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소설

김운회의 ‘삼국지(三國志) 바로 읽기' <6>

영지니 2010. 4. 15. 19:20

김운회의 ‘삼국지(三國志) 바로 읽기' <6>

신(神)이 된 관우


[
들어가는 글]

아카데미상을 받아서 더욱 유명해진 ‘와호장룡(臥虎藏龍: 2000년, Crouching Tiger, Hidden Dragon)’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와호장룡은 “영웅과 전설은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있다”라는 의미의 중국의 속담이죠. 이 영화는 청나라 최대의 혼란기 19세기 말 무림(武林)을 차지하기 위한 암투를 그린 것입니다.

‘와호장룡’에서는 하늘을 나는 것은 기본이고 새처럼 나무 가지 끝에 매달려 몸싸움을 하기도 하고 절벽을 건너뛰고 물 속으로 들어가서 칼싸움을 벌이기도 합니다. 과거 일본 닌자 영화에서는 하늘을 나는 데 칼집을 이용하여 발을 구른다든지 하는 액션을 취하지만 와호장룡은 새보다 가볍게 하늘을 날아다닙니다. 과거 일본의 닌자(忍者) 영화들은 하늘을 난다기보다는 점프를 남들보다는 좀 더 길게 한다는 식이었지요.

현재까지 중력을 무시하고 사람이 하늘을 나는 예는 없지요. 바로 얼마 전 모 방송국에서 공중에 3초만이라도 떠 있을 수 있으면 백만 달러를 주겠다고 현상금을 걸었는데 아무도 이것을 통과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제가 배웠던 명상들 가운데 인도의 어떤 것은 단학과 같이 몸을 약간씩 튀어 오르게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3초에 미치지 못합니다.

어쩌면 여러분 대부분이 사랑하시는 관우의 무공도 와호장룡식 무공이 아닐까요? 나관중 ‘삼국지’에서 관우는 하늘을 날지 못한다 뿐이지 나머지는 와호장룡의 주윤발(周潤發 [저우륜파])과 별로 다를 바 없지요. 이 점에서 아마 관우는 형가(荊軻)와 더불어 황당무계한 중국 무협지의 원조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1) 와호장룡식 무공(武功) : 관우

저는 어릴 때 관우의 무공을 많이 듣고 자랐습니다. 이것은 비단 저뿐만은 아니겠지요. ‘삼국지’에서 가장 무공이 뛰어난 사람이 여포인가, 관우인가, 하는 식이죠. 그런데 여포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관우를 무공이 가장 뛰어난 장수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으로 봅니다.

관우(162?~219년)는 지금의 산서성(山西省)에서 태어나 탁현(현재의 베이징 부근)에서 유비를 만나, 장비와 함께 의형제를 맺고, 평생 그 의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유비가 조조(曹操)에게 패하였을 때, 관우는 사로잡혔지만 원소(袁紹)의 부하 안량(顔良)을 베어 조조의 후대에 보답한 다음 유비에게로 돌아갑니다. 관우는 형주에 남아서 촉을 방어하다가 손권군의 공격을 받아 사로잡힌 후 참수되었습니다. 최근의 보도에 따르면 관우의 67대손을 찾았는데 호북성(湖北省) 공안(公安)현의 농부 관충금(關忠金·71)이라고 합니다.

관우가 천하의 무공을 자랑하는 대표적인 장면들을 모아 봅시다. 먼저 관우는 동탁 토벌전에 참가하여 술이 식기 전에 화웅(華雄 : ? ~191)의 목을 베고 돌아와 술을 마십니다. 백마에서 안량이 칼자루를 잡기도 전에 관우의 청룡도가 휙 하고 허공을 가르니 안량이 피를 흘리며 떨어지고 관운장은 무를 자르듯이 안량의 머리를 베어 옵니다. 이어 관우가 문추의 등 뒤에서 공기를 가르는 순간 문추의 머리통이 굴러 떨어집니다. 관우는 두 형수를 모시고 5관문을 통과하면서 여섯 명의 위나라 장수들을 단칼에 죽입니다(이 장면은 와호장룡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주윤발은 겨우 몇 명의 고수들과 싸우는데 반해서 관우는 수백 명의 군사들을 상대로 하면서도 큰 동작도 없이 선봉의 장수들을 그저 두 동강씩 내고 맙니다).

