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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부경과 최치원, 삼교관련 해석

영지니 2007. 3. 11. 22:09

 

'우리역사의 비밀'에서 '팔도유람'님의 글 퍼 다듬음

 

천부경은 쉬운 글자의 연속입니다.
그런 글자로 구성된 문장들의 의미가 다소 난해하게 보일 뿐이지요. 사실 최치원과 연결시킬 때 그 문장의 의미는 한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어쨌든 번역되었다는 사실은 변할 수 없습니다. 또한 一부터 十까지는 역과 음양오행의 수리에 의해 풀이될 수밖에 없습니다.

시施·무無·종終·만왕만래萬旺萬來 등과 같은 용어들은
유·불·도 삼교의 관념에 의해 풀이됩니다. 천부경은 그런 범위를 벗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최치원의 학문 자체가 그 범주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주목할 것은 수리와 삼교의 용어들입니다만, 그 또한 굳이 다른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동양학에서 이는 상식에 속하는 문제인 까닭입니다.

물론 거기에다 사족을 붙일 수 있습니다만, 그건 왜곡이 되어버립니다.
수리와 삼교의 용어는 그 뜻이 변질될 가능성이 없습니다. 신라 말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는 물론 앞으로 긴 세월이 흐를지라도 크게 달라질 것이 없습니다. 역, 음양, 오행, 수리, 삼교 등은 동아시아에서 영원히 계승될 수밖에 없는 지식인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번역되었다고 해도 주해를 붙일 이유가 없습니다.
앞서 '당초부터 주해는 없다'고 한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주해가 없는 번역은 번역한 자를 통해 이해될 수밖에 없습니다. 즉 번역물은 번역자의 학문과 사상이라는 단서를 통해 해석될 수밖에 없죠.

그러므로 최치원은 천부경을 풀이할 때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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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부경 풀이에서 첫 번째 난관은 읽는 방법입니다.
그 이유는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풀이가 달라진다는데 있습니다. 가령 <일시무시一始無始, 일석삼극一析三極, 무진본천無盡本天>으로 읽을 때와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 석삼극무진본析三極無盡本>으로 읽을 때의 풀이는 전혀 달라집니다.

그럼에도 띄어쓰기·현토·쉼표·구두점이 없습니다.
이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81자의 나열로 보일 수 있습니다. 다만 읽는 방법을 알아낼 수 있으므로 81자는 불후의 경전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최치원은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그는 9세기 중반 신라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당나라로 유학을 갔습니다.

이어 당나라 과거에 급제한 뒤,
'황소黃巢의 난'을 통해 입신양명했습니다. 당시 신라와 당나라는 삼교를 제한하지 않았습니다. 또 그의 형은 승려였고, 후원자 고변高騈은 집무실에 도관을 차릴 정도로 도교에 심취했던 인물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자연스럽게 삼교에 회통하였으니 천부경에 삼교의 용어가 보이는 것은 모두 그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치원 그는 사륙변려四六騈儷에 능한 문장가였습니다.
원래 변려문이란 변체문, 사륙변려 또는 사륙문이라 합니다.

'변'은 마차에다 두 마리 말을 나란히 세운 것을 말하고,

'려'는 두 사람이 나란히 밭을 간다는 뜻입니다.

이는 '하나의 대對를 이루는 것'으로 전의轉意되었습니다.

원래 변려문의 특징은 먼저 대구對句를 존중하면서,
넉 자 내지 여섯 자 문구를 많이 쓴다는 점입니다. 한문에는 원래 넉자 여섯 자로 된 문구가 많지만 변려문은 그런 문구를 의식적으로 구사한다는 점이 다르지요. 그렇게 하는 이유는 평측平仄과 압운押韻을 존중하되 음조의 아름다움을 살리고 전고典故를 존중하므로써 화려한 미문 의식을 높이고자 함에 있습니다.

천부경은 3교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평측과 압운을 중시하는 형식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문체입니다.

문체란 문장가의 버릇이고 습관이며 또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그것은 서예가에게 필체나 성악가에게 목소리와 같습니다. 목수의 연장과도 같은 버릇과 습관들입니다.

그 때문에 모든 문장가들은 글을 쓸 때 자기만의 독특한 문체를 드러내고 맙니다.
자기 철학과 사상을 드러내야 하는 번역이라면 더욱 그러합니다.

