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운회의 ‘삼국지(三國志) 바로 읽기' <7>
황건적(黃巾賊), 바람과 풀의 싸움
[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풀' 김수영(1921~1968)>
(1) 바람과 풀
중국은 아직은 그래도 사회주의 국가입니다. 저는 비교적 긴 시간을 사회주의 경제나 사상, 이론에 대한 연구를 했었지요. 사회주의 사상과 나관중 ‘삼국지’는 함께 하기 어렵습니다. 나관중 ‘삼국지’는 철저히 봉건주의적인 사상을 기반으로 쓰여졌기 때문이죠.
그래서 중국 공산당 정부는 상당한 고민에 빠졌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중화주의를 전파하는 데 나관중 ‘삼국지’ 만한 것이 없는데 이것을 전파하자니 국내적으로 국민들에 대한 사상적인 해이가 발생할 수 있고, 이것을 무시하자니 나관중 ‘삼국지’가 가져다 주는 여러 가지 이익을 포기해야 하니 말이죠. 여러 가지의 곡절을 거쳐 다시 ‘삼국지’는 대표적인 중국의 브랜드가 되었지요.
그러면 구체적으로 중국 정부가 나관중 ‘삼국지’와 관련하여 고민하는 게 어떤 것이 있을까요? 대표적인 것을 꼽으라면 ‘황건적의 난(184)’입니다. 여러분들은 그 동안 TV를 통하여 미국의 자본, 일본의 기술을 바탕으로 중국 CCTV가 제작한 ‘삼국연의(三國演義)’를 보셨을 것입니다. 첫째 편을 보시면 맨 앞에 ‘장강은 동해로 흐르고 ~’하는 삼국지 노래가 나오고 바로 ‘황건기의(黃巾起義)’라는 이상한 한자 글이 나오는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여러분 대부분은 황건적(黃巾賊)의 난은 많이 들으셨을 테지만 이 ‘황건기의’(黃巾起義)라는 말은 아마 처음 들으신 분이 많을 것입니다. 이 말은 황건 농민군이 의거를 일으켰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도대체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황건적의 난(184)'이라는 말은 머리에 노란 두건을 쓴 도둑들이 일으킨 난동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현대 중국 공산당 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는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던 말입니다. 그런데 현대 중국 정부는 이것을 ‘황건기의’ 즉 노란 두건의 농민군들이 일으킨 의거(義擧)라고 합니다.
황건적의 난은 민중봉기(民衆蜂起)입니다. 민중봉기의 원인은 기본적으로 관핍민반(官逼民反), 즉 나라가 백성에게 핍박하니 백성들이 이에 반항한다는 뜻이죠. 원래 백성은 약하기 때문에 웬만하면 얌전히 지내려고 합니다. 그것은 마치 풀이 바람보다도 빨리 눕는 것과도 같지요. 그러면서도 풀처럼 생명력은 깁니다.
세상은 마치 풀(草)과 바람(風)의 싸움인 듯합니다. 경우에 따라 비를 몰아오는 바람이 없으면 풀이 자라지도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풀은 비록 하잘것없이 보이지만 이 풀이야말로 모든 생명을 먹여 살리는 원천입니다. 풀의 강인함이야말로 우리를 지금 이 자리까지 몰고 온 위대한 생명력이죠.
그런데 백성은 평소에 더 없이 양순합니다. 과거로 갈수록 더욱 그렇지요. 왜냐하면 과거에는 요즘과는 달리 백성이 데모를 하거나 반란을 일으키면 봉건 왕조들은 매우 잔인하게 진압하였기 때문에 백성이 나서서 봉기를 일으키기는 매우 어렵기 때문이죠(물론 최근까지도 민중 봉기에 대해 기관총으로 진압하는 국가들이 많이 있었고, 이들은 대부분 천인공노할 독재국가이거나 후진국들입니다). 그러나 이들도 생존의 위기에 이르면 민중봉기를 일으키게 됩니다. 후한 말기가 되어 황건적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이들이 도저히 생존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추정할 수 있죠.
