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리신비

수메르 문명3

영지니 2008. 4. 20. 09:47
  

수수께끼의 고대문명 수메르 문명3

 

 
평화의 그림(좌) 전쟁의 그림(우)BC 2700,  수메르런던 대영박물관(Britsh Museum, London)

 

쇠퇴하는 문화 일반
 천문학의 쇠퇴와 변질은 과학 일반과 문화, 예술, 법률, 사회 기본구조의 퇴보를 상징하는 병리적 증상이었다. 수학의 60진법은 바빌론시대에서 더 나아진 것이 없었으며, 발달된 의학지식과 심지어 방사선 치료법을 연상하게 하는 특이한 의료기술까지 가지고 있었던 수메르의 의학은 이 시대에 이르러 마술로 전락했다. 설형문자는 더욱 자체(字體)가 일그러진 형태로 점토판에 기록되어 있으며, 학교, 선생의 직분, 숙제 같은 교육에 관한 수메르인의 관심은 이 시대에 자취를 감추었다.

 

 

 

 

 

 

 

 

 

 

그림설명: "수메르 이크 샤마간상"앨러배스터BC 3000

 

또한 많은 지혜의 말, 시가, 속담, 비유담이며, 태양계의 생성과 천계와 지구, 아눈나키('하늘에서 지상에 내려온 사람들')의 인간의 창조에 관한 자료를 보여 준 신화 비숫한 이야기 같은 문학적 창조성도 사라졌다. 이런 문학 장르는 실로 1천 년이 지나서야 히브리 성서에서 다시 부활되었던 것이다.

 

수메르의 왕들은 신전을 짓고 운하를 파내며 예술품을 창작한 것을 자랑스레 기록했지만, 바빌론의 왕들은 전쟁과 정벌 기록, 이를테면 많은 포로를 잡고 많은 적병의 머리를 베어 낸 것을 뽐내는 기록들을 남겼을 뿐이다. 전 시대의 열정과 우아함은 거칠고 조잡함으로 바뀌었다. 바빌론 법전(예컨대 함무라비 법전)은 죄와 별을 규정했을 뿐이지만, 전 시대에는 약자의 보호와 윤리 규정이 법률의 주지였다. 이 수메르의 법개념은 그 6백 년이 지난 뒤 성서의 모세 십계명에서 다시금 부활되었다. 옛 통치자들은 '엔시 EN. SI' 곧 '정의의 목자'라는 타이틀을 몹시 바랐지만, 바빌론의 왕들은 '사방 세계의 왕'이나 '왕 중 왕'을 '백성들의 목자'대신 선호했다.

 

수메르에서는 부드러운 사랑과 정사를 묘사한 시가들이 많았다. 그 중 이난나와 신랑인 두무지 Dumuzi와의 사랑을 노래한 것이며, 인간 왕과 신인 배우자들의 사랑, 평민 신랑 신부의 사랑 부부간의 사랑이나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을 표현한 노래들이 많았다. 그러나 필시 마르둑의 개성으로 인하여 이러한 민중의 의식구조가 후대에 변질되었던 같다. 이와 같은 수메르의 문학예술의 장르는 다시금 1천 년이 지나서 히브리《성서》에서 다시 부활되었다(엄격한 윤리서인 《성서》에 어찌하여 노골적으로 여체를 찬미한다든가 성애를 노래하는<솔로몬의 아가(雅歌)>가 포함되어 있는지를 이로써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수메르에서 여성의 지위는 상상 이상으로 높았다. 여성들은 가정에서 실을 뽑고 옷감을 짜고 우유를 짜는 일, 가족을 돌보는 일뿐 아니라 가수, 댄서는 물론 의사, 조산원, 간호원, 가정교사, 선생, 미장원 주인 등 전문직에도 나타났다. 통치자의 가정 출신으로 가족 농지를 관리하고 경영하며 농산물을 거래하는 직책을 맡은 여성도 있었다. 왕실 귀족의 아내들은 광대한 신전토지를 관리하기도 하고 여성 사제로도 일했는데, 그 달들은 3계층의 신관의 하나로서 고등 여신관도 있었다. 사르곤왕의 딸은 신전에 바치는 찬가를 짓고 우르의 난나/신 신전에서 고등신관으로 일하기도 했다. 영주 구데아의 어머니는 라가쉬 신전의 고등 신관이었다. 수메르시대에 여왕 또는 여성 통치자가 몇 명쯤 있었으리라고 생각되지만, 그들의 정체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원래 수메르 신화에서 여신들은 처음부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엔릴('명령하는 주님')의 배우자는 '닌릴 NIN.LIL'('명령 하는 여주인'). 엔키('대지의 주')의 배우자는 '닌키'('대지의 여주인')이었고, 어머니 여신인 닌하르사그는 엔키가 인간을 창조할 때 공동 창조자였다. 이들은 12신 판테온의 당당한 멤버들이었다. 또 수메르 전승에는 문화예술과 생활기술을 가르쳐 준 많은 여신들이 있어서 이를테면 맥주의 여신, 방직의 여신, 필기의 여신들이 있었다고 한다(이들은 신화적 가공인물이 아니라 실제적 '문화 영웅'들이었다.).