이처럼 최치원의 삶과 철학과 문체는 천부경이 그의 번역본이라는 사실과 맞물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천부경은 최치원의 문체로 읽혀져야 할 것이므로 저는 다음과 같이 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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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符經 81자                          글자수

一始無始一                             5
析三極無盡本                          6
天一一 地一二 人一三               3, 3, 3
一積十鉅 无櫃化三                   4, 4
天二三 地二三 人二三               3, 3, 3
大三合六 生七八九                   4, 4
運三四成環 五七一妙衍             5, 5
萬往萬來 用變不動本                4, 5
本心本 太陽昻明 人中天地一      3, 4, 5
一終無終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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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차이나철학사를 가리켜 '주역에 주석을 붙인 역사'라고도 합니다.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차이나의 철학자들이 주역을 논의의 중심으로 삼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특히 당나라 때는 한대의 상수학이 완전히 청산되면서 현학적인 학풍이 유행하였고, 도가와 유가의 왕래가 잦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런 지식은 더욱 존숭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과거 신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역, 음양오행, 수리 등과 같은 지식은 절대적이었습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최치원은 문장가로 명성을 널리 떨쳤을 뿐만 아니라 풍류도風流道를 언급하였고 선맥仙脈의 후계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최치원이 역, 음양오행, 수리 등과 함께 삼교의 지식에 정통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것입니다.

한편 천부경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글자는 수數입니다.
수리는 천부경 연구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수리란 무엇입니까? 다름 아닌 수의 이치입니다.

수리 十은 완전무결, 九는 가장 큼, 一은 본체가 됩니다.

천부경은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로 시작되어, <일종무종일一終無終一>로 끝납니다.
글자수를 세어 보면 모두 열입니다.

전부 변려문으로 읽으면 모두 열 줄이 됩니다.

물론
<천일일天一一, 지일이地一二, 인일삼人一三, 천이삼天二三, 지이삼地二三, 인이삼人二三, 본심본本心本>은 각각 석 자이니 변려문의 형식과 다소 어긋나는 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三은 가장 중요한 단어이므로,
변려문의 형식을 철두철미하게 고집할 이유는 없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모두 열 줄의 문장을 꼭 불변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과 <일종무종일一終無終一>은, 결국 같은 뜻이 되기 때문이지요.

그 문장을 한 줄로 이해하면 결국 아홉 줄이 됩니다.
거기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수리 十은 완전무결하다는 의미이지만 현실의 세계에서 완전무결함은 없습니다.

예외가 있는 것이지요. 순금도 99. 9%의 순도이며, 지구의 공전에도 윤초閏秒가 있습니다.

그 때문에 수리에서는 九로써 十을 대신합니다.

사정이 그러하니 천부경은 비록 열 줄이지만,
실제로는 아홉 줄의 수리를 따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때문에 81자는 실로 구구팔십일수리九九八十一數理가 되니 오묘하다고 할 것입니다.

한편 수리는 오행과 상통하며 五라는 관념과 통합니다. 따라서 천부경은 다음과 같이 다섯 마디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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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마디,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
석삼극무진본析三極無盡本(일종무종일一終無終一)-----본체론本體論

둘째 마디,
천일일天一一 지일이地一二 인일삼人一三
일적십거一積十鉅 무궤화삼无櫃化三--------------------분합론粉合論
                           (궤는 나무목이 빠져야 함)
셋째 마디,
천이삼天二三 지이삼地二三 인이삼人二三
대삼합大三合 육생六生 칠팔구七八九-------------------생성론生成論

넷째 마디,
운삼사성환運三四成環 오칠일묘연五七一妙衍
본심본本心本   태양앙명太陽昻明-----------------------변화론變化論

다섯째 마디,
만왕만래萬往萬來 용변부동본用變不動本
인중천지일人中天地(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통일론統一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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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체·분합·생성·변화·통일의 다섯 마디는 천부경의 세계관입니다.
또 수리에서

'기를 생성하는 생수生數'는 一·二·三·四·五이고,

'기를 통일하는 성수成數'는 六·七·八·九·十입니다.

본체는 一이고 근원이므로 이는 다른 네 마디를 이끌고, 변화와 생성은 역의 원리로 연역되며, 분합과 통일은 오행의 원리로 귀납됩니다.

이에 따라 천부경은 역·음양·오행·수리를 전개할 수 있게 됩니다.
본체론으로 시작하여 통일론으로 끝나는 다섯 가지의 이론은 너무 복잡하고 번잡한 관계로 자세한 설명을 생략하기로 합니다. 그 점을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별도의 질문이 있으시면 즉시 답 드립니다)------

물론 천부경의 사유와 세계관은,
중국적 역·음양·오행·수리적 사유와 세계관과 미묘한 문제에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차이는 일단 무시해도 좋습니다. 천부경을 풀이하거나 이해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기 때문이지요. 문제는 천부경의 사유와 세계관이 차이나적 역·음양오행·수리로 표현되는 모든 사유와 세계관을 포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건 놀라운 일입니다.

