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야할한국사

고구려는 중국의 역사인가? 한국의 역사인가?

영지니 2007. 12. 30. 23:21

현재 중국은 고구려사를 자국사라며 3조원이라는 막대한 예산으로 동북공정을 추진하고 있다.

 

동북변강역사여현상계열연구공정(東北邊疆歷史與現狀系列硏究工程)

이는 현재 중국이 진행하는 동북공정을 말한다. 동북공정은 '중국변강사지연구중심'(이하 연구중심)이 진행하는 프로젝트로 이 기관은 중국 사회과학원 직속의 개방성 연구기구이다. 연구중심은 연구 1부, 연구 2부, 편집부, 종합처, 도서실, 망락신식부 등 6개부가 있다. 그 중 연구 1부가 동북, 서북, 북방 약칭 삼북 변강의 역사와 지리를 연구하고 2부에서는 서남, 남방, 해강海疆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고구려와 관련된 동북공정은 연구 1부가 중심이 되어 2002년 2월부터 5년을 기한으로 연간 3조원을 들여 고구려사에 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그렇다면 고구려사는 중국측의 주장대로 중국사인가? 아니면 한국사인가? 우리나라 사람들은 막연하게 나마 고구려사는 한국사라 알고 있지 왜 고구려사가 한국사인지는 알지 못한다. 더욱이 고등학생 중 대다수가 왜 고구려가 한국사인 지 모르고, 게다가 우리의 첫 국가가 단군조선이 아닌 고구려로 알고 있다.

 

이는 기존 학계가 신라 중심의 역사를 가르침과 더불어 고구려, 백제, 신라의 뿌리인 단군조선 넓게는 예맥족에 대한 연구가 부진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구려사는 한국사일까? 이에 필자가 얕으나마 알고 있는 지식을 총 동원하여 고구려사가 우리 역사인 이유를 증명해보고자 한다.

 

 (참고로 이 글은 예전에 제가 올린 글이지만, 못 읽으신 분들을 위해 다시 올립니다.)

 

 

 

중국이 고구려사가 자국사라 우기는 근거

 

①고구려는 중국 영토에서 건국되었고 중국 영토에서 활동하다가 중국 영토에서 멸망했다.

②고구려는 중국 황제의 책봉을 받았다.

③왕씨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가 아니다.

④한반도 북부지역도 중국의 역사이다.

 

반론

 

①영토 패권주의에 불과하다.

 

고구려의 영역이 현 중국 영토에 위치해 있다고 해서 고구려가 중국사라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다. 고구려가 활동한 당시 중국 즉, 중원은 섬서성, 산서성, 산동성, 하남성, 강소성 일대였지, 고구려가 위치했던 하북성,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 내몽골, 연해주 등지는 아니었다. 중국의 입장에서 그들 지역은 변방이었을 뿐이었다. 중국은 명나라가 들어서기 전까지 만주지역을 차지한 적이 없었다. 그나마 만주지역을 차지한 명나라 시대 조차 만주지방에는 한족(漢族)계통이 아닌 동이족 계통인 만주족 등이 많이 살고 있었다. 동북 3성에 한족 인구가 급증한 것은 청나라 말기로 채 몇 백년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청나라는 만주지역을 자신들의 발상지라 여겨 한족의 이주를 금하는 봉금정책을 실시했다)

오히려 단군조선시대부터 대원국(대발해국, 고영창이 거란 말기 세운 발해유민국가)이 멸망할 때까지 3천년 이상 만주의 주인은 한족이 아닌 우리민족이었다. 역사적으로 따져보아도 고구려사는 중국측보다는 우리의 역사라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의 땅에서 건국되었다고 해서 후세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팔레스타인의 역사라 기록할까? 아마 그렇지는 않을거다. 이와 같은 논리로 고구려사가 중국사라는 중국측의 주장은 논리적 비약이 심하다고 할 수 있다.

