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야할한국사

고조선과 홍산문화

영지니 2007. 12. 29. 22:55

발해 북안의 신석기 문화 중 가장 주목할 문화가 <홍산문화>입니다. 이 홍산 문화는 실로 엄청난 문화입니다. 이 문화를 발굴하므로 인해서 중국은 황하중심 문화 전파론을 지양하고 이른 바 '다중심문화론'을 인정하게 되었으며 산동 반도에서 발견되는 북신문화-대문구-용산문화가 바로 이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이론까지 나오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 문화가 바로 고조선 중심지였다고 우리나라에서도 공식화되고 있는 요녕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중국학자 부사년이 주장하였던 이하동서설의 주인공인 夷가 바로 고조선인이거나 그 선조였다는 이론으로까지 확산될 기미가 보이고 있습니다. 또 우리나라 학계의 일부에서도 이 문화를 가지고 고조선이 실제로 기원전 2333 년에 건국이 되었을 가능성을 제기 하기도 하였고 기존의 고조선의 중심이 평양으로 주장하는 학자와 논쟁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이 문화는 또한 환단고기를 중심으로 하여 꾸준히 강단 사학계를 한반도 중심의 식민사관이라고 비판했던 재야사학자들에게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홍산 문화는 황하문명 보다도 빨리 고대 국가를 형성한 유적이 보이며 성곽이나 왕궁터등이 발견되어 고조선이 건국되기 전에 이미 고대국가의 발판을 만들었다는 재야사학자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까지 되었습니다.

환단고기에서 나오는 배달국이 바로 홍산 문화(B.C.4500∼B.C.2500), 더 나아가 홍산 문화의 전신인 흥륭화 문화,신락 문화(B.C.6000∼B.C.5000)를 기반으로 세워졌다는 주장이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이라고 매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홍산 문화는 요녕 지역과 내몽고동부 지역에 광범하게 전개된 6천년(B.C.4,000)의 신석기시대중기에 해당하는 2단계 신석기문화로 인식됩니다.

홍산 문화는 앙소 문화의 채도와 이전 단계의 연속 고선문계 토기와 세석기 등을 융합하여 한 단계 발전하여 전개되었는데 후에 이 지역 하가점하층문화에 연결되고 중국 황하유역과 산동 반도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東夷族'의 활동지역을 문헌상으로 보면, 하북성 동북부와 산동 일대, 양자강하류 유역 등입니다.

산동 지역에서 가장 앞서는 신석기문화유적은 북신 문화인데, 북신 문화는 7천년 전까지 소급되어지고 황하의 자산, 배리강 문화와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또한 B.C. 4500년경의 이지역 대문구 문화와도 직접적인 연원관계에 있습니다. 대문구문화는 하남성 서쪽의 앙소 문화와 대비되는 문화로써 東夷系 문화로 추정되고 있고 이후의 용산문화에 연결됩니다.

홍산 문화의 가장 큰 특징은 석묘계(石墓系) 돌무덤입니다. 돌을 쌓아 묘실을 구성하는 적석총(積石塚-돌무지무덤)과 돌 판을 잘라 묘실 벽을 짜는 석관묘(石棺墓-돌널무덤)가 대능하상류 역 요녕성 우하량 유적에서 발굴되었습니다. 고고학에서 가장 중요시하게 여기는 분야가 묘장법인데 죽은 사람을 장례 치르는 의식이야말로 오랜 기간 변하지 않는 그 민족 고유의 전통이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경우 은 이전에는 땅을 파서 묘실을 만들고 시신과 유물을 안장하는 토광묘가 유행하고 있고 주대(周代)에 들어와서야 나무로 곽을 짜서 묘실을 만드는 목관묘가 유행합니다.

역사상에서 홍산 문화와 동일한 석묘계의 묘장법을 채용하고 있는 나라가 고조선이므로 고조선의 전 단계인 홍산 문화는 고조선의 선조들이 이룩한 문화로 보지 않을 수 없다는 주장이 그래서 힘을 얻고 있는 것입니다. 돌을 이용하여 구조물을 축조하는 방식이 고조선이후 부여, 고구려에도 계속하여 전승되는 고유의 산물이기도 합니다.