나관중 ‘삼국지’에서는 없는 얘기지만 후한 말에 외척 세력들이 세도정치를 하면서 국정이 혼란해졌고 이 혼란을 틈타 호족 또는 대귀족들이 땅을 마구 차지하여 독립적인 소규모 자영농이 몰락하게 된 것이 민중봉기의 원인입니다. 대귀족들이 땅을 함부로 차지하게 되면서 나름대로 작은 왕국의 형태로 나아가게 되고 이것은 지방분권화를 촉진하게 됩니다. 토지가 없어진 농민들은 오갈 데가 없으니 전국을 유랑 걸식하거나 대귀족의 노예로 들어갈 수밖에 없지요. 대귀족에 흡수된 농민을 예농(隸農)이라고 합니다(당시 역사서들에서 후한 말 인구가 매우 축소되어 나타난 것도 이 예농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당시에는 예농은 인구조사에서도 제외되었겠지요).
진수의 스승이었던 촉의 석학 초주(?周)는 한나라 말기의 이 같은 현상을 두고서 당시의 현실은 ‘진(秦)나라 말기와 같은 혼란이 아니라 육국(六國)이 동시에 할거하는 형세가 있어서’ 중국은 통일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하였습니다. 초주의 분석은 후한 말기에 그만큼 중앙정부가 대호족 세력들을 통제하기가 어려워졌다는 것을 말하고 있지요.
즉 대귀족(호족)들은 자기 영역을 더 확보하기 위해 토지를 마구 차지하고, 이를 기반으로 대규모 전쟁을 하는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군벌(軍閥)이 나타나지요. 이러니 백성들은 유랑 걸식하는 떠돌이가 되기도 하고, 일부는 밥벌이라고 하려고 군벌들의 사병(私兵)이 되기도 합니다. 이 당시 상황을 후한 말 최식(崔寔)은 “빈농(貧農)의 아비와 아들이 부자들에게 노예처럼 봉사하고, 또 자신의 처자(妻子)도 데려와 일을 시킨다(정론[政論])”고 표현했습니다.
이 같은 시대적으로 암울한 상황에서 중국 고유의 종교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이게 되고, 당시의 종교 지도자를 중심으로 대규모 민중봉기를 일으킨 것이 소위 황건적의 난입니다. 사회제도가 제 구실을 못하면서 사회 구조적인 모순이 폭발한 것이지요.
이런 형태의 민중봉기를 난동·민란·농민전쟁·기의·농민반란·민란 등으로 다양하게 부르는데, 정사나 나관중 ‘삼국지’에서는 이를 황건적의 난이라고 하여 타도할 대상으로만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철저히 봉건 지배층의 논리구조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왕조 사회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겠죠.
그렇지만 과거에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현대에서는 이 말을 쓰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국가의 근본은 백성인데 그 백성이 도탄에 빠져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 호미나 죽창으로 무장하여 어설픈 군대를 일으키는데 이것을 도적들의 난리라고 하니 모순이 아닙니까?
사회 시스템이 무너져 국가가 백성들을 먹여 살릴 능력이 없을 때, 가장 큰 피해자는 최하층민입니다. 이들이 생존을 위해 군대를 일으키는데 이 같은 농민군들은 수천 년 중국역사를 통틀어 지속적으로 나타납니다. 이들 대부분은 정부군에 의해 진압되지만 명(明)나라나 중국 공산당과 같이 정권을 획득하여 새로운 왕조(또는 정부)를 열어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현대 중국 정부도 농민군인 홍군(紅軍)으로 중국을 통일하고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였습니다. 이 홍군은 현대 중국 정부군의 전신(前身)입니다. 따라서 중국 정부가 황건적의 난이라는 말을 인정하면 그것은 자기의 정체성(identity)을 부정하는 셈이 됩니다. 그러니 황건적의 난이라는 말을 쓰면 안 되지요.
그러면 여기서 잠깐, 민중봉기에 대해서 제대로 보려고 하는 것이 사회주의적 사고방식은 아닌가 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것은 보다 원초적인 인간의 권리와 자유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사회가 발전할수록 그 국가 구성원의 권리와 자유가 확대되지요,
현대 미국을 봅시다. 미국에서는 건국 초부터 중앙정부가 혹시나 독재할지도 모른다고 하여 민간에서 총기를 소유할 수 있도록 헌법적으로 보장하고 있지요. 만약 정부가 시민들의 의사에 반하여 폭정을 거듭하면 시민들은 이에 대해 저항할 권리가 있다는 말이죠. 물론 이 때문에 수많은 총기 사고가 나서 하루에도 수십 명이 죽기도 합니다. 미국은 민중봉기가 극단적으로 나타나지 않을 정도의 사회적, 또는 제도적인 완충 장치를 많이 확보하고 있기 때문에 실제로 그 같은 일이 발생하기 어려운 요소는 있지만 대규모 인종폭동은 실제로 나타나고 있지요.
