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야할한국사

고구려 호태황이 정복한 진짜 강역은?

영지니 2007. 12. 30. 23:24
“秦韓의 노인들 스스로 말하기를 秦나라가 망해서 도망해온 사람으로 피난가는 것이 고역이다. 韓國의 馬韓 땅이 적당할 것 같아 馬韓의 동쪽을 나누어 같이 살았으며 말은 秦나라와 비슷하여 그런 이유로 나라 이름을 秦韓이라고 하였다?(秦韓耆老自言 秦之亡人來避苦役適韓國 而馬韓割東界地以與之 相呼爲徒 有似秦語 故或名之爲秦韓 後漢書)" 秦나라 사람들이 중국 남부로 가서 倭의 무리로 살았던 것을 이용해 辰韓이 檀帝의 직접 통치 지역임을 부정했던 것이다. “新羅 사람들은 스스로 소호금천(小昊金天)氏의 후손이어서 姓을 金氏로 하였다?(新羅人自以小昊金天氏之後 故姓金氏)” 三國史記 新羅本紀 赫居世 편도 아닌, 百濟本紀 義慈王 편에 써 있는 날조기사 이다. 秦나라 사람들이 중국 남부로 가서 倭의 무리로 살았던 것을 이용해 3 차 辰韓에서 건국한 新羅마저 중국인으로 둔갑시킨 것이다.

본래 倭人들이 살던 땅이 아니다. 이상한 문장이다. 본래 倭人들이 살던 땅이 아니었으면 倭人들이 어디서 왔는지도 기술해야 할 것이 아닌가. 원래 한단(桓檀) 역사서에는 倭가 秦나라 출신자라 적시되어 있었다.(신찬성씨록 참조)

진나라 유민들이 이주해 왜인이 되었다.

하지만 李氏朝鮮 에서는 呂政이 皇帝로 격상되어 있어 李陌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본래 倭人들이 살던 땅이 아니었다(本非倭人世居地 太白逸史)”는 애매한 문장으로 바꾼 것이다.

明은 山海經을 뜯어고쳐 倭가 燕에 속한다고 했다. 그러나 倭의 실체는 秦나라 遺民이다. 中土의 戰國 時代에는 倭가 없었다.

 

舊唐書에는 “倭國은 옛날의 왜노국(倭奴國)이다(倭國者古倭奴國也)”고 했다. 秦나라 출신의 倭는 倭奴國으로 불렸던 것이다. 그러나 舊唐書는 明 때 쓴 책이므로 日本을 가리켜 쓴 글이다. “일본국은 동해의 동쪽에 있는 나라로서 예전에는 왜노국(倭奴國)이라 불렀다(日本國在東海之東古稱倭奴國或云惡其舊名故改名日本以其國近日所出也).”는 蒙汗史(元史) 역시 明 때 날조했다. 列島倭는 예전에 倭奴國이라 불리지 않았다. 百濟는 자국이 세운 나라라를 노예국이라 했을 리 없고, 高句麗 역시 같은 한민족인 百濟人이 세운 나라니까, 노예국이라 부르지 않았다. 新羅 역시 列島에 식민지까지 세웠다. 舊唐書와 元史의 이 구절만 봐도 明 때 날조한 책이 명백하다.


日本은 舊唐書와 元史의 저 구절을 보고 우리나라의 노예국이 아니라, 중국의 노예국 이라며 감격스러워 하고 있다. 그래서 서둘러 한위노국왕(漢委奴國王)이라 금인(金印)을 새겨 국보로 지정했다. 그러나 왜노국(倭奴國)은 정식 국명도 아니고, 왜(倭)를 더욱 비천하게 부르기 위한 별칭 이었다. 왜노국(倭奴國)이 지극히 “아름답지 못한 이름”이라는 건 대체 언제쯤 알아 차리려나?

