군 요시무네(吉宗)는 조선의 의학서적 ‘동의보감’을 손에 넣은 뒤 그 책에 나오는 약재를 조사하라고 대마도측에 지시했다.

대마도는 왜관을 근거로 1721년부터 30년 동안 한반도의 동식물을 조사한 끝에 1200여종의 약재를 확인했고, 이것이 일본의 근대적 생물 실태조사의 실마리가 됐다. 뿐만 아니다. 조선에만 있던 인삼을 일본 땅에 재배하고자 몰래 씨앗과 뿌리를 빼내가기도 했다. 조선인 역관과 상인들은 돈을 받고 그런 일들을 도와주고 있었다. 조선 정부는 이런 일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유석재기자 karma@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