 

②동아시아의 한 관례일 뿐

 

고구려가 중국 역대왕조에 책봉을 받고 조공을 바쳤다고 해서 고구려가 중국의 속국 또는 지방정권이라는 중국측의 주장은 결코 성립될 수 없다. 당시 동아시아의 정세를 살펴보면 조공과 책봉은 동아시아 외교 관례의 하나일 뿐 이었다. 고구려가 중국 왕조로부터 '낙랑군공', '요동개국공'이라는 책봉을 받았다고 해서 고구려를 중국 왕조의 지방정권으로 보면 안된다. 만약 고구려가 지방정권이라면 당시 중원보다 강했던 돌궐, 토번 또한 중국의 책봉을 받았으니 중국의 지방정권이다 라는 말도 안되는 얘기가 성립된다.

참고로 중국 역사는 소위 춘추필법(春秋筆法)이라는 사관으로 그 특징은 위한중국휘치(爲漢中國諱恥:한족과 중국의 수치스러운 기사는 숨긴다), 긍초이누이적(矜초而陋夷狄:중국은 높이고 외국은 깍아 내린다), 상내약외(詳內略外:한족에 관한 국내사는 과대하게 부각시키고 국외사는 줄여 낮춘다)로 중국 사가들은 이 원칙에 따라 한족에 수치스러운 기사는 숨겨 기록하지 않았다. 일례로 고구려 8대 신대왕 때 고구려와 한의 전투인 좌원대첩을 들 수 있는데 좌원대첩은 고구려군과 한의 대군이 맞붙어 한나라군 중 한 사람도 살아 돌아간 사람이 없는 대전쟁으로 중국 사서에는 이 사건이 기록되지 않았지만 우리측 사료인 『삼국사기』에 위 사건이 기록된 것으로 보아 중국인들이 고의로 역사적 사건을 숨기고 날조했음을 알 수 있다.

중국 왕조 중 한나라는 초원의 패자 흉노(匈奴)에 수없이 조공을 바쳤는데 그들 역사서에는 오히려 흉노가 중국에 조공을 바쳤다는 식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 혹 고구려가 중국 왕조에 조공을 바쳤다는 기사도 거꾸로 중국 왕족 고구려에 조공을 바쳤다는 기사로 바꾸어 추측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③고려는 고구려의 계승국

 

중국은 "왕건은 신라 장군이었고 신라를 멸한 다음 후고려를 건립했다. 왕건은 신라 김씨 계통으로 고구려 고씨의 위를 계승한게 아니었다. 왕씨 고려는 대동강 이남만 차지했고 수도 개성은 신라의 옛 땅이지 고구려의 옛 땅이 아니다"는 식으로 고구려를 계승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중국측의 역사 왜곡이다. 분명히 사서에는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나와있다.  왕건이 고려라고 국호를 정한 것도 고구려를 계승하는 의미에서였고, 발해 세자 대광현이 고려에 귀순하자, 그에게 동족의 예를 베푼 것을 보면 고려는 고구려 계승의식이 뚜렷하다고 볼 수 있다. 거란의 침입 때 서희는 거란 장군 소손녕과 담판을 벌일 때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했기 때문에 국호를 고려라 정했고, 원래 고구려의 경계를 따지자면 도리어 요가 고려의 땅을 침식한 것"이라고 말한 것을 보면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볼 수 있다. 고려가 고구려를 이어받았다는 것은 중국측 기록인 『송사』에 기록되어 있다. 『송사』고려열전을 보면 "고려는 본래 고구려라고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중국 측의 주장은 자신들의 정사(正史)를 부인하는 행위이다.

북방사 연구의 권위자인 서병국 교수는 자신의 저서 『고구려제국사』에 왕건의 성이 고구려 고씨였다는 놀라운 사실을 제기하였다. 『신오대사(新五代史)』에 의하면 당나라 말기에 일어난 큰 혼란을 틈타 고구려 유민이 자립하여 나라를 세웠고 그 나라의 국왕의 성이 고씨라고 기록되어 있다. 후당 장종 동광 원년(923), 국호와 왕의 성명이 상실된 이 나라가 정사인 광평시랑 한신일과 부사인 춘부소경 박암을 후당에 파견했다고 한다. 그런데 서병국 교수는 사신을 파견한 나라가 고려이며, 왕은 태조 왕건이었다고 주장한다. (고려사를 보면 박암이 고려에 투항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 그를 후당에 파견한 것은 그가 중국의 실정에 밝은데다, 언어와 문장 면에서 우수한 능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이 주장에 따르면 왕건의 성은 고씨이고, 그가 성을 고씨에서 왕씨로 바꾸었다는 것이 서병국 교수 주장의 요지이다. 만약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고려는 명백한 고구려 계승국으로, 중국이 주장하는 "왕씨 고려가 고구려 계승국이 아니다"라는 중국의 억지는 빛을 잃게 될 것이다.