정사에도 “관우는 안량의 깃발과 마차의 덮개를 보고 있다가 말을 달려 많은 병사들 사이에 있는 안량(顔良)을 찌르고 그의 머리를 베어 돌아왔다(촉서, 관우전).”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를 보면 관우의 무예가 상당하다는 것을 알 수는 있습니다. 관우를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은 정사의 기록에 “관우는 화살에 왼쪽 팔이 관통된 적이 있어 의원의 권고에 따라 팔을 절개하고 뼛속의 독소를 제거하게 했는데, 팔의 피가 흘러 그릇에 가득했지만 관우는 평상시처럼 웃으면서 담소하였다(촉서, 관우전).”라는 내용입니다. 인내심이 대단한 사람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나관중 ‘삼국지’에 나타난 그 수많은 관우의 무공 가운데 정사에서 검증된 사실은 안량을 죽인 것 말고는 이렇다 할 내용이 없습니다. 219년 홍수가 나서 우금이 통솔하는 칠군(七軍)이 투항을 한 예는 있지만, 이것은 관우의 무공과는 별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이 당시 관우의 위세는 중원을 진동하여 조조가 허도를 떠날 것을 고려했다는 말이 있는데(촉서, 관우전) 위서 무제기에는 그런 사실이 없지요. 화웅도 관우가 죽인 것이 아니라 손견(孫堅)에 의해 죽었지요. 문추도 관우에게 죽은 사실이 없습니다(오관참장은 다음 항목에서 상세히 다루지요).

그런데 우리가 유념해야 하는 것은 관우의 무공에 대한 기록이 이상에 불과한데 그나마 촉서(蜀書)에 있다는 것입니다. 정사의 기록 가운데 촉의 기록이 상대적으로 부실한 편이지요. 왜냐하면 촉나라에는 엄격한 의미에서 사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진수는 촉서를 편찬할 때 의지할만한 기록이 없어서 애를 먹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관우의 무용을 전하여주는 유일한 안량 참수 기록이나 관우의 팔 치료에 대한 내용도 어쩌면 과장되었을 수도 있다는 말이지요.

정사의 기록 가운데서도 본기(本紀)라고 할 수 있는 [위서] ‘무제기’에는 “조조는 장료와 관우를 선봉으로 삼아서 원소의 군대를 격파하고 안량을 죽였다.”라고 만 되어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진수가 기록한 ‘관우전’ 내용의 일부는 당시 촉 사람들에게 구전(口傳)으로 내려오는 것을 채록했을 가능성도 있지요. 불과 1백 년 전만 해도 녹두장군이 구름을 타고 다녔다고 믿는 사람이 많았지 않습니까? 구전을 믿는 데는 신중해야 하겠죠.

관우의 무공의 정도를 논하는 분들이 많은데 시간이 있으시면 장료(張遼), 서황(徐晃), 감녕(甘寧) 등을 비롯한 여러 장수들의 실제 기록들을 보시죠. 관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한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적어도 무공과 관련해서는 관우를 능가하는 사람들이 비일비재합니다. 그리고 ‘삼국지’시대 4백 년 전에 항우(項羽)는 “검술은 단지 한 사람을 적으로 함에 그칩니다.”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한 사람의 무공이 아무리 뛰어나도 그가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3~5인을 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사족이지만 조조가 관우를 두려워했다거나 적벽대전에서 패배하여 관우에게 사로잡혀 목숨을 구걸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것은 모두 지어낸 이야기이죠.

(2) 전쟁 통에 형수들 모시고 유람하기

나관중 ‘삼국지’를 가장 재미있게 만드는 대목이자 관우의 무공이 가장 큰 빛을 발한 것은 관우가 두 형수를 모시고 5관문을 통과하면서 혼자서 여섯 명의 장수를 단칼에 죽이는 장면일 것입니다. 저는 어릴 때 이 장면을 밤새워 읽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비슷한 경험을 가지고 계실 겁니다. 이 사건을 통상적으로 오관참장(五關斬將)이라고 하지요. 오관참장은 나관중 ‘삼국지’의 대표적인 사건으로 관우가 여러 유혹을 뿌리치고 의연하게 유비를 찾아가는 대목인데, 이것은 관우를 오늘날 대표적인 충의지사가 되게 한 부분입니다.