日本은 왜노국(倭奴國)이다. 倭奴 中國倭가 列島로 대거 이주해 오늘날 日本人 유전자의 25.8 %를 제공하고 있다. 일본이 무지 좋아할 것으로 보인다. 진하승(秦何勝 : 일본명은 하타노 가와카쓰)이 秦始王의 후손 이라고 우기던데, 이제는 日本 전체가 秦나라의 후손이라 우길 수 있으니까[날조에 눈이 뒤집힌 코류지(廣隆寺)에서는 “아니다. 우리는 秦始皇의 후손이다. 秦始皇도 秦氏, 우리도 秦氏 아닌가”라고 우기고 있다. 그러나 누차 말했듯이 秦始王은 성은 영씨(嬴氏)였고, 진짜 성은 呂氏였다. 秦始皇을 ‘秦氏皇’, ‘秦氏 皇帝’라 생각한 걸까. 코류지에 가면, “呂不韋 아들이 우리 선조”라는 비석을 볼 수 있다]

기모노(着物)의 시초는 3 세기경 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다. 중국 역사책에 3 세기경, “큰 천에 구멍을 뚫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쓰고 있었다(http://www.anseo.dankook.ac.kr/~ahns/cul-67.html)"고 적혀 있는 왜(倭)는 中國倭이다(3 세기에 中奴는 日本으로 항해할 능력조차 없었다. 中奴가 대이주를 했다면, 당연히 언어도 변하지 않을 수 없다. 中奴가 9 세기에야 겨우 일본으로 이주했기 때문에 일본이 10 세기 까지 한국어를 사용했던 것이다).
그러면 열도에서는 뭘 입었나.
벗고 살았다.

오우진(應神) 천황 시대에 봉녀(縫女) 두 명을 보내 주어서, 비로소 임금과 신하들이 한복(韓服)을 입게 되었다. 그렇지만 서민들은 옷을 입지 않은 벌거숭이 모양 이었다고 한다.

토우테이칸(藤貞幹)이 일본결척(日本決尺)을 인용해 쇼오꼬오하쯔(衝口發)에서 한 말이다. 藤貞幹은 18 세기 일본인이다. 그러므로 韓服은 李氏朝鮮의 복식을 가리켰다. 李氏朝鮮은 高句麗가 아니라, 百濟 복식을 이어받았다.

기원전 4 세기(朝鮮時代)에 썼다는 山海經은 우리나라를 두고 “군자국은 북쪽에 있으니, 사람들은 의관을 했다”고 했다. [“君子國은 북쪽에 있으니, 사람들은 의관을 했으며, 칼을 차고, 짐승을 잡아먹으며 사냥하기를 좋아하여 다투지 않았다(君子國在其北衣冠帶劍食獸使二大虎在旁其人好讓不爭 山海經 海外東經)." 옛날에는 사냥이 군사훈련의 일종이었다. 군사훈련을 하고 나면, 사냥물은 당연히 그 자리에서 잡아 나눠 먹었다. 사냥은 운치라도 있지, 中土는 4300 년 전까지 짐승이 주식 이었다. 后稷이 농사법을 가르쳐준 4300 년 전까지 쌀도 구경하지 못해서 우리나라 보고 모래를 먹는다고 한 미개인들이다]

慈烏支 한웅의 中土 정복 이후 우리나라 사람으로 “淮垈 지역을 차지하고 생활한 자가 매우 많았으니, 漢나라 땅의 사람들과 섞여 거처하면서 농사짓고 누에치며 길삼하고 가축을 기르는 것을 밑천으로 하여 생업을 삼았다(占居淮岱者甚多 與漢土之人雜處 農蚕織牧 資以爲業
揆園史話 檀君紀).” 우리나라는 배달시대부터 비단으로 옷을 해 입었던 것이다.