중국의 고전이나 사서에 나오는 황제헌원과 대결을 벌였던 치우의 세력근거지로도 지적이 되기도 하는데 황제헌원과 결전을 벌이며 하북과 산동 일대를 개척하여 청구국을 세웠다는 기록은 [사기]에 더 자세히 기록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홍산 문화 이후 하가점 하층문화(B.C.2000∼B.C.1300)가 그 지역에 보다 광범하게 확산되어 등장하는데 홍산 문화는 하가점하층문화로 이어졌고 하가점하층 문화는 바로 고조선의 문화였다는 주장으로 이어졌습니다. 홍산(紅山) 문화는 소하연(小河沿) 문화를 거쳐 하가점하층 문화로 연결된다는 것은 중국학계에서 거의 공식화 되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소하연 문화에 이어지는 하가점하층 문화, 구체적으로 풍하(豊下)문화에서 고조선의 건국연대보다 조금 앞서는 서기전 2천4백년 경으로 보이는 청동기 유적이 발굴되었는데 출토된 유물을 보면 화살촉, 칼, 창 등도 발굴되어 기원 전 2333년에 고조선이 건국되었다는 기록의 신빙성을 높여주고 있습니다.


이 요동, 요서 일대에 발굴된 이 청동기 유물은 황하유역에서 발굴되는 청동기 유물보다 연대가 훨씬 빨라 중국동부지역에 발견되는 청동기에도 상당한 영향 을 주었을 것으로 예상되기까지 합니다.

이 홍산 문화의 발견은 우리나라와 중국의 고대역사를 다시 써야 할 정도로 파장이 실로 큽니다. 중국의 학자들은 지금까지 중국의 앙소 문화와 대비되는 문화로 대문구 문화와 용산 문화로 보았었는데 홍산 문화를 발견한 이후로 이 대문구 문화와 용산 문화의 주인공으로 홍산 문화를 들고 있습니다.

즉 홍산 문화의 주인공을 고조선이나 그 선조로 파악하였을 경우에는 중국의 문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하북, 산동 등지의 동이족이 한민족의 선조였다는 근거가 됩니다. 또한 북신 문화-대문구 문화-용산 문화-악석 문화로 이어지는 산동 문화와 흥륭화 문화, 신락 문화-홍산 문화-하가점하층 문화(풍하문화)로 이어지는 요령문화의 주인공이 한민족의 선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국의 학자들도 산동 문화의 주인공인 동이족이 동북에서 기원하였다고 주장을 하면서도 구체적으로 어느 민족이었나를 밝히기를 꺼려하고 전백찬같은 중국학자의 일부가 사적 상에 보이는 辰國(고조선?)이 동이족의 중심지였다고 주장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과연 홍산 문화는 고조선인의 선조가 일으킨 문명일까?

분명한 것은 중국학계에서도 은나라 때까지 화하 족이 하북 성과 산동 성을 넘어오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홍산 문화의 주인공이 동이족이라는 것은 중국학계가 인정하는 것인데 중요한 것은 그 동이족이 과연 고조선인이냐하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나라학계에서도 고조선의 중심을 예전의 평양에서 요서, 요동 등 요녕으로 보고 있습니다. 한민족의 기원도 그곳에서 발생하여 한반도로 이주를 해왔다는 이론이 점차로 신빙성을 더해 가고 있기 때문에 홍산 문화의 주인공 나아가서 중국의 문화의 중요한 획을 그었던 세력이 누구냐 하는 중요한 기로에 서있게 되었습니다. 이 홍산문화의 주인공이 누구냐 하는 것을 떠나서 분명한 것은 이 문화가 고조선을 건국하는데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입니다.

1.B.C.6000~B.C.5000 황하유역(화하족) - 자산문화,배리강문화
산동지역(동이족) - 북신문화
요녕지역(동이족) - 흥륭화문화,신락문화


2.B.C.4500∼B.C.2500 황하유역(화하족) - 앙소문화
산동지역(동이족) - 대문구문화
요녕지역(동이족) - 홍산문화


3.B.C.2000∼B.C.1300 황하유역(화하족) - 이리두문화
산동지역(동이족) - 용산문화
요녕지역(동이족) - 하가점하층문화 -

중국 작가협회 회원이자 소주(蘇州)시 산문학회 부회장 겸 강소성 곤산(昆山)시 문화국 부국장 진익(陳益)은 치우의 정체에 대해 중국인의 선조는 치우이고 치우의 선조는 바로 오월(吳越)의 조상이라 말한다. 오월은 임혜상이 바로 동이족이라 한 것과 일치한다.

그는 사료에 흔적만 겨우 보이는 희미, 모호한  하(夏) 이전의 시대를 만장(漫長:뭐가 뭔지 모르는 시대) 시대라 하고, 중국의 역사가 3황이니 5제니 하여 역사를 덮어버렸으나, 오월문화는 세세대대 (양자강)강남의 땅에 토착한 사람들이니, 그들이 곧 오월의 조상, 선조라 말한다.