특히 그 깊이와 넓이가 성리학을 훨씬 능가한다는 것은,
범인들의 상상을 넘는 일이지요. 주희라는 거목이 집대성한 신유학운동입니다. 천부경은 주희마저 포괄하고 있습니다. 이는 쉽게 납득되지 않습니다. 상식이 아닌 까닭입니다. 천부경을 풀이하다 보면 그 역시 상식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최치원의 삶을 평가하자면 한 마디로 파란만장입니다.
그는 신라·당나라·발해가 멸망하던 시기에 태어나 고려가 건국되고 차이나에서 5호 16국의 혼란이 계속되던 때까지 활동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삼교를 회통하는 문장가로, 국익을 생각하는 외교관으로, 시대를 앞서가는 경세가로, 선맥의 계승자로 활동했지요.

그 와중에서 그는 풍류도를 논하고 천부경을 번역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결코 순탄하지 않은 인생을 살면서도, 뚜렷한 목표가 있는 삶을 추구했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러한 그의 삶은 12세 이전의 소년기, 당나라 유학기, 과거급제 후 활동기, 귀국 후 활동기, 은둔기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그 기간 동안 그는 시련과 고난과 도전과 영광을 두루 경험했고,
나름대로의 가치관을 정립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궁금한 것은 그가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느냐는 점입니다.

이를 알아보기 위해 먼저 그의 생애를 단편적으로 살펴본 뒤 시대적 배경과 가치관과 풍류도와 후세의 평가를 차례대로 살펴보기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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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만장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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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은 약 1,100년 전(신라 헌강왕 원년 857),
6두품 견일肩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싹이 보였던지 그는 12살 어린 나이에 홀로 당나라 유학을 떠났습니다. 이후 18세(875)에 당나라 과거를 급제한 뒤, 20세(877)에 표수현위漂水縣尉가 되었습니다. 당나라에서 얻은 최초의 관직이었습니다.

하지만 21세가 되던 해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납니다.
박학광사과博學廣詞科에 응시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으니 그는 입산하여 오직 학문에 열중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그는 양식이 떨어지는 곤궁함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관직에서 물러나 녹봉이 끊긴 상태에서 마땅한 수입원조차 없는 까닭이었습니다.

생계가 어려워진 그는 주위의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이 때 만난 사람이 조정 실력자 고변高騈이었습니다. 고변은 그에게 많은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곤궁한 생활을 해결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재능을 발휘하는 길까지 열어 주었습니다. '황소의 난(880)'이 일어나자 조정은 고변에게 병마도통의 책임을 맡겼습니다.

회남절도사 겸 병마도통 고변은 그를 종사관으로 삼았습니다.
문서를 관장하는 종사관으로써의 최치원은 고변과 조정을 대신하는 격문과 서신을 작성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4년간에 걸쳐 천하에 문명文名을 떨치게 됩니다. 저 유명한 '토황소격吐黃巢格'을 대작한 것도 바로 이 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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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가 모두 너를 죽이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아마 지하의 귀신들도
가만히 너를 죽이려고 의논하였을 것이다.
(不唯天下之人 階思顯斬 仰亦地之鬼己議陰誅)--계자의 좌방부 소거해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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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문을 읽은 황소는 어찌나 놀랐던지,
혼절하여 앉았던 의자에서 떨어졌다고 합니다. 격문은 황소에게 쏠렸던 천하의 인심을 조정에 돌아가도록 했다고 합니다. 황제는 난이 평정된 뒤, 최치원에게 도통순관都統巡官 승무랑시어사承務郞侍御使 내봉공內奉公과 자금어대紫金魚垈를 하사하기도 했습니다.

황소의 난이 평정된 후,
그는 당나라의 많은 문인, 승려, 도인 등과 교분을 쌓고 서신을 주고 받는 등 명성을 높이는 한편,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습니다. 황제와 회남절도사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있으면서도 그는 28세(884) 때 귀국을 결심합니다. 그는 황제에게,

"오랫동안 부모 계신 곳을 떠나 있었는데 귀국을 허락하시니……감사합니다…….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하지 못하겠습니다. 머물려니 까마귀의 정에 마음이 상하고, 떠나려 하니 그리움을 품게 됩니다. 지금 떠나가려 하나 헌하軒下가 그립습니다. 저의 심정은 감격하여 마음이 뛰고 눈물이 흐름을 이길 수 없습니다."

