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야할한국사

왜(倭)는 대륙에 존재했었다!

영지니 2007. 12. 29. 22:58

삼국지 위서 한전은 한과 왜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한(韓)은 대방(帶方)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한계를 삼고 남쪽은 왜와 접해 있으며(南與倭接) 면적은 사방 4 천리쯤 된다. (한에는) 세 종족이 있으니 마한(馬韓)·진한(辰韓)·변진(弁辰)이며 진한은 옛 진국(辰國)이다. 마한은 (삼한 중에) 서쪽에 있다. 지금 진한 사람 모두 편두(褊頭)고, 왜와 가까운 지역(近倭)이므로 역시 문신을 하기도 한다. (변진의) 독로국(瀆盧國)은 왜와 경계가 접해 있다(與倭接界) (韓在帶方之南東西以海爲限南與倭接方可四千里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韓辰韓者古之辰國也馬韓在西......今辰韓人皆褊頭男女近倭亦文身......其瀆盧國與倭接界 三國志 魏書 東夷傳).”

위 기사에서 주목할 점은 왜의 위치가 韓半島 밖이 아니라 韓半島 안쪽, 즉 三韓의 남쪽인 韓半島 남부에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지금껏 “倭는 日本列島에 있다”는 고정관념 속에서 이 기사를 보아 왔으므로 이 기사가 말해 주는 위치 비정을 무시해 왔는데 이런 고정관념을 해체하고, “(한의) 남쪽은 왜와 접해 있다(南與倭接)”는 기사를 해석하면 倭는 도저히 日本列島 내에 있을 수 없게 된다. ‘접(接)’은 육지로 서로 경계할 때 쓰는 낱말이지, 바다 건너 이웃한 지역을 말할 때 쓰는 단어는 아니다.


만약 바다 건너 倭가 있었다면 ‘바다(海)’로 동쪽과 서쪽의 경계를 표시한 이 기록이 유독 남쪽 경계를 표시할 때만 바다를 생략할 이유가 없다.
또한 辰韓條의 ‘근처에 倭가 있다(近倭)’는 구절과 弁辰 12 개국 가운데 하나인 독로국(瀆盧國)이 ‘倭와 경계가 접해 있다(與倭接界)’는 구절도 倭가 日本列島가 아니라 辰韓과 瀆盧國 근처의 韓半島라는 사실을 말해 준다.


[살아있는 한국사 1 (단군조선에서 후삼국까지 ) "왜는 일본열도가 아닌, 한반도에 있었다" 중에서 전국역사교사모임]

저것이 바로 倭奴가 任那日本府를 착안하게 된 대목이다. 중국 대륙에 倭가 있었기에 우리나라를 韓半島에 집어넣자, 倭도 종이 위에서 韓半島로 이동한 것이다.

“25 史의 권위를 이길 수 있는 학자나 학설은 존재할 수도 없고 존재 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어째서 모르는가?” 이 땅의 사학자들이 모두 저런 생각을 갖고 있길래, 우리는 지금껏 “三韓은 韓半島에 있었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三國과 朝鮮의 일식기록에 반하는 모든 학설이나 역사책은 거짓이다. 三國志는 우리나라 역사책을 분해해서 만든 책의 하나로 三韓을 韓半島에 우겨넣기 위해 明이 대대적으로 날조했다.

이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중국의 역사책은 다 진실이고, 우리나라 역사책은 다 틀렸다는 그 헛된 믿음부터 바꾸어야 한다. 대체 自國史는 모조리 거짓이고, 他國史는 모조리 진실이라 믿는 것부터가 잘못이고, 남부끄러운 일 아닌가. 우리나라는 역사를 과장한 적이 없다. 과장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위대한 역사이기 때문이다.

百濟가 山東省 일대에 있었다는 주장은 가끔 나오는데, 이런 사람들도 중국 역사책이 왜곡 되었다는 말은 절대 하지 않는다. 하지만 後漢의 일식기록이 渤海灣이다. 燕나라가 渤海灣에 長城을 쌓았다고 우긴다. 중국 역사책의 虛構를 지적하지 않고도, 地名을 밀어낸 사실을 지적하지 않고도 우리나라를 중국 대륙에 위치시킬 방법이 있단 말인가.