 

④결코 중국의 역사가 될 수 없다.

 

중국의 주장: 한반도가 오늘날 한민족의 거주지가 된 것은 15세기 이후의 일이다. 따라서 5세기 고구려가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 것을 놓고 조선이라는 국가가 생겼다고 봐서는 안된다. 15세기 이후의 이씨조선과 기씨(箕氏)조선(기원전 11세기), 위씨(衛氏)조선(기원전 2세기) 등은 모두 조선이라고 불렀으나 민족구성과 국가 귀속이 다르기 때문에 하나로 보아서는 안된다. 이씨조선은 오늘날 한민족(韓民族)이 세운 조선으로 한국의 역사에 속하고, 기씨조선과 위씨조선은 한족(漢族)을 선조로 한 옛 조선으로 중국의 역사에 속한다.                                    

우리의 반론: 한반도와 만주 대륙을 하나의 구획으로 했던 한민족의 역사 무대가 한반도로 좁혀진 것은 고려 이후이며, 한반도 유사 이래 변함없이 만주는 한민족의 터전이었다. 북한 지역이 중국 역사에 귀속된다는 중국 측의 주장은 정도를 넘어서는 억지이다. 엄밀히 말하면 역사, 신라지리적인 의미에서 중국의 범위는 만리장성 이남일 뿐이다. 현재 중국 국경선 자체가 만주족의 정복왕조인 청(淸)나라가 개척한 것으로, 만주족의 역사 또한 한족 중심의 중국사로 편입될 수 없다.

 

 

고구려가 우리 역사인 이유 9가지

 

①고구려의 구성종족은 예맥족

 

 고구려를 세운 민족은 맥족(貊族)으로 흔히 예맥(濊貊)족으로 알려진 족속이다. 『후한서』고구려전을 보면 "(고)구려(句麗)는 일명 맥이(貊耳)이다. 따로 별종이 있어 작은 물가에 의지하여 살아 소수맥(小水貊)이라 불린다. 좋은 활을 생산하는데 맥궁이 바로 이것이다" 후한서를 보면 알 수 있듯 고구려를 세운 종족은 맥족임을 알 수 있다. 예맥족은 고대 동이족(東夷族)의 일파로 화하족(현 중국민족)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민족이었다. 동이족은 '동방의 큰 활을 쏘는 민족'이라는 뜻으로 고대 중국인들은 동이족을 두려워하고 군자의 나라라고 경외해왔다. 동이족의 일파 중 고이(高夷)라는 종족이 있는데 혹자는 이 고이가 고구려의 전신이라고 주장한다. 예맥족은 예족과 맥족으로 구성된 종족인데, 예족은 고조선과 신라를 세운 종족이고, 맥족은 부여와 고구려, 백제를 세운 종족으로 이들이 한민족의 직계조상이라고 한다. 중국인을 형성한 종족인 화하족과 고구려 아니 한민족을 형성한 동이족 좁게는 예맥족은 본래 근본이 다른 민족이므로 고구려사는 중국의 역사가 아닌 우리의 역사라 할 수 있다.

 

②중국 동북부와 한반도는 같은 문화권

 

 고구려가 위치한 중국 동북부와 한반도 중북부 지방은 본래 같은 문화권이었다. 고조선의 유물인 비파형 동검과 미송리식 토기가 만주지역과 한반도 중북부 지역에 출토된다는 것과, 한반도 중북부와 만주지역의 고구려 성터 유적이 중국의 것과 별개라는 점, 고조선의 준왕이 마한에 망명하여 마한의 왕이 되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만주지역과 한반도는 비슷한 생활 문화권이었다는 것이고 이러한 전통이 삼국시대에 계승되었음을 알 수 있다.