오관참장은 관우의 탁월한 무공과 용맹성을 보여줍니다. 나관중 ‘삼국지’에 따르면 관도대전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데 관우는 자신을 마치 구세주를 모시듯 환대해준 조조를 분연히 뿌리치고 형수들을 안락한 마차에 모시고 유비를 찾아 떠납니다. 마치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 ‘황야의 무법자’나 아놀드 슈워제네거의 ‘터미네이터’를 연상시킵니다. 일단 나관중 ‘삼국지’에 나타난 오관참장의 구체적 상황을 보시죠.

동령관(東嶺關)을 지날 때 위나라 공수(孔秀)가 이끄는 5백인의 군사를 관우는 홀로 대적하였는데 청룡도가 햇빛에 번쩍하니 공수가 죽고 군사들은 모두 도망갔다.

낙양관(洛陽關)을 지날 때 태수 한복(韓福)은 부장 맹탄(孟坦)과 1천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관우를 막았으나, 관우는 단칼에 맹탄의 몸을 두 동강내고 한복을 내리치니 한복이 말에서 떨어지고 병사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갔다.

기수관(沂水關)을 지날 때 장수 변희(卞喜)는 도부수 2백인을 매복하고 공격했지만 관우가 변희를 단칼에 두 동강을 내자 병사들이 다 도망갔다.

형양관(滎陽關)을 지날 때 태수 왕식(王植)은 1천 군마를 매복하여 공격하자 역시 단칼에 왕식을 두 동강내고 말았다.

활주관(滑州關)에 이르러 하후돈의 부장인 진기(秦琪)가 군사를 몰고 오자 관우는 단칼에 진기의 목을 베었고 이에 놀라 군사들이 도망갔다.

이상이 오관참장의 내용입니다. 오관참장은 관도대전(200년)이 진행되던 때 일어난 것인데, 먼저 관도 대전의 상황을 보죠.

서기 200년 2월, 여양으로 진군한 원소는 안량(顔良)에게 명령하여 백마(白馬)를 공격하면서 관도대전이 시작됩니다. 관도대전은 백마ㆍ연전전투(조조의 기습전) → 관도 수성전(지구전) → 오소전투(보급로 파괴) 등의 순서로 전개됩니다. 백마ㆍ연진 전투는 기습전으로 조조가 승리를 거두는데 이 때 장료와 관우가 큰 역할을 합니다. 조조의 급습을 받은 안량의 부대는 대파되고 그 원소의 맹장 안량도 전사합니다. 이후 조조가 허창(허도)의 입구인 관도를 굳게 지키자, 전쟁은 지구전의 양상을 띠게 됩니다. 관우가 유비에게로 탈출해서 돌아간 것은 이때의 일입니다.


나관중 ‘삼국지’는 관우가 형수들과 함께 황하쪽 오관(五關)으로 갔다고 했는데, 이것은 받아들이기 곤란합니다. 즉 관우가 두 형수를 모시고 동령관(東嶺關: 당시에는 없었던 지명) → 낙양관(洛陽關) → 기수관(沂水關: 당시에는 없었던 지명) → 형양관 (滎陽關: 하남성 동북쪽) → 활주관(滑州關: 하남성 활현) → 황하의 경로로 갔다가 다시 역으로 방향을 틀어서 여남(汝南)으로 내려 갔다고 하는데 이것은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은 경로라 불가능합니다.

특히 형양관이나 활주관 방향은 당시 관도대전이 진행 중이라 많은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즉 허창을 기준으로 약 450Km이상을 북쪽으로 올라갔다가 유비가 원소 진영을 떠났다(탈출?)는 말을 듣고 다시 여남 땅을 향하여 남쪽으로 약 300Km 이상이나 되는 길을 전란 중에 두 형수를 마차로 모시고 남북으로 오르고 내려갔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한국 전쟁이 한창 되는 중에 두 형수를 모시고 서울에서 신의주로 갔다가 다시 대전으로 내려오는 격입니다. 아무래도 좀 심합니다.