인간의 역사에서 발전(Development)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저명한 경제학자 뮈르달(Myrdal)은 발전을 ‘총체적인 사회 시스템의 상향운동(Movement upward of entire social system)’ 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회 시스템이란 경제적 요소 외에도 제도·사상·질서 등이 서로 순환적인 인과관계에 있는 사회적 및 정치적 요소를 모두 포괄하는 것이죠. 따라서 발전이란 구조의 변화와 더불어 제도·사상·질서 등의 변화를 동시에 수반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사회의 발전이란 극소수의 사람들이 아니라 대부분의 국민들의 삶의 질이 얼마나 높아지고 있으며 또 그들의 권위가 얼마나 확대되고(of the people, for the people), 그들에 의해 얼마나 정치가 이루어지는가(by the people), 또는 그들의 의사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반영되는가에 달린 것이라는 말이죠.
이런 각도에서 본다면, 이제 우리도 황건적의 난이라기보다는 ‘황건기의’ 또는 ‘황건 농민운동’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황건 농민전쟁이라고 하면 너무 계급투쟁이라는 면이 부각되니까 말이죠(마르크스의 유물사관은 매우 탁월한 해석방식이긴 해도, 다소 결정론적인 요소가 있고 동양사회에 그대로 적용하면 많은 무리가 따르지요).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제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동학란(東學亂: 1894)’이라고 하다가 198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동학혁명(東學革命)’, ‘동학운동(東學運動)’이라고 합디다(그때까지 정부나 학계의 어떤 사람들이 이를 방해했다는 얘기는 아닐까요?). 사실 동학혁명은 민족 독립운동의 원류(原流)였는데 말이죠.
생각해봅시다. 동학 농민군이나 황건 농민군이나 도둑들이라기보다는 결국 우리의 형제자매·아버지·어머니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들이 도저히 살 수가 없어서 생존권을 요구한 것이지요. 그런데 무슨 도적 떼로 본다니 기막힐 일이죠. 과거 일본은 우리 무장 독립군들을 마적(馬賊)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일부의 급진주의자들처럼 황건 농민군은 옳고, 당시 정부군은 무조건 나쁘다고 해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황건 농민군들이 실제로 약탈을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고 당시에는 당시의 가치관이 있고 제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설령 농민군이 정권을 장악한다고 해도 농민들의 이상에 맞는 정부를 구성할 형편이 못되었지요. 당시에는 문자를 알고 있는 지식인들(독서인: 讀書人)이 전체 인구의 1~3 % 정도도 안 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들의 도움 없이 정부를 구성할 수가 없기 때문이죠.
그런데 그 독서인들은 대부분 당시의 (봉건적)가치 관념을 가진 사람들이었지요. 이들 대부분은 민중봉기에 대해서는 매우 냉담했습니다. 대부분의 사서에서도 민중반란에 대해서는 많은 정치사 중 한 절로 서술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따라서 기록도 주로 ‘○○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식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한 연구가 오랫동안 되지 못하였지요. 자료도 극히 부족합니다. 우리나라나 일본이나 1980년대부터 상당히 본격적인 연구가 진행되었습니다.
(2) 황건 농민군은 왜 수만의 대군으로 수백 명의 군대도 못 이기죠?
저는 대학 다닐 때 동학 농민군들 만여 명이 수백에 불과한 일본군 대대병력 정도에 궤멸되었다는 것을 책에서 읽고 너무 답답했습니다(전체적으로는 수만의 농민군과 2백여 명의 일본군, 2천5백여 명의 관군의 전쟁이었다고 하죠). 그래서 당시 농민들의 시체가 산을 이루었다는 전쟁터인 공주 부근의 우금치(牛禁峙)라는 언덕을 추운 겨울에 직접 걸어 보기도 했습니다. 길게 이어진 언덕과 구릉을 걸으면서 당시 죽어간 원혼들을 생각했습니다.
동학군이 궤멸된 원인으로 주로 지적되는 것은 당시로서는 첨단이었던 일본 무기와 정규적인 군사 작전이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병력이 10배가 넘는데도 이기지 못하다니 안타까운 일이죠. 도대체 왜 그럴까요? 다시 중국으로 돌아갑시다.