 

③삼국의 역사를 기록한 삼국사기

 

 우리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1차 사료를 꼽자면 삼국사기를 들 수 있다.(하지만 본인은 삼국사기 보다 한단고기를 우리역사의 1차 사료로 들고 싶다) 삼국사기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역사를 기록한 사서이다. 만약 고구려가 우리의 역사가 아니라면 굳이 삼국사기가 고구려의 역사를 기록했을까? 우리의 역사이기 때문에 우리의 역사서에 기록된 것이다. 중국인들은 이런 기본적인 상식조차 모르는 무식한 인간들인가? 고구려의 역사를 남겼다는 것은 당시 우리민족은 고구려사를 우리의 역사라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④삼국의 언어는 기본적으로 비슷

 

 고구려와 백제 또는 고구려와 신라의 사신이 서로 통역했다는 기록이 없고, 또한 고구려 장수왕 때 백제 개로왕의 신하인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이 고구려와 백제의 전쟁이 일어나기 전 투항했다는 것과 도림이 쉽게 개로왕에 접근했다는 점, 신라 거칠부가 고구려를 염탐하러 갔을 때 아무 꺼리낌 없이 의사소통을 했다는 점에서 삼국의 언어는 기본적으로 비슷했다고 보여진다. 물론 우리나라 지방마다 사투리가 있는 걸로 보아 삼국의 언어는 지금보다 복잡한 사투리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언어의 뿌리가 같기 때문에 의사소통에 지장이 없었을 것으로 주정된다.

 

『후한서 권 85 고구려』

"동이족들은 서로 전하기를 부여의 별종인 까닭에 언어와 법제가 많이 같다고 한다"

『삼국지 권30 고구려』

"동이의 옛 말에 부여의 별종이라 하여 언어와 여러 일들이 부여와 더불어 같다"

『양서 권54 고구려』

"언어와 여러 일들이 부여와 같은데 그 성질과 의복은 다른데가 있다"

『후한서 권85 동옥저』

"언어, 음식, 거처, 의복이 고구려와 같다"

『삼국지 권30 옥저』

"그 언어는 고구려와 더불어 대부분 같고 때때로 약간 다르다"

『후한서 권85 예』

"늙은이들이 스스로 이르기를 고구려와 같은 종족이라 한다. 언어와 법속이 대개 서로 유사하다"

『삼국지 권30 예』

"언어와 법속이 대개 고구려와 같다"

『양서 권54 신라』

"(신라의) 언어는 백제를 기다린 뒤에야 (중국과) 통한다"

『양서 권54 백제』

"지금의 언어와 복장은 대개 고구려와 같은데 다닐 때 두 손을 맞잡지 않고 절할 때, 다리를 펴지 않는 점이 다르다"

『남사 권79 백제』

"언어와 복장은 대개 고구려와 같다"

 

 중국 사서들을 보면 예, 맥, 부여, 고구려, 옥저, 진한, 변한, 백제, 신라의 언어가 같다고 나오고, 물길, 읍루가 상이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중국 사서들을 종합해 볼 때 삼국의 언어는 기본적으로 그 뿌리가 비슷하므로 의사소통에 별 지장이 없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⑤고구려와 수, 당의 전쟁

 

 만약, 고구려가 중국의 일개 지방정권이라면 고구려와 수, 당의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설사 전쟁이 일어났다고 해도 113만 대군, 50만 대군 등 엄청난 군사를 동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고구려와 수, 당이 싸운 것, 그것도 엄청난 군사를 동원하여 싸웠다는 것은 고구려가 중국의 일개 지방정권이 아닌 당당한 자주국가, 중국과 대등한 제국(帝國)이었음을 뜻한다. 그리고 만약 중국의 주장대로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면, 수와 당은 엄청난 대군을 동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욱이 일개 지방정권에게 철저하게 패배하는 중앙정부가 있었는가? 결국 수와 당이 엄청난 대군을 거느리고 몇 번이나 고구려를 쳤다는 것은 고구려가 그들의 지방정권이 아닌 그들을 위협하는 대제국임을 말한다.  일찍이 당 태종은 고구려를 자기(당)들과 비슷한 수준의 학문을 지닌 문명국이라고 스스로 밝힌 바 있다. 이는 고구려가 중국에 뒤지지 않는 대국임을 말해준다. 만약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면 중국과 대등한 수준의 학문을 구사할 수 있었을까? 영류왕 때 당의 사신으로 고구려에 파견된 이의침이 고구려왕이 부르자 엎드려 기어가서 절하고 다시 엎드려 국서를 전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기록은 고구려가 중국의 일개 지방정권이 아닌 중원을 통일한 수, 당 조차 두려워 한 대제국(大帝國)이었음을 알려준다.