三國은 중국 대륙의 중심지에 있었다. “韓은 帶方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한계를 삼고 남쪽은 倭와 접해 있으며 면적은 사방 4 천리쯤 된다(韓在帶方之南東西以海爲限南與倭接方可四千里).”는 韓半島를 염두에 두고 고친 것이다.


 



왜(倭)는 韓半島에 없었다. 三國의 남쪽에 있던 왜(倭)는 韓半島가 아니라, 중국 대륙에 있었다. “바다와 육지의 여러 왜인들(海陸諸倭 太白逸史)"이라 했다. 倭는 섬과 섬에 가까운 중국 대륙 해안가에 살았던 것이다. 百濟城을 白帝城으로 바꾼 中奴이다. 일단 수법을 개발하면 무진장으로 써먹었다. 臺灣(대만) 역시 對馬島에서 바꾼 것이다.

임나(任那)는 본래 대마도(對馬島)의 서북 경계였다. 북은 바다로 막히고 ...... 뒤에 대마의 두 섬은 마침내 임나가 통제하는 바 되었기 때문에 이로부터 임나는 비로소 대마도를 다 뜻하는 말이 되었다. 옛부터 구주(仇州)와 대마도는 곧 삼한이 나누어 다스렸던 땅으로 본래 왜인들이 살던 땅이 아니었다(任那自本在對馬島西北界北阻海......後對馬二島遂爲任那所制故自是任那乃對島全稱也 自古仇州對島乃三韓分治之地也 本非倭人世居地 太白逸史)

對馬島 즉 臺灣의 서북 경계는 臺灣海峽과 닿은 해안이다. 對馬의 두 섬은 對馬島가 두 개의 섬으로 이루어졌다는 말이 아니고, 對馬島(臺灣)를 二分한 것을 말한다. 옛날에는 강을 바다라 불렀다고 했다. 강이 바다니까, 강으로 나누어진 두 지역은 각각의 섬이었던 것이다. 對馬島에도 강은 꽤 있다. 그 중에서도 臺灣山脈의 중간쯤을 가르는 동서의 두 강을 연결해 바다라 하고, 아래 위를 섬이라 불렀던 것이다.

仇州는 섬이 아니다. 섬에는 모두 島가 붙기 마련이다. 中國倭가 對馬島에 거주 했으니까, 對馬島 맞은편, 즉 臺灣海峽과 접한 땅이 仇州였던 것이다.


협보(陝父)는 장차 개혁될 것을 알고 무리를 유혹하여 양곡을 도둑질하여 배에 싣고 패수(浿水)를 따라 내려와 해포(海浦)를 거쳐 몰래 항해하여 곧바로 구야한국(狗邪韓國)에 이르니 곧 가라해(加羅海)의 북안(北岸)이다. 여기서 수 개월 동안 살다가 아소산(阿蘇山)으로 옮겨가서 기거했다. 이를 다파라국(多婆羅國)의 시조라 한다. (광개토경호태황이) 뒤에 임나(任那)를 병합하여 연정(聯政)을 세워 이를 통치 하였는데, 3 국은 바다에 있고 7 국은 뭍에 있었다(陝父乃知將革誘衆裏糧舟從浿水而下由海浦而潛航直到狗邪韓國乃加羅海北岸也 居數月轉徙于阿蘇山而居之是爲多婆羅國之始祖也 後倂于任那聯政以治三國在海七國在陸 太白逸史 高句麗國本紀)

伽倻도 揚子江 하류에 있었는데, 新羅 동쪽에 있었다. 지금의 東支那海가 그 당시는 伽倻海(加羅海)였다. 우리나라를 韓半島로 축소하다 보니까, 新羅 아래쪽에 그려 넣을 수밖에 없었지만, 伽倻는 중국 동해안에 위치했다.

상선약수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