역사적으로 나타나는 중국의 민중봉기는 농촌을 기반으로 하고 참가민중이 막대하다는 점을 특성으로 가지고 있고, 그 민중의 규모는 국가적인 경제의 파탄으로 인한 유민(流民)의 수에 비례합니다. 비단 한나라 말기뿐만 아니라 중국역사를 통틀어 보면 각 왕조의 말기에는 1백만~2백만의 농민이 대체로 참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실제 중국 역사를 변화시키는 가장 확실하고 강한 힘은 바로 민중봉기의 주체세력인 농민군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막강한 병력으로 왜 소수의 정부군을 이기지 못했을까요? 여기에는 여러 가지의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농민군 내부의 문제로 지도자가 자주 타락하거나 농민군들의 일부가 유구화(流寇化: 도적떼화, 혹은 비적화[匪賊化])되는 현상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즉 농민군의 지도자가 마치 봉건시대의 왕과 같은 존재가 되려고 하는 경우가 나타나 농민군 지도부의 건강성이 없어지고, 농민들은 농민대로 수가 많다 보니 군량미 보급이 제대로 될 리도 없어 도시들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약탈과 방화를 일삼는 경우가 다수 나타났다는 것이지요.
둘째, 지도자들 간의 분열이 심했다는 것입니다. 즉 같은 처지의 농민 지도자가 규모가 커져 대세력이 되면서 서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심하게 싸웠다는 것이죠. 대표적인 경우가 진승ㆍ오광의 난(B.C.209)입니다. 이들은 앞을 다투어 자기를 왕이라고 칭합니다.
셋째, 민중봉기는 종교적인 색채가 강한 것을 특성으로 합니다. 대부분의 대규모 민중 봉기는 오두미·백련교 등등의 종교적인 색채를 띠고 있지요. 경우에 따라서는 의술(醫術)도 대세력 형성의 중요한 매개가 됩니다. 그런데 이 종교라는 것이 농민군들을 모으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그것으로 새로운 시대의 비전(vision)을 제시하기는 어려운 법입니다. 종교로 국가를 운영ㆍ유지할 수는 없는 일이죠.
넷째, 직업 군인인 장교가 부족하므로 전술적인 면에서 크게 불리하지요. 즉 소규모 전투라도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전투를 수행해야 하는데 전공이 밭갈이, 벼 베기, 김매기인 농민들을 데리고 전쟁을 하는 마당에 그나마도 장교도 없으니 이들은 쉽게 오합지졸이 되고 말지요.
다섯째, 농민군들은 전투 경험이 부족하여 공황(panic) 상태에 빠지기 쉽습니다. 군사용어로 공황이란 전쟁터에서 죽음의 공포가 엄습하여 집단적으로 전투를 기피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그리고 경험자들에 의하면 이 공황 상태는 쉽게 전파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정부군은 탈영을 할 경우 군법에 회부되어 죽음을 당하게 되지만 농민군들은 가족 전체가 한꺼번에 참여하는 경우도 많아 위계질서도 약할 뿐 아니라, 죽음의 공포 속에서 쉽게 대오를 이탈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지요. 그래서 십만 대군이라도 이내 오합지졸로 바뀌는 경우도 많습니다. 나관중 '삼국지'에서 제후들이 소규모의 병력으로 다수의 황건 농민군을 물리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것은 일부 사실로 볼 수 있습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농민군의 지도자들은 부적을 나눠주기도 하지만 이것도 잠깐이겠지요. 실제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서는 별 소용이 없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들은 수적으로는 정부군에 비할 바 아니라도 전투력은 기대 이하의 수준이었습니다.
따라서 농민군의 군사적인 특성을 보면 ①전투력이 허약하고 ②많은 병력이 움직이므로 비효율적이며 ③많은 전투식량이 필요하게 되니 약탈이 발생하는 현상이 생깁니다. 여기에 장교의 부족과 지도자들의 갈등도 심각하죠(왜냐하면 이들이 거병을 할 때 동등한 위치였기 때문이죠). 그래서 이들이 소수정예부대에 쉽게 무너질 수밖에 없지요.
(3) 황건기의에서 홍군(紅軍)까지
서기 184년 하늘을 가득 덮은 누런 두건(黃巾)의 물결이 황하의 거대한 물결처럼 빠르게 낙양을 위협하게 됩니다.
황건 농민군은 36방면으로 되어 있으며, 대방면은 1만 여의 군사들, 소방면은 6~7천의 군사로 구성되어 있고 각 방면에는 수령을 두었고, 그 수령을 장군이라 불렀습니다. 이들 황건 농민군을 이끈 지도자는 바로 장각(張角: ? ~184)이었죠.