정사 어느 구석을 봐도 오관참장을 입증할 내용은 없습니다. 오관참장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가공의 인물들이며 지어낸 사건들이죠. 어쩌면 중국인들의 대륙적인 허풍이 가장 잘 드러난 대목입니다. 이 사건은 관우의 와호장룡식 무공과 유비에 대한 의리가 클라이맥스에 이르고 있는 대목으로 관우의 연기가 절정에 달한 대목입니다. 그런데 어쩌죠. 그 내용은 와호장룡처럼 모두 꾸며낸 것이니.

그러면 당시의 실제 관우 모습은 어떠했을까요? 두 가지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전쟁 중에 홀로 원소진영으로 내달려 투항한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만약에 나관중 ‘삼국지’를 조금이라도 인정하여 자기의 가족과 유비의 가족들을 데리고 갔다면, [그림]과 같이 허창에서 바로 여남으로 향하는 남행(南行) 길이었을 가능성이 있지요. 먼저 실제 기록들을 대조해봅시다.

“(안량과 문추가 모두 죽자 원소의 군대는 크게 동요했고, 조조는 군대를 돌려 관도로 보냈다.) 원소가 진군하여 양무(陽武)를 지키자 관우는 유비에게로 도망을 쳤다(紹進保陽武 關羽亡歸劉備: 위서, 무제기)”

“(관우는) 고별의 편지를 써 놓고 원소군 속의 유비에게 달려갔다(拜書告辭, 而奔先主於袁軍 : 촉서, 관우전).” 이 당시에 조조는 “사람들은 각기 주인이 있으니 쫓지 말라”고 하였다고 합니다(관우전).

그런데 [촉서] '선주전(유비전)'에 보면, “(조조가 원소와 관도에서 서로 대치하고 있을 때) 여남의 황건적 유벽 등이 조조를 배반하고 원소에게 호응했다. 원소는 유비를 파견해서 유벽 등과 허현 주변을 탈취하도록 하였다. 관우는 유비가 있는 곳으로 도망쳐 돌아왔다. (汝南黃巾劉?等叛曹公應紹紹遣先主將兵與?等略許下 關羽亡歸先主 )”라고 합니다. 같은 촉서인데도 관우전과는 약간의 차이가 나타납니다.

결론이 이렇든 저렇든 관우는 조조의 온갖 환대에도 불구하고 분연히 유비를 찾아서 형수들을 모시고 떠나 오관에서 자신을 막는 여러 장수들을 단칼에 죽이고 유비와 감격의 재회를 한 것이 아니라 단신으로 원소 진영으로 내달려 도망쳤거나, (유비 가족을 이송했다면) 겨우 조조의 눈을 피해 허창에서 여남으로 직행하여 유비에게로 돌아간 것이죠. 무제기나 관우전의 기록대로라면 관우는 전쟁터에서 단신으로 도망쳐 유비에게로 갔고 허창(허도)에 있었던 유비의 부인들과 관우의 가족들은 알아서 도망쳐 왔겠지요. 후에 유비와 합류하지 못한 유비의 부인(미부인?)이 있었다면 영 이별을 했을 것입니다.

나관중 ‘삼국지’에서는 조조가 관우를 마치 자신의 구세주(救世主)나 되는 듯이 대우한 것으로 나옵니다. 이것은 분명히 아니지요. 지나치게 과장되었습니다. 조조는 천하의 인재란 인재는 다 모으려고 하고 있었기 때문에 관우를 심문해보고 쓸만하면 쓰는 정도에 불과했겠지요.

조조가 유비군을 궤멸시키자 관우는 조조에게 사로잡혔던 것은 사실이나 나관중 ‘삼국지’에 나오는 식으로 “조조에게 항복을 하는 것이 아니라 황제에게 항복한 것이며, 유비가 있는 곳이면 어느 곳이나 달려가겠다.”는 조건을 달았던 것은 아니지요. 만약 그리 했다면 조조는 “패장(敗將)이 말이 많아”라고 하여 당장 관우의 목이 달아났을 것입니다.