“高矢氏는 청구국(靑丘國)으로 나아가 산천을 둘러보고 토지의 형세를 관찰하고 밭과 들녘을 개간하여 농업과 잠업을 일으켰다. 바람의 기운은 따뜻하고 부드러워 오곡은 풍성하게 살찌니 백성들은 모두 가볍고도 따뜻한 옷을 입고 기름지고 훌륭한 음식을 먹게 되었으며, 모자를 쓰고 띠를 두르며 옷을 갖춰 입고 신을 차려 신는 등 자못 천하의 풍채가 있었기에 文武가 아울러 일어나게 되었다(高矢氏就靑丘國觀山川 相土地 開田野 興農桑 風氣溫昜 五穀豊肥民皆衣輕煖而食肥俍頗有冠帶衣履天下之槪文武亦得以幷興 揆園史話 檀君紀)." 朝鮮 개국 당시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은 모자를 쓰고 띠를 두르고 의관하기를 즐겨 했던 것이다.

後漢書, 三國志에는 “馬韓 사람들은 잠상을 알며 솜과 베를 만든다(馬韓人知田蠶作撓布
後漢書)”고 했다. 다시 말해 중국은 기원후에 들어서자, 비단과 솜, 베를 만드는 법을 잊어 버렸던 것이다. 그것은 中土에 들어간 후로 기술발전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잠상(蠶桑)과 길쌈의 기술이 거듭 발전하는데, 中土는 그대로 이니까,(퇴보했을 수도 있다), 우수한 상품에 밀려 中土는 더 이상 비단을 만들지 않게 된 것이다.

 

中國倭의 3 세기 복식이 그로부터 華夏의 2 천 년전 복식과 동일 하다는 점에 주목하자. “큰 천에 구멍을 뚫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쓰고 있었다”는 中國倭의 옷이나 “身子의 두 배의 옷감을 반으로 접어 중간에 구멍을 뚫어 머리를 넣고 앞과 뒤를 매어서 입었다.”는 華夏의 옷이나 표현만 다를 뿐, 똑같은 디자인이다.

날조 中國史에서도 華夏는 殷나라 때 “身子의 두 배의 옷감을 반으로 접어 중간에 구멍을 뚫어 머리를 넣고 앞과 뒤를 매어서 입었다.”
(중국의 복식사, http://www.anseo.dankook.ac.kr/~ahns/cul-67.html)

華夏가 기원전 천 수백 년 때 이미 “身子의 두 배의 옷감을 반으로 접어 중간에 구멍을 뚫어 머리를 넣고 앞과 뒤를 매어서 입”는 것에서 벗어 났다면, 華夏 출신의 中國倭가 3 세기에 “身子의 두 배의 옷감을 반으로 접어 중간에 구멍을 뚫어 머리를 넣고 앞과 뒤를 매어서 입(作衣如單被穿其中央貫頭衣之 三國志)”을 수는 없다. 누가 2 천 년전의 미개 복식으로 회귀할 것인가. 中土에서 중국 대륙 끝으로 이주할 당시에도 華夏의 복식이었던 것이다. 그 후에도 오래도록 변함없는 華夏의 복식이었다. “큰 천에 구멍을 뚫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쓰고 있었”던 倭奴의 복식은 朱元璋이 揚子江 이남을 차지할 때까지 中奴의 보편적인 모습이었다.

秦나라, 漢나라의 남자들은 포(袍), 곤의(褌衣), 고(袴), 관(冠), 건(巾), 책(幘)을 입지 못했다. 漢나라에서는 수구(袖口)를 축소시킨 것를 만들어 입지도 못했다. 漢나라 벼슬아치들은 평상시에 곤의(褌衣)를 입지도 못했고, 꽃무늬를 수놓은 비단신을 신지도 못했다. 北夫餘의 복식이다.

日本書紀에 541 년과 544 년 新羅의 伽倻 진출을 저지하기 위해 百濟 聖王이 주재한 대책회의에 참석하는 기사가 있어? 大伽倻가 新羅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百濟와 더불어 倭와 연합해? 날조 중국사를 보고 창작한 기사다.