전하는 말에 따르면 장각은 천재적인 문재(文才)에도 불구하고 여러 번 관리시험에 떨어졌다고 합니다(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지 못했던 것이지요). 장각은 깊은 시름과 열병으로 세상을 등지고 산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장각은 깊은 산중에서 약초를 캐다가 비를 만나서 동굴 속에 들어갔다가 비몽사몽간에 파란 눈을 가진 동안(童顔)의 노인에게 ‘태평요술’이라는 책을 받아 도탄에 빠진 만백성을 구하라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장각이 산을 떠나 저자 거리로 나와 사람들의 병을 다스리고 수많은 제자들을 키워서 민중의 구원을 도모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장각을 따르는 무리를 태평도(太平道)라고 했는데 이들이 황건 농민군의 주축이었지요.
이 전설을 다 믿기는 어렵지만 장각이 산 생활을 통하여 약재(藥材)에 대한 광범위한 지식을 쌓았을 것이라는 점은 짐작할 수 있지요. 장각은 당시에 금서(禁書)였던 ‘태평도청령서(太平道淸領書)’를 입수하여 이것을 바탕으로 교의를 편찬했다고 합니다. 태평도라는 말도 여기서 생긴 것이죠. 여기에는 태평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개인의 실천윤리가 설명되어 있다고 합니다. ‘태평경’이라는 책은 지금도 있지만 그것이 ‘태평도청령서’를 계승한 것이라고는 말할 수는 없겠지요. 후한서(後漢書)에는 ‘장각 등을 몇 번씩 잡았다가 놓아주면서 반성하도록 했으나 도무지 효과가 없다. (후한서, 양사전)’는 표현이 있습니다.
초기의 태평도는 은밀하게 조직화되었으나 영제 말년에 이르면서부터는 중국 전역으로 확산되고 북동부에 이르는 대부분의 지역은 집집마다 대현양사 장각이라고 쓴 패를 걸어두었다고 하지요.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는 당시의 도탄에 빠진 수만 명의 민중들이 토지와 재산도 버린 채 태평도로 들어갔다고 하고 있습니다(자치통감, 권58). 태평도는 기주(冀州)가 발상지였습니다.
그런데 정확히 어떤 경로를 통해서 태평도의 교단이 봉기를 결정했는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당시의 지도자들 상당수가 전사(戰死)한 것이 주요 원인이겠지요. 저는 태평도인들은 조정의 탄압을 예방하기 위해, 점조직으로 편성하고 언제든지 군대로서 동원될 수 있도록 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정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조직적이면서 봉기가 일시에 전국적으로 일어났기 때문이죠. 184년 2월 태평도는 전국적으로 일제히 봉기합니다. 이들은 갑자년에는 ‘푸른 하늘(후한을 의미)이 망하고 누런 세상이 대신한다(蒼天已死 黃泉當立)’는 기치를 내걸고 군대를 일으켰습니다(이것은 ‘음양오행설’과도 관계가 있는데 이 점은 다른 항목에서 논의하겠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한나라 정부군에 의해, 또는 조조와 유비와 같은 군벌들에 의해 진압됩니다. 이 진압에 관한 내용들이 후한서(後漢書)나 정사에 상세히 나와 있지요. 지도자들은 일찍 전사하거나 병사하지만 잔여 세력들은 산속으로 들어간다거나 비밀 조직화하여 지속적으로 나타납니다. 대체로 서기 190년대 후반 경에는 황건기의가 거의 종식되지만 오두미도(五斗米道)는 한중(漢中)을 중심으로 일종의 종교왕국을 건설하기도 합니다. 이 때의 지도자들은 장릉(張陵)-장형(張衡)-장로(張魯)로 3대째 이어지는데 이 장로가 나관중 ‘삼국지’에 등장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중국의 역사에서는 황건기의를 포함하여 이 같은 농민들의 저항운동이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죠. 모택동(毛澤東) 등이 저술한 ‘모택동 선집(1952)’에 따라 역사적으로 간략히 정리해봅시다.