조조가 관우에게 내린 편장군(偏將軍)이라는 벼슬은 장군 가운데는 하급직입니다. 편장군은 변란이 발생하거나 필요에 따라서 임시로 설치되는 직책으로 잡호장군(雜號將軍)의 일종입니다. 당시에 장군 서열은 대장군(大將軍) - 거기장군(車騎將軍) - 좌장군(左將軍) - 전장군(前將軍) - 우장군(右將軍) - 후장군(後將軍) - 잡호장군(雜號將軍) 등의 순서로 위계가 정해집니다. 편장군은 바로 이 잡호장군의 일종이죠. 그래도 조조가 관우를 편장군(偏將軍)에 임명한 것은 관우의 능력을 인정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관우의 이력을 보면 이 '편장군'이라는 직책은 관우에게는 매우 소중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관우는 생애 처음으로 제대로 대접을 받은 셈이기 때문이죠. 그 동안 관우는 현의 마궁수(馬弓手), 평원현의 별부사마(別部司馬), 하비태수 직무대행 등의 미관말직(微官末職)으로 전전하다가 처음으로 황제로부터 받은 장군의 관직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이 시기에 관우는 제후의 반열에 올랐는데 이것은 관우 개인의 영예일 뿐만 아니라 가문(家門)의 영광이었을 것입니다. 무너진 가문을 일으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관우는 조조를 떠납니다.

나관중 ‘삼국지’에서는 관우가 유비와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조조를 떠난 것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도 사실이겠지요. 그러나 또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즉 관우가 위나라에서 출세하기에는 한계가 있음을 절감했을 수가 있죠. 위나라는 인재의 풀(pool)이라고 할 만큼 많은 인재들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제가 보기에 관우가 유비에게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 상당한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비는 완전히 알거지 상태였기 때문이죠. 그냥 눌러 있으면 조조의 깊은 관심을 받기도 하고 일단 일정 수준은 안락한 삶을 살 수가 있을 테니 말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관우의 나이를 생각하면 관우가 유비에게 간 것이 이해가 됩니다. 관우가 조조에게 투항할 때 관우의 나이는 이미 삼십대 후반(39세?)~사십대(41세?)에 접어듭니다. 당시 나이 사십이라면 요즘 50대 후반~60대 정도겠죠. 그 나이에 아무리 공식적인 직책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유비 휘하에서 제2인자였던 사람이 견디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중소기업의 부사장이던 56세인 홍길동씨가 대기업의 임시직 영업사원 관리 과장 대우로 들어갔을 때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를 말이죠. 특히 관우는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정사에 따르면 관우는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저는 조조 공께서 저를 후하게 대해주시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만 저는 유비 장군에게 깊은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그를 배신할 수는 없습니다. (羽歎曰 吾極知曹公待我厚, 然吾受劉將軍厚恩, 誓以共死, 不可背之 吾終不留, 吾要當立效以報曹公乃去)”라고 명백히 말하고 있지요(촉서, 관우전). 일단은 관우가 유비에게 돌아간 것은 의리 때문이기도 하지만 관우는 아마 심리적으로 많이 방황하였을 것임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정신적 고뇌야말로 관우의 참모습을 알게 하는 중요한 대목이지만 정사에서는 다만 “관우가 탄식하면서 말하기를(羽歎曰) 자기는 돌아가야 한다.”고만 나오고 있지요. 사실 ‘관우의 탄식’과 결국 유비에게 돌아가는 관우의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적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나관중 ‘삼국지’처럼 지나치게 묘사하는 게 문제지요. 저는 이 점에서 나관중 ‘삼국지’가 ‘인간 관우’를 알 수 있는 기회를 빼앗아 가버렸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것이 관우에게도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누군가가 제 이름으로 제가 아닌 다른 저를 만들어 제가 하지도 않은 일을 만들어 충의지사로 모신다면 저는 결단코 거부할 것이기 때문이죠. 그 충의지사는 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좀 어려운 말로 저는 '소외(Alienation)'되고 싶지 않거든요.

그렇든 저렇든 관우는 나관중 ‘삼국지’에서처럼 우아하게 유비의 부인들을 모시고 눈썹을 휘날리며 유비에게 달려간 것은 아니죠. 그러나 이 선택으로 관우는 만대의 충의지사가 되었고 이 장면은 나관중 ‘삼국지’에 의해 한없이 미화ㆍ과장되었습니다.

