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야할한국사

하늘을 나는 수레, 「비차」 :조선시대 우리는 하늘을 날았다

영지니 2007. 12. 30. 23:31

1.정평구와 비차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일이다. 일본군이 진주성을 포위하자 성 안에 있던 사람들은 옴짝달싹 못하게 되었다. 이 절박한 상황에 정평구(본명은 유연)라는 사람이 이상한 모양의 탈 것(날틀)을 만들었다. 이 신기한 것은 비행기의 전신인 비차, 곧 하늘을 나는 수레였다. 비차는 가죽으로 만들었는데 한 번에 네 사람이 탈 수 있다. 날아가는 모양을 땅에서 보면 마치 따오기 모습 같았고, 배를 두드리면 바람이 생겨 공중으로 떠오르는 원리를 이용했다. 100길(약 150미터) 가량 높이 날았다는 이 비행기는 돌개바람이 불면 힘없이 떨어졌다고 한다.

 

외부와 완전히 차단되었던 진주성은 이 비차로 긴급한 연락을 주고 받았다. 또 다른 성에 갇혀있던 사람들을 탈출시키는데도 큰 공을 세웠다. 당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하도 신기하여 벌렸던 입을  다물지 못했다. 게다가 정평구는 비차를 활용하여 왜군의 후방과 측면을 공격해 왜군을 교란시켜 진주성에서의 싸움이 승리로 이끄는데 큰 역할을 했다.

 

 ※아이들이 갖고 노는 팽이, 곧 핑구는 정평구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평구가 핑구가 되고, 팽이로 바뀐 것이다. 팽이는 땅에서 돌다가 공중을 띄우기도 하는데, 이것은 정평구의 비차가 공중으로 떳다 내렸다 하는 것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2. 비차를 발명한 사람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비차를 발명한 것으로 알려진 정평구에 대한 기록은 19세기 중엽에 쓰여진 실학자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실려있다.

 

"임진왜란 때 정평구란 사람이 비차를 만들어 진주성에 갇힌 사람들을 성 밖으로 데리고 나왔는데, 그 비차는 30리를 날았다."

 

실학자 신경준 또한 『여암전서』에서 비차를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일제시대에 정리된 『김제군지』와 정평구 후손들의 족보에서도 정평구의 비차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그가 제주를 부려서 임진왜란 때 쳐들어온 왜군을 농락했고, 비차를 만들어서 포위를 뚫고 연락과 물자를 운반했으며, 화약을 다루는 데도 일가견이 있어, 벌통과 화약상자를 만들어 왜군을 혼냈다는 야사가 기록되어 있다.

 

 

3. 비차는 어떻게 날았을까?

 

비차는 정확한 그림 자료가 없어서 지금으로서는 그 모양을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의 기록으로 그 생김새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이규경은 비차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그 기술을 모방하려면 먼저 하나이 수레를 만들어 날으는 연처럼 깃과 날개를 달고 그 속에 기구를 설치하고 사람이 탓 사람이 헤엄치는 것처럼, 또는 자벌레가 굽혔다 폈다 하는 것처럼 하여 바람과 기운을 내게 한다면, 두 날개가 자연히 날아서 한순간에 천 리를 가는 형세를 짓고 그것을 줄로 가로 세로 엮어 매어 신축성이 있게 하고, 비차 속에서 풀무질하여 규칙적으로 센 바람을 일으켜 대기 위에 뜨게 한다면 그 형세는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비차의 모양이 나는 연과 같다고 하였는데, 이 '연'이라는 글자에는 새, 즉 제비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어서 새의 모양이 비차의 기본 형태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비차는 비행기와 같이 스스로 추진력을 가지고 날아오르는 것이 아니라, 바람을 받아 날아오르는 연의 원리와 비슷하게 만들어진 것이다.

 

※ KBS 역사스페셜 팀 비차 복원

KBS 역사스페셜 팀은 방송 제작을 위해 이규경의 기록을 토대로 당시의 재료, 즉 대나무, 광목, 또 그 시대에 쓰였던 매듭을 사용하여 정평구의 비차를 복원, 시험비행을 시도한 결과 20미터 높이에서 70미터까지 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비차의 추진장치까지 완벽하게 복원하지는 못했지만, 비행에는 성공, 정평구의 비차가 실제로 있었을 것이라는 점을 입증했다.※

 

 

 

출처 : 이선생의 블로그