 

바빌론 시대에는 이러한 평등풍조가 사라졌다. 그 예로서 마르둑은 '니사바'가맡았던 필기의 여신 역할을 아들인 '나부'가 대신하도록 조작했다고 한다. 단순하고 전투적인 남성 우위의 사회에서는 여성의 지위뿐 아니라 문화 일반이 모두 쇠퇴해 갔다.

이와 동일한 현상이 기독교 초기 시대인 기원 전후부터 되풀이되었다. 발달된 수학과 천문학과 철학이며 호메로스부터 시작된 문학적 재능과 창조적인 예술적 재능을 보이며 일어난 그리스 문명은 서기전 5~6세기부터 본격화되어 3세기경 알레산드로스 대왕의 대원정에 힘입어 멀리 동쪽 인도지역까지, 서쪽으로는 이베리아 반도에까지 영향을 미친 헬레니즘의 명성을 떨쳤다. 여성의 지위도 꽤 높아 올림포스 판테온의 여성신들과 델포이, 도도나의 신탁소(神託所)의 여사들이며 사포 Sappho(BC 610?~580?)같은 여류 시인의 존재는 당시 여성의 지위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요약하자면 민주적 시민정치체제, 자유스럽고 이지적인 학예풍토, 그리고 전후 어느 시대에 비해서도 비교적 높았던 여성의 지위 같은 것이 그리스 문명의 특징이었다. 그러나 기독교가 지배세력인 로마의 국가 종교로 공인된 서기4세기 초 이래 이러한 그리스 문명의 향기는 사라지고 신권(神權)이 모든 것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암흑시대가 시작되었다. 학문과 예술이 도그마적 이론과 교리에 의해 창조성이 사라지는 암흑시대가 르네상스 때까지 1천 년 이상 지속되었던 것이다.

 

수메르 문명이 바빌론 시대 이후 변화한 과정을 살펴보면, 원래 과학이었던 것이 미신 과 주술(呪術)로 변질되고 이것이 다시 종교로 변하게 된 것이다. 이 과정은 신화학자 프레이저가 《황금가지》에서 제기했던 문화의 발달과정, 곧 주술→종교→과학이라는 과정과는 정반대인 것이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지금까지 거의 모든 주류 학자들이 이런 점에서 인류의 문명발달 과정을 올바르게 해석하지 못하고 잇는 것 같다는 생각이다. 그들은 예컨대 바빌로니아의 점성술이 일종의 신앙으로 발전했고, 이것은 현대에 이르러 과학으로 그 실체가 규명된 것을 예를 들어 주술→종교→과학이라는 도식으로 정리했지만, 필자는 수메르 문명의 예를 들어 이것을 과학→주술→종교에서 다시 과학으로 회귀하는 과정이 반복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의 전반부에 제시된 고대의 과학적 발명도 이같은 필자의 견해를 뒷받침하는 사례이다. 곧 태고적 옛날에 과학이었던 것이 어느 틈엔가 사라져 전설적인 옛 이야기가 되어 미신화된 물신숭배의 대상이 되었고, 이것이 정리되어 다시금 교리화된 종교가 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이것이 또 다시 오늘날 과학으로 해명되고 있는 것이다.

