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야할한국사

우리역사 바로알기 --단군 조선의 개국.

영지니 2007. 12. 31. 23:28

우리역사 바로알기 --단군 조선의 개국.

실체가 없는 역사

해방 이후 지금까지 한국의 강단 사학계는 우리 겨레의 시원을 단군에 두고있으면서도 이를 신화적 사간으로만 해석하여 [단군과 고조선] 이라는 이름만 있을뿐 그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 망령된 사관을 고수하고 있다.

 

우리의 역사 인식이 이렇게 까지 된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으나, 과거의 사대. 모화 의식에 물든 지식층과 일제가 만들어 놓은 식민사관을 그대로 계승한 학자들이 잘못된 틀을 만들어 놓고 그 틀에 부합하지 않는 사료적 근거나 자료를 무조건 배격해온 것이 가장 큰 원인이다. 이들은 현존하는 자료들을 놓고도 그 진실성과 의미를 밝혀 내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지엽적인 허점을 찾아내 핵심적인 내용까지 모두 부정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라면 중국 고대사도, 25 사도 전부 부정 되어야 옳을 것이다. 위대한 (?) 중국의 역사는 모두 사실로 인정하고, 자기 민족의 역사는 뿌리째 부정하는 이러한 논리가 존재 한다는 것은 아직도 사대. 모화 의 어두운 불행이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 이다. 중국의 문헌 가운데 우리의 역사를 사실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대목은 전부 부정하면서 왜곡. 과장 된 중국측의 주장은 아무런 검증 없이 무조건 수용하고 있는 한국의 사학자들은, 한마디로 중국 시학의 양자 들이다.

중국의 25사 중 첫 번째인 [사기] 에도 [조선] 이라는 국호가 등장하고 국내외의 수많은 고서에서도 [조선]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국내의 사학계를 주름잡고 있는 학자들은 이러한 [단군조선] 의 실체를 부정하고, 오히려 중국인들이 단군조선에 와서 왕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기자조선 이나, 위만조선 따위는 절대적으로 신봉함으로써 중국 역사의 대변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장구한 [환단] 의 역사를 [고조선] 이라는 유령같은 한마디로 얼버무리면서 우리의 고대사를 끝없는 어둠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한심한 작태를 언제나 그만둘것인가?

유교에서는 요임금을 순임금과 함께 성인으로 받들며 태평성세의 본보기로 삼고 있다. 이러한 요임금과 [단군조선] 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삼황오제중 헌원의 손자라는 제곡고신이 죽고난 뒤 [지]가 제위에 올랐으나 정사를 잘 살피지 못한다 하여 쫒겨나고 다시 요임금이 제위에 올랐다. [단군왕검]이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조선] 이라 한 것은 요임금이 즉위한지 25년이 되는 기원전 2333 년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삼국유사] 는 [위서]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2천년전에 단군왕검 이 아시달에 도읍하고 나라를 세워 국호를 조선 이라 하였다. 이는 당고 (요임금) 와 같은 시기이다.]

중국의 학자 동작빈 은 은나라의 유적에서 발굴된 갑골문 연구의 권위자로서, 갑골문에 나타난 일식과 월식 등의 기록을 근거로 고대 제왕들의 연표를 작성한 인물이다. 그에 따르면 BC 2333년[ 무진년이 바로 단군이 아사달에 도읍하고 나라를 세운 원년이다.

[단군 기원으로부터 현재까지의 연대수를 아주 쉽게 계산할수 있다. (...) 중국의 기원은 황제훤원 으로부터 시작하였다. 요임금 1 년이 갑진년이녀 25 년이 무진년인데, 무진년은 기원전 2333 년에 해당한다. 이것이 곧 [단군기원] 년수이다.]

청구국(배달국) 의 마지막 18 대 거불단 한웅을 일명 [단웅] 이라고하는데, 그 단웅과 [웅족] 의 여왕 사이에서 테어난 사람이 바로 [단군왕검] 이다.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단군조선] 의 역사를 전하는 문헌으로는 [단기고사] [단군세기] [규원사화] 등이 있다.


이들 문헌은 공히 [단군 47] 대 2,096 년에 으르는 장구한 역사를 전하고 있으며, 이중에서 특히 고려말에 [행촌 이 암] 이 저술한 [단군세기] 는 역대 단군들의 재위 기간에 있었던 사실을 편년체로 기록하고 있는 귀중한 문헌이다.

이제 이러한 사서들에 기록된 내용을 국내외의 고대 문헌들을 참조해 가며 하나씩 검증해 보자.

실증 한단고기 발췌.

* 단군세기 로 계속 이어집니다.



출처 : 덤장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