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11호(1987년 5월 13일지정)로 지정되어 있는 과하주는 예부터 내려오는 우리나라 명주이다. 오래된 향지 『금릉승람(1718년)』에 김천과하주는 익산의 여산주, 문경의 호산춘과 더불어 전국에서 이름난 술이라 했다. 김천 남산동에 있는 샘을 ‘과하주샘’이라고 하는데 이 샘물로 과하주를 빚었다. 타지방 사람이 이곳에 와서 과하주 빚는 방법을 배워가서 똑같은 방법으로 아무리 빚어보아도 과하주의 맛과 향기가 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물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라고 금릉승람에 적혀 있다. 과하주는 일제시대까지 김천주조회사에서 빚었는데 제2차 세계대전으로 중단되었다가 광복 후 재개되었다. 그러나 6.25 한국전쟁으로 자취를 감추었다가 1984년 송재성씨가 시험양조 끝에 본격적으로 생산에 착수하여 김천 명주의 맥을 이었다.
김천은 물이 좋아, 샘에서 금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 금샘이 금지천(金之泉)인데, 김천(金泉)이라는 이름도 그 샘에서 나왔다. 임진왜란 때 파병된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이 샘물 맛이 중국 금릉(남경)에 있는 과하천(過夏泉) 물맛과 똑같다고 말했다. 그 뒤로 금지천은 과하천으로 불렸다. 현재 김천시 남산동에는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228호로 지정된 과하천이 있다. 시내를 내려다보는 산 중턱에 민가로 둘러싸여 있다. 그 샘을 둘러싸고 있는 담벽에는 ‘金陵酒泉’(금릉주천)이 새겨진 비석이 있었다. 1882년에 세워졌는데, 김천을 금릉이라 부르고 과하천을 주천(酒泉)이라 불렀다는 얘기다. 중국 금릉의 삼산이수(三山二水) 지형을 닮아서 김천을 금릉이라 불렀고, 과하천 물로 빚은 술맛이 기막히게 좋아서 주천(酒泉), 곧 술샘이라 불렀다 한다. 그 과하천 물로 빚은 술이, 여름을 넘긴다는 과하주(過夏酒)다. 과하주는 조선시대에 널리 빚어 먹었다. 『규곤시의방(閨坤是議方)』, 『산림경제(山林經濟)』,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 등에도 소개되어 있다. 이 과하주(過夏酒)는 김천시 남산 2동의 과하천(過夏泉)에서 나오는 물로 술을 빚으면 여름을 지나도 술맛이 변하지 않는 명주가 된다는 것에서 유래된 것이다. 과하천이라는 이름은 이여송이 이 물맛을 보고 중국 금릉(金陵)에 있는 과하천의 것과 같다고 하여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 술은 조선시대와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전승되어서 국내는 물론 일본의 기록에 남겨질 정도였다.
이 술이 본격적인 생산체계를 갖추고 양산된 것은 1930년 한일 합작으로 세워진 김천주조주식회사의 설립에서 비롯된다. 이 회사는 1945년 태평양전쟁 말기에 문을 닫았다. 당시에 기술자였던 조무성씨는 권응칠씨로부터 과하주의 양조법을 전수받았으며 회사에 근무(1931∼1952)하면서 양조기술을 터득하였다. 기능 보유자였던 그는 1989년 80세의 노환으로 사망함에 따라 전수자였던 송재성이 그 대를 이었다. 송재성은 처남 조종호가 상무로 재직중인 김천주조주식회사 정문앞에 치과의원을 개업(1941∼1949)하고 있었다. 또한 당시 일본인 기술책임자였던 죽촌수남(1907년생. 현거주지: 北九州市小倉北區三部丸 1∼4∼29)과 기술자 오형수와 절친한 사이였다. 그래서 그는 주조회사에 무상출입할 수 있었으며, 그 과정에서 양조방법과 과정, 비방을 상세히 알 수 있었다. 그는 1979년부터 현재까지 과하주의 조사와 복원에 심혈을 기울여 왔으며, 1986년 가을에 그의 집에서 당시 78세의 고령으로 기억력이 부족했던 조무성씨를 도와서 과하주의 복원을 공동으로 행하였다.
과하주의 원료인 토종 찹쌀·누룩(麴子)·물은 각각 1말·6개·10ℓ로 한다. 특히 물은 과하천(옛날에는 金之泉 또는 酒泉이라고 불렀다)의 것을 사용한다. 이 술은 음력 1월 15일∼2월 15일, 특히 우수와 경칩사이가 최적기이다. 이 술은 정월 보름에 빚어서 넣어두었다가 4월 8일경에 먹는다고 전하고 있다. 제조 과정은 다음과 같다. 과하주의 재래 양조법은 찹쌀과 누룩가루를 같은 양으로 섞어 떡을 만들고 물을 넣지 않고 독에 밀봉하여 저온으로 1~3개월 발효시켜 만든다. 이렇게 해서 빚은 과하주는 알코올 13~14도 정도로 독특한 향기가 있고 맛이 좋다. 양조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과하주를 담는 시기는 정월 15일부터 우수 경첩 사이가 적기이다. 양조법은 찹쌀 2말을 과하주샘물에 24시간 담갔다가 고두밥을 찐 다음 국화, 쑥을 밑에 깔고 짚을 편 위에 널어서 식힌다. 별도로 누룩가루 2말을 고하주 샘물 1말에 담갔다가 우려낸 물만을 사용하여 고두밥을 떡으로 만든다. 이렇게 반죽한 떡을 냉각하여 독에 넣고 한지로 밀봉하여 실내온도 15도~18도 되는 양조실에서 45일 이상 발효시키면 25도 정도의 정주 1말반 정도를 얻을 수 있다.
출처 : | 누리의 취재노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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