전쟁의 난민들

수메르의 많은 비슷한 점이 엿보인다. 국제적 패권 쟁탈 전쟁에서 핵무기가 사용되어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는 것이 그 예이다. 그러나 수메르 시대에는 기나길게 지속된 시대의 특징인 거대한 통합된 정치 문화체제가 와해되고 종교에 의하여 유지되었던 내셔널리즘이 붕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두 시대에 공통되게 많은 파난민들이 생겨나 세계의 인구지도가 재편되었다. 수메르가 사라질 무렵 메소포타미아에서 처음으로 전쟁 난민을 뜻하는 '문나브툴루 Munnabtulu'('문자 그대로는 파괴로부터의 도망자')란 말이 나타났다. 이것은 "와해된 종족의 잔존자' 라고 해석된다. 가정과 직업과 생계를 잃고 나라마저 사라져 난민이 된 사람들이다.

수메르가 사라지자. 생존자들은 사방으로 유랑하기 시작했다. 의사, 교육자, 천문학자. 건축 조각가 서기 같은 지식인들은 새로 이주한 지방에서 문화의 전파자가 되었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도시계획, 대의(代議) 제도, 법전, 학교, 원양 무역, 천문학 등 많은 문화 업적을 이루었던 수메르인들은 또한 최초의 '디아스포라 Diaspora'(유랑하는 난민)가 된 것이었다.

 

아브라함 일가가 우르를 떠난 처음 이주했던 북방 아나툴리아 가까운 하란 Harran이 아마도 유민들이 처음으로 향했던 곳이었을 것이다. 이 곳은 유명한 우르의 상인들의 거점으로, 그들은 그 동, 서, 북방으로 광대한 캐러뱀 무역로를 개척했었다. 그 곳에서 수메르 이후 히타이트, 후르리아/ 미탄니 민족과 동북방 코카서스 산맥의 인도-유럽민족들과 만나고 ,또 동남쪽으로 인더스 계곡 엘람 지방, 서쪽으로 이집트로도 이주했을 것이다. 멀리 동쪽으로 인더스 계곡가지 가서 아리안 민족과 섞여 수메르 신화가 스며들었을 것이다. 북쪽으로는 멀리 발트해까지 이주하여 핀란드, 에스토니아, 헝가리인의 선조가 되었을 것이라고 시친은 주장한다. 곧 메소포타미아 동북쪽으로는 흑해 연안의 그루지아를 거쳐 볼가 강변옛 사마라 Samarra (현대 쿠이비쉐프 시)를 세우고 다뉴브강을 따라 멀리 발틱해까지 이주했다는 주장이다(그러나 위의 민족들이 교착어인 우랄-알타이 언어를 사용한다는 공통점 외에 이를 입증할 다른 증거가 없다. 아니, 이와 반대로 특히 헝가리 민족의 경우 서기 896년 이후 유럽사에 등장하기 이전 원래 신강성 위구르 지역 일대에 거주하고 있었던, 몽고인종과 가까운 인종이라는 증거가 1986년 이후 드러나고 있다. 더욱이 헝가리인들의 말의 억양과 매운 것을 좋아하는 식성은 우리 한국인과 똑같다고 한다. ).


신앙과 과학적 이성의 전통

이 '새 시대'에 주변 국가들에 확산된 수메르 판테온의 영향은 반드시 기억되어야 한다. 서기전 18세기 이후 하타이트의 12신 판체온은 수메르의 강한 영향을 이것이 '흐르리아' 신화와 함께 수메르와 그리스 신화를 이어 주는 중개자 역할을 했던 것이다. 또 마찬가지로 팔레스타인의 가나안 신화와 문명은 미케네- 미노아 문명을 거쳐 역시 그리스 문명에게로 이어졌다.