280 년에 이르러 斯盧國王이 辰韓 세력을 대표하여 미개 진(晋)에 조공 했다고? 新羅는 溫祚 당대에 百濟에 조공했다. 高句麗에는 廣開土境好太皇에 이르러 조공했다. 高句麗와 斯盧國 사이에 百濟가 끼어 있어 斯盧國은 高句麗와 직접 맞닿아 있지 않았기 때문에 굳이 조공할 필요가 없었다. 高句麗가 조공하지 않는 新羅를 정벌하려고 해도 百濟부터 정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中土는 高句麗 영토 채달목분지(柴達木盆地)나 타림분지(塔里木盆地)와 접해 있다. 조공을 안하면 당장 정벌을 받는다. 265 년에 선 진(晋)이 280 년 부터 高句麗에 조공하기 시작했던 것은 280 년에야 晉이 高句麗 영토와 맞닿았기 때문이다. 晉은 百濟와는 遼西로 접해 있기 때문에 高句麗, 百濟에 다 조공해야 했다.

479 년 加羅國王 하지(荷知)가 齊나라에 사신을 보내고 보국장군본국왕(輔國將軍本國王)이란 작호를 받았다(加羅國三韓種也建元元年國王荷知使來獻詔曰量廣始登遠夷洽化加羅王荷知款關海外奉贄東遐可授輔國將軍本國王)는 南齊書의 기사는 高句麗 역사서를 보고 베낀 날조기사이다. 5 세기는 廣開土境好太皇이 중국 대륙, 아니 중앙아시아를 포함한 동아시아를 정복한 때다. 伽倻가 자국을 정복한 高句麗에 사신을 보내지 않고, 고작 中土 한 구석을 차지한 중국, 그것도 南朝에 사신을 보내 작호를 받았다?

중국이 高句麗에 정복당한 伽倻에 어떤 도움이 되는가. 중국은 高句麗 건국 당시부터 속국 이었다. 배달 개천 초기부터 우리나라 식민지였다. 대대로 우리나라 사람이 파견되어 제후로서 통치한 땅이다. 廣開土境好太皇이 동아시아를 정복할 때에도 그 땅이나마 잃지 않으려고 숨조차 죽이고 있던 나라였다. 고작 漢나라 중기에 반짝 하고 침략을 일삼았을 뿐, 蒙古干涉期(?)를 제외하면 高麗 末까지 내내 우리나라의 속국이었던 것이다.

“倭는 5 세기 초부터 몇 차례 사신을 보낸 끝에 5 세기 말 宋나라 황제에게 도독(都督) 倭, 新羅, 任那, 秦韓, 慕韓 6 국 제군사(諸軍事) 안동대장군(安東大將軍) 왜국왕(倭國王)의 칭호를 밝혔다(倭國在高驪東南大海中......自稱使持節都督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 宋書)"고? 정복은 高句麗에 의해 되고, 장군과 왕이라는 호칭은 宋나라에 주장하나?



倭人이 秦나라인이기 때문에 宋나라인도 똑같은 미개 족속이었다. 그런데 倭가 宋에게 장군과 왕이라는 호칭을 구걸 했다고? 高句麗 皇帝로부터 安東大將軍 倭國王 칭호를 받았던 것이다. 물론 新羅, 伽倻를 통솔하는 대장군이 되었다는 것은 거짓이다. 나머지 9 개 倭國을 통솔하는 大將軍의 호칭을 받았던 것이다.

應神이 列島에 도착했을 당시, 列島는 옷조차 없어서 벌거벗고 있었다(衝口發 : 藤貞幹) 벼이삭은 5 세기 말까지도 손으로 쥐어뜯어 수확했다(고대국가와 천황 : 田村圓澄). 집? 그런 것도 없었다. 6 세기 까지도 그냥 흙구덩이에서 풀로 지붕이나 가리고 살았다(田村圓澄).