(3) 중국인들의 관우 사랑

제 강의에 대하여 나관중 ‘삼국지’는 소설이다, 그러니 그렇게 이해하면 된다는 의견을 주시는 분이 간혹 있는데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관우의 경우를 보더라도 나관중 ‘삼국지’는 그저 소설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삼국지’로 독서계를 평정한 세계적인 작가 분이 ‘삼국지’를 전공한 대만 교수에게 “삼국지를 내 마음대로 쓰고 싶다”고 말하자 그 교수가 ‘촉한정통론’과 ‘관우(關羽)’만은 건드리지 말라고 당부하더랍니다. 마치 영국이 셰익스피어를 인도와 바꿀 수 없듯이 중국인들은 관우만은 지켜야 한다는 식이죠. 관우는 분명히 송강(수호지)이나 레트 버틀러(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안드레이(전쟁과 평화) 등과는 다릅니다. 중국인들의 관우에 대한 사랑, 참으로 유별납니다. 관우는 중국인들에게는 신(神)입니다. 그런데 저는 관우에게 불경스러운 언동을 늘어놓고 있으니 앞으로 중국 가기는 틀렸습니다(물론 저도 ‘인간 관우’는 좋아합니다).

관우는 나관중 ‘삼국지’에서는 와호장룡의 무공(武功), 충신의 대명사, 의리의 화신으로 등장하고 있죠. 실제로도 대부분 중국인들과 한국인들도 그렇게 믿고 있지요. 송나라 때 이후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관우의 지위는 왕에서 황제의 지위 나아가서는 신(神)으로 격상되어 중국 민중의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관우의 우상화는 수나라 때 시작되어 당나라 때에는 관우묘를 세우는 풍조가 성행하였고, 그 후 북송시대에 관우의 작위가 제후에서 공(公), 왕(王), 제(帝), 성(聖), 천(天)으로 올랐으며 명·청 시대에는 관제(關帝) 또는 관성제군으로 봉하여져 문묘와 같이 무묘에서도 제사를 지내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낙양에 위치한 '관림(關林)'은 관우의 목이 묻힌 곳으로 '관제묘(關帝廟)'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관우묘의 명칭입니다. 일반적으로 중국에서는 황제의 무덤을 능(陵)이라 하고 오직 성인의 무덤에만‘림(林)’자를 붙이는데 역사적으로 공자와 관우만이 이 혜택을 받았습니다. 즉 공자의 무덤을 ‘공림(孔林)’이라고 하고 관우의 무덤을 ‘관림(關林)’이라고 부르고 있지요.


그러면 왜 중국인들이 관우를 지나칠 정도로 숭배할까요? 여기에는 두 가지의 설명이 가능합니다.

첫째는 정부의 홍보용으로 관우는 매우 유용한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즉 역사적으로 황제들이 자신에게 충성할 것을 강요하는 하나의 심벌로서 관우를 이용했다는 것이죠. 즉 관우의 우상화가 추진된 것은 황제가 충신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충성을 하려면 이 정도는 해야 할 것이라는 의미로 관우를 우상화하고 정치적으로 이익을 얻는 것이죠.

둘째, 서민의 입장에도 관우는 숭배할 만합니다. 관우는 온갖 시련에도 불구하고 유비를 위해 싸웠고 사나이간의 의리를 귀하게 여기는 대장부의 표상으로 비쳤기 때문이죠. 정사의 기록만을 보아도 유비, 관우, 장비 중에 포로가 된 경우는 관우 밖에 없는데 이것은 유비나 장비가 도망가고 난 뒤 사후처리를 관우가 하다가 생긴 일이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관우가 유비에게 돌아간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지만 일반 대중들은 다만 빈털터리 유비에게 돌아간 그 사실만 남아있는 것이죠. 그런데 바로 이 대목에서 대중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끼지요. 그래서 관우는 중국 역사상 최고의 인기 스타가 된 것입니다. 모든 면에서 약자인 민중들은 관우가 허약한 유비를 따라 나서는 것을 보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낄 것이고 군주들은 심리적으로 자신이 정치적으로 실각하거나 고립될 경우를 상상하면서 관우와 같은 사람이 곁에 있기를 기대하는 것이죠. 그러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관우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까지는 좋은데요. 이것이 지나쳐서 우리나라까지도 관우 숭배의 열풍이 심하게 불었다는 것이지요. 우리나라에서도 관우의 묘가 많이 건립되어 숭배의 대상이 되고 있어 중화주의를 뿌리 깊게 만드는 직접적인 요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관제묘가 세워졌으며 무속신앙(巫俗信仰)에서도 관우를 신격화하여 모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나라의 관우묘는 서울(동대문), 안동(태화동: 경북민속자료 제30호), 수원, 남원 등에 건립되었습니다.