일찍이 그들이 창조한 찬란한 문화는 만장(漫長) 시대 중, 돌로 병기를 제작한 송택(崧澤)문화(5500-6000년전)와 옥으로 병기를 제작한 양저(良渚)문화(4000-5500년전)와 동(銅)으로 병기를 제작한 마교(馬橋) 문화(3000-4000년전)가 있다. 「월절서(越絶書)」에는 이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헌원(軒轅), 신농(神農), 혁서(赫胥) 시대에, 돌로 병기를 제작하고 수목을 잘라 궁실을 짓고 죽으면 용장(龍藏)으로 치룬다.  황제시대에 이르러, 옥으로 병기를 만들고, 수목을 벌채해 착지(鑿地)에 궁실을 지었다. 죽으면 용장(龍藏)으로 치룬다. 우혈(禹穴) 시대에 청동으로 병기를 만들고, 착(鑿)으로 대궐을 삼고, 용문(龍門)을 통과해, 동해에서 결강이하(決江異河) 동쪽에 물을 대었다.-

헌원, 신농, 혁서 등 3황 시대는 이미 각종 신석기 도구를 만들어 쓴 시대였으며, 황제시대인 황제, 전욱, 제곡, 제요, 제순의 5제 시대는 옥기(玉器) 시대였다. 하우(夏禹) 시대로 진입하면 이미 청동기가 주류를 이룬 청동기 시대였다.

3황5제 시대를 볼 것 같으면, 태호(太湖) 유역은 하이브리드화된 화하(華夏)족이 칭하기를 만이융적(蠻夷戎狄)의 땅이라 하였다. 당시 이곳의 만이(蠻夷)인들 사이에는 허다한 씨족 부락이 있었는데 그들은 바로 산해경 등 고서에 기재되어 등장하고 있는 착치민(鑿齒民), 나국민(裸國民), 조제(雕題), 우민(羽民), 왕망(汪芒)씨 등이었다.

착치민은 강남(양자강) 오월 조상, 선조이다. 앞 이빨 두 개를 뽑는 것을 아름다움으로 삼았다. 이들은 일찍이 동이(東夷)의 예( )와 더불어 전쟁을 하기도 했는데 이 기록은 「산해경」에도 보인다. 예가 활과 화살을 잡고 착치민이 방패를 잡았다 하니 그들의 무기가 이미 비교적 상당한 수준으로 발달한 상태였음을 알 수 있다.

나국민(裸國民)은 단발문신을 했으며 나체위에 문신으로 장식을 한 조상, 선조이다. 하우씨가 치수를 하기 위해 양자강 중, 하류인 나국(裸國)에 당도했을 적에(그러니까 상류에서 왔다), 현지인의 습속을 따라 문신을 했다 하니 이는 마테오릿치 신부가 명의 습속에 따라 유학자의 의복을 걸친 것과 같다 하겠다. 나국(裸國)은 옛 오(吳)나라의 땅이니 오늘날의 경치좋은 동양의 베네치아 소주(蘇州) 일대이다.    

조제(雕題)는 다시 말해 이마에 문신을 새기고 검은 물감으로 물들여(雕題黑齒:굴원의 「초사」와 「예기」에 보임), 조제교지(雕題交趾:베트남으로 한무제가 남월을 정복해 교지로 삼음)라 하니, 습속은 나국(裸國)과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이들 부락사람들은 뿔로 만든 현판에 꽃 장식을 조각해 넣고, 소라고둥과 방합 먹는 것을 즐겨하고 아이누족 처럼 치아를 검게 한다.

조상 제사를 지낼 때 인육을 사용하며 인골로 해장( 醬:젓갈)을 담근다. 우민(羽民)은 지금의 절강성 천목산(天目山) 이동에서 연해(沿海)지구에 사는데, 전설중에 우민국은 불사지향(鄕)이라 불렸으며, 산야에 귀혈이 많아 이것이 화하여 단석(丹石)이 되고 마침내 마노(瑪瑙)가 된다 했다.

사람들은 마노로 항아리를 만들어 감로를 받아 씨족 수령에게 바친다. 왕망(汪芒) 씨는 우민국의 일개 남방부락으로 씨족수령의 신체가 유달리 커서 사람들이 칭하기를 방풍씨(防風氏)라 하였으며, 후세 사람들은 왕망국을 장인국(長人國), 장이국(長夷國), 대인국 등등으로 불렀다. 굴원은 일찍이 천문(天問)에서 방풍(防風)씨를 장인(長人)이라 부르고 "장인하수(長人何守)?"라 묻고 있다.