그런데도 日本은 3 세기에 큐슈(九州)에 ‘야마다이국(邪馬台國)’이라는 번듯한 나라가 있었다고 날조했다. 邪馬台는 중국 대륙에 있던 倭의 하나다. 그 뿐이 아니다. 九州에다 높이 12 m의 망루대와 촌락을 만들어놓고 ‘요시노가리(吉野ヶ里) 유적’이라 부르며 전세계에서 관광객을 끌어 들이고 있다. 요시노가리 유적은 韓半島人이 사는 곳에다 395 년에 세운 百濟 植民地 倭의 군사기지다.

倭가 문맹자 집단 이라서 大韓海峽도 못 건넜다는 주장이 있다. 그렇다면 바이킹은 문화민족이라서 잉글랜드를 정복 했던가. 日本列島의 倭人(아이누族은 제외)들은 일본인들이 그렇게도 염원하는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민족”이 아니라, 항해 끝에 그 땅에 정착한 종족이다. 韓半島에서 기원전 3 세기 부터 건너간 사람들, 4 세기 말 이후로 列島를 식민개척한 百濟人, 新羅人에 이어 8 세기 전후로 新羅에 정복당한 후 필사적으로 도망친 中國倭가 日本人들의 조상이다.

應神이 열도에 도착할 때까지는, 列島는 선주민 아이누族과 韓半島人들이 사는, 이름도 없는 섬에 불과했다. 列島는 귤화위지(橘化爲枳)의 미개 땅이었다. 그 땅으로 간 모든 것이 퇴보했다. 배우는 것조차 거부했다. 천문학만 해도 몇 번이나 가르쳐 주었던가. 曆博士 왕보손(王保孫), 관륵(觀勒), 高麗 천문관, 李氏朝鮮 천문관해서 네 차례나 가르쳐 주었건만 일식관측 조차 못하다가 서양인에게 배웠다.

植民母國 百濟 멸망 후에 日本은 적국 新羅 선박에 얹혀서 대륙을 오갔다.

백제배, 신라배 신세만 졌던 일본이 직접 외항선을 큰 바다에 띄우게 된 것은 9 세기 들어서였다. 그러나 아직도 조선술 및 항해술이 미약했기 때문에 일본의 견당사선들이 조난 당했다는 침통한 기사가 상세하게 일본역사에 전하고 있다. 9 세기 말에 스가와라노 미치사네는 조정으로 부터 견당사로 임명 받았다. 그러나 그는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는 것을 중지해 달라고 우다(宇多) 천황에게 주청했다. 스가와라노 미치사네는 당시 문장박사이며 장관직에 있었던 최고로 존중받는 학자였다.
천황은 그의 주청을 받아 들였고 이후 견당사 제도 자체마저 폐지 시키는 등 당나라와의 교류를 중단시켰다.(일본문화사, 홍윤기)

隋書에는 遣隋使 오노노 이모코(小野妹子)가 韓半島의 百濟를 거쳐서(백제 멸망 이전) 隋나라를 오갔고(上遣文林郎裴清使於倭國度百濟), 日本書紀에는 3 차 遣唐使 타카무쿠노 쿠로마로(押使 高向玄理) 일행이 新羅를 거쳐 唐나라에 갔다고 나와 있다.

遣隋使, 遣唐使. 이런 것은 없었다. 종족명 까지 우리나라 피지배계층 이라는 뜻의 鮮卑族인 隋와 唐은 보고 배울 문물이 전혀 없는 미개국 이었다. 鮮卑族 자체가 문명과는 거리가 먼 유목민이다.

中土의 유목민들은 주로 高句麗로 견한사(遣漢使)를 보냈다. 隋, 唐은 上國 新羅로 遣漢使를 보냈다. 그러나 隋, 唐에 이르면, 中土는 문명의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倭는 百濟로, 日本으로 바뀌고 나서는 大震國으로 遣漢使를 보냈다. 그러니까 오노노 이모코(小野妹子)는 百濟 땅 한반도를 거쳐서 중국 대륙의 百濟로, 타카무쿠노 쿠로마로(高向玄理) 일행은 新羅 땅 한반도를 거쳐 大震國으로 遣漢使로서 갔던 것이다.

