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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첩된 원기둥들, 시간과 상처-고충환(미술비평)
고대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의 시간의 신 크로노스(사투르누스)는 자식을 낳는 족족 입안에 집어삼키는 비정한 아버지이다. 인육을 먹는 인간 즉 카니벌리즘의 기원에 대해서도 말해주는 이 신화 속에서 아비에게 죽임을 당하는 자식은 현재를 의미하며, 그 현재의 시간은 세상과 접촉하자마자 곧바로 과거의 시간 속으로 편입된다(이는 흐르는 똑같은 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고대 그리스의 격언과도 통한다). 여기서 현전(現前)하는 것은 현재의 시간이기보다는 과거의 시간이며, 이는 현재시제에 바탕을 둔 일상적인 시간개념과는 다른 차원의 시간개념을 암시한다. 말하자면 시제에서 더 궁극적인 것은 자신이 집어삼킨 현재로 인해 비대해진 과거인 것이며, 이는 그대로 현재보다는 과거에 사로잡힌 인간 실존에 대해서 말해준다. 한마디로 인간에게 있어서 존재론적이고 실존적인 시간 개념은 언제나 과거시제로만 주어진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다름 아닌 자기반성적인 존재인 것이며, 과거시제 속에서만 이러한 자기와 맞닥트릴 수 있기 때문이다(자기반성적인 과정이 외적으로 드러난 것이 회상과 환기이다). 이처럼 자기반성적인 모든 인간은 언제나 현재보다는 과거에 사로잡힌 자이며, 의식보다는 무의식을 사는 자이다.
한편, 삶과 죽음이 접해 있는 시간의 알레고리는 시간의 순환에 대해 말해준다. 순환하는 시간, 반복되는 시간의 고리는 존재의 뒷덜미를 부여잡고 있는 과거 시제와 더불어 상식적인 시간개념을 배반한다. 다시 말해서, 시간을 양적인 것으로 환치시키는 물리적 시간개념을 거부한다. 또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시제 사이에 끼여들 수 있는 어떠한 가변적인 변수나 돌발적인 우연성의 개입도 인정하지 않는, 직선적이고 선분적인 시간개념을 비켜간다. 이로써 시제 속에 자기를 투영하는 자기반성적인 인격체는 과거시제 속에서의 질적 시간을 사는 자이다. 이러한 신화나 알레고리는 하나같이 물질의 근본인 공간과 함께 인간의 존재론적 근본이 시간임을 말해준다(하이데거). 그런가하면 베르그송의 지속 개념은 이질적이고 다양한 성분들이 서로 융합되는 내적으로 연속된 일종의 흐름과도 같은 것으로서(마치 마르셀 프루스트의 의식의 흐름과도 같은), 질적으로 등가를 이루는 성분들이 연속된 물리적 시간개념과는 다르다. 이렇듯 시간은 인간 존재의 축이며 의식의 축이다. 그리고 인간의 의식이 그렇듯 그 성분은 양적이기보다는 질적인 성분으로 구조화돼 있다.
그렇다면 동시대 작가들은 이러한 시간개념을 어떻게 가시화하며, 그 추상적인 순수 개념에다가 어떻게 물적 형식의 옷을 덧입혀 시간을 현전시키는가. 이용덕의 조각은 이러한 물음에 그 맥이 닿아 있다. 그에게 있어서 조각은 자기반성적인 행위인 것이며(그의 작업에는 어김없이 정신 혹은 혼의 존재에 대한 물음이 전제돼 있다), 그 자기반성적 행위는 시간을 감각화하는 것으로 나타난다(시간의 축적 혹은 축적된 시간, 순환, 재생, 생장 등의 부제에서도 보듯이). 말하자면 그의 작업에 있어서의 시간의 물음은 곧 자기의 존재를 묻는 것이 된다. 