 

그런데 가나안의 '탐무즈 Tammuz 신화'는 원래 수메르의 이난나-두무지의 사랑과 두무지의 죽음의 기록한 이야기였지만, 이것이 결국 대지와 식물의 성장, 결실, 죽음, 부활을 상징하는 종교적 농경신화로 알레고리컬하게 변형되어 이집트의 오시리스-이시스 신앙과 혼합되고 다시 여러 지역으로 퍼져서 탐무즈 -아티즈 신화(가나안, 시리아)와 아도니스 신화(그리스)로 변했다. (《황금가지 Golden Bough》를 쓴 신화인류학자 J. G. 신화의 백을 잇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최근 마이클 베이젠츠 등의 《서혈과 성배 Holy Blood. Holy Grail》을 보면, 필시 《신약성서》필자들이 예수를 신격화 시켜 적대자인 로마와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기독교 자체를 위대하고 장엄하며 신비스럽게 만들려는 정치적 의도에서 예수의 부활의 중요성을 강조하려고 성서를 조작했으며, 또한 마리아의 처녀 수태도 이런 동기에서 생겨나 강조되었고, 죽음을 극복하는 영적 신비와 능력을 강조하는 부활적 의식도 이교도들의 춘분의식에 때를 맞춰 조작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결론지어 말하자면, 신과 인간의 합일과 조화라는 수메르의 신앙 전통은 긴 단절을 거져 아브라함 이후 히브리인들에 의해 계승되어 결국 민족적인 것에서 세계적인 것, 곧 유대-기독교 신앙 Judeo - Christianism으로 발전, 승화되었고, 한편 수메르의 합리적 이성과 과학 전통은 빛나는 그리스 문명과 크스모폴리턴한 헬레니즘으로 부활, 발전했던 것이다. 이 두 문명 지류가 현대에 이르는 서구 문명의 정신적 지류가 되어 온 것이다.


청금석과 실크로드

수메르인들은 수많은 신전 내부를 치장하기 위해 금, 은, 청동, 터키석, 홍옥수 같은 귀금속과 보석을 구하려고 노력했었다. 특히 청금석 Lapis Lazuli는 군청색 바탕에 황금색 가루가 뿌려진 듯 아름다운 보석인데, 이집트와 수메르인들은 이것을 반짝이는 별이 빛나는 하늘을 상징하여 주로 신전 내부의 천정을 장식하는 데 사용했다. 신전이 한두 곳도 아니었으니 그 소요량도 대단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아프가니스탄의 산지에서만 산출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먼 거리를 운반했을까?

 

아마도 그 첫 길은 수메르에서 서북방 무역 도시 하란을 거쳐 다시 동북방 자그로스 산맥을 넘어 지금 이란 북부를 횡단한 다음 다시 험한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지금 아프가니스탄의 헤라트와 카블까지 가서 구했을 것이다(이 종착지에서 다시 북으로 중앙아시아의 키르키즈를 거쳐 파미르 고원, 천산 산맥, 타클라마칸 사막을 우회하면 중국의 돈황까지 이어지는 실크로드가 된다.). 둘째로, 페르시아만에서 배로 호르무즈 해협을 거쳐 인도양 연안을 따라 하라파와 모헤조다로 가까운 해안에 도착하여 다시 육로로 북상하여 카이버 고개를 넘어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어느 길이든 험하고 고생스러웠지만, 목적한 청금석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수메르인들이 그 옛날 중국인들과 접촉한 길이 전혀 없었다고 볼 수 있었을까? 남대서양과 마젤란 해협을 거쳐 태평양으로 나와 안데스의 주석을 구했던 수메르인들이 더 가까운 중국과 접촉하지 못했다고 볼 수 없을 것 같다. 서기전 6세기에 시작된 것으로 알려진 실크로드의 왕래가 그 훨씬 이전인 서기전 20세기 이전부터 있었을지 모른다.

 

출처 : 신비여행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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