이들 전기적 색채로 충만한 남방 씨족 부락들은 1, 2대 단군과 동시대 인물인 우(禹)임금 때 동이족 지리 역사서 「산해경(山海經)」에서도 그 기록을 볼 수 있듯이  단발, 문신, 조제, 착치 등 서로 같은 습속을 보이고 있다. 왜곡기록이긴 해도 하(夏) 소강(少康)이 그의 서자를 월군(越君)으로 봉할 때

하(夏) 나라 소강(少康)은 자신의 서자(庶子)를 월군(越君)으로 봉하는데, 그에게 제일 먼저 요구한 것은 바로 월의 풍습에 맞게 단발, 문신한다는 조건이었다. 단발, 문신은 무언가.

문신은 바로 요즘의 조폭들이 팔뚝에 "일심" 혹은 "차카게 살자"라는 문구를 새겨 넣는 것처럼 신체의 피부에 각종 신성한 도안을 새겨 넣는 소위 타투(Tatoo)를 말하는 것이며, 단발은 머리 4 주위를 밀어버리고 머리 뒤 쪽 한가운데만을 남겨놓아 상투를 틀어 올려 한가운데의 구멍 사이에 병( :대나무 비녀)을 꽂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같은 동이족인 만주족의 변발하고도 약간 비슷하고(만주족과 깎는 것은 같고 상투는 다르다) 우리의 상투와 비슷하다는 점에서는 조선시대의 우리 조상들과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으니 우리 조상 선조들의 흡사한 전통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새로 임명된 군주는 여기에 덧붙여 앞니 두개를 뽑아내는 착치를 해야 함을 요구받았으며, 또한  씨족 내부에서 아름다움의 상징으로 이마 위에 먹으로 꽃무늬를 새겨 넣는 조제(雕題)를 요구받았다.

당시 태백(泰伯)과 중옹(仲雍)은 위수(渭水) 유역으로부터 태호(太湖) 일대에 이르기까지 포진하고 있던 동이족 형만인(荊蠻人)의 단발, 문신의 풍속을 따라 패션의 아름다움을 드러냈으니, 실제 20세기 말 21 세기초의 강남(江南:양자강) 수향(水鄕)의 농민들은 아직도 착치의 고통은 두 번 다시 재현하지 않고 있지만, 금박 입힌 이빨을 즐겨하고 예의 단발을 즐겨 한다.

그럼 동이족인 오월(吳越) 선조들의 단발 문신은 어떠했을까. 이들 문화현상에 대해서는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위한 장식설, 존영설(尊榮說), 무술설(巫述說) 등 갖가지 해석이 분분하지만 고힐강(顧 剛)은 태호(太湖) 유역은 자고로 울창한 고목의 숲을 이루어 토지가 낮고 습하여 인류가 용사(龍蛇)와 함께 동거하여 피해를 많이 입었음을 말한다.

그리하여 당시 오월인(吳越人)들은 이들로부터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단발, 문신을 하게 되었는데, 이는 동물세계의 보호색상과 동일한 것이다.  도등(圖騰) 씨족의 문신을 보면, 대표 도등 조상선조의 존재는 이에서 발생하는 보호력에 힘입은 바 크다.

문신의 원초적 의의는 본래 성인예식(成人禮)의 표시였는데 후에 점점 각종 관념, 의식, 습속이 첨가되어 일종의 종합적 원시예술과 도등(圖騰)숭배 의식을 이루었다.


성인의례는 원래 원시 사회에서 청춘남녀들이 혼인을 하기 위해 성 관계를 거행하는 일종의 의식이었다. 이러한 의식이 거행되는 동시에 모종의 부호가 만들어져 결혼한 두 남녀가 이미 성인이 되었음을 증명함으로써 비로소 부락 구성원으로 아이를 기르고 아내와의 성관계 권력을 포함 일체의 권력을 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종류의 부호는 씨족, 부족, 지구단위에 따라 동일하지 않았으며 구별이 있었다. 생식기 표피를 잘라내는 할례, 이를 뽑는 발치(발아), 이마에 먹으로 그려넣는 조제, 얼굴에 그림을 그려넣는 회면, 문신, 이를 염색하는 염치, 유두(梳頭), 가관(加冠), 가병(可 :비녀올리기) 등 모두는 모두 성인의례를 표시하는 부호라는데 의의가 있다.

고고학적 술어로 이러한 시대를 구분하면 지금으로부터 약 5500∼6000년 사이의 송택문화(崧澤文化)는 돌로 무기를 삼은 시기의 문화유적지이며,  지금으로부터 약 4000∼5500년 사이의 양저문화(良渚文化)는 옥으로 무기를 삼은 시기의 문화유적지이며, 지금으로부터 3000∼4000년 사이의 마교문화(馬橋文化)는 청동기로 무기를 만들던 시기의 문화 유적지이다.