이를 위해서 작가는 마치 벽돌을 한 장 한 장 쌓듯 일종의 단위적 지층(시간의 단자, 모나드)을 켜켜이 쌓아올려 원기둥(시간기둥)을 만든다. 중심성이 강한 수직 구도로 우뚝 서있는 원기둥은 시간개념의 정점이자 이상향인 영원성을 지향한다. 이는 그대로 순수 관념의 형태로만 주어지기 마련인 영원한 시간을 붙잡으려는 고대 이집트인의 생사관을(이는 그 자체 세계의 축을 의미하는 오벨리스크로 나타난다), 유한자로서 무한한 존재를 꿈꾸는 낭만주의자의 비전을(이는 산 자와 죽은 자를 하나로 결합시키는 묘지와 폐허 이미지로 나타난다), 그리고 수직의 원기둥의 형상으로써 영원한 시간을 표상한 종교적 도상학을 이어받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외적으로 드러나 보이지는 않지만 빈 기둥의 안쪽 표면에 새겨진 선들은 시간의 물리적 계측을(마치 시계의 눈금과도 같은) 암시한다. 마치 시간을 양적으로 도해한 듯한 그 선분들은 사실 각목의 안쪽 면을 따라 균일하게 칼집을 낸 것으로서, 수직의 각목이 원형의 형태로 쉽게 굽어지게 하기 위한 기술적인 과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속이 빈 이러한 원형의 기둥들이 큰 원형의 기둥 속에 보다 더 작은 기둥이 들어 있는 식으로 이중 삼중의 겹으로 중첩돼 있다. 그럼으로써 작가는 종(縱)으로 그리고 횡(橫)으로도 중첩돼 있는 시간의 겹구조를 가시화한다. 이를테면 하나의 원기둥 자체를 구조화하고 있는 시간의 단층들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이어진 수직적 시간개념을 도해한 것이라면, 원기둥(시간기둥) 속에 들어있는 또 다른 원기둥(시간기둥)은 이러한 선분적이고 물리적인 시간개념과는 또 다른 시간의 존재방식에 대해 말해준다. 그러니까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어떠한 시제상의 차이도 없이 주름으로 겹쳐져 있거나, 혹은 하나의 지평 위에 펼쳐진 수평적 시간개념을 표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주름의 형태로 존재하는 이러한 수평적 시간은 모든 계량적 근거로부터 벗어난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시간이며(마치 프루스트에게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동시적으로 현전할 뿐만 아니라, 서로의 시제간에 간섭하고, 서로의 시제 속에 침투하는 의식의 흐름의 속성과도 같은), 세계의 지평을 자기의 안쪽으로 불러들여 내재화하고 개별화한 실존적이고 심리적인 시간이다. 그 심정적 시간은 세계와 맞닥트리고 있는 작가 자신의 외피이다(작가의 실존이 세계와 면해 있는 경계). 그 실존적 피부(시간의 살)는 균일하지 않은 비정형의 형태로 주름져 있고, 그 주름진 피부의 표면에는 파열된 균열이 나 있다. 그리고 이질적인 타자가 공존하는 다중인격체처럼 중첩돼 있고, 폐허와도 같이 허물어져 있다. 마치 한 존재를 증언해 주기 위해 서 있는 묘비와도 같이 허물어진 그 기둥의 이미지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 곧 트라우마를 상기시킨다. 다시 돌아 갈 수 없는 시간들, 다시 돌이킬 수 없는 회한들, 다시 회복할 수 없는 상처들을 증언해주는 퇴락한 기념비를 상기시킨다(현재에 호출된 과거는 언제나 상처의 형태로서만 현전한다. 아름다운 과거는 돌이킬 수 없는 좌절된 욕망이며, 그리고 잊고 싶은 과거는 그 자체가 상처인 것이다).
