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신간 '동북공정' 성과물 어떤 내용 담았나
(베이징=연합뉴스) 박기성 특파원 =
중국 사회과학원 산하 동북변강사지(東北邊疆史地) 연구센터는 2007년초까지 완성하기로 한 총 27가지의 연구논문 중 6가지를 2003년 책으로 출간한 이후 3년 뒤인 최근 5권을 후속 출간했다.
'동북변강연구총서'라는 이름의 시리즈 형태로 중국사회과학출판사가 이번에 출간한 5권 가운데
'발해국사'와 '고구려 민족과 국가의 형성 및 변천' 등
2권을 입수해 그 내용을 분석했다.
총서 편집위원회는 각권 시작 부분의 일러두기에서 국경지역의 역사 연구는 매우 민감한 문제라는 점을 지적하며 모든 작품은 저작자 본인의 학술적 관점을 나타낸 것일 뿐이라는 점을 밝혔다.
◇ 발해국사
발해국사에서는 머리말을 통해 "발해(698∼926)는 당(唐)대의 일개 지방정권이자 속국으로 장기간 당과 긴밀한 정치.경제.문화 관계를 유지했고 당의 동북지구 개발에 있어 중요한 역사적 작용을 했다"고 평가했다.
논문은 이를 뒷받침하는 문헌으로 구당서(舊唐書).신(新)당서 등 중국의 48종, 삼국사기.삼국통사 등 한국의 12종, 속일본기(續日本紀) 등 일본의 24종을 제시했다.
이 책에서는
▲말갈국의 건국과 발해의 발전
▲영토와 행정구역 및 인구
▲민족원류와 주류민족
▲발해정권과 당의 관계
▲발해의 멸망과 동단(東丹)의 건국 등
순으로 다뤘고 맨 끝 부분에 발해의 역사귀속과 역사적 지위에 대해 언급했다.
논문은 발해가 '해동성국(海東盛國)'이란 이름을 얻을 정도로 발전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면서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를 가진 말갈인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주장했다.
또 발해의 주류민족에 대해서는 말갈족, 고구려인, 발해족의 3가지 학설이 있으나 문헌 분석을 종합할 때 말갈로 보는 게 옳다고 주장했다.
이와 함께 발해의 왕이 연호를 사용하고 스스로를 황상(黃上)이나 성인(聖人:천자의 의미)으로 칭하는 등 독립국가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지만 당의 책봉제(冊封制)를 따르고 관리를 받은 중국 변경의 국가 중 하나라고 말했다.
시종 발해도독부 또는 발해군이라는 이름으로 당의 관할 아래 있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발해가 신라와 고구려에 의해 동족 국가로 인정받지 못했다면서 발해정권은 의심할 여지없이 당시 중국의 국가 중 하나로 그 역사는 중국사의 범주에 포함되는 것이 마땅하다는 논리를 폈다.
◇ 고구려 민족과 국가의 형성 및 변천
이 책은 상.하 편으로 나누어
상편에서는 고구려의 원주민과 전(前)고구려 시기의 민족융화, 고구려족의 형성과 변천을 소개했고
하편에서는 고구려 이전의 국가 변천사와 고구려의 통치제도를 집중적으로 다뤘다.
먼저 지역적 개념을 논하면서 진(秦)나라 말기 대혼란으로 중원의 이민이 대거 요동(랴오둥-遼東)반도를 건너 한반도 북부로 들어갔고 이후 고구려 정권의 통치 아래서 융합하면서 고구려족을 형성했다고 밝혔다.
고구려족은 원주민인 이(夷)인과 예(穢)인이 중원문화와 몽골 초원문화의 영향 속에 복잡한 민족융화과정을 거쳤고 부여인의 남하 후 부여인과도 융합해 이뤄졌다고 덧붙였다.
한민족의 뿌리에 대해서는 기원전 11세기 기자(箕子)가 은(殷)나라 유민 5천명을 이끌고 한반도로 이주해 대동강 유역에서 원주민인 동이(東夷)인과 민족융합을 이루면서 고조선인을 형성했다면서 이들이 후에 한4군(漢四郡)의 하나인 낙랑군의 주체민족이라고 말했다.
동이인의 일부는 예인으로 개칭하고 한강 유역으로 남하해 마한(馬韓)인으로 발전한다고 적고 있다.
또 고구려인은 부여에서 나온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면서 동부여와 고구려는 모두 해모수가 세운 북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부족으로 보았다.
이는 고구려 시조 기원설의 원형이 바로 부여인의 시조 기원설이라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고 했다.
민족구성과 관련, 부여인이 남하해 고구려의 통치집단을 구성했지만 고구려족의 주축세력은 예족, 맥(貊)족 등 토착민족이며 숙신과 말갈 등도 포함된다고 밝혔다. 단일민족이 아니라 복잡한 민족 융합체라는 설명이다.
단군조선의 시조인 단군 신화에 대해서는 천왕(天王), 부인(符印)과 같은 불교용어가 등장하는 점으로 미루어 한반도에 불교가 처음 전래된 서기 372년 이후에 형성된 것으로 단정했다.
이 논문에서는 한4군이 한반도의 대부분을 관할했다는 점을 적시했지만 고구려가 중국의 속국이라거나 지방정권이라는 식의 단정적인 표현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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