라는 말로 기쁨과 아쉬움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최치원의 유학기를 살펴볼 때, 그는 끈기와 인내심으로 학업에 정진하여 입신양명을 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인물들과 교분을 나누고 황제의 총애까지 받는 동시에 당문화에 정통했으므로, 어린 나이에 유학을 떠난 목적을 충분히 달성했다고 할 것입니다.

당시 그는 명성을 천하에 떨친 뒤,
많은 명사들과의 교분을 통해 학문과 경륜의 깊이를 더하면서 날로 발전을 거듭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귀국을 결심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귀국이었으므로 제법 논란이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냐는 거죠. 대체로 세 가지로 설명됩니다.

첫째, 당의 정치적 상황에 염증을 느꼈을 가능성이 있고,
둘째, 17년 동안의 타향살이로 몸과 마음이 지쳤을 가능성이 있고,
셋째, 짐작할 수 없는 어떤 이유가 있었을 가능성도 있죠.

어쨌든 그는 29세 때(885년 3월) 신라로 귀국했습니다.
헌강왕은 시독侍讀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이라는 직책을 내려줍니다. 한림학사는 당의 관직을 갖고 귀국한 자들에게 주는 의례적인 벼슬이었죠. 수병부시랑과 지서서감이라는 벼슬은 달랐습니다. 특별한 우대였죠.

그 때문에 신라 조정에는 그를 시기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는 스스로 지방관을 자원했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다음해 7월, 헌강왕이 죽고 동생인 정강왕이 즉위하였으나, 그 역시 1년만에 죽고 진성여왕(887 - 897)이 즉위하였습니다. 이에 신라는 왕권이 약해지고 조정의 기강이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가뭄·천재지변과 관리의 횡포가 계속되던 신라.
그 틈을 탄 도적들의 횡행이 계속되면서 견디지 못한 농민들은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와 함께 지방의 호족세력들이 나서는 등 극도의 혼란이 일어나면서 신라는 말기적상황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서 그는 정치개혁의 경륜을 쌓는 한편 문필文筆에 전력을 다하였습니다.
신라불교사에 큰 의미가 있는 사산비명四山碑銘을 남긴 것도 바로 이 때입니다. 그는 귀국 후 37세(진성여왕 7년 893)때까지 태산군, 부성군, 대산군, 천령군 등 주로 외직을 돌아다니며 태수로 봉직하며 혼란의 시대를 직접 경험하였습니다.

894년에는 그는 정치적 개혁안을 담은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를 올리기도 했죠.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수습책이었을 거라고 평가됩니다만, 아쉽게도 그 내용은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어쨌든 진성여왕은 이를 가납하여 6두품 최고 벼슬인 아찬阿贊을 제수하였습니다만, 결국 건의안을 채택되지 않았고, 신라는 멸망의 길을 걷게 됩니다.

이후 그는 42세에 모든 활동을 정리하였습니다.
현실을 떠나 가야산으로 은둔하게 된 것입니다. 그가 가야산으로 은둔한 뒤의 행적이나 죽음에 관한 기록이 없어 더 이상 자세한 활동 상황은 알 수 없습니다. 일설에는 그가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는 말도 있고 선맥의 후계자가 되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의 문인 중에는 고려 조정에 참여한 자가 많았으므로,
후진양성에 힘을 쏟았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어쨌든 격동의 시기에 태어났던 그는 어린 나이에 유학을 떠나 금의환향했으나 경륜을 펼쳐보지도 못한 채 결국 은둔의 삶을 선택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삶을 평범하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최치원의 삶은 파란만장 그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그의 삶 속에 표현되고 있는 고구려의 사상은, 오늘 날 차이나가 동북공정이라고 하는 이름을 내세우면서 역사도둑질에 나서고 있는 상황을 정리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시대적상황.

혹자들은 흔히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타고난 자질과 인격이라고 합니다.
같은 일이라도 사람에 따라 느끼는 바가 다르고, 같은 행복도 사람에 따라 느끼는 바가 다르며, 같은 불행도 사람에 따라 느끼는 바가 다릅니다. 느끼는 바가 다르면 길흉화복이 다를 터. 대체로 옳은 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가하면 자질과 인격에 따라 목표하는 바가 다르고,
성취하려는 바가 다르며,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이 달라지는 것이 곧 인생이라고 할 것 입니다. 다만 그렇다고 해도 자질과 인격만이 삶을 결정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때와 장소와 환경 등과 같은 조건이 삶을 결정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한석봉이 만약 21세기의 쌀나라에서 태어났다면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아인슈타인이 만약 15세기의 조선에서 태어났다면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그들은 물론 남다른 인격과 자질을 타고났으니, 스스로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다만 같은 업적을 남길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자질과 뛰어난 인격을 타고났더라도,
때와 장소와 환경이라는 조건이 어울리지 않는다면 그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21세기 쌀나라의 한석봉이나 15세기 조선의 아인슈타인은, 다만 불우한 천재로서의 삶에 만족해야 할 가능성이 더 많을 것입니다.