이렇듯 작가는 자기의 존재를 시간과 동일시하는(자기에게 주어진 일정한 시간을 살아내는 한 존재로서의 자기를 반성하는) 한편, 그 시간의 개념에다 살을 붙인다. 그리고 그 시간의 살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시제로 이어진 순환구조로서, 절대구조로서 나타난다(원형의 형태 자체는 모든 시간의 계기에 대해 열려 있는 동시에 닫혀 있는 시간의 이중성을 암시한다). 그 순환구조가 윤회의 바퀴를, 그리고 그 절대구조가 자기의 꼬리를 물고 있는 뱀인 우로보로스를 닮아 있다. 구조적으로 우로보로스는 자기 외부에 대해 닫혀 있는 뫼비우스의 띠와 통한다. 그리고 이러한 뫼비우스의 띠와 관련해서는 특히 작가가 여타의 원기둥 형상과는 별개로 제시하고 있는 보다 큰 또 다른 작업에서 그 예를 접할 수 있다. 둘 이상의 원형의 구조물이 횡으로 서로 합체되면서 하나의 닫혀진 형상을 이루고 있는 이 작업들은 기하학적 형태에 바탕을 두고 있으면서, 이와 동시에 일말의 유기적 형태로의 변형 가능성을 띠고 있다. 원형의 단위들을 중첩시켜 나가는 과정 중에 비롯되는 우연한 휘어짐 현상을 작업의 일부로 포괄한 것에서는 메타모르포제 즉 생물학적 변태의 가능성이 암시된다. 그 뫼비우스 띠의 절대구조 속에서 시간은 닫혀 있는 동시에 열려 있는 자기 순환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작가가 제작한 모든 원기둥의 형상이나 기하학적이고 유기적인 형태 자체는 하나같이 그 속이 비어 있는 일종의 껍질로만 구조화돼 있다. 이러한 껍질로 된 조각은 적어도 논리적으로 볼 때 양감(매스, 알맹이)을 결여한 것이란 점에서, 그리고 이에 따른 무중력의 존재를 실현한 것이란 점에서 전통적인 조각의 개념을 비켜나 있다. 문제는 이러한 탈조각의 실현이 일종의 눈속임 곧 의태(擬態)의 형태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이용덕의 조각은 외관상 철구조물의 양감으로서 전통적인 조각을 닮았지만(한눈에도 작가의 조각은 기계 구조물의 변형된 한 형태를 상기시킨다), 사실 알고 보면 나무 각목을 조합해 만든 속이 빈 껍질의 구조물인 것이다. 이 지점에서 작가의 작품은 철구조물과 나무 각목의 사이, 전통적인 조각과 탈조각과의 사이, 실제와 의태의 차이만큼이나 동질적이면서도 이질적인 오브제로서의 독특한 존재감을 획득하게 된다.
이렇듯 이용덕은 원기둥(시간기둥)과 함께 뫼비우스의 띠로부터 빌려온 유기적 형상을 통해 존재론적이고 실존적인 시간 개념을 표상한다. 그리고 자기 폐쇄적이고 가역적인 순환하는 시간을, 절대시간을 표상한다. 그 절대시간 속에서 삶은 죽음과 접해 있고, 에로스(삶의 충동)는 타나토스(죽음의 충동)에 물려 있다. 안과 밖이 서로 열려 있는가 하면, 앞(前)과 뒤(後)가 서로 통한다. 그리고 마치 살에 새겨진 문신과도 같은 상처를 통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시간도 현재화할 수 없음을 드러내며, 시간 자체가 이미 존재이자 상처임을 증언한다.
누적된 시간의 탄력-최태만(미술평론가)
평붓이나 혁필(革筆)을 이용해 공간에 그려놓은 획이라고 할까, 아니면 야적해 놓은 강철 원자재와도 같은 것이라고 할까. 이용덕이 만들어내는 형태는 말 그대로 공간에 그려놓은 드로잉이거나 혹은 다른 형태로의 변화를 예비하는 일종의 중간단계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자체로 완성된 형태를 지닌 그의 작품은 자기완결성을 지니면서 동시에 무한으로 향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때, 자기완결성이란 작품의 형태가 ‘닫힌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그러한 형태가 ‘종결’로서가 아니라 순환과 지속의 특성도 동시에 가지고 있음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은 무한성의 의미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시작과 끝이 분명하며, 작품의 전체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은 분명히 ‘닫힌 형태’를 지닌 것임에 분명하지만 그 형태가 연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는 개방적 속성도 지니고 있다. 말하자면 형태가 끝나는 지점에 마치 형태의 성장을 이끌어가는 생장점이 있는 것과 같은 시각적 효과를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는 것은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그의 작품은 개방과 폐쇄, 활동과 정지, 성장과 응축이란 서로 상반된 두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자율적으로 운동하는 듯한 형태와 더 이상의 움직임이 개입할 때 파괴될 수 있는 완결된 구조 사이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긴장. 