일본천황의 치세 때에 조서를 내려서 묻기를 ‘이웃나라’와 ‘달갑지 않은 나라’는 어찌 구별하는가. 답하기를 ‘이웃나라는 큰 당나라이며, 달갑지 않은 나라는 신라이로다.”[영집해(令集解 859~876) 제3권]

큰 唐나라? 일본문헌에는 大唐國이라 적혀 있을 걸~ 18 세기 이후 역사날조 하면서 大震國에서 글자 한 자 바꾸었던 것이다.

遣漢使라는 말은 三國史記를 편찬할 당시부터 있었다. 中土의 나라들이 高句麗, 百濟, 新羅로 遣漢使를 파견한 것을 明이 遣唐使로 고쳤다. 三國史記에는 朝貢國 新羅, 百濟가 高句麗에 사신을 보낸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太白逸史만 해도 “百濟 新羅 가락(駕洛)의 여러 나라가 모두 조공을 끊임없이 바쳤다(百濟新羅駕洛皆入貢不絶)”고 했다. 遣隋使, 遣唐使라고 바꾸었으니까, 안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列島倭는 사정이 다르다. 百濟 식민지가 植民母國의 적국으로 문물을 배우러 갈 수는 없다. 列島倭는 高句麗가 아닌, 百濟로 견한사(遣漢使)를 보냈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장구한 大陸史를 부정하는 이 땅의 사학자들은 고작 가짜 廣開土境大勳跡碑文의 사라진 일부 자구해석에만 처절하리만치 매달리고 있다. 그러나 廣開土境大勳跡碑를 세운 長壽弘濟好太烈帝가 과연 비문의 문자해석에나 매달리기를 바랄까. 長壽弘濟好太烈帝가 알아주길 바랐던 것은 高句麗가 정복했던 광대한 땅이다. 高句麗가 朝鮮을 계승했다는 사실이다. 숙적 百濟를 정복한 위업이다.

廣開土境好太皇이 정복한 땅은 중앙아시아를 포함한 동아시아다. 그렇다면 廣開土境大勳跡碑는 어디에 있었나. 중국 대륙이다. 韓半島와 滿州는 高句麗軍이 밟을 필요도 없는 땅이다. 중국 대륙의 百濟軍이 패해 百濟 皇帝가 항복하면서 百濟의 전영토가 정복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동북아에다 비를 세울 이유는 없다.

廣開土境大勳跡碑는 전승기념비다. 廣開土境好太皇은 百濟와 新羅, 伽倻, 東夫餘가 있고 倭가 있는 중국 대륙과 토번(吐蕃)이 있는 중앙아시아[廣開土境大勳跡碑를 보면, 廣開土境好太皇은 즉위 8 년에 吐蕃을 정복했다. 吐蕃은 747 년 고선지(高仙芝 : ?~755)가 정벌할 때까지도 파미르 고원 너머 중앙아시아에 있었다. 廣開土境好太皇은 중앙아시아까지 정복했던 것이다]를 정복한 것이다.



廣開土境好太皇은 중국을 정복할 필요가 없었다. 중국은 高句麗와 百濟의 상대가 되지 않아, 끝없이 눈치를 보고 있던 소국 이었다. 중국은 朱蒙聖帝 때 정복된 이후 우리나라의 충실한 속국이었다.

역사를 날조한 李成桂는 碑도 그대로 둘 수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碑는 축소 韓國史를 증명하는 거짓 증거물 이기도 했다. 그래서 축소 역사에 맞춰 비문 내용까지 바꿔 가짜 비를 제작했다. 廣開土境大勳跡碑를 비롯해서 中原高句麗碑나 울진봉평비(蔚珍鳳坪碑) 등 모든 비가 날조 역사에 맞춰 새로 새긴 가짜 碑다.