21세기의 쌀나라는 한석봉과 같은 사람이 서예가로 성공할 수 없고,
15세기의 조선은 아인슈타인과 같은 사람이 과학자로 성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삶은 때때로 자질이나 인격보다 시대적상황과 문화적조류와 정치적배경이 더 중요할 수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생각을 해 보면,
최치원이 12살 어린 나이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난 것도, 황소의 난을 통해 문명을 천하에 떨친 것도, 신라로 귀국하여 관리가 된 것도, 끝내 가야산으로 은둔하게 된 것도 그에 합당하는 이유와 배경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 있어 시대적상황은 더욱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는 신라와 당과 발해가 정치·경제·문화·사회적으로 화려했던 과거를 마감하며 망국의 조짐을 드러내던 시대에 태어났고, 본격적인 혼란이 계속되던 시대에 활동했으며, 혼란이 완전히 수습되기 전에 삶을 마감하였습니다.

동시에 그는 그 시대를 대표하는 지식인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격동의 한 복판에서 매사 경험하면서 고민을 거듭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혼란을 방관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거기에서 그의 선택은 무엇이었을까요? 그 내막을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만, 행적은 분명합니다.

빈공과에 급제한 이후에도 계속 정진하였으나,
곤궁에 빠져 고변을 만났으며 그의 종사관이 되어 황소를 토벌하자는 격문을 짓고, 입신양명의 뜻을 이루었으나 바로 귀국하여 정치개혁안으로 보이는 시무십여조를 올린 것으로 보아 천부경을 번역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라와 당은 대체 어떤 나라였을까요?

신라는 고구려가 멸망하고 난 뒤,
당을 몰아내고 반도의 패자로 군림했습니다. 이어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며 이 땅의 평화를 가져왔지요. 그렇다고 해도 영원한 제국은 존재하지 않는 법. 신라는 날이 갈수록 향락적이고 퇴폐적인 길을 걸었습니다.

말기에 이르러서 왕위계승의 원칙이 무너지고,
정쟁에서 밀린 귀족들의 자손과 6두품 이하 계층은 깊은 산중에 은둔하거나 세상사에 초연한 삶을 추구하였습니다. 이런 분위기는 국교인 불교를 배척하고 노장老莊과 도교를 수용하는 기반으로 작용했습니다. 이른 바 삼교가 융합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는 삼교가 귀일하던 당나라 사상이 유입된 결과이기도 했습니다.
한편으로 당시 신라의 골품제도는 등용을 제한하고 있었습니다. 즉, 진골은 17관등 중 5위에서 1위까지 오를 수 있었지만 6두품은 6위가 한계였으며, 그 외의 출신은 벼슬이 제한되었습니다. 능력이 있더라도 등용의 길은 험난했던 것이지요.

특히 6두품은 득난得難이라 할 정도였습니다.
원효元曉나 최치원과 같이 뛰어난 인재들은 모두 6두품이었습니다. 신라는 6두품 이하 계급을 등용할 때, 학문의 고하를 가리겠다고 했지만 그나마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6두품 이하 계급에서는 불만이 대단했습니다. 다만 한 가지 길이 있었지요.

당나라 관직을 받으면 쉽게 등용될 수 있는 길.
그런 길이 있었습니다. 때 마침, 당나라는 외국인에게 빈공과賓貢科를 시행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신라의 인재들은 모두 빈공과에 응시하고자 했습니다. 그 결과, 당나라 문화는 더욱 신속히 유입되고 있었습니다.

최치원이 태어나던 시기.
그 때는 청해진을 근거로 활약하던 장보고가 죽은 이후, 신라의 재정이 파탄지경에 이르렀으므로 혼란은 더욱 가중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서라벌에 있는 귀족들은 혼란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하기보다, 왕위계승을 놓고 다툼을 벌이는 일에만 관심을 두었습니다.

그 때문에 나라사정은 더욱 어려워지기만 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신라는 총체적으로 와해되고 있었던 것이지요. 최치원은 바로 그런 시대에 태어났습니다. 12살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 당초의 뜻을 이루었지만 멸망하고 있는 신라는 최치원이 뜻을 펼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삼교를 회통하는 동시에 선맥의 후계자로써 활동했던 최치원.
천부경을 남기고 또한 풍류도에 관한 언급을 남긴 유일한 인물이므로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많은 의문을 해결하려면 그의 삶과 학문적성향을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의 학문은 당나라에서 꽃을 피웠으니 이제 그 사정을 살피고자 합니다.