서울 동대문과 신설동역 사이에 있는 관우의 사당, 즉 동묘(東廟: 동관묘)는 선조 35년(1602) 완공되었는데 이 때부터 조선에서는 전쟁에 나가는 무사들이 이 곳을 들러 참배를 하고 무운을 빌었다고 합니다. 관우 제사를 지내는 날은 임금까지 갑옷과 투구를 걸치고 제사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관우 숭배는 비중국계에서는 유독 우리나라가 심합니다. 우리 무속(巫俗)에서는 관우의 부인까지 신격화 되어있죠. 이 부분은 중국과도 비교할 수 없지요. 우리는 참으로 충실한 소중화(小中華) 백성인 셈이죠.

우리 무속에서 중국으로부터 유래된 신령(神靈)들을 보면, 관성제군(관우), 소열황제(유비), 와룡선생(제갈량), 옥천대사(관우 사부), 오호대장, 감부인, 미부인, 손부인, 오방신장(도교계통) 등이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대부분 나관중 ‘삼국지’의 등장인물입니다. 관우ㆍ유비ㆍ제갈량까지는 이해는 할 수 있다고 해도 옥천대사, 오호대장, 감부인, 미부인, 손부인까지 모신다는 것은 좀 심하지 않습니까?

한국 귀신의 계급을 분류한 조흥윤 교수(한양대)의 연구에 따르면, 한국 귀신은 천신, 조상신ㆍ산신, 유비ㆍ관우ㆍ장비 등 전내신(殿內神: 별도의 건물로 모신다는 의미), 최영ㆍ임경업ㆍ신립 가택신, 터신, 저승관련 신 등의 서열을 가진다고 합니다.

우리의 샤머니즘(Shamanism: 무속신앙)이란 우리 민족의 무의식을 반영하는 것인데 보시다시피 나관중 ‘삼국지’가 얼마나 우리의 무의식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지 알 수 있죠. 천신, 조상신, 산신 등은 우리 한민족의 자연과의 교감을 반영하는 것이고(극복하기 어려운 자연에 대한 경외감이기도 하겠죠), 최영, 임경업 장군 등이 신령화된 것은 역사 속에서 서민들이 겪은 충격적인 사건들 또는 국난 극복 경험의 영상을 통해 자리 잡았겠지요.

그런데 나관중 ‘삼국지’의 주인공들은 우리의 현실이나 역사적 경험과 아무런 상관없이 단순히 이야기나 소설을 통하여 우리 무의식에 자리 잡았다는 점에 심각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나관중 ‘삼국지’를 단순히 소설이 아니라 실제로 받아들이니 이 같은 현상이 생긴 것이죠. 우리 무의식 속에 ‘삼국지’의 영웅들이 이처럼 높은 위치를 점하고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삼국지’는 다시 바라봐야 할 이유가 분명히 있습니다.

따라서 삼국지가 소설이니 그렇게 읽자고 무조건 넘기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삼국지’는 분명 ‘수호지’나 ‘영웅문(중국 무협지)’과는 다르죠. 그래서 ‘삼국지 바로읽기’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죠. 이것은 제가 국수주의(國粹主義)에 빠지거나 중국을 비하하거나 한ㆍ중 갈등을 야기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단지 우리의 무의식 속에 있는 ‘삼국지’의 실체를 다시 보자는 것이죠.

그러므로 관우가 단지 소설 속의 인물이 아니라 지금도 생생히 살아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관우는 ‘삼국지’ 소설 속의 주인공이지만 새로운 역사적 인물로 재탄생하고 소설 속의 옷을 그대로 입고 나와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 대다수가 나관중 ‘삼국지’를 그저 소설로 읽으면, 제가 아까운 시간을 낭비해가며 이 강의를 할 이유는 없지요. 많은 사람들이 인생에 가장 많이 영향을 준 책으로 나관중 ‘삼국지’를 들고 있지 않습니까?