원래 廣開土境大勳跡碑는 高句麗 영토에 세웠다. 百濟 영토에 세우면, 당장 파괴할 것이기 때문이다. 百濟 영토를 바라다 볼 수 있는 국경지대에 세웠을 것이다. 廣開土境大勳跡碑가 세워진 구체적인 장소는 동아시아 제1의 강대국이었던 百濟 영토에 가까운 西鴨綠江(嘉陵江) 혹은 黃山江(揚子江), 漢水(黃河), 浿水(漢水) 유역으로 압축된다. 漢水 유역에 세웠다면, 訥縣(현 洛陽)과 百濟의 초기 도성이 있던 현 開封 사이의 국경지대이다. 百濟의 제 2 皇城(長沙)이 高句麗 땅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어, 黃山江(揚子江) 유역은 가능성이 희박하다. 진짜 廣開土境大勳跡碑를 어디에 세웠던 간에 가짜 비는 東鴨綠江 유역에 세웠다. 李成桂와 朱元璋이 우리나라 역사의 중심을 西鴨綠江에서 東鴨綠江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복종하며 쥐새끼처럼 살았던 華夏는 그 사실을 지우고자, 우리나라 문화재들을 방치하고 있다. 훼손되고 붕괴 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다. 가짜 廣開土境大勳跡碑文을 깎아낸 것도 모자라, 관리를 내세우며 파괴해 한 면을 제외하고는 모두 깨어져 나갔다. 碑의 파손을 막는다는 구실로 5 년에 한 번씩 합성 수지액을 주사하는데, 그 부분이 변색되고 표면까지 심하게 마모됐다. 중국이 늘상 하는 짓이지만, 말은 보호한다 면서도 실제로는 훼손하고 있다.

19 세기 말부터 中奴와 倭奴가 비문변조를 합리화하기 위해 비면에 석회칠을 하기 시작했다. 한 번 석회칠을 할 때마다 자신들에게 유리한 글자를 마구 집어넣고 불리한 글자는 뺐기 때문에 탁본을 만들 때마다 글자가 다르다.

어째서 일본은 廣開土境大勳跡碑에다 석회칠을 하고, 비문을 깎아 내야만 했는가. 日本이 우리민족의 지배를 받던 하잘 것 없는 “벌거숭이” 왜(倭)라는 사실을 감추어야 했기 때문이다.

日本軍 참모본부 편찬과에서 5 년 동안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 : 1884 년 사코 가게노부(酒勾景信)가 만듬]을 연구했고, 淸日戰爭을 전후하여 일본군 참모본부의 장교들이 수차에 걸쳐 현지에 가서 비문을 조사했다. 露日戰爭이 끝난 1905 년에는 비를 일본으로 운반할 계획까지 세웠다. 日本軍 주도하에 廣開土境大勳跡碑를 날조하여 이른바 ‘任那日本府’라 하여 倭의 韓半島 진출설의 가장 중요한 근거로 삼고, 나아가 일본의 한국침략을 정당화하는 征韓論으로 발전했다.

倭奴의 논리에 따르면, 韓國이 고대 일본을 지배한 사실이 밝혀진 이상, 征倭論 및 미래 한국의 일본침략을 정당화하는 근거인 셈이다! 倭奴의 논리에 의하면, 노예들 스스로 列島를 우리나라에 바쳐야 하는 것이다!

廣開土境大勳跡碑에 “百濟와의 전과를 최대의 업적으로 현시한 것”은 그 당시 百濟가 동아시아 제1의 대국이었기 때문이다. 유독 百濟만을 百殘이라 하고 百濟 皇帝를 殘主라 한 것은 百濟에 대한 원한이 너무도 깊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百濟를 굴복시킨 것이 廣開土境好太皇의 최대업적 이었다.

 

상선약수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