당나라는 반란에 의해 세워진 나라였습니다.
원래 수隋나라 양제煬帝는 도참설을 신봉했습니다. 또 당시 시중에는 맹랑한 소문이 떠돌고 있었습니다. 이른 바 백성을 선동하고자 하는 도참입니다.

장차 노군(老君)의 자손이 세상을 다스린다.
- 양씨장멸(楊氏將滅) 이씨장흥(李氏將興) -'

소문을 알게 된 양제는 이연李淵과 그의 아들 이세민李世民을 탄압했습니다.
이연 부자는 이에 항거하여 반란을 일으켰지요. 이세민이 주도한 반란은 결국 성공했고 이어 당제국이 세워졌습니다. 수를 이은 당나라는 정관지치貞觀之治(627-649)와 개원지치開元之治(713-741)를 잇는 130년간 보기 드문 태평성대를 열었습니다.

당태종은 특히 고대로부터 계승된 학술적 성과를 총결산하고자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당나라 문화는 크게 성숙할 수 있었습니다. 당태종은 오경五經이 성인의 시대에서 멀리 떨어졌다는 점에 착안하여 오류가 많은 부분을 바로 잡도록 했지요. 이에 많은 석학들이 약 25년간 경전을 정리하는 동안 특히 역에 관한 연구에 골몰했습니다.

오경 중에서도 으뜸이 역이라고 믿은 까닭이었습니다.
이 때 집필된 책이 주역정의周易正義이고 민간의 이정조李鼎祖는 유사 이래의 역을 집대성하는 주역집해周易集解를 저술했습니다. 그런 만큼 당나라 문물은 크게 발전하였지만 결과적으로 유·불·도 삼교가 서로 융합되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했습니다.

삼교를 고루 용납하던 당나라.
훗날 성리학이 탄생하는 계기로 작용하였기에 당나라문화를 주의깊게 살피는 일은 의미가 있습니다. 잠시 주역집해의 저술자 이정조의 언급을 살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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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교의 기원과 9류의 관건을 깊이 탐구하니,
실로 나라를 열고 집안을 이어 자신을 닦는 올바른 술법이다. 복상(卜商)이 입실하여 미언(微言)을 전수받은 이래 전주(傳注)한 이가 백가(百家)로 천고에 면면히 이어져 왔다. 마침내 천착하기에 이르렀으나 심연의 깊이는 헤아리지 못하였다.

오직 왕필(王弼)과 정현(鄭玄)만이 연이어 세상에 크게 행하였다.
정현은 천상(天象)을 참고하고 왕필은 인간사를 해석하였다. 그렇지만 역의 도리가 어찌 하늘과 인간 어느 한쪽에 편중되고 구애되겠는가? 후학들로 하여금 분란이 일어나게 하여 각각 좁은 소견을 연찬케 하였으니 이에 원류를 변별할 수 없는 과오를 저질렀다.

천상은 멀어 찾기가 어렵고,
인간사는 가까워 쉬 익히게 되니 속된 노랫가락에 흡족하여 빙그레 웃게 된다. 바야흐로 분류하여 모음이 바로 여기에 있음인저!
----(주역집해周易集解의 서문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당나라문화는 결국 유·불·도의 삼교가 귀일하는 경향을 보여줍니다.
당나라 때는 불교가 전파되고 도교의 종교화가 완성되는 시기였습니다. 지배 계층은 유학의 이념을 따르면서도 불교와 도교를 정치투쟁에 이용했지요. 원래 당나라가 유·불·도를 용납했던 것은 정치적 상황 때문이었습니다.

즉 당태종은 몇 차례 왕자의 난을 평정하는 동안,
도사 왕원지王遠知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황제에 오른 뒤, 상청파의 도사들을 국사國師로 삼았지요. 이어 노자는 태상현원황제로 높이고, 노자 어머니를 선천태후로 받들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태종의 며느리 측천무후는 불교를 우대했습니다.

측천무후 역시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의 일부였죠.
최초의 여황제로서 당나라를 무너뜨리려고 했던 측천무후였으므로 불교는 융성할 수 있었습니다만, 뒤를 이었던 현종은 다시 도교를 높였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삼교는 점차 융합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로 인하여 당나라문화는 꽃을 피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하고 주역은 도가와 불가의 논리로 해석되기도 하고,
불경은 도가의 논리로 해석되기도 했습니다. 각 시기마다 3교의 지위는 조금씩 달랐습니다. 처음엔 도교가 존숭되었지만 유학은 곧 지위를 회복하였고 불교가 범람하는가 하면 도교가 성행했습니다. 어떤 면에서 볼 때 삼교는 함께 바람직한 경쟁을 한 것이었습니다.