 

⑥고구려가 활동한 시기 중국의 고구려 인식

 

 고구려사가 어느 나라의 역사에 귀속되는지에 중요한 것은 고구려가 활동하던 시기 주변 국가들의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가 활동한 시기 중국 역사서를 보면 고구려를 자국의 역사라 포함하지 않았다. 그들은 고구려를 백제, 신라, 가야, 부여와 함께 따로 동이전이라는 항목에 분류, 기술하였다. 이것은 그 당시 중국인들의 고구려 인식을 보여주는 증거로 이들은 고구려를 자국(중국)과 같은 민족이라기보다는 동이족, 정확히는 백제, 신라와 같은 민족으로 인식했음을 보여준다.

 

⑦고구려 중심의 천하관

 

 고구려는 중국과는 다른 독자적인 천하관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고구려가 중국의 일개 지방정권이라면 고구려는 자국 중심의 천하관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가 자국 중심의 천하관을 가졌다는 것은 고구려가 중국의 종속국이 아닌 중국과 대등한 국가임을 뜻한다. 고구려 천하관 내에서 고구려는 북연, 백제, 신라, 가야, 부여, 동부여, 거란, 말갈, 실위, 지두우, 왜 등에게 조공을 받고, 이들에게 분봉을 내려주는 황제국(=태왕국, 고구려는 황제라는 호칭 대신 태왕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였다)과 같다. 고구려와 수, 당의 대결은 고구려 중심의 천하관과 중국 중심의 천하관 간의 대결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고구려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는 것(광개토대왕: 영락, 장수태왕: 건흥)을 보면 고구려가 자주국임을 증명한다 할 수 있다.

고구려의 천하관과 중국의 천하관은 상당히 다르다. 중국은 자신들의 천하관만 인정하는데 비해 고구려는 자국의 천하관과 함께, 다른 지역의 천하관과 공존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즉, 고구려는 고구려 지역인 1차 천하관, 고구려의 속국들까지 포함하는 2차 천하관, 그리고 병립하는 몇 개의 천하로 구성되는 동아시아 전체를 3차 천하관으로 본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고구려는 자신들의 천하관을 독자적으로 세움과 동시에 다른 지역의 천하관을 인정하는 다원주의적 성격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고구려야말로 진정한 천하관을 가진 천자국이라 할 수 있다.

 

⑧단군신화와 추모왕(동명성왕)신화의 모티브가 비슷

 

우리민족의 국조인 단군왕검(檀君王儉)의 탄생을 기록한 단군 신화와 고구려의 시조 추모왕의 탄생을 기록한 추모(주몽)설화를 보면 두 신화의 모티브가 비슷함을 볼 수 있다. 단군 신화에서 단군은 천신족(환웅)과 지신족(웅녀)의 결합, 즉 하느님의 아들인 환웅과 지신 웅녀(땅의 어원을 곰으로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의 결합으로 탄생했다. 즉 이주민과 토착민의 융합으로 단군, 즉 조선이 건국된 것과 같이 추모는 천신족과 수신족 정확히 말하면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와 수신(水神) 하백의 딸 유화의 결합으로 탄생하였는데 추모가 성장해서 부여를 도망쳐(이주세력) 졸본곡에 이르러 재사, 무골, 묵거(토착세력)등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세운다는 모티브가 단군신화와 일치한다는 점에서 고구려와 고조선은 많은 연관이 있음을 보여준다.

 

⑨고구려 멸망 후 보장왕이 조선군왕(朝鮮君王)에 임명

고구려 멸망 후 당은 고구려 유민들에게 소위 기미정책이라며, 고구려 유민들의 저항을 분쇄시키기 위해 보장왕을 조선군왕에 임명하여 고구려 유민들을 다스리게 하였다. 여기서 당이 보장왕을 조선군왕에 임명했다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망한 고구려의 임금에게 고려군왕이 아닌 조선군왕의 칭호를 내렸다는 것은 고구려가 고구려 이전에 존재했던 단군조선과 상당한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적어도 고구려가 고조선의 후신이라고 당시 당나라의 사람들이 인식했던 것으로 추측되어진다.

 


 

출처 : 이선생의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