일찍이 한국 최고의 학승 탄허 스님은 「천부경」이 만들어진 시기가 중국의 요순시대와 동일한 시대이기 때문에  '천부경'이 먼저 나오고, 그 뒤에 '하도'에 의한 '복희 8괘'가 나왔으며, 그 뒤 3 천 년이 지나서 '낙서(洛書)'에 의한 '문왕 8괘'인 주역(周易)이 만들어진 것이라 밝힌 바 있다.

뿐 만 아니라 「환단고기」를 보면 "요 임금이 단군으로부터 역관(曆官)을 모셔다가 음력을 만들었다"고 하여 요(堯)가 단군 조선의 분치 제후임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이 말은 천부경이 동이 9족인 고 아시아족이 황하문명인 은허문명을 이루고 살던 당시 쓰여졌다는 말이다. 중국의 문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하북, 산동 등지의 동이족이 홍산 문화의 주인공으로 있고 회하의 빈기 지방에 묘계 동이족이 굳건한 뿌리를 내리던 즈음 동이 제 족의 가장 큰 동아리 주류는 단연 환웅신시개천에서 시작된 단군 조선에 있었다.

그리하여 은, 주 가 단군조에 조공을 바치고 은의 말왕 주(紂)가 구원을 요청해 도와주었다가 개전의 가능성이 없자 그만 둔 것도 바로 단군조였다.(외교사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골 빈 학자들이 사마천에 의해 왜곡된 중국의 사서만을 불변의 성전으로 맹신해 끝간데 없이 헛소리를 해대니까 당대 최고의 학승 탄허 스님은 다음같이 질타했다.

" 물론 중국의 황실 위주로 엮은 모든 역사책들은 한결같이 '요 임금'이 먼저인 것처럼 쓰여있고, 여기에 부화뇌동해서 또한 많은 고서 문헌에도 '고조선의 단군'이 한참 뒤인 것처럼 말하고도 있지요.

그러나 천지의 고래로부터 내려오는 수많은 제후국들의 역사책에는 다같이 '고조선'의 시기상의 우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실제로 엄밀하게 고증해 본다면 본래 중원을 점령하고 살던 아홉 민족들, 즉 '9 이족'은 우리와 다 같은 동이족이 틀림없습니다."  
  
음양오행사상이 태호 복희에서 나오고 간지사상이 이미 은나라 갑골문에 쓰이고 있다는 주장이 문서로 다 나와 있는 세상이다. 곽말약(郭沫若)의 <갑골문자연구>나 낙빈기의 금고신문, 정연종의 <한글은 단군이 만들었다>넥서스 刊, <환단고기>만 보아도 그 내용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환단고기> 같은 도가사서를 검증 안된 책이라 매도하는 말도 안 되는 시비를 거는 자에게 필자는 '대저 우물 안의 고기와는 큰 것을 말할 수 없으니 장애(障隘)에 구애받기 때문이요, 여름의 벌레와는 추위를 말할 수 없으니 여름철에만 살기 때문이요, 도(道)의 한 굽이만 아는 사람과는 지대한 도를 이야기 할 수 없으니 세속에 구애되고 교훈에만 묶였기 때문'이라는 <회남자>의 말을 상기시켜 주는 바이며 잠시 뒤에 적절한 비유 하나를 해주겠다.

필자는 이러한 사람들에게 <환단고기>에 대한 일본인의 각주 붙인 책을 한번이라도 읽어본 적이 있는지 그리고 국내본 이라도 완독해 본적이 있는지 <단군세기>나 <규원사화>를 대비해 꼼꼼히 한번 정도라도 읽어 본적이 있으면도 시비를 거는 것인지 반문하겠다.

갑골학의 아버지라는 동작빈(董作賓)도 갑골문이 중화족 것이라는 단정을 내린 바 없다. 사마천도 정사로 인정 안 한 '은나라'의 조직적인 문자체계가 중국인의 것이 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공자 자신도 이구야은인야(而丘也殷人也)라 해서 나 공자는 95%가 동이족인 은나라 사람이라 뿌리를 밝혔듯이 은나라는 동이족의 국가였고 은나라 문자인 갑골문은 당연히 우리 문자가 아니겠는가.

인류최초의 문자인 녹도문에 대해서는 많은 사서에 보이고 있으니 새삼 거론하고 싶지도 않지만 천부경과 관련해 최치원이 해석한 바 있어 지인은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며 수많은 동양고서를 통해 음으로 양으로 많이 접했으리라 생각한다.

 

출처: 안원전의 21세기 담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