인문학 분야의 성과는 별로 없었습니다.
다만 자연과학 분야는 달랐습니다. 여러가지 업적이 쌓이면서 크게 발전하였습니다. 가령 천문역법에서 이순풍李順風은 혼천의로 황도, 적도, 지평의 경위를 측정했고, 승려인 일행一行은 대연력大衍歷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수학 분야에서는 왕효통王孝通의 집고산경緝古算經,
이순풍은 십부산경十部算經을 저술하므로써 수준을 높였습니다. 그러는 한편 약학, 약물학, 지리학에서도 일정한 성과를 보였습니다. 이러한 과학의 발달은 필연적으로 미신을 타파하며 유물론적 역리철학易理哲學의 발전을 촉진시키는 힘으로 작용하기도 했지요.

당나라는 '안사安史의 난(755 - 763)' 이후 점차 국력이 쇠하기 시작했습니다.
즉 과거제도로 인재를 등용하므로써 신진들이 관직에 등용되었지만 바로 그 때문에 구세력이 몰락하면서 당나라의 왕권도 권위를 잃어 갔던 것이지요. 이후 전반적인 침체기에 빠져들면서 민생이 피폐해지면서 반란의 기운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이어 '황소의 난'을 겪는 동안 당나라는 말기적상황으로 치닫게 되었습니다.
최치원이 태어났을 때, 신라는 점차 쇠퇴하고 있었고 당나라는 말기적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활동하던 때 신라와 당은 발해와 함께 멸망을 재촉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이처럼 그의 시대는 혼란의 연속으로 시대를 마감하는 와중에 있었습니다.

최치원이 비록 최고의 지식을 쌓은 강한 인내심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그 시대는 그의 경륜을 펼치기 어려웠습니다. 만약 혁명가였다면 천하를 도모할 수도 있었겠지만 아쉽게도 그는 문장가인 동시에 외교관이며 철학자였습니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하나. 정신세계 뿐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만 철학자로서의 사명을 다하고자 했던 최치원이었다고 저는 봅니다.
그 당시 유행하던 미륵사상에 의존하며 하늘만 쳐다보기보다 민족적인 긍지를 되찾고 도덕성을 회복하는 일이 더 시급하다고 여겼을 것이라고 사료됩니다. 그가 진성여왕에게 올렸다는 시무십여조도 그런 시각에서 이해되어질 수 있을 것이며 천부경 번역 역시 같은 시각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한 시대의 가치관은 그 시대를 사는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는 법이죠.
다만 지성인들 그 중에서도 미래를 걱정하는 지성인들은 좀 다릅니다. 그 시대의 가치관으로는 어떤 희망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과감히 과거를 탈피하고자 하죠. 즉 새로운 가치관을 찾아 스스로 가시밭길을 걸어갑니다. 예수, 공맹, 노장, 붓다 등도 그런 종류의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최치원은 그 시대에 과연 어떤 길을 걸어가고자 했을까요?
그걸 이해하려면 그의 학문적 소양이나 사상적 토대를 알아야만 할 것입니다. 신라에서 태어난 그의 학문과 사상적 토대는 신라의 학풍에서 기인했을 것입니다. 또한 그가 12세에 홀로 당나라에 유학을 떠났습니다. 아버지 견일은 어린 아들을 홀로 떠나 보내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네가 10년안에 당나라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라고 하지 말아라. 나도 너같은 아들을 두었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 날 많은 부모들이 자식을 멀리 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최치원의 아버지 견일처럼 저렇게 홀로 떠나보내지도 않고 또 저렇게까지 자신하지도 않죠. 어쨌거나 그는 일찍부터 신라의 학문이나 사상을 두루 섭렵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정작 그의 학문과 사상이 완숙한 경지에 도달하게 된 곳은 당나라였습니다. 물론 그는 훗날 선맥의 후계자가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당나라에서 보낸 16년이라는 세월은 결코 짧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세월은 그로 하여금 이민족 문화에 빠져들게 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신라 외교관으로 지내는 동안 당나라를 찬양하는 문장을 많이 남긴 최치원은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대표적 사대 모화주의자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고 있기도 합니다.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주로 문장을 예로 듭니다.