이렇듯 그의 작품은 서로 대척지점에 놓인 속성들을 함께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가 재료로 선택하고 있는 나무가 지닌 정서적 측면을 고려할 때 일면 건조하게 보일 수 있는 견고한 형태와 부드럽고 온화한 재료가 서로 충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그의 작품은 따뜻한 질감, 생명에 대한 암시와 은유 등의 나무란 물질이 환기하는 속성 때문에 유기적 형태에 어울릴 것이란 일반적 기대를 뛰어넘어 중성적이며 건조한 형태를 만들어냄으로써 재료에 의해 쉽게 규정될 수 있는 형태의 한계를 벗어나고 있다. 나아가 직선으로 뻗어나가는 나무의 성질과 상관없이 활처럼 휘어지고 굽은 형태는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시작도 끝도 없이 순환하는 구조에 대해 떠올리게 만든다. 일정한 간격으로 판재에 홈을 내 둥근 형태를 만드는 인테리어 기술에서 힌트를 얻은 그의 방법은 정밀한 계산과 상당한 시간을 투여해야 하는 지독한 노동의 결과물인 까닭에 ‘시간의 누적’이란 문학적 감수성을 자극하는 부분도 있다. 더욱이 이렇게 쌓아올린 단층들은 시간의 주름이자 작가에 의해 제조된 나이테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 표면은 수많은 세포(cell)들로 구성된 조직으로서 대지(大地)로부터 솟아오르는가 하면 거대한 격랑이 대기(大氣)를 휘저으며 굽이치듯 뻗어나가고 있다. 건조하면서 기하학적인 구조물들이 꿈틀대는 생명의 율동으로 살아나는 그의 작품은 그런 점에서 대지의 에너지가 지상으로 확산되는 자장(磁場)처럼 보이기도 한다. 탄력이 높은 철판을 감아놓은 것 같은 형태는 언제든지 주변공간으로 튀어나갈 수 있는 팽팽한 긴장을 불러일으킨다. 때로는 외부의 운동에너지가 안으로 응축되며 더욱 견고한 형태로 완성되고 있음을 보여주는가 하면 때로는 내부의 에너지가 외부로 확산되며 공간을 새롭게 규정하는 요소로 작용하는 듯한 형태는 따라서 공간을 활성화하는 특징까지 지닌다. 즉 그의 작품은 공간과 공간을 연결하는 매듭이 풀어진 끈이자 대지와 공간의 연결을 예비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나아가 육중한 중량과 공간을 점유하는 체적은 작품의 기념비성을 더욱 고양시킨다. 둥근 형태는 성장과 확산을 반복하며 자기증식의 의지를 드러내는가 하면 형태의 내부로 파고들며 공간을 한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곡선형의 구조가 끝나는 지점에서 발견할 수 있는 종결부, 잘려나간 피부의 속살로서 나무토막의 표피는 이 작품의 무한정한 성장을 저지시킴으로써 작품을 안정적으로 만드는 것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종결부가 있기 때문에 작품의 탄성은 더욱 강화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시선은 끝없이 뻗어나가 종국에는 정처 없는 것이 될 수도 있으므로 이 종결부를 통해 자기의 규모를 한정한다는 것은 중요하다. 지층의 단면을 잘라놓은 듯한, 또는 마치 시간을 일정한 두께를 지닌 판(板)처럼 쌓아올린 듯한 그의 작품은 작가의 의도를 넘어서서 자연의 작용에 의해 둥글게 말려들어간 형태를 보여줌으로써 그 자체가 시간의 법칙에 순응하려는 태도까지 암시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이렇게 만들어진 형태는 영원히 고착된 것이라기보다 언제든지 탄력을 받아 진동하거나 혹은 넓게 펼쳐질 수 있는 까닭에 멈춤 속의 동요란 시각적, 심리적 효과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보면서 완성된 형태가 상기하는 상징적 의미보다 마디마디를 연결시키며 형태를 만들어가는 지둔한 작업 자체가 이 작품의 주제인지 모른다는 상상을 할 수 있다. 그럴 경우 형태는 어떤 규칙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자율적인 것이 된다. 닫힌 구조와 열린 구조라는 서로 상반된 성격을 지닌 형태만큼이나 그의 작품은 다의적 해석가능성 앞에 열려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두드러진 것은 무엇보다 시간과의 투쟁과정에서 경험할 수 있는 희열이다. 결과로서 형태는 단순하지만 그 과정에 켜켜이 쌓인 시간의 무게는 그만큼 무거울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중량감이 형태를 시각적으로 더욱 탄력 넘치는 것으로 만드는 요소인 것이다. 집적, 누적, 반복이 주는 심미적 쾌감 못지않게 오랜 시간 투여된 노동의 양이 주는 즐거움을 지닌 그의 작품은 온갖 해체의 방법에 점령당해 있는 우리에게 조각의 장르적 가치를 환기시키는 특별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다만 노동에의 탐닉이 빠져들 수 있는 형태의 동어반복, 방법에의 함몰은 그가 경계해야 할 부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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