(4) 촉한공정의 최대 수혜자 관우

무엇보다도 관우가 충의의 화신으로 재탄생하고 신격화 되어간 데는 주자나 명나라의 ‘촉한공정(蜀漢工程)’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의리 깊은 인사들이 유비 진영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죠. 실제로 처절한 삶을 살아간 사람들은 심배(審配), 전풍(田豊), 전위(典褘), 관구검(貫丘儉), 장홍(臧洪), 동승(董乘) 등을 비롯하여 매우 많지요. 그들의 인생 역정과 관우를 냉정히 비교해 보세요. 그러면 지금까지 보아온 대로 관우는 그 시대의 다른 장수들처럼 살아간 평범한 장군에 불과했습니다. 오로지 유비에게 돌아가 충성을 다했다고 신성화된다는 것은 좀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과연, 촉한공정(蜀漢工程)은 대단합니다. 그래서 지금 진행되는 동북공정(東北工程)도 무섭지요.

가만히 따져보면 관우가 지킨 의리(義理)는 과연 무엇입니까? 관우가 지킨 의리는 중국 민중 전체가 대상인 것도 아니요, 그저 유비 개인에 대한 의리입니다. 유비는 관우가 죽고 일으킨 이릉대전도 군주로서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전쟁이죠(왜냐하면 강력한 위나라와 대치중인 상태에서 동맹군과 싸움을 벌인다니요? 그리고 그 땅은 원래부터 오나라에 주기로 한 땅이었지요). 그저 관우에 대한 의리 지키기에 그 많은 청춘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지요. 또 이것은 촉이 약화되는 가장 큰 원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왜 황제들이나 군주들이 관우 우상화에 이렇게 열을 올릴까요? 관우가 오직 한 사람에게 충성과 의리를 다했기 때문이죠. 실제로 군주들은 언제 실각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살아갑니다. 따라서 군주들은 진정한 국가의 안정이나 번영보다도 항상 조건 없이 자기를 지켜주는 충신이 필요하지요.

여러 차례 진행된 촉한공정으로 관우 숭배에 불이 붙습니다. 드디어 송나라 때에 이르러 관우에게는 왕(王)이라는 작위가 붙기 시작하여 ‘의용무안왕(義勇武安王)’으로 관우를 추존(1123년)하였고, 원나라의 침입에 시달리면서 관우에 대한 사랑은 더욱 깊어졌지요. 이후 원나라까지도 관우를 ‘현령의용무안영제왕(顯靈勇武安英濟王)’이라 합니다(1328년). 시대가 지날수록 도가 지나치더니 명나라 때에는 관우에게 제(帝)라는 시호를 붙이기 시작합니다. 조선의 세조와 유사한 경력을 가진 명나라 성조(成祖)는 자신의 쿠데타가 성공한 것은 하늘의 뜻인 양 미화하면서 관우가 자신을 도왔기 때문이라고 하지요. 이로써 황제가 관우를 신성(神性)을 가진 존재로 널리 퍼뜨리자 당연하게도 민간에서는 관우를 신성시하게 되었고, 신종(神宗)은 관우를 제(帝)에 봉하였습니다(1594년).

관우 신격화는 청나라 때도 계속됩니다. 청나라 관우를 ‘충의신무관성대제(忠義神武關聖大帝)’에 봉했고(1644년), 관우의 선조를 왕(王)으로 승격시키고 관우의 신위를 황궁에 모셔둡니다(1855년). 아무리 한족들을 달래고 정권 유지를 위한 것이기는 하지만 너무 심합니다. 영웅 만들기도 이 정도이면 우상화의 원조 구소련의 스탈린(Stalin)도 항복할 것입니다.

누가 제게 비판할 것입니다. 당신 관우의 숭배 일지(日誌)로 이번 강의를 다 마치려 하냐고 말이죠. 그게 아닙니다. 국가적으로 이렇게 부산을 떤 이유를 생각할 여유를 주려고 하는 것이지요. 제가 보기에 관우에 대한 민중들의 광범위한 애정을 봉건 왕조가 철저히 이용하고 있는 듯합니다. 실제로는 평범한 무장이었던 관우를 이렇게 여론을 조작하여 숭배함으로써 황제 개인은 너무 얻을 것이 많다는 것이지요. 황제들이 이렇게 말하는 듯 합니다.

“야, 너희들도 관우처럼 내게 충성해. 충성을 하려면 말이야, 관우 정도는 되어야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