진나라 때 진승(陳勝)과 오광(吳廣)·항우(項羽)·유방(劉邦), 한나라 때의 신시(新市)·평림(平林)·적미(赤眉)·동마(銅馬)·황건(黃巾), 수나라 때의 이밀(李密賊)·두건덕(竇健德), 당나라 때의 왕선지(王仙之)·황소(黃巢), 송나라 때의 송강(宋江)·방랍(方臘), 원나라 때 주원장(朱元璋), 명나라 때의 이자성(李子成), 청나라 때의 태평천국(太平天國)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수백 회의 봉기는 모두 다 농민의 반항운동이며 모두 농민의 혁명전쟁이었습니다. 모택동의 말처럼 정말 중국은 혁명적 전통이 풍부한 나라지요.
현대 중국 정부도 그래서인지 법륜공(法輪功 [파룬궁])에 대하여 매우 위험하게 보고 있지요. 아이러니이기도 합니다. 현대 중국정부가 마르크스-모택동의 이데올로기로 무장하여 혁명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는데 일 개 심신수행 및 종교 단체에 매우 심각하게 대응하는 게 말입니다. 그러나 중국을 아는 사람들은 심각하게 볼 수도 있습니다. 마치 장개석이 모택동을 그렇게 두려워했듯이 말입니다.
법륜공은 중국 기공(氣功)의 한 갈래로 창시자는 리훙즈(李洪志)로, 그는 지린(吉林)성 창춘(長春) 출신입니다. 리홍즈는 4세 때부터 불교나 도교의 법력을 받아 백두산(중국 長白山) 에서의 수련 등을 거쳐 1992년부터 대중 전파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는 주로 미국에 머물고 있으며, 2001년과 2002년에는 세계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되기도 하였지요. 법륜공은 불교와 도교 원리, 기공과 과학적 이론이 결합된 일종의 퓨전 종교이자 심신수행법으로 볼 수 있습니다.
현재 법륜공은 중국의 군대는 물론 거의 모든 분야에 폭넓게 퍼져 1억을 넘었다고 합니다. 이러니 중국 정부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1996년 중국 정부는 법륜공을 건강 수련법이 아닌 사교(邪敎)로 규정, 탄압해오고 있습니다. 그 동안 법륜공의 지도자들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중국 정부의 이러한 강경 대처에 대한 국제사회는 의아해하고 있습니다(그러나 중국 정부는 앞으로 이들이 중국 사회의 하나의 변수가 될 수도 있다고 볼지도 모르죠).
아무리 법륜공 측에서 종교가 아니고 수련법이며, 정치에도 관여하지 않는다고는 해도 중국 정부는 어림없는 소리로 일축합니다. 이것은 아마 그들의 역사적 경험 때문이겠죠. 즉 법륜공은 외형으로는 종교적인 요소밖에 보이지 않지만 그것이 앞으로 가질 수 있는 가공할 민중적 파괴력을 걱정하는 것이죠. 중국 정부가 보기에 종교라는 것은 하나의 외피(外皮)에 불과하고 그 내부에 잠재된 민중들의 힘을 걱정하는 것이지요.
황건기의도 결국 시대적으로 암울한 상황에서 중국 고유의 종교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이게 되고 당시의 종교 지도자를 중심으로 대규모 민중봉기를 일으킨 것이죠. 그러면 지금 중국은 경제성장이 엄청난데 무얼 걱정하냐구요? 아닙니다. 중국의 인구는 13억인데 그 중 12억 이상은 빈곤 상태를 벗어나 있지 않으므로 이 알 수 없는 힘이 언제 어떻게 폭발할지 모른다는 것이죠.
이상을 통하여 황건적의 실체와 그것이 오늘날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어느 정도는 보시게 되었으리라고 봅니다. 민중 봉기는 실제 중국역사를 변화시키는 가장 확실하고 강한 힘이었지요. 근대에 들어오면서 의식이 깨인 지식인들이 사회문제를 보다 정확하게 보고 제도적으로 이를 해결하려는 시도들을 하게 되었고, 그 가장 큰 흐름이 마르크스주의(사회주의)였음도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마르크스ㆍ엥겔스의 공산당 선언(1848) 이후 러시아 혁명(1917)과 함께 70여 년간 시행된 레닌ㆍ스탈린식 사회주의 실험이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 중심이 되는 내용들은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사회민주주의나 복지국가(福祉國家)에 용해되어 있습니다. (마르크스가 말하는 그 사회주의는 아마도 영국·스웨덴과 같은 복지국가가 아니었을까요? 마르크스는 애초에 기술 발전이 계급투쟁을 야기하고 그것이 상부구조를 변화시킬 것이라고 한 것이니까요).
출처 : | 올드뮤직의 향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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