그러나 최치원의 문장이란 주로 외교문서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원래 외교란 상대를 적당히 올려주는 법. 또한 당나라는 많은 은혜를 베풀었을 뿐만 아니라 학문적·사상적·정치적 기반과 출세의 기반까지도 제공했습니다. 막강한 실력자의 후원이 뒤따르고 황제의 신임까지 얻었습니다. 즉 그에게는 굳이 당나라를 경원해야 할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골품제도로 신분상 불이익을 당할 것이 뻔한 신라로 귀국했습니다.
그것은 분명 최치원 자신이 정치적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나라를 신라로 생각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가리켜 동인東人이라고 했습니다. 동쪽에 사는 사람이라는 뜻이겠지만 이는 한편으로 당나라와 신라는 대등하게 본다는 의미이니 소위 중화사상을 부인했다는 뜻이죠.

황해를 중심으로 신라는 동쪽 당나라는 서쪽에 있습니다.
동인이란 결국 신라와 당을 동등한 위치로 본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죠. 그 때문에라도 우리는 그를 일방적으로 사대 모화주의자라고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대표적 사대모화주의자라니요? 이는 지나친 평가라고 봅니다. 어쨌든 그는 진감화상비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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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도는 사람에게 멀지 아니하고 사람은 다른 실체가 없다. 이로써 동인(東人)의 아들이 불교가 되고 유교가 되는 데에는 서쪽으로 큰 바다를 건너 이중 삼중 통역을 거쳐 유학할 때 목숨은 조각배에 달렸지만 마음은 아름다운 나라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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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동인이란 민족의 주체의식과 통합니다.
그러한 '동인 의식'은 선맥의 후계자로서의 최치원의 삶과 일맥이 상통합니다. 또 이는 천부경을 남기게 된 배경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어쨌든 그의 시대는 그만큼 혼란의 연속이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대로 그는 18세 때 유학을 채용하던 당나라 과거에 급제했습니다.

그의 친형은 승려였고, 후원자 고변은 도가를 존숭했습니다.
또 신라와 당나라는 삼교를 두루 용납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삼교에 접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사상적 중심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혹 삼교 모두에게 적당히 추파를 던지고 있었을까요? 아니면 따로 생각한 바가 있었을까요? 그는 상태사시중장上太師侍中狀에서

"이제 치원은 유문儒門의 말학末學"
이라고 했습니다. 또 하제이부랑별지賀除吏部郞別紙에서는

"오늘도 먼 지방 사람으로서 중니中尼의 생도라 일컫는다. 썩은 선비의 유도로 들추어내기가 부끄럽다. 재능이 없는 선비가 글을 짓다. 마음으로 천리마의 수레를 잡고 우러러 계하에 추창하며 실로 유종儒宗을 귀히 여기어 은혜를 바라고 덕을 그리면서 애닲은 심정을 이기지 못하겠다"

라고 했습니다. 그는 평소 유자를 자처하면서도 유교와 불교의 성격을 가리켜
"공자는 단서를 발명했고 석씨는 극치에 다다랐다(孔發其端, 釋窮其致). 유·불·선을 관통하는 궁극적 이상과 근원을 도라고 한다. 신이 비록 세속의 티끌에 몸을 얽매었으나 신선의 행장에 뜻을 두어 대성하기를 바라고 상달하기를 기약한지라…이하중략…."

고 했는가 하면, 진감선사 대공탑비문에서는
"도가 사람에게서 멀지 아니하고 사람은 이방이 없다. 그러므로 불교를 할 수도 있고 유교를 할 수도 있다"
라고 했으며 구화수대운사소求化修大雲寺疏에서는

"유교의 좋은 가르침을 거양하여 때를 잃지 않고 상고의 풍風을 일으켜 영원히 대동의 교화를 이룬다"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훗날 왕건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보냈다고 합니다.

"신라는 망하고 고려가 일어선다(溪林黃葉 谷嶺靑松)"
이는 그가 삼교를 회통하고 있음은 물론 미래를 내다보는 경륜까지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에 훗날 심약沈約은 최치원을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공자는 발단發端을 하였고 석씨는 극치가 된다고 하였으니 참으로 큰 것을 아는 이로써 비로소 그와 더불어 지극한 도를 논할 수 있겠다."

이러한 평가들은 모두 최치원 그가 삼교에 회통하고 있었다는 것을 입증합니다.
이는 천부경과 풍류도를 해석하고자 할 때 많은 참고가 될 것입니다. 그의 동인의식과 훗날의 사대모화주의자라는 평가는 크게 엇갈리는 부분이라고 저는 봅니다.

문제는 천부경과 풍류도입니다.

 

비록 그 해석에 많은 문제가 있다고 해도 그가 우리 민족의 사상을 깊이 조명하려고 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